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희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킹스메이커는 장난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녜디아 알죠? 길마님은 길드 성에선 소환수들이 마음대로 소환되도록 설정을 해놔서요. 여기 오자마자 녜디아한테 붙잡혀서 끌려갔어요.”
“아….”
“아마 지금쯤 온실에서 애들 밥 주고 있지 않을까요?”
그것참 부럽다. 희연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본인이 킹스메이커의 공방에서 공포 체험을 하고 있을 때 닉은 홀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을 거란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희연이 복슬복슬한 녜디아의 꼬리를 이불 삼는 상상을 하는 동안 킹스메이커는 책상 위에 하얀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하에 있는 마법진의 미니 버전이었다. 크기만 작을 뿐 섬세하고 복잡하다는 건 그대로였다.
한 번을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그려내는 솜씨에선 얼마나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는지가 엿보였다.
“재활용할 수 있는 건 쭉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리 님. 메리 인형 업그레이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괜찮아요.”
희연의 거절에 킹스메이커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다 마폭탄을 마법진의 중앙에 올렸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게 된 희연은 이 이상 봐봤자 심신의 건강에 좋지 못할 거란 판단을 내렸다.
슬그머니 발을 빼는 희연을 발견한 킹스메이커가 어느 구석에 책장을 가리켰다.
“만들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저기 있는 책이라도 읽고 있을래요? 없지랑 초코님은 악령이랑 노느라 바쁜 것 같은데.”
킹스메이커의 말대로 두 사람과 한 악령은 공방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흑마법사는 싫지만, 암살자는 좋은 건지 악령이는 의외로 청산가리에게 툴툴거리지 않았다.
희연은 그 속을 참 알 수 없다 생각했다.
***
킹스메이커의 작업이 끝났을 때쯤, 희연은 뉴비 없지의 손에 들어 올려진 채 책장에 반쯤 매달린 상태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동심의 마음으로 돌아갈지언정 책은 읽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악령이와 함께 놀다 생긴 일이었다. 날 수 있으면서 책장 위로 넘어간 종이비행기를 꺼내 달라 악령이는 투정을 부렸고 희연은 그것을 받아주었다.
뉴비 없지의 손 위로 올라가는 것까지는 수월했다. 그는 거침없이 희연을 높이 들어 올렸고 그녀는 곧바로 책장을 붙잡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오리 님. 손을 놔야 해요! 그래야 내려올 수 있어요! 제가 잘 내려줄 테니까 책장에서 손 떼요!”
“안 돼요! 떨어져요!”
종이비행기는 이미 청산가리가 가볍게 올라가 꺼낸 뒤였다. 작업을 끝내고 그들이 놀고 있는 곳으로 온 킹스메이커는 작금의 상황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작업을 그렇게 오래 했던가?”
“별로요.”
“그쵸? 근데 없지랑 오리 님은 왜….”
청산가리는 킹스메이커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오리 님! 떨어져도 안 죽어요!”
“알아요! 근데 떨어지긴 싫어요!”
반복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킹스메이커는 결국 낫을 들고 왔고, 그녀가 하늘을 날아 희연을 받아준 뒤에야 상황은 정리되었다.
“오리 님은 평소에도 에흐테를 타고 다니면서 왜….”
“…에흐테는 안전하잖아요.”
하긴. 루로를 탈 때면 바짝 굳어 있기는 하지.
킹스메이커는 선택적 고소 공포증인 희연의 등을 토닥여주며 완성된 메리 인형(ver. 2)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는 섬뜩한 모습에 희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깜짝이야….”
차마 반갑다고 하긴 어려운 인형이었지만 악령이에게는 아니었다. 악령이는 신이 나서 곧바로 인형을 향해 달려들었고 이를 킹스메이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사슬부터 정리해야지.”
악령이는 그새 익숙해져 반쯤 잊고 있던 사슬이 그제야 떠올렸다. 쭈뼛쭈뼛 킹스메이커의 앞으로 날아가는 뒷모습에선 흑마법사 앞으로 자진해서 간다는 사실을 썩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이 티가 났다.
희연은 그 모습에 악령이의 말을 떠올렸다. 사악한 마법사의 저택.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에 킹스메이커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희연은 그렇게 판단했지만 악령이가 킹스메이커를 꺼려 하는 이유는 더 복잡한 이유였다.
[이름 없는 악령 : 난 사라지기 싫어.]
“그래?”
킹스메이커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악령이의 메시지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작업에 방해될까 싶어 희연을 비롯한 이들은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눈치 볼 필요도 없어진 킹스메이커는 어디 한번 대화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악령이를 책상 위에 올려주었다.
악령이는 킹스메이커를 보며 둥근 손을 옴팡지게 쥐었다.
흑마법사 직군은 악령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그렇게 불려 온 악령들은 어디로 갔을까?
달빛의 요람에는 많은 영혼이 있었고 그 수만큼 악령의 존재가 만들어지기 쉬운 환경이었다. 악령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악령이었다.
수많은 영혼과 악령을 삼켜 작은 생태계의 정점에 섰다. 삼켜진 힘만큼 많은 기억을 가지게 된 악령이는 생각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가령, 킹스메이커의 마법진이나, 악령을 소모 재료로 사용하는 흑마법사들의 이야기 같은 것을 말이다.
마법사는 많았다. 그중 흑마법사는 소수였다. 악령을 재료로 써먹을 수 있는 흑마법사는 더더욱 소수였다. 그리고 킹스메이커는 그 소수에 속했다.
악령이는 희연을 따라다니는 내내 언제 킹스메이커에게 잡혀 가 재료로 쓰일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 상대가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느꼈다. 악령이 흑마법사인 그녀를 무서워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는 악령이를 재료로 써먹을 생각은 없었다. 완전히 이지를 잃은 것도 아니고 나름 정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킹스메이커는 무서워하는 악령이를 위해 친절하게 너를 재료로 쓰지 않을 거다, 하는 간단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반쯤은 놀리는 거였고 반쯤은 경고였다. 만약에 네가 이지를 잃어 완전히 몬스터로 분류되면 바로 공방으로 끌고 갈 줄 알아라, 와 같은 의미였다.
결국엔 지하의 마법진에 홀려 악령이가 제 발로 공방으로 오긴 했지만 말이다.
[이름 없는 악령 : 나는…!]
그러니 지금, 악령이가 씩씩거리며 킹스메이커에게 항변하는 것은 은근슬쩍 자신을 재료로 써먹지 말라 주장하는 거였다.
킹스메이커는 악령이가 하는 짓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놀리기로 마음먹었다.
“자, 일단 우리 오해를 풀도록 할까? 비록 내가 너를 볼 때마다 어느 실험에 쓰면 좋을까 고민하던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직 나는 단 한 번도 악령을 재료로 쓴 적이 없어. 아마…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정 필요하지 않는다면야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악령이는 자신에게로 가까이 오는 킹스메이커의 손길을 피해 책상 위를 날아다녔다. 질질 끌려다니던 사슬 끝이 어느새 책상 위에 그려진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의도한 곳으로 가는 악령이가 나름 기특해 킹스메이커는 친절해 보이도록 미소를 지어주었다.
“네가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는 걸 안다는 의미는 아타마드흐의 마법사들도 안다는 거지. 그걸 어떻게 아는 건지는 안 물어볼게. 대신 너와 내 사이가 재료와 실험자 사이라는 거 오리 님한테 비밀로 하는 거다?”
[이름 없는 악령 : 싫어!]
“싫어?”
킹스메이커가 되묻자 악령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 그녀는 책상 위를 손끝으로 두들기며 고민했다.
사실 악령이가 희연에게로 날아가 고스란히 말해도 그녀는 별로 상관없기는 했다.
일단 희연이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 그녀는 악령이를 재료로 쓰지 않는 건전한 흑마법사라 설득할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 아예 묻어버리려고 한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으나 상대가 싫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새로 만든 메리 인형을 악령이 옆에 놔두며 말했다.
“말할 거면 있는 그대로 말해. 괜히 오해 사게 하면 널 로쿠투스 사막으로 데리고 갈 거야. 아타마드흐, 너도 만나고 싶진 않지?”
더 이상 악령이에게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지만, 답은 그걸로 충분했다.
킹스메이커는 인벤토리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전 사냥꾼들의 신병을 산골 꼬마 요정들에게 넘겨줄 때 사용한 노예 문서였다.
그녀는 그것을 악령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악령이는 잠시 망설이다 그 문서를 찢었다. 영혼을 속박하는 사슬과 영혼의 주권마저 빼앗아오는 노예 문서가 함께하자 양측이 모두 부서지기 시작했다.
퍼석하게 부서지는 사슬 조각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그와 비슷한 사막의 풍경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기를 쓰고 얻어낸 칭호가 떠올라 있었다.
[<아타마드흐의 마법사들(동화)>
: 죽음의 사막 로쿠투스의 왕 아타마드흐의 시험을 통과한 마법사에게 내려지는 칭호. 삶과 죽음을 농락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 그쪽으로만 안 가면 되겠지 뭐.”
아타마드흐는 온갖 영혼이 뒤섞인 악령이에게서도 자신이 지배하는 사막 냄새를 찾아낼 인간이었다. 희연이 악령이를 데리고 죽음의 사막만 가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킹스메이커는 악령이를 옆으로 밀어낸 뒤 마법진 위에 메리 인형을 올려두었다.
“지하에 있는 마법진은 잊는 게 좋아 악령아. 아타마드흐도 그 마법진의 마법을 한 번도 발동 못 했거든. 나도 예의상 한번 시도해 본 거지 진짜로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해.”
[이름 없는 악령 : …….]
메르헨 호라이즌에는 수많은 마법이 있고, 또한 얼마든지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불가능한 건 세 가지. 시간, 공간, 생명과 관련된 마법.
아타마드흐의 시험을 통과한 마법사 유저들은 보상으로 생명의 나무라 불리는 세피로트의 나무를 마법진으로 형상화한 문서를 받는다.
또한 아타마드흐는 연계 퀘스트로 그 마법진을 활용한 결과물을 내놓으라 한다.
죽은 자를 되살리거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시키거나.
둘 다 게임의 시스템상 불가능한 결과물로, 사실 이 퀘스트는 세피로트의 나무에서 뽑아낼 수 있는 만큼 마법 지식을 뽑아가라 주는 퀘스트였다.
킹스메이커는 그 마법진을 통해 온갖 지식을 얻어냈고 그중 하나가 부두 인형을 만드는 법이었다. 악령이가 바라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결과물이 그 인형이라는 뜻이다.
훌쩍거리며 마법진 위에 누워있는 메리 인형 입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악령이도 이것이 자신의 최선이라는 걸 아는 눈치였다.
어쩌면 악령이는 킹스메이커를 본 순간 공포심과 함께 혹시나 하는 희망을 엿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썩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 킹스메이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나름의 인자함을 담아 악령이에게 충고해 주었다.
“어서 빨리 복수하고 성불하렴.”
“…싫어!”
벌떡 일어난 악령이는 인형의 몸으로 책상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대로 희연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전보다 더 튼튼하게 만들기 잘했다는 태평한 생각을 했다. 희연의 직업이 신관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죽음의 사막으로 가는 퀘스트를 받는 건 마법사와 연금술사. 신전 측 직업인 희연은 그곳으로 갈 일이 없었다.
때마침 그들은 악령이의 슬픔을 푸는 법에 대한 힌트를 요정 왕에게서 들은 참이었다. 킹스메이커는 그때 들은 말을 떠올리며 물 묻힌 천으로 책상 위 마법진을 지웠다.
어떻게 해야 희연을 시드론의 왕 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그녀는 성불하기 싫다고 했던 악령이의 발언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
공방에서의 볼일이 끝난 그들은 닉이 있을 온실로 자리를 옮겼다.
희연은 이동하면서 온실, 공방, 그리고 길드원들이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각자의 방 외에는 성을 이루는 대부분이 전 주인이 꾸민 그대로라는 설명을 들었다.
“처음에 보상으로 성을 받아서 좋았는데, 관리하기가 힘들더라고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보수가 안 된 곳이 많아 실용성도 없었고요. 그래서 실제로 사용할 곳들은 싹 고쳐버리고 나머지는 그냥 놔뒀어요.”
덕분에 한때 시드론 동부의 자랑이라 불리던 마법과 전통의 성 마할라틴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희연이 성의 복도를 보며 성주가 킹스메이커 같지 않다 느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전 성주와 현 성주의 취향이 따로따로 어우러져 있으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전 성주는 시드론 왕의 동생 되는 사람으로 공작이었어요. 원래는 왕녀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라 그 권력이 계속되어야 했지만….”
“?”
“어쩌다 보니 권력층에서 밀려나 버렸죠. 때마침 나라는 존재가 등장했고,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짜잔! 성주가 되었답니다.”
“킹 님이 영지를 뺏어서 왕이랑 합의하에 공작이 되었다고….”
“아 그것도 맞기는 해요. 공식적으로 그렇게 알려졌거든요. 실제로 뺏기도 했고.”
공식적이라 함은 뒷이야기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희연은 무슨 짓을 했기에 킹스메이커가 왕의 동생을 밀어내고 성과 작위를 얻은 것인지 궁금했지만 괜스레 조심스러워 물어보지 못했다.
내심 물어보고 싶어 하는 희연의 기색을 읽었는지 킹스메이커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유도했다.
“그러고 보니 오리 님, 귀환 스킬 썼더니 복도 한복판에 떨어졌다고 했었죠?”
“아, 네.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어요.”
“오리 님이 뜬금없이 복도 한복판으로 이동한 건 설정을 안 해놔서예요. 브로치 한 번 두들기면 설정 창이 나오거든요? 거기서 귀환 스킬 위치 조정하기 버튼 누르면 돼요.”
“온실로 하는 게 좋겠죠?”
“아무래도 온실이 길 찾기에 용이하니까요. 아니면 오리 님 방으로 설정해도 돼요. 길드 성 아무 빈방 골라서 내방으로 설정하기 누르면 거기가 오리 님 방이 되거든요.”
방이라는 말에 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도 주세요?”
희연의 물음이 재밌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즐겁게 웃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요.”
“아, 역시 그렇….”
“난 그렇게 쪼잔하지 않아요.”
때마침 그들은 온실 앞에 다다른 상태였다. 킹스메이커는 유리문을 활짝 열며 말을 이었다.
“이 온실이 그 증거죠.”
“…….”
“신전 지어줄까요, 오리 님?”
“…아뇨.”
“에이.”
희연의 거절을 킹스메이커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