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말랑소의 뒤에 숨은 파드는 언제 자신이 겁먹었냐는 듯 언뜻 들으면 거들먹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 수확되는 것들은 비단 다 자란 벼뿐만이 아니란다. 우리의 감성과 삶의 애환도 함께 잘려나가는 거야.”
“?”
“많은 농작물들이 나와 함께했어. 비록 우리의 끝은 좋지 않았지만 끝까지 나와 함께했던 작물이 있었지. 그 애는 가을과 춤을 사랑하는 친구였어. 우수에 젖은 몸은 가을의 빛으로 반짝였지.”
“가을이랑 춤이랑 무슨 상관이….”
“농작물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먹히면 좋겠다 같은 꿈만 꾸지만 그 애는 달랐어. 어쩌면 그 친구라면 단절된 나와 농작물들의 사이를 개선시켜 줄지도 몰라.”
“…와.”
여러 의미로 대단한 스토리였다. 파드는 희연의 일행을 이끌고 농장의 입구 앞에 섰다.
“그 친구는 농장의 가장 안쪽, 수확물을 넣어두는 창고 안에 갇혀 있어. 남다른 꿈을 꾸는 그 애를 농작물들이 싫어했거든. 우리는 그 애를 구출할 거야.”
“그래….”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 지금 나는 농장에서 쫓겨났고 그 때문에 너희를 손님으로 초대할 자격이 없다는 거야.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파드는 입구 옆에 높게 쌓여 있던 짚더미를 옆으로 치워냈다. 짚 아래에는 아홉 개의 칸으로 홈이 파인 둥그런 석판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 농장에는 오이와 당근, 토마토, 옥수수, 비트, 딸기, 감자와 고구마 양파가 있어. 이 홈 안에 농작물들을 모두 모아 넣으면 너희에게 농작물의 가호가 내려질 거야. 그 가호라면 너희들도 이 농장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런데 못 들어간다고 했잖아. 그러면 농작물도 못 갖고 나오는 거 아니야?”
희연의 질문에 파드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농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잖니. 너희에게선 아주 옅지만 흙의 냄새가 난단다. 그리고 아직 땅 주인은 나야. 내가 힘을 더한다면 너희는 잠시 동안 농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거야. 안으로 들어가 우리 농장의 농작물을 10개씩 모아 가져와 줘.”
[<파드의 싱싱농장 – 농장으로 들어가는 열쇠>
: 파드의 싱싱농장은 농작물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싱싱농장에 대대로 내려 온 농작물의 가호를 통해 출입의 권한을 얻어내자.
현재 수집한 농작물
오이 (0/10) / 당근 (0/10) 토마토 (0/10) / 옥수수 (0/10) / 비트 (0/10) / 딸기 (0/10)/ 감자 (0/10) / 고구마 (0/10) / 양파 (0/10)
(농작물은 싱싱농장의 몬스터를 해치우면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구나.
레이와 함께했던 에빌론 탐방기와 비슷하다 느끼며 희연은 바로 농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그녀를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양쪽에서 붙잡았다.
“오리 님, 들어가기 전에 설명부터 듣고 가요.”
“설명이요?”
“이제부터는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니까요. 우린 오리 님한테 맞춰서 움직일 거예요. 딱 그 레벨 대의 초보 파티 사냥처럼요.”
그렇게 말하며 킹스메이커는 농민의 낫을 흔들거렸다.
“일단, 처음이니까 한 마리만 상대해 보도록 해요. 여기 농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게 당근 밭이니까 거기서부터 시작해요.”
“네!”
그들이 농장 안으로 발을 디디자 허공에 타이머가 표시되었다. 시간은 30분으로 그 안에 필요한 농작물을 다 얻지 못하면 다시 나갔다가 들어와야 했다.
다행히 당근 밭은 멀리 있지 않았다. 초보자용 던전답게 당근 밭을 걸어 다니는 거대한 당근들 간의 거리는 멀었다. 몬스터가 한 번에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듯했다.
뉴비 없지는 그것들 중 하나에게 뛰어가더니 톡 건들고는 잽싸게 그들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무기라고 할 법한 것이 들려 있지 않았다.
“어, 무기…?”
희연이 뉴비 없지가 맨손인 것을 지적하자 닉이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여기서 쓸 만한 무기가 없어 맨몸으로 하겠대요.”
닉의 옆에는 어느새 소환된 플리가 귀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 뉴비 없지가 희연에게 설명할 때 그린 그림처럼 마름모꼴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뉴비 없지가 건드렸던 당근은 그들이 자리를 잡는 사이 화가 난 표정으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당근은 성인의 1.5배 크기에 가느다란 팔다리에 둥그런 손발을 달고 있었는데, 희연은 과연 당근은 어떻게 사람을 공격할까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당근은 초보자용 몬스터답게 몸을 들이박는 식의 공격을 선호했다. 뉴비 없지는 가볍게 당근의 몸을 잡아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고, 그 과정에서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지금처럼 몬스터를 조우하는 순간부터 힐러 직업은 파티원의 상태창을 보게 돼요. HP, MP. 그리고 상태 이상이 보이죠.”
“아, 보여요.”
“힐러는 주로 탱커를 전담해서 피를 회복시켜줘요. 매번 회복시켜 줄 필요는 없고 아, 쟤가 저러다 진짜 죽겠구나 할 때 쓰는 거죠.”
희연은 반사적으로 뉴비 없지의 머리 위를 보았다. HP,와 MP의 수치를 알게 되면 상대의 스텟을 짐작할 수 있게 되기에 힐러 직업군에게 보이는 수치는 퍼센티지로 나타났다.
“물론 안전하게 작업할 거면 남은 피가 20~30% 정도일 때 회복시켜주면 돼요. 그런데 사실 5%일 때 회복시켜줘도 안 죽어요.”
때마침 뉴비 없지에게 붙잡힌 당근이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둥그런 주먹으로 콩콩콩 맞는 뉴비 없지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탱커는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저렇게 주로 맞기 때문에 물약 먹을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힐러가 주로 탱커를 전담하는 거고요.”
“그런데 없지 님 피가 안 닳아요….”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말에 손을 들더니 뉴비 없지의 등을 주먹으로 쳤다.
“윽!”
“자, 탱커는 이렇게 피가 닳아요.”
“아, 네….”
뉴비 없지의 붉은 게이지가 처음으로 닳았지만 치료해줘야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희연이 가만 서 있자 킹스메이커는 농민의 낫을 들었다.
“설명을 이어서 하면, 보통 파티에서 선호하는 딜러 캐릭터는 마법사예요. 스킬 하나 쓸 때 걸리는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만큼 화력이 좋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 외 딜러 직업이 별로인 건 아니죠. 각 직업별로 충분히 제 몫을 하거든요.”
그녀는 뉴비 없지의 등 가까이 가더니 낫을 들어 당근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당근-!
“어, 죽었다….”
“…….”
킹스메이커는 잠시 자신이 들고 있는 농민의 낫과 전리품으로 남은 진짜 당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떨어져 있던 당근을 잡아 저 멀리 냅다 집어 던졌다.
“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
“…….”
“잠시만요.”
킹스메이커는 인벤토리에서 팔팔 끓는 검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마시고는 새 당근을 데리고 오겠다면 뛰어갔다. 희연은 킹스메이커는 버리고 간 병을 건드려 보려다가 닉에게 제지를 당했다.
“독약이에요.
“…….”
얼마 안 있어 킹스메이커는 유난히 건강해 보이고 유난히 광택이 흐르는 당근 한 마리를 잡아왔다. 힐러의 특성으로 전투 중에는 상대의 상태 이상을 확인할 수 있던 희연은 당근에게 걸린 버프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사도 버프 걸 수 있구나.”
스킬 중에 버프가 있었던 건지 물약을 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희연에게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희연은 확인하는 김에 킹스메이커의 상태도 한번 확인해 보았다. 킹스메이커의 머리 위에 뜬 HP, MP 막대기 위에는 시꺼먼 해골, 불꽃, 덜덜 떠는 사람, 눈이 빙글빙글 도는 사람, 머리를 붙잡은 사람과 같은 표시가 떠 있었다.
그녀가 그 표시를 자세히 보자 어떤 상태 이상인지 설명 창이 떠올랐다. 중독, 발열, 오한, 어지럼증, 약화. 반면 당근에게 걸린 버프는 체력 강화, 튼튼함, 물리 내성, 마법 내성, 빠른 회복력이었다.
킹스메이커는 들고 온 업그레이드 당근을 뉴비 없지에게 안겨 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까처럼 농민의 낫을 당근에게 콕 박아 넣으며 희연에게 다시 설명했다.
“자 다시 설명을 이어서 하면, 근딜일 경우엔 탱커 뒤에서 이렇게 공격을 해요. 문제는 탱커랑 가까이 있어서 같이 공격당할 수 있다는 거죠. 이때 힐러는 탱커랑 근딜 직업군을 같이 커버해 줘야 해요.”
“네….”
“그래서 만약 힐러가 컨트롤에 자신이 없다 하면 근딜은 빼고 원딜을 집어넣는 게 좋아요. 그리고 만약 탱커가 무너졌다, 하는 일이 생기면.”
킹스메이커가 말을 끊는 것과 동시에 뉴비 없지는 잽싸게 옆으로 털썩 넘어졌다. 그에게 붙잡혀 있던 당근은 갑작스러운 상황이 혼란스러운지 머뭇거렸지만 곧바로 희연을 향해 달려왔다.
“이렇게 몬스터는 바로 힐러를 노리는데, 여기서 같이 있는 딜러가 원딜이냐 근딜이냐에 따라 행동 방식이 달라져요. 또 서포트 직업이 같이 있냐, 그 직업이 뭐냐에 따라 달라지고요.”
닉의 옆에 얌전히 서 있던 플리가 폴짝 뛰어오더니 당근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가까이 오는 것을 저지시켰다.
“힐러인 오리 님이 도망쳐야 하는 상황은 탱커가 쓰러졌는데 남은 게 원딜 직업과 버퍼 위주의 능력만 있는 서포트 직업만 남았을 때예요. 근딜 직업은 제 몸 하나 챙기기 바쁜 원딜 직업이랑 달리 힐러를 보호하는 게 가능하거든요. 바로 이렇게!”
킹스메이커는 플리의 앞에서 머뭇거리던 당근 위로 올라가더니 조금 전 자신이 꽂아놨던 농민의 낫을 뽑았다. 그녀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당근에 조금씩 생채기를 냈다.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서 몬스터가 처치 순위로 두는 1순위를 자기로 바꿔요.”
희연은 그 많은 디버프를 끌어안고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렇게까지 핸디캡을 안고 있음에도 간 보듯 낫 끝으로 콕콕 찌르는 게 아니면 당근을 즉사시킨다는 점도 놀라웠다. 아무리 많은 버프를 받아도 당근은 킹스메이커에게 농락 거리일 뿐이었다.
“원딜은 공격 한 번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솔직히 힐러보다 나은 거지 방어력이 낮아요. 반면 근딜은 암살자처럼 딜량이 높은 대신 방어력이 취약한 경우도 있지만 서브 탱커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경우도 많거든요. 검사 직업처럼요.”
킹스메이커가 물러나자 플리가 다시 당근을 향해 달려들었다. 플리에게 부딪혀 밀려난 당근은 경직 상태가 되어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이때 근딜 직업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최대한 빨리 몬스터를 처치하는 거예요. 여기서 힐러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탱커보단 방어력이 부족하고 원딜보단 딜량이 부족한 근딜을 잘 관리해 줘야 하는 거죠.”
경직이 풀린 당근은 곧바로 킹스메이커에게로 뛰어와 주먹을 날렸다. 킹스메이커는 그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맞아주었다. 희연은 뉴비 없지처럼 킹스메이커의 피가 조금도 닳지 않는 것을 보았다.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던 뉴비 없지가 킹스메이커의 다리를 주먹으로 쳤고 그제야 그녀의 붉은 게이지가 20% 정도 닳았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에게 보란 듯 양손을 들고 얌전히 계속 당근에게 맞아주었다.
희연은 잠시 눈치를 보다 총을 들어 킹스메이커 쪽을 겨냥했다.
[스킬 <등불의 빛>을 사용합니다. 자신을 포함한 파티원의 HP를 회복시킵니다.
‘빛 아래 사라지는 것은 없으니’]
킹스메이커는 일부분 회복된 자신의 피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최대한 빨리 몬스터를 처치해야 한다고 했죠? 그러면 이때 힐러인 오리 님이 해야 하는 또 다른 역할은?”
희연은 그 말에 곧바로 스킬을 연달아 사용했다.
[스킬 <촛불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공격력, 방어력, 치명타 확률이 증가합니다!
‘꺼지지 않는 촛불의 가련한 생명력은 위대하니’]
[탄환이 변경됩니다. 일반 탄환 >> 마법 탄환]
희연이 쏜 총에 맞은 킹스메이커의 머리 위로 자그마한 하얀 불빛이 일렁이다 사라졌다. 희연의 총구 위에는 작은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걸 확인한 킹스메이커는 낫의 손잡이로 당근의 머리를 아주 살짝 때렸다.
당근-!
남은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당근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희연은 조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총을 들었다. 일부러 그런 거였다.
총을 잡은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희연의 몸은 저번처럼 질질 끌려가지는 않았지만 조금 비틀거리며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방아쇠가 당겨지기 직전, 희연은 간신히 안정적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펑-!
마법 탄환의 작은 폭발음과 함께 당근은 쓰러졌다. 당근은 폴리곤이 되어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싱싱한 진짜 당근 하나가 나타났다.
내내 누워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뉴비 없지가 손뼉을 치며 희연을 칭찬했다.
“그거예요, 오리 님! 파티에서 힐러들은 여유가 있으면 몬스터를 같이 공격하거든요! 무기로 지팡이 같은 거 선택한 애들은 안 되지만 오리 님은 총이랑 가능하죠!”
“저 잘한 거예요?”
“네! 진짜 잘했어요!”
희연은 어색한 얼굴로 당근을 주웠다. 플리가 혹시 자기 것이냐며 옆으로 걸어와 눈을 빛냈다. 그런 플리를 닉이 붙잡아 뒤로 물러나게 했다.
삐애애앵-
플리는 억울하다는 듯 울음소리를 냈고 희연은 처음 듣는 사슴 울음소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롱 문이 닫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닉이 플리를 달래는 동안 킹스메이커는 희연에게 말했다.
“여기까지가 보통 파티가 굴러가는 방식으로 만약 나중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파티를 하게 된다면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네!”
과정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희연은 차근차근 잘 배워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