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희연은 시무룩한 척하는 킹스메이커를 애써 외면하며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날이 저물고 있는 바깥과 달리 온실 안은 봄의 한낮을 가져온 것처럼 따스하고 눈부셨다. 세상과 분리된 것 같은 공간이 신기해 온실 안을 둘러보던 희연의 시선은 둥글게 말려 있는 털 뭉치에서 멈추었다.
그 털 뭉치 밑으로 낯설지 않은 나뭇잎 달린 머리카락과 사람의 손이 삐져나와 있었다. 희연은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닉 님…?”
먕!
털 뭉치 사이에 숨어 있다 고개를 내민 루로가 부름에 대신 답했다. 온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여 있는 아기 용은 털 뭉치 사이에 요령 좋게 숨어 있었다.
배시시 웃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기분 좋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언뜻 보면 귀엽기만 한 모습이었지만 희연은 살랑이는 꼬리가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귀여워만 하고 가까이 갈 생각이 없는 희연과 달리 킹스메이커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루로를 잡아 안았다. 그녀에 이어 뉴비 없지도 거대한 흰 털 뭉치, 녜디아를 안아 들었다.
조그마한 드래곤과 귀를 쫑긋거리는 거대한 늑대가 비켜서자 그제야 그 밑에 깔려 있던 닉의 모습이 드러났다. 닉은 자신을 깔고 뭉개는 늑대의 다소 거친 애정 공세가 익숙한지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로를 챙긴 킹스메이커는 닉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후 희연에게 마저 질문했다.
“그래서 오리 님. 방은 어떻게 할래요?”
“일단은 여기로 귀환 설정하고 나중에 생각하려고 그러는데….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오리 님 편한 대로 하면 되죠!”
킹스메이커의 허락을 구하자마자 희연은 곧바로 온실을 귀환 장소로 설정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방 문제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녀 딴에는 느긋하게 방을 고를 시간이 지금은 없다는 판단을 내린 상황이었다. 희연은 킹스메이커에게 할 말도 많았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런 희연의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대화를 위해 바동거리는 루로를 놓아주었다. 루로는 곧바로 닉에게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어느새 뉴비 없지로부터 탈출한 녜디아도 닉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희연이 그 모습에 부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악령이가 짧은 인형 팔을 펼쳐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킹스메이커는 사이좋은 모습이 보기 좋다고 웃으며 삐죽 튀어나와 있던 꽃줄기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들이 서 있는 땅을 비집고 커다랗고 단단한 나뭇잎 여러 장이 순식간에 자라났다. 킹스메이커는 그중 하나에 앉았다.
“생각보다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앉아요.”
희연은 신기해하며 나뭇잎을 손으로 쓸어 본 뒤 그 위에 앉았다. 잠시 출렁거리기는 했으나 나뭇잎 의자는 단단하게 버티며 의자의 역할을 해냈다.
공방에서 나온 뒤에도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인형 군단들이 눈을 뜬 것도 그때쯤이었다. 수풀에서 기차가 튀어나오자 인형들은 차례로 그 기차 위에 올라탔다.
희연은 그대로 그들이 떠나나 싶었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인형 군단은 기차를 타고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인형들은 기차 속에서 쿠키를 끄집어내 내밀었고 희연은 인형이 건네주는 쿠키를 받아 악령이에게 넘겨주었다.
열심히 오물거리는 악령이를 기차의 빈칸에 태운 뒤, 희연은 말문을 열었다. 킹스메이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상태였다. 그녀는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관문소에서 그 폭죽은 뭐였어요?”
희연의 질문에 의외로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건 좀 설명이 필요한데….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오리 님, 헬르벨 퀘스트 보상으로 칭호 받았죠?”
킹스메이커의 말에는 이미 확신이 서려 있었다.
어느새 피투성이 옷에서 익숙한 검은 정장 차림으로 갈아입은 청산가리도 대화가 흥미롭다는 듯 그들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뉴비 없지는 눈을 빛내고 있었고 닉 또한 내심 궁금한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희연은 그 시선들이 조금 부담스럽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에 말해줬던 오페라… 칭호요.”
그녀는 말하면서도 참 특이한 등급 제도라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희연은 뉴비 없지가 입을 틀어막고 죄 없는 바닥을 두들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마치 주식 투자 성공을 실시간으로 본 것 같은 흥분 상태였다. 그런 뉴비 없지를 슬쩍 밀어내며 청산가리가 물었다.
“저랑 헤어지고 난 다음부터 뭘 하고 다녔길래 그 레벨 대에 오페라 칭호를 얻어요?”
뭘 하고 다녔냐는 질문에 희연은 할 말이 많았지만 애써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많은, 아주 많은 일이 있었죠.”
“?”
청산가리는 궁금한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에 듣죠, 뭐. 그나저나 킹이 할 말이 많은 것 같네요.”
그녀의 말대로 킹스메이커는 답지 않게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은 칭호를 얻었으니 좋은 거 아닌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희연은 그 모습에 조금 불안해졌다.
칭호를 얻어 안 좋은 것들의 예시를 생각하다 보니 관문소 앞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희연의 표정이 굳자 킹스메이커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일단, 오리 님. 축하해요. 이건 진짜예요. 그런데 눈치챈 것 같지만 오리 님 레벨 대에 오페라 칭호면 좀… 귀찮아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아까 같은 상황이요?”
“아니라고는 차마 못 하겠네요. 일단,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토요일. 내일모레면 갱신되겠는데요.”
청산가리의 말에 희연은 눈을 깜박였다.
“갱신이요?”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일단 쉽게 설명하면요, 이제 오리 님은 좌완 파이어볼러 같은 존재가 된 거예요.”
“어… 좋은 의미죠?”
“좋은 뜻이죠. 오리 님이 지옥 한복판에서 뛰어놀고 있다고 해도 길드 입장에서 잡아가고 싶다는 뜻이니까요.”
킹스메이커의 설명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전에 길드 가입했을 때 순위 봤었죠? 여섯 명밖에 없으면서 4위인 거. 길드 순위를 매기는 기준은 다양해요. 소속된 길드원이 몇 명이냐, 그중 만렙이 몇 명이냐, 얼마나 많은 칭호를 가지고 있냐, 그 칭호의 등급이 무엇이냐. 그 외에도 길드 하우스가 있냐, 얼마나 많은 업적을 달성했냐도 포함되죠.”
“…….”
“우리 길드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순위인 건 인원수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등급이 높게 매겨져서예요. 일단 성을 가졌죠. 오리 님이 오기 전까진 여섯이었는데 그중 네 명이 오페라 칭호였어요. 여기다가 각자의 직업에서 업적을 쌓은 것도 많고 레이드도 열심히 뛰어다녔죠.”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어느 창을 불러왔다. 희연의 앞으로 창을 끌고 온 그녀는 그것을 공유했고, 희연이 보게 된 것은 길드 순위표였다.
[<주간 길드 랭킹 – 매주 월요일에 갱신됩니다.>
1. 윈
2.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
3. 양떼목장
4. 뉴비세스 메이커
5. Y.D
…]
“어…?”
희연이 놀란 건 그중 익숙한 이름이 있어서였다.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 누군가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킹 님. 혹시 이름 없는 그분이요. 그분 길드 이름이 이거예요?”
“네? 네.”
킹스메이커로부터 확인 사살을 받은 희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마을 놀에서 이름 없는 그분이 희연에게 길드에 들어오라면서 길드명을 안 알려준 게 아니라 알려줬는데 희연이 못 알아들은 거였다.
희연은 그 당시 이름 없는 그분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 게 내심 미안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또한 그때의 희연은 길드에 가입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요?”
“그게, 길드 들어오라고 하면서 길드명을 안 알려주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아. 그쪽 길드가 그런 오해를 많이 받기는 하죠. 다 자기들 업보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네….”
길드 순위에 오른 이름 중에 멀쩡한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이름을 선택한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던 희연은 자신이 속한 길드의 이름도 평범하진 않다는 결론에 그와 관련된 일은 더 이상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길드 순위는 매주 월요일마다 갱신돼요. 사실 말이 갱신이지 한 번 고정된 순위가 바뀌는 일은 없다고 봐야 했죠. 하지만 아마 다음 주에는 순위가 뒤바뀔 거예요.”
“…저 때문에요?”
희연의 반응이 부정적이자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오리 님 덕분이죠. 오랜만에 우리 길드 순위가 오를 거예요.”
“…….”
“오리 님이 칭호 하나를 얻었다고 상위권 순위가 뒤바뀌는 거예요. 다른 길드에선 어떻게 생각할까요?”
“…뺏고 싶다?”
“정답!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오리 님이 저돌적으로 구애하는 길드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구애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희연은 그 방식이 평화롭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미 맛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폭죽을 보고 달려들었던 사람들. 그중 그녀를 찾던 이들의 혈안된 눈을 떠올린 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 큰일 난 거죠?”
“정확한 건 두고 봐야 알겠지만 아마 괜찮을 거예요. 월드 메시지가 퍼지지도 않았으니 진짜 새 오페라 칭호가 나온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누군지도 모르고. 길드 순위가 갱신되면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
“오리 님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적기는 해요. 우리 길드에는 염소도 있고 귀농 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레벨이 좀 있는 쪽을 의심하지 레벨 5짜리 뉴비를 의심하지는 않겠죠. 이 얘기를 하는 건 그래도 어디 가서 칭호 얘기하지 말라고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저, 이제 레벨 5 아닌데….”
비장한 투로 말하는 희연 때문에 킹스메이커는 저렙에 오페라 칭호를 얻은 특전으로 레벨이 뻥튀기되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어진 희연의 말에는 은은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저 이제 레벨 26이에요. 헬르벨 퀘스트 보상으로 레벨이 16이나 올랐거든요.”
“…우와. 진짜 많이 올랐네요! 그런데 나머지 5는 어디서 나온 숫자에요?”
“아, 그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검은 천막의 상인으로 넘어갔다. 킹스메이커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희연의 말에 집중했다. 희연의 레벨을 듣자 의심받을 일은 없겠다는 결론이 나와서였다.
길드 가입을 이유로 납치나 협박을 당해 질린 나머지 게임을 접으면 어쩌나 고민하던 킹스메이커로선 다행인 소식이었다.
생글생글 웃는 킹스메이커의 얼굴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희연은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이상한 광장에서 벌어졌던 일, 검은 천막의 상인과 뱀, 악령이와 관련된 내용들. 킹스메이커는 머릿속으로 내용을 되새기며 말했다.
“악령이 관련 퀘스트인 건 확실하네요. 전에 힐두르 퀘스트처럼 단서를 전부 수집해야 제대로 된 퀘스트로 이어질 거예요. 파이퍼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데…. 초코 님은 들어본 적 없어요?”
“없죠. 전 원래 NPC 쪽이랑 친분 쌓기 안 해요.”
“없지는 어차피 모를 거고. 길마님도 모를 것 같은데. 마담한테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는 킹스메이커를 보던 희연은 문득 생각난 사실에 손을 들었다. 그녀는 검은 천막의 상인 필루스를 처치하고 유일하게 얻었던 전리품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런 걸 주웠는데….”
먼지가 폴폴 날릴 것 같은 낡은 책을 본 킹스메이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거….”
“혹시 읽을 수 있어요?”
“골렘 제조서인데요.”
“골렘이요?”
희연은 머릿속으로 걸어 다니는 돌 로봇을 떠올렸다. 혹시나 악령이의 퀘스트의 단서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희연은 책에 대한 관심이 식는 것을 느꼈다.
반면 킹스메이커는 책에 흥미가 있는지 희연에게 건네받은 낡은 책이 그 이상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책을 살펴보았다.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가 걱정되었다.
그런 희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청산가리가 말했다.
“킹은 웬만한 글자는 전부 다 읽어요. 룬어랑 암호문 해석, 그 외 잡다한 언어 관련 스킬을 전부 습득했거든요.”
“언어 관련 스킬도 있어요?”
“그럼요. 눈오리 님도 룬어 초급 스킬 정도는 익히는 게 좋을걸요? 제가 알기론 신관 직업은 나중에 퀘스트로 고대 비석 해독이 있거든요.”
“…그렇구나.”
희연이 청산가리와 대화하는 사이 킹스메이커는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책을 덮은 킹스메이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희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희연은 조심히 물어보았다.
“그 책 드릴까요?”
“…오리 님. 그런 말 함부로 하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등골까지 빼먹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등골…얘기까지 나올 물건이에요? 그런데 전 어차피 그거 읽지도 못하고 새로운 문자를 공부할 생각도 없어서요….”
뉴비 없지가 희연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공부는 싫었다. 덕분에 틈만 나면 킹스메이커에게 부족한 언어 패시브 스킬에 대한 지적을 들었지만 말이다.
희연은 자신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를 뉴비 없지의 공감에 웃으며 책을 킹스메이커 쪽으로 밀었다.
“킹 님 가지세요! 저는 필요 없어요!”
“…….”
킹스메이커는 이성과 양심이 다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이성은 받으라 하고 양심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이나 다름없는 뉴비에게 책을 돌려주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도 언제나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책을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계륵이나 다름없는 물건이 알맞은 주인에게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희연은 기뻐했다. 그런 희연의 두 손을 잡으며 킹스메이커가 말했다.
“오리 님. 갖고 싶은 거 다 말해봐요.”
“괜찮아요. 저도 나름 돈 많아요!”
당당한 그 발언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있을 리가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