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오리 님? 돌격 님?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호칭을 정리하고 들어온 게 아니라…. 어쨌든 힐러님도 대단했어요. 탱커가 못 지켜줘서 피가 닳는 상황에 우리 모두 커버한 거잖아요.”
“…거의 다 12시 님이 한걸요.”
“겸손하시네요. 유자차 님이 막아줘서도 있지만, 힐러님들이 잘 커버해 줬으니 저도 그 많은 몬스터를 다 없앨 수 있었던걸요. 달콤 님이 파티장의 말을 잘못 들어서 앞으로 나왔을 땐 어찌나 철렁했는지 몰라요.”
“…….”
“아무튼 힐러들까지 몬스터 피해 앞으로 몰리고, 이번 기회에 탱커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니까요. 하하….”
“그렇구나….”
기 빨려….
희연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한 것을 보면서도 돈 땃쥐 미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어 총을 점검하던 료한에게도 손을 뻗었다.
“료한 님도 많이 놀라셨죠? 원딜인데 바로 코앞에 몬스터가 몰려….”
“괜찮았어요.”
“상황이 갑작스러워서 결국 아무것도 못 하셨잖아요. 원래라면 훨씬 잘하셨을 것 같은데.”
고요한 낯을 하던 료한은 총을 늘어트리며 담담히 말했다.
“남 탓을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으니까요. 상황을 타계할 방법을 찾아야지 과거의 잔재만 쥐고 운다고 누가 알아줄까요.”
“네…?”
“세상은 원래 부조리해요. 남들이 내게 기회를 줄 거라고 믿어서도 안 되고요. 삶은 남이 주는 피해 속에서 살아남는 투쟁이니까요.”
“…….”
내내 싱글벙글 웃던 돈 땃쥐 미의 얼굴에 금이 갔다. 던전 파티 한 번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삶과 투쟁에 관하여 말하는 사람을 이길 자신이 없는 듯했다.
료한은 필요한 말이 아니면 사랑은 달콤달콤만큼이나 말수가 없었기에 아무도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 땃쥐 미와의 짧은 대화를 통해 그의 성격을 대략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외칠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료한 님이 괜찮다면야 네, 괜찮은 거겠죠.”
돈 땃쥐 미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료한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도 사랑은 달콤달콤을 붙잡고 있던 케이아일에게로 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하였다.
“파티장님. 이미 지난 일이니까 너무 연연하지 말고 우리 먼저 파티를 점검하면 어떨까요?”
“네? 아, 점검해야죠. 그런데 일단 뭐가 잘못된 건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에이, 우리 너무 빡빡하게 가지 말아요. 다들 이름난 길드 출신들인걸요. 아마 우리보다 정석적인 파티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금방의 일은 아직 서로가 서로를 몰라 일어난 해프닝 같은 거고요.”
“그래도….”
“파티장의 역할이 바로 이 해프닝을 해결하고 파티원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주는 거죠. 일단 그 시작으로 우리 호칭에 대해 먼저 정리할까요?”
자연스럽게 그 파티장의 역할을 뺏어놓고 돈 땃쥐 미는 케이아일의 어깨를 두들기며 칭찬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한데 모은 우리 파티장님의 안목이 아깝지 않도록 우리 잘 해내 봐요.”
“아, 네…. 잘 해내야죠….”
분위기가 묘했지만 진행은 빨랐다. 그들은 일단 돌격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호칭을 정리했다.
희연은 헷갈린다는 이유로 다소 익숙한 오리 호칭이 선택되었다. 그녀 외에도 모두가 제멋대로 부르던 호칭이 드디어 통일되었다.
호칭 정리를 할 때부터 다음 방으로 넘어가기 전 짧은 브리핑을 할 때까지도 케이아일은 병풍이었다. 어느새 땃쥐 미가 대신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희연은 그 일련의 과정을 보며 결심했다. 이번 판 끝나면 무조건 파티 탈퇴하고 도망가야지. 차라리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남은 레벨을 사냥으로 채우는 게 훨씬 나았다.
“자, 여러분. 두 번째 방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비행형입니다. 그래서 원딜인 두 분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죠. 물론 어둠 박쥐가 나온다는 점에서 암습이 특기인 암살자의 역할도 빠질 수 없겠죠?”
적당한 칭찬을 통해 사기를 높이는 것 하며 매끄럽게 파티를 이끄는 모습까지, 땃쥐 미는 자신이 파티장 경험이 많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노련했다. 땃쥐 미의 노련함이란 상황을 주도하는 점에 있었는데, 그는 기어이 케이아일을 몰아내고 휘핑크림 유자차를 메인 탱커로 내세웠다.
그 점에 대해 케이아일이 좋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명분 있는 내쫓음에 싫다 우길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파티의 조화를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 봐달라고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서브 탱커와의 조율 실패로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인 케이아일은 특히나 말이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갈 볼까요? 다들 지시를 잘 따라주세요?”
휴식을 끝내고 들어간 두 번째 방에서 나온 몬스터는 나뭇잎 부엉이와 어둠 박쥐였다.
나뭇잎 부엉이는 이름대로 나뭇잎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부엉이였는데, 몸체가 흩어지는 스킬이 있어 공격 타이밍을 놓치면 공격이 번번이 무효화되곤 했다.
어둠 박쥐의 경우도 나뭇잎 부엉이와 비슷했다. 동굴 안은 횃불에도 불구하고 빛이 닿지 않는 곳이 다수 있었다. 어둠 박쥐는 그런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기습을 강행하곤 했다.
다만 환한 빛은 피해 도망 다녔기에 레벨이 낮은 그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모짜렐라 님!”
“<치유의 빛>.”
모짜렐라의 스킬과 함께 벽을 박차고 뛰어오른 료한이 희게 빛나기 시작했다. 단일 회복 스킬 <치유의 빛>의 부가효과였다. 땃쥐 미는 그 효과를 어둠 박쥐의 견제용으로 사용했다.
고작해야 재사용 대기시간이 10초밖에 안 걸리는 모짜렐라의 스킬은 어둠 박쥐를 상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탄환 변경>.”
료한의 총에 맞은 어둠 박쥐와 나뭇잎 부엉이가 새빨간 불길에 휩싸였다. 불에 타 비틀거리는 몬스터들을 마무리 짓는 건 희연과 사랑은 달콤의 역할이었다.
동굴의 방 안에는 한동안 총소리와 활을 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희연은 마법 탄환으로 변경한 총을 신나게 쏘며 그 사정을 모를 이들이 보기엔 훌륭하게만 느껴지는 사격 솜씨는 뽐냈다,
얼마나 그럴듯해 보였는지 희연과 달리 실제 본인 능력으로 총을 사용하던 료한이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사격을… 잘 하시네요.”
“그러게. 거너 직업보다 더 조준율이 좋은 것 같은데.”
졸렬한 나뭇잎의 졸렬한 한 마디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료한은 희연에게 집중했다.
“실제로 사격 배운 적이 있나요? 직업이 신관이면 보정 패시브 스킬도 없을 텐데. 혹시 그 총에 따로 보정 스킬이 인챈트되어 있나요?”
“인챈트가 뭐예요?”
“혹시 총은 뭘 쓰세요? 이런 질문 실례일까요?”
“…….”
희연의 무기 이름은 <초보자를 위한 기본 권총> 이었다. 출처가 신전이라 그런지 새하얗게 덧칠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그냥… 총인데….”
“제가 너무 물었나 보네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물었어야 했는데….”
자신을 탓하는 료한의 모습에 희연은 오해라며 말하고 싶었지만, 변명을 하다 보면 결국 스킬에 대해서까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니라는 말만 되뇌며 대화를 얼버무렸다.
“다들 여기 좀 봐주실래요?”
때마침 땃쥐 미가 모두를 불러 시선을 끌었기에 희연은 료한과의 어색한 대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 땃쥐 미의 손에는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편지입니다. 혹시 읽어 보고 싶은 사람 있을까 해서요,”
땃쥐 미가 보여준 건 이번 방에서 나온 전리품이었다. 낡고 오래된 편지는 손때가 탄 듯 이곳저곳이 유난히 헤져 있었다.
“아까 그 칼날 주인의 편지인가?”
“혹시 모르죠. 이 동굴 안에 숨겨진 퀘스트의 흔적이 담긴 걸지도.”
“숨겨진 퀘스트는 뭔 퀘스트야. 그냥 설정집 같은 거겠지. 쓸데없이 의미 부여하는 게 아주….”
“넌 닥쳐.”
대부분이 편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에 땃쥐 미는 편지를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차분히 읽어내려가는 편지는 서글픈 내용이었다.
“친애하는 아나토에게.”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 비가 오고 있답니다. 땅을 적시는 모든 붉은 것을 저 빗물이 쓸어가기를 바라요.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 이렇게나마 전하지 못할 편지를 써 봅니다.
친애하는 아나토. 시간이 흐릅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함께 잠들지 못하는 밤입니다. 빈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채워집니다.
나는 오늘도 살아남았습니다. 차마 웃지는 못합니다. 친애하는 아나토. 나는 두려움에 젖은 밤을 보냅니다.
친구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네요. 밀빛 머리가 퍽 예쁜 친구입니다. 당신이 생각나요.
깊은, 아주 깊은 늪에 빠지는 기분입니다.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내 손에 또 사람이 죽었어요. 그의 목에 걸린 로켓에 그림이 있었습니다. 어리고 예쁜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나토. 나는 내가 싫어요.
전하지 못할 편지를 다시 씁니다. 오늘의 나는 어느 동굴에서 글을 끄적입니다. 밀빛 머리 친구가 내 옆에 있습니다. 살고 싶은 우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쁜 꽃을 찾았어요. 당신께 주고 싶어요. 아나토.
아나토. 나는 전쟁이 싫어요.
아나토. 당신의 이름은 선명한데 나는 아니네요.
아나토. 내 이름을 잊지 말아줘요.
“아나토. 나를 잊어요.”
“…….”
“편지는 여기서 끝이네요.”
방 안에는 잠시간의 고요가 머물렀다. 침체된 분위기를 풀려는 듯 케이아일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자 다들 너무 침울해하지 마시고! 지금까지 우리 아주 잘했으니까 이 기세로 다른 방도 모두 잘 해냅시다! 너무 게임 스토리에 과몰입들 하지 말고요.”
케이아일은 이참에 다시 자신이 파티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듯 그들을 이끌고 서둘러 다음 방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런 그를 땃쥐 미가 제지했다.
“그러지 말고 잠시 쉬었다가 가도록 하죠. 익숙하지 않은 비행형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모두 지쳤을 텐데…. 너무 서두르는 것도 좋지 않을 거라 생각돼요.”
“아… 하지만 이제 겨우 두 번째 방인데 벌써 휴식하기는 좀 그렇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우리는 첫 번째 방에서도 쉬다가 넘어온 건데….”
말을 흐리는 케이아일에게 땃쥐 미는 제법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뇨. 역시 쉬는 게 좋을 거라 생각돼요. 첫 번째 방에서의 휴식은 휴식이라 볼 수 없었고, 우리는 이제야 막 제대로 손발을 맞춰봤으니까요. 아마 다들 말은 안 해도 남에게 맞춰준다는 게 힘들었을 거예요.”
땃쥐 미는 동의를 구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아일에게 유감이 있는 유자차가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뒤를 이어 모짜렐라 역시 휴식을 취하는 것에 찬성표를 던졌다.
케이아일의 입에서는 불만 서린 말이 삐죽 튀어나왔다.
“모짜렐라 님은 힐러라 뒤에만 계셨는데….”
말의 요지는 뒤에서 편히 힐만 주던 너는 뭐가 힘들다고 쉬자는 의견에 찬성하냐는 뜻이었다. 희연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전부터 느낀 것이, 케이아일은 힐러라는 직업을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탱커고, 파티장 같은 남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싶다면 타 직업의 고행 정도는 이해했어야 했다. 특히 힐러는.
첫 번째 방에서부터 케이아일에게 불만을 갖기 시작한 모짜렐라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싸늘했다.
“이 인원수를 죄다 커버 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난 앞만 보고 달려드는 누구랑 달리 파티 전체의 흐름을 봐야 해서 피곤해 죽겠거든요?”
“아니, 모짜렐라 님 지금 싸우자는 게 아니잖아요.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싸우자고 시비 거는 게 누군데 지금….”
당장에 모짜렐라가 지팡이를 들며 케이아일에게 회개할 것을 강요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땃쥐 미가 나선 것은 기어이 모짜렐라가 다 때려치우라는 말을 할 때였다. 이미 분위기는 과열된 뒤였다.
“불만이면 다 때려치워! 시작부터 망한 이 파티가 뭐 대단하다고 내가 이딴 취급 받으면서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잘났으면 너 혼자 탱딜힐 다 하세요!”
“흥분하지 마시고….”
“두 분 다 너무 흥분한 것 같네요.”
모짜렐라와 케이아일의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땃쥐 미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희연은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같은 마음인지 다른 사람들 역시 언성을 높이는 세 사람을 무시하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희연은 떨어진 공복도나 채우자 하는 심정으로 인벤토리를 뒤졌다. 가장 위에는 이곳에 오기 전 킹스메이커가 쥐여준 물약 묶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확인을 안 했네….”
빨간 물약 파란 물약의 용도 정도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지만 자세한 효과는 몰랐다. 현재 레벨에 맞지 않는 귀한 물건이라 한다면 아끼는 게 좋았다.
물약의 내용을 확인한 희연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좋기는 한데 굳이 아끼기에는 또 애매한 그런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킹스메이커가 희연이 물약을 아끼지 않도록 일부러 이런 걸 준 듯했다.
대충 확인을 끝낸 그녀는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물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파티장님?”
“물론이죠! 땃쥐 님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저를 이렇게 신임해 주는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들려오는 대화를 통해 희연은 땃쥐 미가 일시적으로 케이아일에게 파티장의 권한을 돌려줬음을 눈치챘다. 준다고 냉큼 받는 케이아일의 모습에 그녀는 내심 혀를 찼다. 썩 좋은 선택이 아니라 생각해서였다.
모짜렐라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삐딱한 자세와 눈빛이 향하는 곳은 케이아일이 아닌 땃쥐 미였다.
땃쥐 미가 석연치 않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