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발언을 의심했다. 애시당초 희연이 돈을 벌 만한 시간이 없었다는 걸 항상 따라다니던 그녀가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킹스메이커가 희연과 함께하지 않던 시기는 희연이 막 게임을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녀가 도시의 범법자가 되어 구금되었을 때뿐이었다.
전자의 시기에 돈을 벌었다는 건 말도 안 되므로 의심되는 시기는 당연히 후자였다. 킹스메이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당시 함께했던 청산가리 쪽으로 움직였다.
그 시선을 느낀 청산가리는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지 희연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 많다는 돈의 출처가 꼬마 요정들을 괴롭히는 사냥꾼에게 들러붙었던 유저 죽이고 얻은 돈이에요?”
“네!”
“그게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닐 텐데.”
“?”
희연은 청산가리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에빌론을 돌아다니며 악령이 덕에 많은 소비를 해본 희연은 대략적인 이곳의 물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착각한 것은 물가 적용률을 현실과 비슷하게 했다는 점이다.
“아, 혹시.”
킹스메이커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눈치채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한방에 부자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리는 희연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조금 안쓰러워서였다.
“일단 오리 님. 유저 처치하고 얻은 돈이 얼마였어요?”
“1230골드요. 도시 돌아다니면서 1골드밖에 안 썼어요. 퀘스트 깨고 받은 돈도 있고요.”
메르헨 호라이즌의 기본 화폐 단위는 골드였다. 정확히 말하면 유저들의 기본 화폐가 골드였다.
NPC의 화폐는 동화, 은화, 금화로 나뉘며 금화는 골드와 같은 물건으로 귀족 NPC라면 모를까 평범한 NPC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폐 단위는 아니었다.
희연이 레이의 첫 시험인 요른과의 내기에서 동화를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동화 세 닢이면 싸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값이었다. 동화 열 닢은 은화 한 닢, 은화 열 닢은 금화 한 닢이 된다. 금화 세 닢이면 한 사람의 한 달 식비가 나온다는 뜻이었다.
한 사람의 약 34년짜리 식비를 한 번에 벌어들인 희연은 물가를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안쓰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오리 님. 식빵 두 덩이가 동화 세 닢, 그러니까 0.03골드잖아요. 20레벨대 장비 세트가 1500골드예요. 액세서리 같은 거 빼고 매긴 값이.”
“네…?”
“NPC한테 적용되는 물가랑 유저한테 적용되는 물가가 달라요. 먹을 거 빼고요.”
“…왜요?”
“음…, 글쎄요. 관광지에서 비싸게 파는 거랑 비슷하다고 봐야 하나?”
“…NPC가 20레벨 장비 세트 사면 얼마인데요?”
“108골드 정도? 작은 영지의 병사 레벨이 20정도이고 3년 치 식비 정도는 들여야 쓸 만한 장비를 얻는다고 했으니까 그 정도일 거예요.”
“…….”
10배도 넘게 차이 나….
이 정도면 관광지 바가지랑은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희연은 왜 유저들이 뿔이나 NPC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본인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가지 씌우는 수준이 이 정도라면 그녀 역시 혁명에 한 손 보탰을 것이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희연의 어깨는 축 처졌다. 도시를 돌아다닐 때 악령이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양이 상당했었다. 희연은 그 양에 비해 줄지 않는 골드 숫자를 보며 기뻐했다.
그런데 사실 그 기쁨이 의미 없는 거였다니. 이래서 인생은 한방이라는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결말이었다.
“이래서 한 방을 노리다가 훅 간다고들 하는구나….”
그녀는 돈 좀 조금 만져봤다고 거만해지려 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눈에 띄게 기가 죽은 희연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오리 님이 준 책 경매장에 내놨으면 그 값이….”
“…진짜요?”
어차피 쓸모없는 물건이다 하고 가볍게 넘긴 과거의 자신을 멱살 잡고 싶게 만드는 숫자였다. 희연은 조금 아련한 기분으로 이미 킹스메이커의 인벤토리 속으로 사라진 책을 떠올렸다.
이미 떠난 물건이다, 라고 여겨 후회는 길지 않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긴 했다.
그런 희연에게 킹스메이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
“?”
“설마 내가 책만 받고 입 싹 닫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오리 님?”
“아….”
킹스메이커는 방 얘기에 신전이 갖고 싶냐 물어보는 거부였다. 비록 이성적 판단으로 인해 값비싼 책을 꿀꺽했으나 그녀는 언제나 희연에게 그 책값 이상의 것을 해줄 준비가 된 열린 지갑의 소유자였다.
다만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아쉬운 것이,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물가 차별에 놀란 것이지 희연은 당장에 거금을 들여 필요한 게 없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소소하게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희연은 물욕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현실도 아닌 게임 속에서까지 욕망이 피어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희연에게 킹스메이커는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정말로 필요한 게 없어요, 오리 님? 이번만 있는 기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해도 정말 필요한 게 없어서요. 굳이 따지면 레벨이 올랐으니까 장비 정도인데….”
이는 돈 내는 사람인 킹스메이커로 인해 불발된 주장이었다. 저렙 때 장비를 자주 바꿔봤자 별다른 메리트가 없어서였다.
장비와 스킬, 스텟이 중요해지는 고렙 구간이 아닌 저렙 구간에선 딱 하나만 봤다. 레벨. 그마저도 저렙 구간에서 유저가 몬스터보다 레벨이 낮다고 해도 더 강한 경우가 많았다.
메르헨 호라이즌의 경우 그 저렙 몬스터가 다른 게임에 비해 지능이 높고 강한 편이긴 했지만, 장비를 신경 써서 준비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거금을 내놓을 생각은 있어도 쓸데없는 낭비를 할 생각이 없는 킹스메이커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쉬움의 입맛만 다셨다.
“역시 그때 그 목걸이를 낙찰했어야 했는데….”
대주교의 목걸이. 신관인 희연에게 딱 알맞은 장비였다. 킹스메이커는 놓쳤던 물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킹스메이커가 당장에 선물하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자 희연은 다른 문제를 화두에 올렸다.
원래라면 퀘스트 보상을 받자마자 물어봤어야 했지만 갑작스러운 축하 폭죽에 이은 길드성으로의 도망으로 인해 까먹고 있던 문제였다.
“맞다. 물어보는 걸 깜박했는데, 저 칭호 얻고 나서 스킬이 많이 늘어났어요.”
“아, 원래 오페라 칭호에 얹어 주는 스킬이 많아요. 그래서 오페라 칭호를 갖고 있는 유저가 많이 유리하죠.”
거기까지는 희연도 대충 아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처음 길드성에 온 날 칭호의 등급을 알려주며 가볍게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어서요….”
“문제요?”
[백발백중 낭만의 프라이쉬츠(패시브) : 칭호 <마탄의 사수> 보유자 전용…]
[사냥꾼의 직감(액티브) : 숙련된…]
[사냥꾼의 욕심(액티브) - 현재 사용 불가능한 스킬입니다.]
[장미 화환의 비둘기(액티브) - 현재 사용 불가능한 스킬입니다.]
[백장미 피는 밤(액티브) - 현재 사용 불가능한…]
스킬창 목록을 다시 확인한 희연은 역시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는 사실에 인상을 찡그렸다.
“저 새로 생긴 스킬 중 두 개 빼고 나머지가 다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떠요.”
“엥?”
희연이 뭘 말하든 다 좋다 웃으며 꽃받침하고 있던 뉴비 없지의 얼굴이 떨어졌다. 끔벅이는 황금색 눈동자가 희연의 말에 놀랐다는 걸 증명했다.
“전부 사용 불가라고요? 스킬이?”
킹스메이커 또한 희연의 발언에 놀란 반응을 내비쳤다. 레벨 부족으로 장비 착용이 불가능한 경우는 봤어도 스킬이 사용 불가하다는 건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거였다.
“오리 님 화면 좀 캡쳐해서 저한테 보내줄 수 있어요?”
“네. 잠시만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멈추었다. 갑자기 멈춘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의아해했다.
“…?”
멋쩍은 듯 손끝을 꼼지락거리던 희연이 물었다.
“…캡쳐 어떻게 해요?”
“아. 손으로 슥-.”
“사진은 어떻게….”
“귓속말 위에 보면 네모난 도형이 있는데-.”
하나하나 설명을 들은 뒤에야 희연은 무사히 킹스메이커에게 자신의 스킬창을 보낼 수 있었다. 킹스메이커는 소소하게 새로운 것을 알려줬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달란다고 주는 희연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오리 님. 그런데 다음부터는 누가 정보 달라고 하면 막 주고 그러면 안 돼요.”
“아, 네!”
“…진짜로 안 돼요. 가족이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는 거 아니고 뭐냐고 물어도 알려주는 거 아니에요. 스킬창은 물론이고 스텟 같은 것도, 장비가 뭔지도 전부 다요.”
그 가족에게 정보를 너무 안 줘서 여태껏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희연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약속이에요?”
킹스메이커의 입장에선 희연의 나이를 추정할 수 없었기에 최대한 주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최소 열다섯. 15세 미만 금지인 게임에서 희연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힌트는 그 정도였다.
나이는 모르지만 무른 구석이 있고 남의 말에 잘 넘어가는 성격이라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킹스메이커의 판단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희연은 이 게임에선 키위새가 죽으면 키위가 된다고 말하면 믿을 것 같았다. 그러나 희연의 태도가 워낙에 확고했기에 킹스메이커도 그 이상 주의를 줄 수는 없었다.
“음….”
희연이 보낸 스킬창 목록을 쭉 훑어본 킹스메이커는 어렵지 않게 원인이 무엇인지 추측했다.
“대충 짐작 가는 이유는 있는데….”
“뭐가 문제인 거예요?”
“오리 님 레벨이 이제 26이랬죠?”
“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에요. 레벨이 부족하면 장비를 착용할 수 없는 것처럼 스킬도 조건이 안 맞아서 그런 걸 거예요. 대부분 오페라 칭호 얻은 사람들 레벨이 높아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보지만요.”
“그 얘기는….”
“레벨, 혹은 스텟. 오리 님 같은 경우엔 레벨이 낮으니 당연히 MP도 부족할 거고. MP 최소 수치를 못 채운 게 원인일 수도 있다는 거죠.”
MP 부족이라는 말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레벨이 오른 만큼 어느새 MP는 410이라는 숫자로 늘어나 있었다.
처음 그녀가 신관으로 전직했을 때의 숫자가 88이었던 걸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희연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다.
“많이 늘었는데….”
“참고로 제가 검은 새 날리는 스킬 있죠? 광역기 말고 단일기. 그거 한 번 날릴 때 드는 MP가 2000이에요.”
“…….”
“길마님 숲속의 칸타타 스킬 한 번 쓸 때마다 MP 몇 달아요?”
“5000이요.”
“…저 MP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검은 천막의 상인과 싸울 때 지금의 스텟이었다면 더 수월하게 이겼겠다, 식의 생각을 하던 희연은 반성했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은 MP 총합의 약 다섯 배가 필요한 스킬을 물 쓰듯 사용했고 닉은 그 두 배였다.
다시 한번 거만해지지 말자 다짐하는 희연에게 킹스메이커가 말했다.
“기죽일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도 기죽지는 않았어요.”
“음… 좋은 태도예요.”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희연이 레벨을 올리면 됐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레벨을 올리러 가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시뻘건 색을 뽐내며 희연의 상태창 끝을 차지하는 문구 때문이었다.
악마와의 내기.
높은 확률로 희연이 일정 레벨에 다다르면 발동되는 저주였다. 스킬 가짓수 좀 늘리겠다고 지뢰를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문제는 아니었다. 희연은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차라리 매도 빨리 맞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솔직히 레벨 제한은 너무 제약이 큰 것 같은데….”
희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RPG 게임에서 레벨을 올리지 않고 노는 방법이 많기는 했지만 희연은 그런 쪽의 플레이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다.
열정적으로 플레이하며 레벨을 높이는 타입 역시 아니었지만, 가볍게 즐기는 과정에서도 오르는 것이 레벨이라고 할 때 이는 분명 남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페널티가 맞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킹스메이커는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청산가리가 웃으며 말했다.
“뭔 상황인지 설명 좀 해줘요.”
“아, 그게-.”
킹스메이커는 최대한 간결하게 희연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청산가리는 나름의 해결 방안을 내놓았다.
“그냥 빨리 렙 올려서 악마 불러낸 다음에 죽이죠? 언제나 원인 제공자가 없어지면 문제는 해결돼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솔직히 끌리는 건 사실이네요.”
“그렇죠?”
청산가리는 그것 보라며 희연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의견이 정말 좋은 것임을 어필하는 의미였다.
희연은 이전 산골 꼬마 요정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청산가리의 방식은 많이 과격한 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음…. 아니다. 진짜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네?”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가늠해 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진심이었다.
“오리 님. 자미엘한테 저주받았을 때 정확히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어요?”
“대화가….”
없지 않았나?
희연은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달빛 요람의 숲에서 목덜미가 붙잡힌 상태로 반쯤 강제나 다름없는 내기를 시작하게 된 날.
사실 희연은 자미엘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간간이 몇 마디 주고받은 걸 대화라고 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그 내용이 모두 헬르벨 놔줘라, 싫다, 죽어라, 악마 같은 새끼 따위의 것밖에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