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92)화 (92/251)

92화

“와….”

“플리. 이리 와.”

닉의 부름에 플리는 사뿐사뿐 걸어왔다. 곧은 목만큼이나 우아함이 느껴지는 걸음걸이였다. 희연은 플리가 가까이 올 때까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순한 눈망울과 등 위에 연한 빛깔의 꽃무늬를 품은 플리는 꽃의 요정이 꽃사슴의 모습을 빌린 게 아닐까 싶은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눈가에 피어난 자그마한 꽃들은 돌담 위 꽃처럼 여려 보이면서도 시선을 끌었다. 머리 위와 목 주위에 핀 알록달록한 꽃은 다채로웠다. 빽빽하게 자란 나뭇잎 줄기는 꽃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희연은 간간이 온실에서 사슴으로 보이는 잔영 같은 것을 발견했었다. 매번 제대로 보지를 못해서, 설마하니 온실에 사슴이 있을까 싶어 금세 흥미를 잃었던 것의 정체가 눈앞에 있었다.

“저 꽃사슴 실제로 처음 봐요…. 어, 진짜 꽃이 자라는 꽃사슴도 처음 봐요.”

“귀엽죠? 얘가 길마님이 여우퀘에서 발견한 애예요. 카나리아 숲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했대요.”

“…….”

잠시 카나리아 숲에서 발견했던 것들을 떠올린 희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희연을 위로해 줄 참인지 플리는 사박사박 걸어와 희연의 손에 뺨을 비볐다. 그 모습에 희연은 감동했다.

“와…! 와!”

“쓰다듬어줘도 돼요. 꽃이 자란 쪽은 피해서요.”

희연은 닉의 조언을 들으며 조심조심 플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닉이 관리를 잘해준 것인지 원래가 그런 것인지 플리의 털은 굉장히 부드러워 자꾸만 손이 갔다.

“당근 줘도 돼요?”

“네.”

인벤토리에서 윌로우 농장표 당근을 꺼낸 희연은 간만에 즐거운 시간을 충분히 누렸다. 플리는 애교가 많았고 자신을 예쁘다 예쁘다 해주는 희연에게 살갑게 굴었다.

제법 시간이 지난 이후에야 희연은 아쉬운 마음으로 플리에게 손을 뗄 수 있었다. 그런 희연에게 닉이 말했다.

“플리도 같이 가니까 아쉬워하지 않아도 돼요.”

“플리…. 싸울 수 있어요?”

“네. 지금 가는 던전에는 플리가 가장 적절해요.”

“혹시 플리 레벨이….”

“25요.”

아슬아슬하게 희연이 1 높았다.

혹시 이전까지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상대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나? 희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플리의 순한 눈망울을 보았다.

플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귀를 파닥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여워라.”

희연은 진실 따위 몰라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

파드의 싱싱농장은 테마 던전으로, 던전의 주인이자 농장의 주인인 파드에게 퀘스트를 받아 진행되는 콘텐츠였다. 파드는 에빌론의 거리 중 농산물 거리에서 자신을 찾아올 유저들을 기다렸다.

모두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물건을 사고파는 자리에서 평범한 농부 차림에 농기구 하나 어깨에 걸친 파드를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거리를 매일 돌아다녔기에 싱싱농장 던전에 도전하려는 유저들은 그를 찾아 농산물 거리를 헤매야 했다. 이에 게임 초반, 불만 서린 문의 글이 게임사에 쇄도했다.

게임사는 이에 누구나 파드를 알아볼 수 있도록 그에게 특징 한 가지를 추가했는데, 바로 누구나 지나가면서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는 귀여운 소를 데리고 다니게 했다는 점이다.

희연은 킹스메이커로부터 파드의 뒷이야기를 들으며 그 설명이 옳다 생각했다. 저 멀리 걸어가는 한 농부를 모두가 쳐다보았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파드의 옆에는 털이 보송보송한 송아지가 함께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목욕하고 드라이한 송아지는 솜털이 어찌나 보송보송한지 다리가 오동통하게 보일 정도였다.

밤의 어두움으로도 가리지 못할 귀여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송아지가 밤을 밝히기 위해 등불을 목에 걸고 있어서 더 귀여웠다.

“귀엽다!”

“그렇죠? 귀엽죠!”

“네! 진짜 귀여워요.”

뉴비 없지의 말에 희연은 격하게 긍정했다. 왜 킹스메이커가 닉에게 소를 데리고 오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는지 알 것 같은 귀여움이었다.

뉴비 없지는 희연에게 귀여운 송아지에 대한 정보를 더 들려주었다.

“저 소 이름이 말랑소예요! 말랑소! 잘 어울리죠!”

“네! 사람들이 지은 거예요?”

“아뇨. 말랑소 이름은 파드한테 저 소를 데려다준 GM이 지었어요.”

그 GM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큰일을 했다는 건 알수 있었다. 희연은 들뜬 기분으로 파드를 향해 뛰어갔다.

기다란 이파리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던 파드가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희연 일행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파드는 의외로 어린 소년이었다. 밀짚모자 아래 드러난 얼굴엔 차마 다 숨기지 못한 장난기가 드러나 있었다. 콧잔등 위에 살며시 뿌려진 주근깨는 그가 활발한 성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한테 볼일이 있나 보지 이방인 친구들?”

말랑소에게 몸을 기대며 파드가 물었다. 희연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파브넷에게 추천장을 받았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별다른 물건을 받지 못해서였다.

다행히도 스토리는 자동으로 진행되었다.

“잠깐, 바람이 내게 이야기 해줬어. 너는 윌로우 농장에서 일을 했구나?”

“바람?”

“몰랐니? 우리들은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바람은 언제나 너희 이방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든.”

파드의 설명에도 희연이 영 감을 못 잡자 킹스메이커라 뒤꿈치를 들어 그녀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칭호랑 업적이요. NPC들한테 우리가 한 일이 바람을 통해 전달된다는 설정이거든요.”

“아.”

희연은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어린 농부 파드는 알아서 스토리를 진행했다.

“너희도 우리 가문의 싱싱농장에 들어가려고 온 거지? 원래라면 너희가 신성한 농장에 방문해도 되는지 시험해 봐야 하지만 특별히 허락해 줄게.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도 있고….”

“?”

파드는 정확히 희연을 보며 말을 맞췄다.

“막내로서의 전우애라는 것이 있으니까.”

“막내… 그건가?”

업적 [내가 바로 이 구역 신입입니다!]. 희연은 이전 마을 놀에서 주민들이 그녀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던 것의 연장선임을 눈치챘다.

막내 생활 따윈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여기며 웃어넘겼다.

파드는 말랑소 위로 올라타더니 어느 한 곳을 향해 농기구를 들어 올렸다.

“말랑소의 몸에 손을 올리고 날 따라와. 이제 우리는 싱싱농장으로 갈 거니까.”

희연과 뉴비 없지는 신이 나서 말랑소 위로 손을 올렸다. 덤덤해 보였지만 닉도 좋아하는 티를 다 감추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던 것은 말랑소가 킹스메이커와의 접촉은 거부했다는 점이다.

킹스메이커는 허공을 헤맨 손을 거두며 태연히 말했다.

“속상해라. 이래서 흑마법사는 슬픈 직업이라니까.”

“…그건.”

닉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킹스메이커는 어깨를 으쓱이곤 뉴비 없지의 목에 알아서 매달렸다.

“준비는 다 된 거지 친구들?”

파드는 목에 걸고 있던 주머니 안에서 씨앗 하나를 꺼내 바로 앞에 던졌다. 씨앗은 땅을 파고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자라나 줄기가 되었다. 줄기는 서로 얽히고설켜 둥근 리스 모양으로 자라났다.

그것은 일종의 문이었다. 둥근 줄기 안에 나타난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나무 팻말이었다. 팻말에는 커다란 글씨가 쓰여 있었다.

환영합니다, 파드의 싱싱농장.

그들은 말랑소가 움직이는 걸음에 맞추어 그 문을 통과했다.

파드의 싱싱농장은 윌로우의 농장처럼 언제나 낮인 건지 밤하늘에 둘러싸인 에빌론의 거리와 달리 하늘이 쾌청하게 푸르렀다.

“자, 그럼 이제부터 너희가 할 일을 알려주기 전에! 먼저 이 농장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줘야겠지 친구들? 부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를 바라.”

파드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파드라는 이름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농장을 물려받았다. 파드의 싱싱농장은 시드론에서 가장 큰 땅에 지어졌고 기름진 땅을 가졌으며 가축들이 건강하고 쑥쑥 자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자란 농작물은 언제나 신선하고 생기가 넘쳤는데, 그것이 과해지자 변화가 일어났다.

생생함이란 생기를 뜻했고 생기란 살아 있음을 뜻했다.

농작물 중 과하게 자라나는 것들이 생겼다. 사람만 한 크기로 자라는 농작물을 처음 발견했을 때 어린 파드는 자신이 천생 농부구나 하며 재능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대하게 자란 싱싱한 농작물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구나. 하지만 이야기를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렴.”

인격을 가진 농작물은 파드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같은 종의 농작물이 더 잘 자라는지 파드에게 알려주었고, 땅에서 자라나는 농작물들의 소리를 듣고 파드에게 그들의 불만을 알려주었다.

인격을 가진 농작물들의 도움을 받은 파드의 싱싱농장은 더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파드는 예정대로 상자를 가득 채운 싱싱한 농작물을 에빌론을 비롯한 여러 도시, 마을에 팔았다.

농장주로서 가장 대성한 결과물이었고 농작물들의 친구로서 그들을 배신한 일이었다.

농작물들은 파드에게 따졌다. 어떻게 자신들의 친구를 친구인 그가 팔 수 있냐고 말이다. 파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가꾸고 키워낸 농작물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일부의 인격을 가진 농작물들을 제외하곤 나머지 모두 농작물일 뿐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고 농장을 가꾸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농장주인 그는 키운 농작물을 팔 수밖에 없었다.

억울해진 파드는 농작물들에게 따졌다.

“왜 내가 너희 친구들을 삶아 먹고 데쳐 먹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니?”

“이렇게 들으니까 되게 묘하네….”

“쉿.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

농작물들은 파드의 질문에 답했다.

그야 우리는 애초에 식용 목적 작물인걸? 누군가 우리를 먹는 것까진 합의된 사안이었어.

파드의 억울함은 배가되었다. 그 식용을 위해 필요한 중간 과정이 바로 판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작물들은 단호했다. 그들은 먹히는 것까지가 자신들의 역할이지 그 과정은 자신들이 관여할 분야가 아니며 얽히기도 싫다 했다.

왜 멋대로 우리를 가지고 너희끼리 이윤을 남기니. 화가 나는구나.

그것이 농작물들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우리의 다툼은 계속되었고 결국, 난 농작물들에게 이 농장을 빼앗기고 말았어.”

“그렇구나.”

“농작물들은 본인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 그래서인지 내가 농사를 할 때보다 인격을 가진 농작물들이 자라나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단다. 결국 나는 이방인들의 도움 없인 농작물 하나 마음대로 팔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거야.”

“…저런.”

“부디 나를 도와주겠니?”

희연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지도 못한 스토리가 당황스러웠다. 그런 희연에게 킹스메이커가 파드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긴 스토리가 중요한 테마 던전이 아니라 그래요. 테마 던전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라고 만든 곳이거든요.”

“그렇구나….”

농작물의 반란이라는 스토리가 예상 못 한 것이긴 했지만 확실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희연의 목적은 던전, 파티 퀘스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익히고 최대한 빨리 레벨을 높이는 것에 있었다.

나름 납득을 마친 희연에게 파드는 선택지를 주었다.

“이방인 친구들. 너희는 나를 어떻게 도와줄 거니?”

[1. 농작물 탈환

: 오늘도 영차영차 농사짓고 있을 농작물들을 피해 땅에 묻힌 농작물을 수확해 파드에게 가져다주자.

난이도 : ☆☆☆]

[2. 땅 주인은 누구인가

: 싱싱농장의 주인은 명백히 파드다. 그의 땅을 침범하고 주인을 내쫓은 괘씸한 농작물들을 혼내주자.

난이도 ☆☆]

[3. 가을은 사색의 계절

: 우리의 가치는 정말 먹히는 것에만 있을까? 인생을 고찰하며 삶의 목적을 찾게 된 농작물을 찾아가 보자.

난이도 : ]

보기란을 모두 읽은 희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지막에 이상한 게 섞여 있어요.”

“그게 우리의 선택지예요.”

“…진짜요?”

“네. 진짜요.”

희연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뉴비 없지가 냉큼 세 번째 보기를 선택했다.

[<3. 가을은 사색의 계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수락 (3/4)]

파티원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듯했다. 희연은 탐탁지 않은 심정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파드는 그들의 선택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오, 이런. 너희는 의외로 고찰하는 삶을 좋아하는 친구들이었구나. 그래 친구들. 너희는 가을이 무슨 계절인지 아니?”

“가을을 계절이라고 한단다, 파드.”

“흑마법사라 그런지 감성이 없구나.”

“너는 눈치가 없구나.”

킹스메이커가 농민의 낫을 만지작거리자 파드는 퍼뜩 자세를 바로 했다. 어린 나이에 농장을 경영하고 수많은 유저들을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게 만든 것이 운이 아니라는 듯 처세술이 굉장히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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