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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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방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늑대와 유사한 모습을 가진 <회색 갈기 늑대>, 그리고 나뭇가지가 엉켜 만들어진 조형물 같은 삵 형태의 몬스터였다.
두 번째 방이 원딜의 노련함을 요구했다면 세 번째 방은 근딜의 필요성을 요구했다. 골고루 포지션별로 파티원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조금 곤란했을 구성이었다.
제대로 손을 맞춰 본 경험이 유효했던 것인지 케이아일의 주도하에도 파티는 제대로 굴러갔다. 일단 힐러가 다시 탱커가 되고 원딜이 근딜이 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
땃쥐 미가 감투를 썼을 때보단 삐걱거리는 게 사실이었지만 모짜렐라의 피를 토하는 능력 덕에 그 티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맨 뒤편에서 모짜렐라와 함께 힐을 넣던 희연은 볼 수밖에 없었다. 모짜렐라가 내내 땃쥐 미를 수상쩍다는 시선으로 보는 것을 말이다.
여전히 희연은 땃쥐 미에 대해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녀는 능력이 없으면서 만용에 가깝게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도, 묘하게 상황을 주도하고 손바닥 위에서 굴리려고 하는 사람도 싫었다. 그래서 끼어들지 않는 거였다.
반면에 모짜렐라는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다. 어떤 정의롭거나 선한 마음이 아닌 자기를 두고 일행 간 정치질을 하려 했다는 점이 불만이어서였다.
앞뒤로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케이아일과 땃쥐 미, 두 힐러를 제외한 사람들은 착실하게 던전 공략에만 집중했다.
그 덕택인지 그들은 어렵지 않게 세 번째 방을 통과하며 전리품을 얻었다. 세 번째 전리품은 나무패였다.
평범한 나무패가 아닌 일종에 신분패였는지 패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만 이름 부분은 불에 그슬린 자국으로 인해 알아볼 수 없었다.
“암베르니아?”
유일하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건 지역명으로 보이는 이름 정도였다. 희연은 처음 들어보는 지역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암베르니아?”
바로 그때, 바닐라가 그 지역명을 안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땃쥐 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무패를 자세히 보게 달라는 뜻이었다.
땃쥐 미는 순순히 그것을 넘겼고 그 순간 바닐라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 암베르니아는 말이죠….”
[<닐라닐라 바닐라>가 파티에서 탈퇴했습니다.]
“…?”
“응?”
“어?”
여기저기서 온갖 의문이 담긴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무패를 쥐고 있던 바닐라가 파티 탈퇴와 함께 사라졌다. 갑작스럽다는 말 외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닐라 님이 갑자기 왜 나가신 거지…? 이제 곧 던전 공략도 끝나는데.”
케이아일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모두가 바닐라의 파티 탈퇴의 의미를 알지 못해 멀뚱멀뚱 있던 중 모짜렐라가 갑자기 삐약 소리를 냈다.
“삐약….”
“?”
“나무패! 세 번째 전리품, 그거 퀘스트 아이템 들고 나갔잖아!”
“아…!”
뒤늦은 깨달음에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술렁거리는 분위기에 케이아일이 손을 들어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잠깐, 다들 진정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다들 인벤토리 확인해 봐요. 파티 퀘스트였고 퀘스트 아이템이니까 우리 중에 받은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대놓고 엿 먹이기 위한 행동을 한 바닐라가 이 정도 생각도 안 하고 움직였을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각자의 인벤토리를 확인한 그들에게 남은 건 확인사살뿐이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방안을 감돌았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케이알이었다.
“일단, 제 인벤토리에는 없습니다….”
“저도.”
“없어요.”
“저도인데….”
“후우….”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런다고 해서 바닐라가 던전 진행에 필요한 퀘스트 아이템을 들고 도망가 버렸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머리를 쓸던 희연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땃쥐 미에게 물었다.
“바닐라 님이랑 아는 사이 아니었나요?”
“저요?”
“네. 친해 보이던데….”
땃쥐 미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전혀요. 우린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걸요. 저도 지금 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럽네요. 가끔 고의적으로 트롤짓하는 유저가 있다곤 했지만 설마 우리 파티에서, 그것도 이런 식으로 엿 먹이고 갈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
“파티장님. 탈퇴 금지 설정 안 하셨던 거예요?”
“네? 탈퇴 금지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듯 케이아일이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그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파티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엉망이 되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치 자신에게 잘잘못을 따지듯 말을 거는 땃쥐 미의 모습에 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파티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파티를 탈퇴할 수 있는 설정이 있다 들었는데….”
“아, 그게 제가 파티장을 해본 게….”
“혹시 이번이 처음이었나요?”
“그, 아예 처음은 아닌데….”
이제는 케이아일이 불쌍하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희연은 질린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땃쥐 미가 뭘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고의적으로 케이아일을 고립시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탈퇴 금지 설정부터 하도록 해요. 그리고 여러분께 제한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요. 비록 우리가 퀘스트 아이템이 하나 없기는 하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요? 간다고 해봤자 어차피 마지막 방에서 전리품 부족으로 진행이 안 될 텐데.”
모짜렐라의 말에 땃쥐 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모짜렐라 님 말씀대로 우리는 보스 처치를 못 할 거예요. 이렇게 된 거 빨리 파티를 깨고 나가 다시 처음부터 공략하는 게 나을 수도 있죠. 하지만 다음 방은 중간 보스라는 점이 중요해요. 보스는 패턴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 패턴을 모르고요.”
“그렇죠.”
“그러니 연습 게임이다, 생각하고 일단 할 수 있는 곳까지 진행하면 좋지 않을까요? 어찌 됐든 보스 방까지는 들어갈 수 있으니 어디에 서야 유리할지 같은 것도 미리 볼 수 있고요.”
땃쥐 미의 말이 영 설득력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또한 내심 눈치챈 것이다. 지금 당장 파티를 깨고 나가봤자 다시 이 구성으로 파티를 만들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걸 말이다.
그럴 바에야 땃쥐 미의 말대로 경험이라도 한 번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희연은 이 파티를 나간 뒤 다시 합류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케이아일이 훌륭한 리더는 아니었으나 안목이 좋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짜증을 내면서도 휘핑크림 유자차나 모짜렐라가 진즉 파티에서 나가지 않은 이유였다.
이미 케이아일이 파티 탈퇴 금지를 설정한 이상 새로 파티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이들에겐 좋게 좋게 가기 위해선 땃쥐 미의 말을 따르는 게 나았다.
그건 파티장인 케이아일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 그러면 바로 다음 방으로 이동할까요? 다음 방은 발밑을 조심해야 해요. 가는 길도 그렇고 그대로 죽을 수도 있거든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케이아일이 땃쥐 미의 뒤에 섰다. 이전처럼 선두에 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파티에서 가장 멘탈이 튼튼해야 하는 것이 탱커인데 케이아일은 바닐라의 탈퇴로 인해 이미 심신이 지친 듯했다.
땃쥐 미는 미소 지으며 케이아일의 말을 지지했다.
“파티장님 말이 맞아요. 다음 방 중간 보스는 불곰이고 공격을 피하다 발밑을 제대로 못 보면 그대로 그 밑으로 떨어질지도 모르거든요. 물론 가는 길도 위험하고요. 다들 조심하셔야 해요?”
두 사람이 말한 위험한 길이란 게 무엇인지 희연을 비롯한 던전 초행자들은 알지 못했다.
앞서 걷는 이들을 뒤쫓을수록 동굴 안에서부터 웅웅 소리를 내며 불어온 바람의 세기가 강해지고 기온이 서늘해졌다.
그들이 지금껏 지나온 동굴의 형태는 돔 형태에 가까웠다. 둘러싸여 있단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방을 비롯한 방과 방을 잇는 통로 역시 모두 층고가 높고 넓었다.
그러나 세 번째 방을 지나 네 번째 방으로 가는 길목부터 형태가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히 높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높은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이 이 동굴 안이 얼마나 오래된 곳인지를 보여주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온 것인지, 길을 안내하는 횃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걸어야 하는 길은 길이라고 하기엔 얇고 아무 안전장치 없는 외길이었다. 절벽과 절벽을 잇는, 꼭 누구 하나가 건너면 뒤에서부터 무너질 것 같은 그런 외길 말이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 흐릿한 횃불의 빛 하나 믿고 저 길을 건너야 한다니. 그 사실에 균형 감각에 자신 없는 이들의 낯은 좋지 못했다.
희연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밑에서부터 들리는 바람 소리가 저 밑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조차 없게 했다. 다시 올라올 방법도 없으니 떨어지는 순간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누구 하나 먼저 섣불리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땃쥐 미가 이야기했다.
“괜찮다면 원딜인 두 분과 나뭇잎 님이 앞서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민첩 스텟이 높을수록 균형 감각도 좋다고 하니까요.”
“네. 그러죠.”
“…….”
“아, 진짜 귀찮게….”
료한과 사랑은 달콤, 졸렬한 나뭇잎이 먼저 앞서고 그 뒤를 휘핑크림 유자차와 케이아일이 뒤따랐다. 민첩 다음으로 균형 감각에 도움되는 스텟이 힘이었기 때문이다.
땃쥐 미가 남은 희연과 모짜렐라에게 말했다.
“두 분은 천천히 오시는 게 좋겠네요. 아무래도 힐러라 앞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할 때 외길을 건너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게 더 힘들 테니까요.”
“네….”
“알아서 할게요.”
불퉁한 두 사람의 태도에도 땃쥐 미는 웃으며 외길을 탔다. 그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모짜렐라가 희연에게 말했다.
“가죠.”
“천천히 오라고….”
“네. 그래서 지금 가는 건데요. 그리고 난 원래 수상한 놈은 옆에서 지켜봐야 직성이 풀려서요.”
더 할 말이 없어진 희연은 외길 위로 발을 올렸다. 조금 불안한 걸음이 얇은 길 위를 걸었다.
앞서 나간 세 사람은 차림새가 가벼웠고 힐러인 희연과 모짜렐라 역시 그리 두껍지 않은 로브 차림이었다. 그들의 신발 역시도 금속과는 거리가 먼 가죽신이었다.
반면에 두 탱커와 땃쥐 미의 경우 옷차림새가 무거운 편에 속했다. 특히 사슬 갑옷을 입은 휘핑크림 유자차와 금속 장식이 달린 옷을 입은 땃쥐 미의 경우 움직일 때마다 찰캉찰캉 하는 금속 소리를 냈다.
잘 정돈된 길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여러 파티가 지나가면서 나름 다져진 외길 위에는 흙과 먼지, 작은 돌멩이 같은 것들이 없었다. 가죽신을 신은 이들의 기척은 자연스럽게 옅어졌고 고요한 동굴 안에 울리는 발소리의 주인은 세 명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랬기에 땃쥐 미는 자신의 뒤를 쫓는 힐러 둘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땃쥐 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케이아일의 등을 밀었다.
툭.
“어?”
급작스러운 기습에 케이아일은 반항하거나 자신을 미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단말마를 남기며 외길 밑으로 떨어졌다.
가죽 갑옷의 무게 탓에 그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랐다.
[파티장 <케이아일>이 별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다음 파티장으로 임시 지정된 사람이 없습니다.]
[파티장 자리는 <케이아일> 다음으로 가장 레벨이 높은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의 파티장은 <돈 땃쥐 미>입니다.]
케이아일 없는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의 파티장 돈 땃쥐 미.
그가 저지른 일을 고스란히 목격한 희연과 모짤렐라는 놀라 굳어버렸다. 케이아일이 떨어진 자리를 보며 비죽 웃는 땃쥐 미의 모습에 서늘함을 느낀 희연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총을 들었다.
[스킬 <산골 꼬마 요정의 친구>를 사용합니다.
패시브 효과 : 산속에서 이동속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액티브 효과 : 산속에서 기척을 숨길 수 있습니다. (최대 인원 2/2)
‘친구에게만 알려주는 우리가 살아남은 방식!’]
희연은 모짜렐라를 붙잡고 최대한 빨리 왔던 길을 되돌아 가 땃쥐 미와의 거리를 벌렸다. 안 그래도 옅었던 기척이 스킬의 효과로 발소리 하나 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사건 현장을 목격할 수 없다 판단되는 거리에 도착한 뒤에야 스킬을 해제했다.
“방금….”
“쉿.”
모짜렐라의 말을 막으며 희연은 앞을 보았다. 뒤늦게 뒤돈 땃쥐 미가 희연과 모짜렐라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그가 케이아일을 미는 것을 보았나, 아닌가 재보는 눈치였다.
다행히도 딱딱하게 굳은 두 사람의 모습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케이아일의 사망 소식에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마침내 땃쥐 미는 자신의 범죄가 완벽 범죄라는 판단을 내린 것인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런! 케이아일 님이 발을 헛디뎌서 그만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네요. 앞에 계신 분들 속도 좀 높여주실 수 있나요? 일단 우리도 위험할 수 있으니 이 길을 마저 건너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힐러님들도 조심해서 오셔야 해요!”
땃쥐 미는 두 사람을 다시 확인하곤 앞서 걸어갔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가 멀어진 뒤에야 모짜렐라는 입을 열었다.
“미친 새끼 아니야…?”
“…….”
“님도 봤죠? 지금 저 사람이 파티장 밀어버리는 거.”
“네…. 저도 봤어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확실한 건 땃쥐 미는 케이아일을 밀어내고 파티장을 대신한다는 그런 사소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희연과 모짜렐라는 일단 그 뒤를 쫓아 걸었다. 심사가 뒤틀린 땃쥐 미가 언제 달려와 그들도 밀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