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두 힐러를 제외한 사람들은 네 번째 방 앞에 서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땃쥐 미는 희연과 모짜렐라가 도착하자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길이 좁고, 케이아일 님은 갑옷에 방패까지 들어 몸이 무겁다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네요. 제가 잘 잡았어야 했는데….”
“…….”
“이제 우린 어떻게 할까요? 일단 제가 파티장을 맡긴 했지만 우리 파티의 리더는 케이아일 님이었는데.”
땃쥐 미는 대답을 요구하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케이아일이 사라진 이상 홀로 탱커의 역할을 하는 휘핑크림 유자차의 주장이 가장 중요했다. 희연에겐 불행히도 그녀는 이 구성원대로 던전을 진행하는 것에 유감이 없었다.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힐러가 둘이나 있으니 솔탱도 해볼만할 것 같아요. 일단 전 괜찮아요. 여기까지 온 게 아쉽기도 하고. 어차피 우린 경험 쌓으러 가는 거니까 실패해도 괜찮고요.”
료한이나 사랑은 달콤의 경우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반응이었다. 희연은 졸렬한 나뭇잎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가 이번에도 밉살맞게 말해주기를 말이다. 그러나.
“들어갈 거면 빨리 들어가지? 어차피 망한 파티인데. 뭐 준비할 게 더 있나?”
그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희연과 모짜렐라는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나뭇잎 님은 참 호쾌하네요. 그럼… 두 분은요? 괜찮은가요?”
땃쥐 미의 시선에 잡힌 희연의 어깨가 굳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땃쥐 미의 탁한 금색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의 것과 비슷했다.
어, 어떻게 하지….
희연이 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모짜렐라가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좋아요.”
“!”
“들어갈 거면 빨리 들어가죠.”
“네, 좋습니다. 모두 동의했으니 바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요?”
멀어지는 땃쥐 미의 모습을 보며 희연은 모짜렐라의 로브 자락을 잡았다. 왜 그런 말을 했냐 묻는 그녀의 표정에 모짜렐라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우리 어차피 파티 탈퇴 못 하는 상황이에요. 차라리 빨리 파티 망하고 나가서 도망가는 게 낫다고요.”
“…….”
“여기서 나가자마자 그냥 튀어요. 저 새끼 이상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미친놈인 것 같으니까.”
불안하긴 했지만 현재로선 모짜렐라가 말한 것이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땃쥐 미와 아는 사이 같았던 바닐라의 갑작스러운 파티 탈퇴마저 계획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바닐라 님이요. 아무래도 땃쥐 님이랑 아는 사이였던 거 맞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일부러 케이아일이 파티 탈퇴 금지 설정하게 하려고 계획했을 확률이 높죠. 아무래도. 원래 파티장이 죽고 그다음으로 파티장 물려받는 사람은 설정 조작 못 하게 되어 있으니까.”
선택권이 없었다. 그가 파티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이상 따라 움직여야 했다. 결국은 땃쥐 미의 목적을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다.
희연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총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보스 방은 못 들어가니 이번이 마지막 관문이었다.
네 번째 방. 그곳에 있는 몬스터는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곰으로 <스톤 베어>라는 정직한 이름의 주인이었다. 던전의 중간 보스 역할을 하며 그 위치에 걸맞게 공격 패턴 역시 가지고 있었다.
스톤 베어는 주로 앞발을 휘둘러 공격하는데, 그 위력이 제법 강하다 보니 방 이곳저곳은 금이 가거나 틈새가 벌어져 있곤 했다. 스톤 베어는 방의 중앙에 웅크리고 누워 자신의 잠을 깨울 이방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곰의 뒤에는 꾹 닫혀 있는 거대한 돌문이 보였다. 원래라면 네 개의 전리품을 바쳐 열었어야 하는 보스 방의 문이었다.
“스톤 베어면 물리 공격이 더 효과 있겠죠? 땃쥐 님 역할이 중요하겠네요.”
“네, 그렇군요. 료한 님, 달콤 님. 엄호 잘 부탁드립니다. 나뭇잎 님. 조금 더 앞으로 가주시겠어요? 그리고 버프 부탁드립니다.”
땃쥐 미와 눈이 마주친 희연이 일행에게 버프를 걸어주었다. 모두의 머리 위로 빛의 조각이 쏟아져 내렸다. 그 빛이 자극이 되었는지 겨울잠에 빠진 듯 웅크려 있던 스톤 베어가 눈을 뜨고 그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우워워워웡-!
동굴 안에 웅웅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그들은 몸을 움츠렸다.
[스킬 <곰의 포효>에 당했습니다. 상태 이상 ‘위압’, ‘공포’에 빠집니다.]
[‘위압’의 효과로 이동 속도가 저하됩니다.]
[‘공포’의 효과로 일부 능력치가 저하됩니다.]
거대한 손을 내리치는 스톤 베어의 공격을 휘핑크림 유자차가 막아냈다. 무게를 싣는 스톤 베어 탓에 그녀의 HP는 조금씩 닳기 시작했다.
“<치유의 빛>.”
모짜렐라가 곧바로 휘핑크림 유자차를 회복시켰다. 그녀가 스톤 베어를 붙잡는 동안 졸렬한 나뭇잎은 은신 스킬을 사용해 스톤 베어의 뒤로 이동했다.
휘핑크림 유자차가 스톤 베어에 움직임을 붙잡았고, 땃쥐 미가 시선을 끌며 그녀의 뒤에서 공격한다. 암살자인 졸렬한 나뭇잎은 시야가 잡히지 않는 곳에서 공격하고 원딜인 료한과 사랑은 달콤이 적절한 거리를 재며 공격한다.
분명 정석적인 파티의 사냥 광경이었지만 희연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탱커의 도움 없이 몬스터와 가장 근접하게 있는 졸렬한 나뭇잎에게 집중해야 할 그녀의 시선은 연신 땃쥐 미 쪽으로 향하곤 했다.
사실, 그건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티의 탱커를 전담한 이상 희연보다 더한 집중력이 요구됨에도 그 역시 땃쥐 미에게서 눈을 못 뗐다.
그런 두 사람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땃쥐 미의 검에 이전에는 못 보던 푸른 빛이 서리는 순간 희연과 모짜렐라는 동시에 외쳤다.
“<등불의 빛>!”
“<치유의 빛>!”
먼저 스킬이 발동한 건 땃쥐 미였다. 그가 휘두른 검은 휘핑크림 유자차를 베고, 스톤 베어를 베어 마침내 졸렬한 나뭇잎을 베어냈다.
“악!”
희연은 지팡이보다는 총을 사용할 때 스킬 시전이 더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에 베여 쭉 닳던 휘핑크림 유자차가 간신히 산 것은 희연의 스킬이 발동해서였고, 간당간당하던 피가 안정적으로 차오른 건 뒤늦게 모짜렐라의 스킬이 닿아서였다.
두 명분의 회복 스킬에 겨우 살았다는 의미였다. 만약 두 사람이 땃쥐 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있어 조금만 더 늦게 스킬이 발동했다면 휘핑크림 유자차는 꼼짝없이 별님을 만나러 떠났을 것이다.
다만, 모짜렐라의 스킬은 단일 회복기였다. 땃쥐 미의 공격은 탱커인 유자차보다 방어력도 HP도 낮은 졸렬한 나뭇잎이 버틸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판단을 내려 그나마 살릴 가능성이 높은 휘핑크림 유자차에게 자신의 스킬을 사용했던 것이다.
[파티원 <졸렬한 나뭇잎>이 별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창에 희연은 입안의 살을 꽉 깨물었다. 고요해진 방안에 목이 베인 스톤 베어가 무너지는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땃쥐 미의 일격에 던전의 중간 보스가 명을 달리했다는 의미는 하나였다.
“너… 렙 몇이야.”
모짜렐라가 나무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땃쥐 미가 파티를 배신했다는 명확한 상황에 어느새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도 뒤로 물러난 참이었다.
간신히 살아난 휘핑크림 유자차의 경우 혼란스럽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료한과 사랑은 달콤의 경우 의외로 이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희연은 유자차의 HP를 확인하며 총을 들었다. 땃쥐 미는 경계하는 그들을 보더니 히죽이며 비웃음을 지었다. 검을 어깨에 걸친 그의 머리 위에는 마치 NPC 나 GM처럼 새빨간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살인마…?”
그녀가 그 문자의 의미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모두의 눈앞에 붉은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유저와 조우했습니다.]
[란 최근 일주일 내 200명 이상의 유저, 혹은 50명 이상의 NPC를 살해한 유저에게 붙는 칭호입니다.]
[ 유저 살해 시 페널티가 붙지 않습니다.]
“아쉬워라…. 정보 숨기느라 힘들었는데 결국 다 들켰네요.”
땃쥐 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 위에 띄운 글자만이 경고의 의미가 아닌 건지 그의 그림자 역시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 웅덩이에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희연은 땃쥐 미의 다 들켰다는 말에 서둘러 파티 창을 불러왔다.
“파티 창.”
[파티 : 케이아일과 친구들
- (Leader) <돈 땃쥐 미 (208)>
…]
“208….”
평균 레벨 30인 그들에게 있어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또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레벨 차가 10 이상이면 함께 들어올 수 없는 던전에 저런 고렙의 유저라니.
모두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달리 땃쥐 미의 행동에는 여유가 흘렀다. 그는 돌무더기가 된 스톤 베어의 사체를 뒤지더니 압화된 꽃 책갈피를 꺼냈다. 편지에 쓰여 있던 아나토에게 주고 싶다던 예쁜 꽃을 의미하는 물건이었다.
땃쥐 미는 압화 책갈피를 훑어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대충 던졌다. 그는 돌무더기에 앉아 빙글빙글 웃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파티 탈퇴. 현재 파티에서 탈퇴가 불가능합니다. 파티장의 허락이 있어야 파티 탈퇴가 가능합니다.]
[파티 탈퇴. 현재…]
[파티 탈퇴. 현재…]
[파티 탈퇴. 현재…]
“아, 오리 님. 어차피 허락 안 해줄거니까 파티 탈퇴 신청 좀 그만 누르세요. 자꾸 내 앞에 메시지 떠서 짜증 나잖아요.”
“…….”
“자자, 다들 왜 그리 굳었어요. 우리 좋았잖아요. 제법 좋은 파티였는데 다들 왜 그러지?”
땃쥐 미는 자신의 무해함을 증명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진득하게 희연에게 향해 있었다.
“제가 어떻게 여기 던전에 들어왔는지, 왜 이러는 건지 많이들 궁금하죠? 간단해요. 전 그저 퀘스트를 깨러 왔답니다. 어떤 멍청이가 잃어버렸던 물건이 최근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것 좀 받으려고 왔죠.”
“…….”
“혹시 뭔지 아세요? 예쁜. 아주 예쁜 초록색 목걸이인데.”
뱀…!
희연의 표정이 수습할 새도 없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악령이 역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런 둘의 반응에 땃쥐 미는 눈을 휘었다.
“우리 좋게 좋게 가죠. 어차피 내가 그쪽 죽인다고 해서 원하는 물건이 뚝딱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목걸이를 넘기면 오늘 한 번만 죽이는 거로 끝내줄게요.”
“…보통 살려준다고 하지 않아요?”
“네? 왜요? 게임 접을 때까지 죽이고, 죽이고, 계속 죽여야 재밌는 건데.”
지익-, 지이익-
자리에서 일어난 땃쥐 미는 칼을 질질 끌며 희연에게로 다가왔다. <곰의 포효> 스킬에 걸린 것처럼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짓눌린 그녀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희연뿐만이 아니었다. 땃쥐 미를 살피던 다른 이들 역시 알 수 없는 무게감에 눌려 움직임에 제약이 생겼다.
“헉…!”
“자, 오리 님. 목걸이 넘겨주세요. 어서. 빨리요.”
순식간에 희연의 앞으로 온 땃쥐 미는 그녀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발끝이 떠오르고 목이 졸렸다. 희연의 입에서는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애당초 그녀는 목걸이를 순순히 넘길 의향이 없었다. 제법 매섭게 노려보는 눈이 그 의미를 전달했고 그에 괘씸함을 느낀 땃쥐 미는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붙잡은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뇌까지 흔들리는 느낌에 희연은 멀미와 유사한 상태를 느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앞엔 이죽거리는 얼굴이 선명했다.
“ㅎ….”
“뭐?”
“<회개하세요>!”
하얀 날개가 피어오른 총을 쥔 손이 땃쥐 미의 머리를 내리쳤다. 물론 별 효과는 없었다. 희연도 타격이 있으리라 믿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공격을 따로 있었다.
땃쥐 미가 희연의 공격 탓에 눈이 부셔 잠시 주춤하는 틈을 타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악령이가 그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콰득-!
“아악-!”
짓씹는 소리가 선명했다. 땃쥐 미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악령이의 공격이 제대로 된 유효타였음을 증명했다.
더불어 그의 우렁찬 목소리는 상황 파악을 하느라 주춤하던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어느새 짓누르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진 것이다.
“이 새끼가… <철퇴>!”
가장 먼저 가까이에 있던 모짜렐라가 하얀빛이 어린 지팡이로 땃쥐 미의 오금을 쳤다. 땃쥐 미의 무릎이 굽혀지며 그가 비틀거리는 순간 방패를 든 휘핑크림 유자차가 달려들어 그를 밀어냈다.
“미친 새끼 죽어라!”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다리에 힘이 풀린 상태에서 온몸을 날려 밀어내는 공격을 버틸 재간은 없었다. 땃쥐 미는 연속적인 공격에 결국 잡고 있던 희연을 놓치며 거하게 넘어졌다.
“윽…!”
“빨리빨리!”
떨어지며 땅을 구른 희연을 휘핑크림 유자차는 곧바로 낚아챘다. 땃쥐 미가 마구 흔드는 바람에 어지러운 그녀의 시야가 채 정돈되기 전이었다.
“악, 악령이…!”
희연은 속이 울렁거리는 와중에도 악령이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외침에 땃쥐 미의 거센 저항에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악령이가 폴짝폴짝 뛰어 그녀의 뒤를 쫓았다.
간신히 유자차의 다리에 매달리는 데 성공한 악령이를 보며 안심하던 희연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료한과 사랑은 달콤이 거리를 떨어트리며 땃쥐 미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모짜렐라는 땃쥐 미가 떨어트린 던전 진행을 위한 퀘스트 아이템을 챙긴 뒤 그들의 뒤를 쫓는 중이었다.
악령이의 공격에서 벗어난 땃쥐 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는 그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드, 등불….”
멀미에 시달리는 희연은 스킬을 차마 다 내뱉지 못했다. 그러나 희연의 목소리를 듣고 대신해 스킬을 써줄 힐러는 한 명 더 있었다.
“<등불의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