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95)화 (95/251)

95화

희연은 남은 넝쿨의 개수를 세보며 아직 시간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가 이야기를 들어줄 성싶자 흑토마토는 냉큼 입을 열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새콤달콤한 소스가 되고 싶다 했어. 내 다른 친구는 시원한 주스가 되고 싶다고 했지.”

“…….”

동화 기반 이야기가 많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동요도 기반이 되는 줄은 몰랐다. 희연이 다른 생각에 빠지는 사이에도 흑토마토는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성토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먹히기 싫었어! 사라지기 싫었다고!”

“그래….”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고 나는 말도 할 줄 아는데! 왜 먹히기만 하고 사라져야 해? 이렇게 꿈도 갖고 있는데?”

희연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고 어느새 정신을 차린 구황 작물들이 흑토마토를 비난했다. 그중 옥수수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나쁜 토마토! 우린 애초에 먹히기 위해 태어났단 말이야! 네 개의 강줄기가 타고 흐르는 동산의 시작에서부터 그렇게 태어났다고!”

“흥! 그건 너희들한테나 해당하는 말이야! 난 동산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든. 난 사람들이 만든 개량종이란 말이야!”

그들이 싸우는 와중에도 킹스메이커는 착실하게 넝쿨을 잘랐다. 뉴비 없지는 남은 팝콘을 먹으며 관전했다. 닉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품종 싸움…?”

“아, 그건가.”

희연이 닉의 말에 동의하는 사이 킹스메이커가 넝쿨 정리를 모두 완료했다. 발이 자유로워진 흑토마토가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더니 빙그르르 춤을 추었다.

“나는 춤을 출 거야! 안 먹힐 거라고!”

다른 작물들이 어떻게 요리에 소모될지 고민하는 사이 혼자 춤을 추겠다는 꿈을 꾼 토마토다운 당찬 모습이었다.

“없지 없지. 저 오두막 문 뜯어서 방패로 써.”

“방패? 왜?”

“이제 올 거거든.”

“?”

킹스메이커는 손수 문짝을 뜯어 뉴비 없지에게 들려주었다.

“자, 오리 님. 이제 이 루트의 마지막 단계만 남아 있어요. 몬스터가 몰려오는 것을 웨이브라고 하는데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 해결책은 도망가거나, 막거나, 다 해치우는 거예요.”

“네?”

“우리는 적당히 해치우다 도망이나 갈 거예요. 제한 시간이 있으니까요.”

희연이 킹스메이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 땅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희연은 처음엔 지진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저 멀리서 흙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무리가 보였다. 그 무리를 보며 킹스메이커가 말했다.

“옛날에 내가 깬 건 여기까지였어요. 렙 25로는 아무리 해도 혼자 웨이브를 못 막겠더라고요. 도망도 힘들고.”

“그러면 저게….”

몰려드는 무리의 정체를 깨달은 건 희연뿐만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문짝을 들고 있던 뉴비 없지는 답지 않게 질린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뭐람….”

띡, 띡, 띡-

타이머가 움직이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닉이 급하게 플리에게 버프를 걸어주는 모습을 보며 희연도 총을 들었다. 웨이브 퀘스트 상황이라 그런지 이동용 펫인 에흐테는 자동으로 소환 해제가 되었다.

덕분에 도망이라는 선택지는 보류되었다. 희연은 몰려오는 몬스터의 수를 가늠해 보며 물었다.

“여기서 농장 입구까지 멀지 않아요?”

“오리 님이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

[스킬 <촛불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탄환이 변경됩니다. 일반 탄환 >> 마법 탄환]

희연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고, 스킬의 효과는 모두의 머리 위에 떠 올랐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킹스메이커의 머리 위에 떠 올라 있는 디버프 표시를 보며 헛헛하게 웃었다.

“이거 퀘스트 실패하면 언제 다시 할 수 있어요?”

“실패하지 않아요 오리 님.”

이럴 때의 킹스메이커는 단 한 번도 실패라는 걸 겪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희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준비했다. 흑토마토는 닉이 챙긴 뒤였다.

달려 나갈 준비를 하던 희연은 문득, 자신에게는 버프 스킬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동 사냥 스킬에 가려 존재감을 잃었던 스킬이었다.

킹스메이커는 덤 취급을 했지만, 지금의 희연에겐 하나라도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버프 스킬이었다.

[스킬 <사냥꾼의 직감>을 사용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상대의 약점이 표시됩니다.

‘단 한 발의 총알이 가져가는 목숨은 누구의 것인가’]

검은 눈 위에 잠시 녹색의 빛이 일렁거렸다. 희연은 눈을 깜박이다 서둘러 달려오는 농작물 무리를 쳐다보았다. 알록달록 제각기 색을 가진 농작물 위로 새빨간 점이 나타나 있었다.

점은 크기가 큰 것도 있었고 작은 것도 있었으며 몸 하나에 점이 남들보다 여럿인 객체도 있었다. 희연은 실험 삼아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펑-!

마법 탄환에 맞은 당근이 전과는 달리 한 번에 즉사했다. 약점을 맞춰 크리티컬 효과가 들어간 것이다. 희연이 놀라 자신의 손과 당근 앞을 번갈아 보는 사이 농작물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에게로 쏠렸다.

힐러에게 어그로가 모두 쏠린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킹스메이커가 말했다.

“오리 님, 집중. 우리의 주목적은 사냥이 아닌 도망이에요. 물론 오리 님은 사냥하고 싶은 만큼 사냥해도 되지만요. 우리는 자제할 거고요.”

“혹시 킹 님이 사냥을 최대한 피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자미엘 때와는 달리 유난히 몸을 사리는 모습에 결국 그녀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묘한 표정으로 뜸을 들이더니 이유를 알려주었다.

“너무 렙 차이 나는 파티에서 몬스터 몰살하는 흔적이 나오면 GM이 찾아와서 조사하거든요.”

“아….”

“이미 몇 번 걸려서 나름 조심하는 거예요.”

“…네?”

“괜찮아요! 길마님은 걸려본 적 없고, 플리는 레벨도 낮아서 충분히 도와줄 수 있어요!”

희연이 당황하는 사이 킹스메이커는 예의 물약을 끄집어내 한 병 더 비우더니 뉴비 없지에게도 같은 것을 넘겼다. 희연은 자신의 눈앞에서 줄줄이 늘어나는 상태 이상 표시를 보며 혼란을 느꼈다.

“한 병 더 먹을까?”

“두 병 더 먹는 게 좋겠다.”

뉴비 없지는 연달아 물약 두 개를 더 비운 다음에야 자세를 잡았다. 희연은 평생 볼 상태 이상 목록을 지금 다 봤다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도 뉴비 없지와 킹스메이커의 피는 조금씩 닳고 있었다.

치료를… 해줘야 하는 건가?

희연이 고민하는 사이 온갖 경작지에서 몰려온 농작물 몬스터들이 분노의 울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희연은 일단 잡고 보자 생각하며 총을 들었다.

탕, 탕, 탕, 탕-!

그녀의 연속사격은 깔끔했다. 약점 간파 스킬 덕에 원샷원킬이라는 결과까지 나왔다. 문제는 총소리였는데, 걸어 다니는 어그로인 힐러가 총까지 사용하자 라이징 스타급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희연은 오로지 자신만 보인다는 듯 몰려드는 농작물들을 보며 굳었다. 사람보다 1.5배 큰 농작물들이 달려오는 모습은 의외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흐랏차!”

뉴비 없지가 기합을 내지르며 들고 있던 문짝을 농작물 무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마치 부메랑처럼 빙그르르 돌며 날아간 문짝은 몬스터 무리를 뒤로 물린 뒤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저는 왼쪽이랑 앞! 플리가 오른쪽. 토마토랑 오리 님이 가운데고 킹이랑 길마님이 뒤를 맡습니다. 그러면 이제 출발!”

탱커라는 직업 덕에 파티의 리더 역을 자주 맡아본 뉴비 없지는 곧바로 위치를 지정하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디버프 물약 세 개의 위력 덕인지 나름 힘차게 달려나가 문짝으로 밀어냈음에도 농작물 중 폴리곤이 된 객체는 없었다.

희연은 넘어진 농작물들을 맞추며 그 뒤를 따랐다. 어느새 타이머는 처음 파드의 농장에 들어설 때처럼 30분의 제한 시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글바글 몬스터가 몰린 상황이라 희연의 시야는 한정적이었다. 다행히도 흑토마토가 자신의 위에 올라간 것을 제안해 준 덕에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희연은 물약의 도트 대미지 탓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뉴비 없지도, 플리도 치료해 줘야 했고, 재사용 시간이 끝날 때마다 버프도 걸어야 했다.

힐과 버프를 걸지 않을 때는 몬스터를 잡았다. 높은 시야각을 차지한 덕에 사격하는 것이 용이해졌지만, 아무런 방어막 없이 위에 있다는 점에 위협 확률도 높아졌다.

가끔 옥수수들이 원거리 공격을 할 경우 킹스메이커가 농민의 낫을 날려주는 덕에 아직까진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희연은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총을 쏘며 힐러를 선택한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탁, 탁.

“이거 왜….”

나름 잘해나가던 와중 유일한 실수는 희연이 MP 관리하는 것을 완전히 잊어먹었다는 거였다. 실전 경험이 부족해 생긴 실수였다.

뒤늦게 텅 빈 파란 막대기를 확인한 희연은 서둘러 탄환을 변경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탄환 변경, 일반 탄환!”

[MP가 부족합니다!]

탄환 변경을 하는 것에도 MP가 필요했다.

“어, 이거, 잠깐….”

검은 천막의 상인과 싸울 때는 본인이 MP가 부족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MP 계산이 철저했지만 나름 여유가 생긴 지금 희연은 방심하고 말았다. 자신의 MP는 마음 놓고 막 쓸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물약이…!”

[현재 파드의 싱싱농장이 닫히기까지 15분 남았습니다.]

[싱싱농장의 농작물들이 한마음으로 가장 위협적인 적에게 제약을 겁니다.]

[<21세기 킹스메이커>는 14분 59초 동안 움직임에 제약을 받습니다.

(대상의 레벨에 따라 페널티가 다르게 정해집니다.)]

“아….”

짧은 탄식의 주인공은 킹스메이커였다. 나름 조심조심하며 최대한 안 나서려 했음에도 농작물들이 그녀를 가장 위협적인 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여차할 땐 다 쓸어버릴 생각을 했던 킹스메이커는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파드의 싱싱농장의 히든 루트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전개는 그녀도 예상 못 한 거였다.

고렙이 저렙존에서 양민학살 하는 것을 막는 편인 게임사의 정책을 지금 느낄 줄은 몰랐다.

팔다리에 묶인 족쇄에 속으로 혀를 차던 킹스메이커는 입은 자유라는 사실을 깨닫고 곧바로 외쳤다.

“오리 님 앞에!”

희연이 MP 부족에 이어 킹스메이커가 페널티를 받았다는 사실에 당황하는 사이 고구마 농작물이 기다란 줄기를 이용해 공격을 시도했다. 희연은 그 공격을 피해냈지만, 그 밑에 있던 흑토마토는 아니었다.

“으악!”

줄기에 묶인 흑토마토는 비틀거렸고 그 위에 서 있던 희연까지 덩달아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다행히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연속되는 실수에 희연은 쉽사리 침착함을 되찾지 못했다.

“물약을… 어, 줄기부터 없애야 하나? 아, 플리 회복도 해야 하는데….”

그녀가 헤매는 사이 농작물 중 가장 몸이 가볍고 작은 딸기 몬스터가 플리의 눈을 피해 공격을 가했다.

딸깃-!

“!”

갑작스러운 공격도 공격이지만 희연은 생각보다 큰 대미지에 경악했다. 힐러의 방어력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얇디얇은 종잇장 같은 거였다.

급한 대로 흑토마토 위로 올라온 딸기를 발로 걷어차서라도 떨어트리려 했지만, 딸기는 희연의 예상보다도 더 질긴 작물이었다.

“악! 물었어!”

딸기는 희연의 다리에 찰싹 매달려 와득와득 깨물었다. 희연은 총을 휘둘러 딸기를 공격했지만 평타로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삐애앵-!

“플리…!”

희연이 딸기에 맥을 못 추리는 사이 플리가 몰려드는 몬스터 사이에 갇혔다. 뉴비 없지가 문짝을 집어던져 몬스터들을 내쫓았지만 플리는 이미 시달린 뒤였다.

“넌 쫌 그만 물어!”

그사이에도 딸기 몬스터는 여전히 희연의 다리를 씹고 있었다. 어느새 희연의 피는 3분의 2나 닳은 상태였다.

이번 퀘스트는 실패다.

이미 희연은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연은 자신이 실수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MP 관리만 제대로 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껏 도와주려고 레벨도 안 맞는 곳에 스스로 페널티까지 안고 와줬는데….

이 파티가 끝나고 나면 그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할지 걱정하던 희연은 눈앞에 떠오른 창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테이머의 가호>! 테이머 닉의 HP, MP가 일부 전달됩니다.

대상 : <눈오리의 돌격>, <플리>]

“아….”

희연은 서둘러 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간당간당하던 플리의 HP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게다가 추가적인 버프를 받은 것인지 플리의 머리 위에는 희연이 걸어 준 버프 외에도 처음 보는 표시가 줄지어 나타나 있었다.

“괜찮아요?”

어느새 흑토마토 위로 올라온 닉이 희연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무기인 리라를 끄집어냈다.

버프라도 걸어주려는 건가?

그러나 이어진 닉의 행동은 희연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리라로 희연의 다리를 아그작아그작 씹는 딸기를 내리쳤다. 당연하게도 딸기는 그 한방으로 즉사했다.

딸깃!

악기는 생각보다 좋은 근접 무기였다.

“…….”

희연은 긴장으로 바짝 얼어 있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색하게 악기를 갈무리하는 닉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 느꼈던 불안함은 사라진 뒤였다.

“오리 님 집중, 집중!”

“아, 네!”

눈만 끔벅이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외침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총을 들었다. 다시 뉴비 없지와 플리의 상태를 전담하며 사냥하는 내내 희연은 더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해도 불안함은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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