86화
희연이 지하 계단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그쪽이 더 가까워서는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의 경우 어차피 막힌 길이라는 걸 알았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 밑에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희연은 차라리 새 부리 가면에게 총을 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혼비백산한 정신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것마저 멈추게 만든 방 안의 장면에 희연이 할 수 있는 건 의미 없는 감탄사뿐이었다.
“와…?”
처음 그 방을 봤을 때 희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성의 이름이 타락한 흑마법사와 비밀의 던전이 아닌가에 관하여 말이다.
지하의 지하. 그곳은 무척이나 넓은 방이었다. 그래서 희연은 당황했다. 그 넓은 방의 바닥을 빼곡하게 채운 마법진은 누가 봐도 손수 그려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방 안에선 분필 특유의 석회질 냄새가 가득했다.
무서울 정도로 섬세한 작업물이었으나 차라리 위험한 물건으로만 가득한 장소였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희연은 생각했다. 이 넓은 곳을 오로지 마법진 하나로 다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광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위용은 뒤에서 쫓아오는 새 부리 가면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 정도였다. 그녀와 함께 마법진을 바라보던 악령이가 희연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두들겼다.
[이름 없는 악령 : 나! 나 이거 알아!]
“이걸?”
악령이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 신난 건지 사슬을 질질 끌며 마법진의 중앙으로 달려 나갔다. 희연은 혹시나 그려놓은 마법진이 지워질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이름 없는 악령 : 이거 사람을 만드는 마법진이랬어!]
“…뭘 만들어?”
[이름 없는 악령 : 사람! 나… 이거 필요해.]
이어지는 악령이의 말도 제법 충격이었지만 희연에게는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이 더 충격이었다.
그런 콘텐츠도 있었나? 그런 걸 게임사에서 허락하나? 아니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한가? 온갖 의문이 희연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나름 사전 조사를 해봤던 그녀지만 마법진 좀 그린다고 사람이 뚝딱 만들어진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 소환 같은 건가?”
일종의 카드 게임처럼 사람 모습을 한 소환수 같은 걸 소환한다는 뜻인가? 희연은 최대한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이 마법진을 해석해 보았다.
“흑마법사니까 사람 좀 소환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역시 이곳은 타락한 흑마법사와 비밀의 던전….
사실 킹스메이커의 친절한 태도가 새로운 제물을 찾기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니었던 건가 하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던 희연을 일깨운 것은 어느새 바로 옆에 도착한 새 부리 가면이었다.
“찾았다.”
어깨를 짚는 손길에 대한 희연의 반응은 상당히 원초적이었다.
“아악! 악! 악!”
희연은 새 부리 가면 속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총을 들어 올렸다.
탕! 탕! 탕!
조준도 하지 않은 어설픈 사격은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슬쩍 발을 빼는 것만으로도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던 새 부리 가면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양손을 들었다. 총을 붙잡고 주저앉은 희연을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그 모습을 볼 정신이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악령이를 챙겨 계단 쪽으로 달려가느라 챙 넓은 모자를 벗은 새 부리 가면의 머리색이 익숙한 검푸른 색이라는 걸 보지 못했다.
“눈오리 님?”
새 부리 가면, 청산가리가 도망가는 희연을 불렀지만, 그 목소리는 희연의 비명에 묻혀 닿지 않았다.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던 희연은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주춤하며 멈추었다.
“아.”
익숙한 목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렸다. 희연은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낫을 질질 끌며 고개를 기울인 킹스메이커가 있었다.
초록색 눈이 방 안을 휙휙 둘러보더니 희연을 향해 도르륵 굴러왔다.
“이런. 들켰네.”
희연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로, 로그아웃….”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그 물음에 답하기도 전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일단 인형 다 챙겨왔는데 고양이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이거 공성전용 아니었어?”
지하실의 입구 앞에서 쓰러진 인형들을 품에 안고 나타난 뉴비 없지였다. 킹스메이커에게 들고 온 인형을 넘긴 그는 뒤늦게 계단 밑에 있는 희연을 발견하고는 구김 없이 활짝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눈을 깜박였다. 설마 뉴비 없지도 한패…, 까지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상대는 희연이 좋아 보이는 퀘스트 좀 받았다고 교황 엔딩까지 생각하던 뉴비세스 메이커 장인이었다.
놀랄 때는 언제고 맥이 풀린 듯 멀뚱히 서 있는 희연이 이상해 보였는지 킹스메이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리 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희연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내 소리 지르며 도망 다니고 지하실을 헤맨 시간이 허무한 만큼이나 심신이 지쳤다.
뒤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새 부리 가면의 정체 또한 이쯤 되니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희연은 흐물흐물거리는 몸에 애써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새 부리 가면을 벗은 상대는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울먹이듯 물었다.
“오랜만이고 반가운데…, 왜… 왜 그런 가면 쓰고 있는 거예요?”
“이거요? 제 장비인데.”
“아까 위에서 기계는 왜….”
“아 그거. 장갑 꼈더니 지문 인식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면 피는….”
“그건…. 비밀.”
질문하는 족족 잘 대답해 주던 청산가리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회피하며 웃었다. 어쨌든 청산가리는 의도적으로 희연을 겁준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대강 상황을 파악한 킹스메이커는 곤란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오리 님, 혹시 여기가 귀신의 집 같은 곳인 줄 알았던 거예요?”
“…무서웠어요.”
사실대로 실토한 희연을 위로하듯 킹스메이커는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녀 본인도 자신의 공방이 남들이 보기엔 으스스한 구석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상한 물건이 많다는 것 또한.
괜히 이상한 오해가 남을까 싶어 킹스메이커는 먼저 물었다.
“나한테는 질문 없어요?”
희연은 그녀의 질문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관을 봤는데요.”
“그 안에 있는 건 인형이에요.”
거기까지는 희연도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뱀 사체는요?”
“레이드 전리품. 그거 제법 귀한 거예요.”
“저 마법진은요?”
“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히 하기 어려웠기에 킹스메이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자신은 그저 건전한 탐구가일 뿐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그녀는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다.
“전에 봤던 지호 기억나죠?”
“악의의 응집 제작한 분이요?”
“네네! 맞아요, 걔. 걔도 마법사인데 그 물약을 만든 거예요. 마법사와 연금술사는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저 마법진도 그런 연금술의 일환인 거죠.”
사실 희연이 궁금한 것은 킹스메이커가 건전한 흑마법사인가, 탐구심 넘치는 연금술사인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저 마법진이 황금 연성을 위한 장치였다고 했다면 그녀는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그러면 진짜로 저 마법진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거… 누가 알려줬어요?”
킹스메이커의 물음에 희연은 눈을 굴려 악령이를 보았다. 대강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한 킹스메이커는 어깨를 으쓱이며 질문에 대한 답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호문클루스예요. 사람이 아니라.”
“호문클루스?”
“쉽게 설명하면 인공적으로 만든 사람? 의지가 있는 인형? 그런 거예요.”
사람과 흡사한 인격을 가진 AI 인공 지능 로봇 같은 건가?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생각보다 더 쉽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다. 게임의 NPC들로 대입해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낯선 지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풀리는 의문에 희연은 결국 자신이 지금껏 지레 겁먹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성에서 비밀 통로가 나오고 지하실이 나오고 쾅쾅거리는 관, 거대 뱀 사체, 피투성이 새 부리 가면과 낫을 든 사람을 눈앞에 둔다면 그게 누구더라도 자신처럼 행동했을 거라 그녀는 믿었다.
실제로 조용히 경청하는 뉴비 없지 또한 오랫동안 지하실을 드나들었지만, 여전히 이 장소를 무서워했다. 그 증거로 그는 킹스메이커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인형을 챙겨 혼자 계단을 내려오는 과정도 나름 무서웠기 때문이다.
킹스메이커는 두 겁쟁이를 위해 지하실의 불을 켜주었다. 그녀가 벽을 두어 번 치자 은은하게 어둠이 깔려 있던 곳이 환해졌다.
잠시 빛에 적응하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던 희연은 몇 번 눈을 깜박거린 끝에 지하실의 풍경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도서관 같네요?”
킹스메이커의 손을 꼭 잡고 마법진의 방에서 벗어난 희연은 방 중앙에 전시된 뱀 사체를 제외한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지하실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넓었다. 만약 지금보다 방이 조금만 더 작았다면 사방을 메운 책꽂이 탓에 압박되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희연은 지하실을 조금 둘러봤을 뿐인데도 책장에 꽂힌 책이 각 분야별로 잘 정리되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거기엔 지하실의 구조가 특이한 것이 한몫했다.
넓은 방은 층고가 높았기에 복층 구조로 나누는 게 가능했다. 덕택에 분야별로 나뉜 책장마다 따로 책상, 의자 등 가재도구를 구비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 위에 올려진 물건만 봐도 어느 구역에 무슨 책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도서관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지하의 도서관을 쭉 훑던 희연의 시선을 천장에 다다랐다. 어두울 때 보았던 밤하늘이 지금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남색 바탕에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다양한 천체 그림을 잠시 구경하던 희연은 손을 잡고 있던 킹스메이커가 움직이자 그제야 고개를 바로 했다.
“이왕 공방까지 내려온 김에 인형 고치고 가는 게 좋겠네요.”
“여기가 공방이었어요?”
“원래 마법사의 공방은 지하실에 짓는 게 규칙이에요. 멋있잖아요.”
“…?”
멋 때문에 그런 거면 규칙이 아니지 않나…?
희연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질문하지는 않았다.
킹스메이커는 이제 희연의 손을 놓고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뉴비 없지까지 떨어트린 뒤 뱀 사체 옆에 숨겨져 있던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들이 인형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을 본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책상으로 이동한 건가 하는 추측을 했다.
뉴비 없지도 희연도 킹스메이커의 뒤를 졸졸 쫓아갔기에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책상 한편으로 밀어내는 종이에서 글자 몇 가지를 읽을 수 있었다.
호문클루스. 실패. 하위 버전. 부두 인형.
안고 있던 인형을 책상 위에 늘어트리던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시선이 향한 곳을 확인하더니 그녀가 묻기도 전에 설명해 주었다.
“호문클루스를 만들려다 실패한 결과물이 메리 인형이에요.”
“아….”
메리 인형이 오컬트의 산물이 아닌 과학의 산물이었다는 점이 놀랍기는 했지만 희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반면 악령이는 자신의 몸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새 부리 가면을 쓰고 뉴비 없지를 놀리던 청산가리가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안 물어봤네. 그건 뭐예요?”
“악령이에요. 헬르벨 퀘스트를 하면서 만났어요.”
“그래요? 신기하네.”
몇 번 악령이를 손으로 두드려보던 청산가리는 품 안에서 종이비행기를 꺼내더니 허공을 향해 날려 보냈다. 스킬 보정인지 아주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 뒤를 쫓는 악령이를 보다 킹스메이커 쪽으로 몸을 튼 희연은 고양이 인형의 꼬리를 손끝으로 건들며 입을 열었다.
“저, 사실 할 말이 있어요….”
“?”
“복도에 깨진 유리 장식. 그거 범인 저 아니에요.”
“네?”
“진짜 저 아니에요.”
킹스메이커는 눈만 깜박거리다 뒤늦게 희연이 한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뭐라고. 괜찮아요. 범인은 이 인형이죠?”
“네에….”
“어쩌다 밖으로 돌아다니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이 인형이 하는 일이 그거에요. 다 깨부수고 사람 열 받게 만드는 거.”
“왜 그런 인형을….”
“공성전 할 때 상대측 열 받으라고 만들었죠.”
“그렇구나….”
설마 했더니 정말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구나. 희연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인형에서 눈을 떼지 못한 그녀의 모습에 아직 의문이 남아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킹스메이커는 이것저것 설명에 살을 덧붙였다.
“인형이 여기 들어오자마자 쓰러진 건, 일부러 그렇게 설계해서예요. 아무래도 프로그램된 방식으로만 움직여서 변수로 인해 공방에서 중요한 물건이라도 깨 먹을까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아.”
“음… 그리고 메리 인형은 내구도가 다 닳아서 고쳐 쓰는 건 효율상 별로일 것 같아요. 재료도 있으니까 새로 만들어 줄게요.”
킹스메이커의 손에 의해 분해되는 메리 인형을 멍하니 보던 희연은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닉 님은요?”
“음….”
책상 위를 손끝으로 두들기던 킹스메이커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끌려갔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