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파드의 싱싱 농장은 이름부터가 초보자를 위한 장소라 못 박은 것 같았다.
희연은 그곳에 어떤 몬스터가 있을까 생각하며 손을 들었다. 조금 전 설정 목록에서 인터넷 검색 기능이 있는 것을 봤기에 바로 검색해 볼 참이었다.
파드의 싱싱농장에 관한 정보 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테마 던전으로 이동시켜주는 파드의 위치,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레벨. 같이 가면 좋은 파티 구성원 추천 리스트까지.
“그런데 이 던전 파티로 들어가야 하네요?”
희연은 입장 조건에 2인에서 4인까지라는 글을 발견했다. 같이 들어갈 사람은 어디서 구하지 잠시 고민했지만 애당초 그녀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와! 파드의 농장 안 가본 지 오래됐는데. 거기 소랑 양이 진짜 귀여워요, 오리 님!”
“길마님 가서 소 테이밍 하면 안 돼요. 소는 온실에서 못 키워요.”
“…안 데리고 와요.”
이미 그들은 희연과 같이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들어가기엔 레벨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오리 님! 여기 적정 레벨 추천만 있지 레벨 제한은 없거든요! 우리 전부가 장비 바꿔 끼고 앞에 안 나서면 오리 님의 즐거운 던전 라이프는 깨지지 않아요!”
“아하….”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열정적으로 파드의 싱싱 농장을 어떻게 공략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중간중간 닉이 끼어들어 그들의 계획을 저지했으므로 희연은 이번 던전 나들이가 무사히 끝나리라 믿었다.
“그러면 우린 던전 갈 준비하고 올 테니까 잠시만 여기 있어요, 오리 님.”
“준비요?”
“장비 바꿔 끼고 오게요!”
사실 그들이 장비 좀 바꾼다고 해서 초보용 던전에 가기에 적절한 스펙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희연은 수고로움을 감수해서라도 자신과 함께 던전에 가려 한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다.
가끔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 번에 사람이 여럿 빠지자 온실은 적막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희연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아.”
온실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사람은 다섯이었다. 희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청산가리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내내 그저 하하, 웃고 있었는데 이 상황을 구경하는 것이 재밌지 참여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저번 희연과 함께 산골 꼬마 요정들에게 갔던 것은 그저 킹스메이커의 부탁 때문이었다는 느껴지는 태도였다. 청산가리는 희연에게 퍽 친절히 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그녀는 희연에게 손을 살래살래 흔들어주었다.
“잘 다녀와요. 가서 재밌게 놀고요.”
“네!”
“파티 퀘스트를 할 때 지켜야 하는 불문율 같은 건 킹한테 들으면 될 거고. 딱히 제가 조언할 만한 건 없네요. 어차피 눈오리 님이 좀 실수한다고 문제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놀다 와요.”
던전이 처음인 희연의 부담을 덜어주는 말이었다.
청산가리는 희연과 조금 대화를 나누다 얼마 안 있어 퀘스트를 해야 한다며 떠났다.
인형들과 함께 온실에 남았던 희연은 악령이와 대화하고 가끔 튀어나오는 토끼를 구경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희연에 앞에 나타난 것은 뉴비 없지였다. 그는 갑옷을 벗고 간편한 천 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어두운 색감의 옷이 그의 붉은 머리와 금색 눈에 잘 어울렸다.
“오리 님! 오리 님! 아직 아무도 안 왔어요?”
“없지 님이 제일 먼저 왔어요.”
“그러면 킹이랑 길마님이 오기 전까지 파티에 대해 알려드릴까요?”
“네!”
그는 희연의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바닥에 직직 선을 그었다.
“보통 파티는 3인에서 5인으로 잡는 경우가 많아요. 그 이상 되면 소통이 잘 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사고 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고요?”
“싸움 나고 파탄 나요.”
“아….”
바닥에는 어느새 옹기종기 모인 네 개의 덩어리가 그려져 있었다. 희연은 어렵지 않게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제일 앞에 있는 게 저. 그리고 이 뒤에 있는 게 킹이랑 길마님. 오리 님은 제일 뒤에요.”
마름모 모양으로 선 네 개의 덩어리 앞에 커다란 덩어리가 그려졌다.
“보통 몬스터는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약한 쪽을 노려요. 힐러가 보통 그 대상이고, 그다음은 딜러, 그중에서도 마법사, 그다음이 서포트 쪽 직업이죠.”
“닉 님이 서포트 직업인 거죠?”
“정답! 몬스터가 힐러 다음으로 마법사를 노리는 이유는 보통 마법사들은 스킬 하나 캐스팅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예요. 노리기 딱 좋거든요. 그동안에는 못 움직이고 만약 스킬 쓰다 실패하면 페널티를 받으니까요.”
“…….”
“킹은 거기에 해당 안 하지만 일단 편의상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아, 네.”
그는 선을 직직 그었다. 몬스터와 희연을 상징하는 덩어리 사이에 선에 쭉 그어졌다.
“만약에 탱커가 힐러 쪽으로 가는 공격을 계속 못 막는다, 그래서 힐러가 자힐을 한다? 그런 경우가 생기면 무조건 그 파티는 버리고 도망쳐야 해요.”
“그래도 돼요?”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하는 겁니다, 오리 님. 기본적으로 힐러가 방어력 낮고 걸어다니는 어그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파티에서 제일 최악인 상황이 힐러가 죽는 상황이고요. 탱커가 힐러를 못 지킬 정도로 형편없다? 그러면 그 파티는 가망 없는 거예요.”
“…….”
“빨리 손절하세요.”
뉴비 없지는 자신을 뜻하는 덩어리 위로 엑스자를 그었다.
“탱커가 죽으면 딜러와 서포트가 힐러를 지켜야 해요. 왜 그럴까요?”
희연은 잠시 생각해 보다 금세 답을 내놨다. 사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파티에서 힐러만큼 하는 일이 명확한 직업은 없었기 떄문이다.
“힐러가 죽으면 치료해 줄 사람이 없어서…?”
“정답. 보스 레이드를 뛸 때면 물약 먹을 시간 같은 거 없어요. 던전 중엔 포션 사용이 불가능한 곳이 많죠. 그리고 몬스터 중엔 저주 거는 것들도 많고요.”
“…….”
“탱커가 죽으면 나머지 직업군은 열심히 피하면 돼요. 딜러가 죽는다고 공격 수단이 없는 게 아니고 다른 직업군도 충분히 서포트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유일하게 힐러만 대체가 불가능해요.”
이렇게 부담스러운 직업일 줄은 몰랐는데.
희연의 표정이 굳자 뉴비 없지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여기까지가, 정상적으로 파티할 때의 설명이고. 사실 요즘 파티는 이렇게 안 굴러가요.”
“?”
“힐러는 앞에 있고, 딜러는 보호 따위 필요 없다며 뛰쳐나가고 혼자 남은 탱커는 알아서 쫓아다니며 보호하거나 같이 딜이나 넣어야 하거든요.”
“네?”
“생각해 봅시다, 오리 님. 킹 무기는 뭐죠?”
“낫…. 아.”
일단 킹스메이커는 얌전히 서서 스킬 준비하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킹이 마리아 만났다고 하던데. 걔가 이 게임에서 제일 잘 나가는 힐러인데 걔만 봐도 요즘 힐러들은 뒤에 있지를 않는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무기 봤어요?”
“…채찍을 보긴 했는데.”
“맞아요, 그거. 문제도 거기서부터죠. 무기 선택을 자유로 해놓으니 위로 갈수록 개판이 됐답니다. 나중에 꼭 양떼목장 미친 양 떼 찾아봐요.”
킹스메이커가 알려준 것과 같은 정보였다. 뉴비 없지까지 그 내용을 언급하자 희연은 내심 그 내용이 궁금하면서도 보기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힐러들도 스타일이 다양해요. 파티원 살리는 것만 하는 애부터 내 허락 없인 못 죽는다, 힐 받고 싶으면 알아서 와라, 피해주는 것을 내가 제거하마, 내가 딜로 캐리하겠어, 까지.”
“…….”
“마리아는 내 허락 없인 목 죽는다와 내가 딜로 캐리하겠어 타입의 힐러예요. 걔 덕분… 이라고 하긴 애매한데. 제일 잘 나가는 힐러가 분위기를 그렇게 잡은 덕에 힐러하는 애들 중에 평범하게 힐만 하는 애가 없는 편이죠.”
희연이 직업을 고민할 때 들은 말이 있었다. 랭커 하나가 분위기를 잡아놓는 바람에 힐러는 위로 갈수록 갑이라고. 희연은 그 문제의 랭커가 마리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리 님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플레이하면 된다는 거예요. 물론 저렙 때는 평범하게 힐 해주는 게 좋지만요. 어차피 나중 가면 힐 해주면 감사합니다 같은 분위기로 넘어갈 거예요.”
“…언젠가 갑이 돼보고 깊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어요.”
“갑질 좋죠. 오리 님은 골라잡기 하면 되는 겁니다!”
뉴비 없지는 유쾌하게 웃었다. 희연은 그에 따라 작게 웃으며 그가 바닥에 직직 그어놓은 그림을 보았다.
이미 총을 선택했을 때부터 희연도 평범한 힐러 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보다 앞서 길을 다지다 못해 포클레인으로 뚫으며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채찍질하는 힐러도 있으니 총질하는 힐러를 보며 적어도 사람들이 놀라지는 않을 거 아닌가.
지금이야 아는 사람들끼리 파티를 하지만 나중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할 땐 어떻게 하나 희연은 고민했다. 짧지만 새로운 인간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썩 내키지 않아서였다.
파티 퀘스트가 일종의 조별과제와 비슷한 형태라는 점도 그 생각에 그에 한몫했다. 그녀가 게임을 하겠다며 휴학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 상대하는 게 지쳐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온종일 사람한테 시달리다 집에 갔더니 인간관계의 피곤함 따위 모른다는 듯 얼굴 매끈한 백희준을 보니 열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도 희연의 핸드폰엔 가끔 욕설 섞인 문자가 오곤 했다. 종강 직전 마지막 조별 과제에서 희연이 이름을 빼버린 조원의 짓이었다.
패배자의 발악으로 취급하며 무시했기에 별다른 타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협박에 가까운 문자를 받고 태연하게 학교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상대는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이었기에 희연은 넉넉잡아 1년의 휴학계를 냈다. 핑계는 백희준이었고 목적은 쉬는 동안 힐링이나 하자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게임을 하겠다며 휴학한다는 희연의 말에 물론 반대했다. 하지만 희연은 우겨서라도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핑곗거리가 없었고 사실대로 말하기는 싫어서였다. 왜인지 그녀의 부모님은 얼마 안 있어 휴학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희연이 바라는 대로 평화롭게 힐링이나 하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나름 이 게임에 정을 붙였다. 재미도 있었다. 원래라면 생각도 없던 길드 생활마저 말이다.
“빨리 던전 가보고 싶어요.”
“그렇죠?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오리 님. 오리 님이 교황이 되는 그날까지-.”
“저 교황 안 될 거예요….”
“힝.”
희연은 정말로 지금의 상황이 즐거웠다.
『파드의 싱싱농장』
“그건 뭐예요?”
던전의 적정 레벨에 맞추겠다며 장비를 바꿔 끼고 온 킹스메이커를 본 순간, 희연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알프스 풍의 옷 대신 어느 마을 소녀1 같은 차림새로 갈아입고 왔는데, 땋아 내렸던 머리는 위로 묶었고 흉악한 낫 대신 희연도 들 수 있는 낫을 들고 있었다.
“농민의 낫이요.”
농사용 낫을 말이다. 희연은 오늘따라 킹스메이커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엔 일말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저걸 무기로 쓰겠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에 뉴비 없지는 신이 나서 웃었다. 희연은 상관없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민의 낫도 누구 손에 들려 있냐에 따라 충분히 흉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닉 님이 안 오셨어요.”
“아, 길마님 지금 나무에 물 주는 중이에요. 물 다 주면 바로 출발하기로 했어요.”
“나무요?”
“오리 님은 아직 못 봤죠? 온실이 만들어진 이유가 그 나무 때문이에요. 온 김에 한 번 보고 가요.”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데리고 온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온실의 안쪽으로 갈수록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것이 눈에 보였다. 식물이 자유롭게 자라나 언뜻 보면 관리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이고 자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처럼도 보였다.
닉은 그의 키 반만 한 하얀 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얇은 가지도 잎도 모두 새하얗게 빛나는 나무였다. 빛으로 빚은 것 같은 나무는 가까이 가자 따스한 온기를 내뿜었다.
“우와….”
희연의 감탄사에 나무에 집중하던 닉이 고개를 들었다. 그 또한 킹스메이커처럼 간편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나부끼던 긴 머리는 얌전히 땋아 어깨에 늘어트린 상태였다.
희연의 눈에는 그 모습이 요정닉에서 현실계 사람으로 한층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준비 다 됐어요?”
“네네! 길마님도 물 다 줬죠?”
“네.”
닉은 들고 있던 나무뿌리로 만들어진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녜디아가 그것을 입에 물고 온실의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희연은 질문했다.
“녜디아는 같이 안 가요?”
“녜디아는 같이 가기엔 레벨이 너무 높아서요. 대신 플리가 같이 갈 거예요.”
“플리?”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희연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녜디아가 사라졌던 수풀 사이로 새로운 동물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