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어찌 됐든 때마침 적절한 도움을 받은 희연은 어렵지 않게 파티 모집을 할 수 있었다.
GM 당근이 알려준 파티 찾기는 두 가지 설정이 존재했는데, 이미 만들어진 파티 목록을 보여주거나 유저의 머리 위에 파티 모집이라는 문구를 띄워주는 형식이었다.
희연은 머리 위에 문구도 띄우고 목록에 떠 있는 파티 목록도 훑어보았다. 파티 명 옆에는 파티 신청 버튼이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버튼을 눌렀지만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했다.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대다수가 이미 인원수가 다 찼거나, 중고 뉴비이거나 해서였다. 그 이유를 모르던 희연은 혹시 자신이 파티하기에 조건이 맞지 않는 건가 싶어 다시 표지판 쪽으로 이동했다.
표지판에는 파티 입장 조건 같은 것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어서였다. 조금 전엔 짹짹짹짹 새소리만 가득한 글들에 놀라 자세히 보지 못했다.
뒤늦게 제대로 확인한 던전 출입 조건은 총 세 가지였다.
레벨 20~35까지. 파티의 최대 인원수는 9명. 파티원 간의 레벨 차가 10 이상 차이 나지 말 것.
희연의 레벨은 29였기에 파티원의 레벨이 정해진 구간 안에서 높든 낮든 상관이 없었다. 다시 파티 신청 창을 확인한 희연은 대부분의 파티가 이미 최대 인원수가 채워져 있다는 걸 알았다.
“파티 구하는 사람은 많던데….”
다시 주변을 살펴보는 희연의 시선은 주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파티 모집이라는 문구를 띄우고 있었다. 저 사람들만 모여도 파티가 몇 개는 생길 터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누군가의 파티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자진해서 파티를 개설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희연은 정 파티를 못 구하면 본인이 파티를 개설해 볼까 고민했지만, 다수가 안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여겨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행히 힐러는 어느 파티에서든 환영받는 존재라던 킹스메이커의 말이 사실인지 얼마 안 있어 누군가 희연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힐러신가요?”
병아리 같은 금발이 화사하면서도 눈에 띄는 남자였다. 그는 가죽 갑옷에 나무 방패를 들고 있었다. 희연의 시선이 방패 쪽으로 향하자 남자는 손에 든 것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전 탱커예요. 마침 저희가 힐러를 한 명 더 구하고 있었는데 같이 파티하시지 않을래요?”
마침내 찾아온 기회에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은 희연은 냉큼 좋다고 답하기 전, 자신의 상황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그런데 제가 여기 던전은 처음이라서요….”
남자는 희연의 걱정이 무엇인지 다 안다는 듯 서글서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를 비롯한 몇몇이 경험자이고 힐러님 외에도 저희 파티에 첫 공략인 분들이 많이 계시거든요. 모른다고 실수한다고 해서 분위기가 나빠지고 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처음이라면 전체적인 파티 분위기가 유하지 않을까? 희연은 그런 기대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신을 ‘케이아일’이라 소개하며 희연을 데리고 파티원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이동하면서 희연에게 자신의 파티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제가 파티장이고 저 말고도 저희 파티에는 서브 탱커, 원딜 둘, 근딜 둘에 서포트 하나 힐러 한 분이 계세요.”
“…여덟 명 중에 힐러는 한 명이었네요?”
“네. 그래서인지 그 힐러분께서 혼자 힐 하는 건 힘들다고 힐러 한 명만 더 데리고 가자고 하더라고요. 웬만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그 힐러분이 너무 쪼아서…. 힐러 찾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딱 만나고, 운이 좋았죠!”
“네에….”
힐러 혼자서 여덟 명을 커버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어째서 그 힐러가 파티장을 쪼아 힐러 하나 더 구해오라고 했는지 희연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파드의 싱싱농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쉽게 말하는 케이아일을 서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케이아일은 그런 희연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요.”
“눈오리의 돌격이라고 해요.”
“아하. 이번 파티에는 닉네임이 재밌는 사람이 많은 것 같네요!”
“네에.”
“그런데 그 인형은 뭐예요? 아이템? 아니면 컨셉 같은 건가요?”
“…….”
희연은 답하는 대신 어깨에 매달려 있는 악령이 쪽을 먼저 보았다. 악령이는 킹스메이커의 조언에 따라 입을 꾹 다물고 착실히 인형인 척하고 있었다.
“되게 낡은 인형이네요. 옷도 그렇고. 이왕지사 고를 거면 더 예쁜 인형도 많은데.”
“…저 사람들이 파티원이에요?”
“어, 네! 여러분 제가 새 힐러님 모시고 왔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달려가는 케이아일은 나쁜 사람 같진 않았지만 친해지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다. 희연은 따끔따끔한 어깨를 무시하며 악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싸우는 것 같던데.”
케이아일의 등장으로 지금은 소강 되었지만, 분명 그의 파티원은 멱살잡이를 하며 정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랬다. 희연에게 어서 오라 손을 흔드는 케이아일의 뒤에선 적개심을 감추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언어의 몸짓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불안하다 생각하며 희연은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자자, 다들 어서 인사 나누세요!”
다행히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는 시간에는 싸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케이아일의 말에 그의 파티원들은 희연에게 고갯짓으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희연이 놀란 건 그들 중 두 명이 아는 얼굴이어서였다. 파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싸운다는 사실에 놀라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그녀가 잠시 당황하는 사이 케이아일은 그녀에게 파티를 걸고 한명 한명 사람들은 소개해 주었다.
“자, 자 여기 이분이 눈오리 돌격 님이랑 함께 우리 파티를 치료해 줄 힐러예요. 12시의 모짜렐라 님!”
방금까지 싸우던 사람 중 한 명이자 파티장 케이아일을 쪼았다는 힐러는 이전, 희연이 전직을 위해 신전에 간 날 그녀보다 앞서 전직을 하고 지팡이로 친구의 머리를 후려치며 힐을 걸었던 그 남자였다.
희연과 비슷한 밋밋한 하얀 로브에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던 12시의 모짜렐라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야기했다.
“레벨 29네요? 회복기 하나죠?”
“아, 네….”
“제가 회복기가 네 개예요. 일단 메인 탱커, 암살자, 검사, 궁수 이렇게 4명 맡을게요. 님이 나머지 3명 전담하세요.”
“…감사합니다.”
다짜고짜 통보하는 그의 모습이 한편으론 무례하게도 보일 수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배려가 담겨 있었다. 12시의 모짜렐라가 희연에게 넘긴 사람들의 직업을 생각해 보면 실질적으로 희연이 집중적으로 담당할 건 서브탱커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원수가 많을수록, 그중 실질적으로 힐러가 커버쳐야 하는 직종이 많을수록 힐러가 괴로워진다는 걸 희연은 알았기에 자진해서 탱커에 근딜 둘까지 전담하겠다는 그가 고마웠다.
힐러 간에 남들은 모를 우애를 다지고 난 이후 케이아일은 넉살 좋게 이 사람 저 사람을 희연에게 소개해 주었다. 뒤늦게 들어온 그녀를 위한 나름의 배려인 듯했다.
“자, 여기는 이번 파티의 서브 탱커를 맡은 ‘따뜻한 휘핑크림 유자차’ 님.”
“만나서 반가워요.”
서브 탱커 ‘따뜻한 휘핑크림 유자차’는 사슬 갑옷에 한 손에는 망치와 비슷한 둔기를 다른 손에는 둥그런 방패를 든 유저였다. 닉네임에 맞춘 커스터마이징인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유자차 색에 끄트머리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여긴 ‘사랑은 달콤달콤’ 님.”
“……”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이는 남자, 사랑은 달콤달콤은 허벅지에 화살통을 메고 손에는 활을 쥐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직업이 궁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꽉 찬 근육을 가진 거구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궁수보단 탱커가 더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료한’ 님.”
“안녕하세요. 료한이라고 합니다.”
휘황찬란한 머리카락 색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희연처럼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이전 헬르벨과 함께 에빌론에 갔을 때 보았던 그 남자였다.
그 당시 레이와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 게임을 시작하면 주는 초보자용 복장을 착용 중이었다는 점에서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벌써 희연과 엇비슷한 레벨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게다가….
“혹시 직업이….”
“거너예요.”
들고 있는 총은 희연의 권총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전문적인 분위기가 났다. 헬르벨의 총이 산속 사냥꾼의 것이라 한다면 료한의 것은 전쟁의 분위기가 흘렀다.
“서포터인 ‘닐라닐라 바닐라’ 님. 직업이 음유 시인이라 버프 위주예요.”
“바닐라라고 불러주세요!”
바닐라 색의 폭신해 보이는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가 반갑다며 들고 있던 플루트를 흔들었다.
“검사인 ‘돈 땃쥐 미’ 님, 마지막으로 암살자인….”
“삐약…, 친목질도 아니고 자기소개에만 시간을 얼마나 쓰는 거야. 진짜 삐롱삐롱 삐로로롱.”
“…‘졸렬한 나뭇잎’ 님입니다.”
12시의 모짜렐라와 멱살잡이를 하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나름 훈훈했던 분위기는 졸렬한 나뭇잎의 삐약 소리에 미묘하게 바뀌었다.
욕을 써서 화가 나야 하는데 귀여운 병아리 소리 탓에 화내기도 뭐 했기 때문이었다.
비단 희연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 듯 다른 유저들도 이걸 화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듯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들 중 성인 모드로 전환한 사람은 없었기에 모두가 졸렬한 나뭇잎의 욕설을 새 소리로 알아들은 것이다.
처음 게임을 할 때부터 성인 모드로 바꿨던 졸렬한 나뭇잎은 자신이 욕이 새소리로 들린다는 점을 몰랐고, 그 때문에 지금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겁먹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우리 파티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이름 값한다 하는 길드 소속 애들만 데려오셨네?”
“예? 그게 무슨….”
“예? 는 뭔 예야. 아주 파티 창이 화려한데.”
“파티 창?”
희연은 파티 창을 불러와 목록을 확인했다.
[파티 : 케이아일과 친구들
- (Leader) <케이아일 (34)>
- <돈 땃쥐 미 (-)>
- <닐라닐라 바닐라 (-)>
- <졸렬한 나뭇잎 (33)>
- <따뜻한 휘핑크림 유자차 - 마이 페이버릿 쥬씨 (32)>
- <12시의 모짜렐라 – 양떼목장 (32)>
- <사랑은 달콤달콤 - ⋆길드 순정 만화 러ver⋆ (30)>
- <료한 – 윈 (30)>
- <눈오리의 돌격 – 뉴비세스 메이커 (29)>]
파티 목록을 본 희연의 감상은 간결했다. 료한을 제외한 모두가 닉네임이 자기주장이 강하구나. 그리고 이름에 별도 넣을 수 있구나.
길드 이름들이 모두 익숙하다는 걸 깨달은 건 졸렬한 나뭇잎이 료한의 어깨를 툭툭 밀었을 때였다.
“윈이 저렙도 길드원으로 받아주는지 난 몰랐네. 뭐 누구 동생, 누구 친구 그런 식으로 들어갔나? 나도 비법 좀 알려주쇼,”
“비법 같은 거 없는데요.”
“비법 같은 거 없는뒈여.”
료한의 말을 따라 하는 졸렬한 나뭇잎의 모습에 12시의 모짜렐라가 중얼거렸다.
“졸렬하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뭐, 어쩌라고.”
타겟을 바꾼 졸렬한 나뭇잎은 12시의 모짜렐라의 멱살을 붙잡았다. 케이아일이 힐러 찾아 삼만 리를 하는 동안 같은 이유로 시비가 걸렸기에 12시의 모짜렐라는 참지 않았고, 졸렬한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지기 싫어 만용을 부렸다.
파티가 파탄 날 위기에 처한 케이아일은 희게 질린 낯으로 그들을 말렸다.
“아니,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럴까. 우리 이러지 맙시다. 이제 던전만 들어가면 되는데 왜 싸우고들 그럽니까.”
“이 새끼 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힐러라고 거들먹거리고 너 때문에 시간 다 뺏기고!”
“…….”
“미친 너희 길드 믿고 설치지 마! 새끼야!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새아악-!”
빠악-!
졸렬한 나뭇잎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12시의 모짜렐라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제법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머리를 얻어맞은 졸렬한 나뭇잎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 그에게 12시의 모짜렐라는 스산하게 말했다.
“야. 똑바로 들어. 지팡이는 둔기류야.”
“아악! 악!”
“싸우지 말아요, 제발!”
희연은 순식간에 엉망이 된 상황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파티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개설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 와중에도 상황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새 꺼낸 스낵류를 와작와작 씹으며 감탄을 내뱉는 따듯한 휘핑크림 유자차였다.
“와… 저 힐러 되게 잘 싸운다.”
“…….”
긍정적인 건지 해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랑은 달콤달콤은 이런 상황에 끼어들기 싫다는 듯 자신의 무기 점검에 집중했고 바닐라와 돈 땃쥐 미는 아는 사이였는지 둘이 키득거리며 관전했다.
“내가! 너! 같은! 새끼한테! 조롱! 당하려고! 힐러한! 줄! 알아!”
12시의 모짜렐라는 지치지도 않는지 한 음절, 음절마다 이제는 지팡이가 아닌 둔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물건으로 계속해 졸렬한 나뭇잎을 팼다.
“<회개>, <회개>, <회개>!”
“그만! 제발 그만 하세요!”
“네 실력이 이따위니 길드에 못 들어가지!”
케이아일은 울었고 나뭇잎도 울었다. 휘핑크림 유자차는 한동안 개판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구경하다 파티의 또 다른 힐러인 희연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지금 파티는 깨버리고 우리끼리 던전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다행히 싸움은 금세 끝났기에 기다린 보람이 나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