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부러진 칼날 조각을 손에 쥐자마자 나타난 문구에 희연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업적 <죽은 자의 이야기>. 악령이와의 만남 이후로 반쯤 잊고 있었던 업적이었다.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자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편지를 쓴 주인공이 유령이 되어 이 동굴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희연이 부러진 칼날 조각을 손에 쥐자 흐릿했던 목소리가 명확해지며 다른 파티원들에게도 들리기 시작했다.
아나토…. 나…, 는…. 꽃이 예뻐요…. 내 이름…. 피….
그 변화에 넋을 놓던 이들 중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모짜렐라였다. 그는 여지껏 보았던 모습 중 가장 환하게 갠 얼굴로 외쳤다.
“…됐다. 가자!”
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모두가 그와 같이 밝아진 얼굴로 걷기 시작했다. 케이아일도 땃쥐 미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만약 모짜렐라가 처음부터 파티장을 맡았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희연은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행동에 거침이 없으면서도 시야가 좋았다. 구심점 역할이 되어 줄 사람이 파티를 이끈다는 건 좋은 반향이었다.
다만 희연은 마냥 웃을 수가 없는 것이, 입구를 막은 돌무더기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신경 쓰여서였다.
자신만 겁이 많은 건가 싶을 정도로 모두 그쪽 방향에는 별 신경을 두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땃쥐 미와 눈이 마주쳤던 그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희연은 서두르던 모짜렐라를 붙잡고 료한과 사랑은 달콤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저 외길 부수는 게 가능할까요?”
상당히 노골적인 방식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땃쥐 미를 혼란스럽게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희연의 의견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입구도 부숴보았던 그들에게 얇은 외길 하나 부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빠르게 일을 처리한 그들은 목소리의 출처를 찾아 샛길로 진입했다.
희연은 그때부터 왜 이 동굴 안이 미로이기도 하다는 말이 나왔는지 깨달았다. 첫 번째 샛길 끝에 나온 것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었다. 그다음은 세 갈래, 다음은 다섯 갈래… 일곱 갈래… 열 갈래….
업적 특성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감히 이 샛길 안을 돌아다닐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서진 칼날 조각의 경우 여전히 희연의 손에 있었는데, 그녀가 손을 떼는 순간이면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서였다.
땃쥐 미의 위협에서 벗어난 것은 좋았으나 정해진 길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단점도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단점은 어둠이었다.
횃불 없이 어둠 껌껌한 동굴 안을 헤매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료한이 희연에게 했던 말대로 우울감에 젖는 쪽에 가까웠다. 우울은 보슬비처럼 그들을 적셨다.
“갈림길이 마지막으로 나온 지 얼마나 됐더라….”
“…….”
대상을 정하지 않고 툭 튀어나온 휘핑크림 유자차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알게 모르게 지친 상황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의외로 희연이었다.
그들과 희연의 다른 점은 한 가지였다. 업적의 유무. 희연은 악령이를 꼭 끌어안으며 앞을 노려보았다. 악령과 함께해서 좋을 것 없다던 이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저 걷기만 했는데 지친 일행의 모습에 희연은 그 발언이 단순 경고 같은 게 아니었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희연은 그 끝이 좋지 않다고 했던 요른의 말을 애써 머릿속에서 떨쳐내며 물었다.
“상태가 많이 나빠요?”
“모르겠어요. 그냥… 자꾸 처지고 졸리고…. 묘하게 짜증도 나요.”
휘핑크림 유자차의 대답에 희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희연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눈 밑이 까매져 있었고 입술은 메말랐다. 뺨은 희게 질려 있었으며 눈빛은 또렷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 역시 상태가 비슷했다.
잠깐 쉬었다 가기로 한 그들은 벽에 기대어 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산소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다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것처럼 굴고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희연은 한 가지 제안을 내밀었다.
“제가 먼저 가서 살펴보고 오면 어떨까요?”
그녀의 발언에 물병을 꺼내 머리 위로 냅다 부어버리던 모짜렐라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에 물에 젖은 하늘색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겼다.
“그쪽 힐러거든요. 어쩌다 오늘 탱커도 돼봤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잘못하면…. 아니, 후우…. 말이 왜 이렇게 나가지….”
모짜렐라는 스스로도 왜 이렇게 날카로운 반응이 나갔는지 모르겠다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확신했다. 악령 관련 업적이나 아이템, 칭호가 없는 그들에게 이곳은 쥐약이라는 것을 말이다.
윌로우의 목장에서 희연도 그랬다. 그녀는 농사 관련으로 무엇 하나 없었기에 결과가 참담했다. 지금 상황에 그때의 일을 대입해 보자면 무기력해진 파티원들의 상태는 쉽게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희연은 확인차 그들에게 물었다.
“혹시 유령이나 악령이나 그런 쪽 관련 칭호, 업적, 아이템 가지고 있으신 분?”
돌아오는 답은 당연하지만 없었다. 희연은 여전히 머리 위로 물을 뿌리는 모짜렐라의 손에서 물병을 뺏으며 생각했다. 샛길로 들어서부터 점차 상태가 나빠지던 파티원들. 선명해지는 목소리와 그와 반대로 어두워지는 시야. 이 동굴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
설정상 이 동굴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였다. 그랬기에 몬스터들이 숨어들어 군락지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왜, 던전 공략을 위한 정해진 길에는 횃불이 있었던 걸까? 횃불, 불은 인간의 대표적인 도구였다.
어두워짐과 동시에 상태가 나빠진 게 아니라 애당초 이 동굴 자체에 그런 효과가 있었는데 누군가 놔둔 횃불로 인해 멀쩡했던 거라면?
희연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했다. 비교적 상태가 나쁘지 않은 료한이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우리도 횃불이 있는 길로만 다녔으니까요. 원래라면 이렇게 어두운 길로 자진해서 들어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렇죠?”
“네. 그리고 만약 이쪽이 정말 히든 루트라면… 여기까지 온 우리를 이렇게 죽게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이 근처에 답이 있겠죠. 갈 거면 같이 가요. 아무리 그래도 혼자 가는 건….”
“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료한이 앞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며 희연은 생각을 정정했다. 료한은 비교적 멀쩡한 게 아니라 멀쩡해 보이기만 하던 거였다.
비실비실거리며 맥을 못 추는 료한을 잡아 벽에 기대게 한 뒤 희연은 악령이만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까지 갈 생각은 없어요. 요 앞에만 갔다 올 테니까 다들… 머리에 물 뿌리거나 하지는 말고 그냥 쉬고 있으세요!”
다시 머리에 물을 부어버리고 있는 모짜렐라에게서 다시 물병을 뺏은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길이 나뉘었다. 여러 갈래로 나뉜 길이 이제는 징그러울 정도였다.
희연은 흐릿해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발을 놀렸다. 선택에 따라 이동할 때마다 통로는 좁아졌다. 일행이 둘씩 손잡고 걸을 수 있을 것 같던 폭이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행인 점은 높이는 크게 줄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높이마저 큰 폭으로 줄었다면 키가 큰 편인 사랑은 달콤이나 휘핑크림 유자차는 이곳을 지날 때 머리에 천장을 지고 걸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정석적인 길에 비하면 높이 또한 낮은 건 사실이었다. 아마 파티원들의 상태가 나빠진 것에는 천장이 점차 낮아지며 답답함을 만들어내는 환경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엔… 갈림길이 둘이네.”
료한의 말대로 여기까지 들어온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는 것인지 이 미로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희연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게 된 목소리에 들고 있던 칼날을 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유령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
“음… 음?”
희연이 혼자가 된 덕인지 악령이는 입을 열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작은 인형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이쪽 길이 싫어! 기분이 나빠!”
“이쪽이구나.”
그녀는 곧바로 악령이가 싫다고 했던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악령이 싫어하는 것은 성 속성. 유저에게는 도움 되는 방향이란 뜻이었다.
희연은 바동거리는 악령이를 달래며 조심히 몸을 내밀었다. 오른쪽 갈림길의 끝에 있는 것은 스톤 베어가 있던 방보다도 더 거대한 방이었다.
그녀는 처음 방을 훔쳐봤을 때, 방을 이루는 석재의 재질이 주홍빛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방 안에 도는 훈기가 뺨에 닿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 방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던 건가 싶은 빛으로 가득 찬 방에 희연은 홀리듯 들어섰다.
벽에 빼곡하게 줄지은 횃불. 매끈하게 정리된 바닥. 종유석 대신 알 수 없는 그림이 새겨진 나선형의 천장.
방의 중심에는 까만 무언가가 웅크려 누워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만 한 크기의 꾸덕꾸덕한 어둠으로 뭉친 그것은 동그란 붉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희연을 바라보았다. 흐릿해졌던 목소리가 다시 선명해졌다.
이리로 와…, 알려 줘. 나…, 도와줘.
“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희연은 방을 무수히 많이 장식한 횃불 중 하나를 꺼내더니 그대로 그 방을 뛰쳐나왔다.
그런 그녀의 뒤로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 가…?
“다시 올게!”
악령으로 추정되는 무언가에게 답해준 뒤 희연은 횃불이 꺼지지 않게 조심하며 파티원들을 찾아 달렸다.
희연이 떠난 이후로 급격히 안 좋아지는 기분에 축 늘어져 있던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는 횃불을 들고 나타난 희연의 등장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횃불의 온기가 스며들자 그들을 내내 괴롭히던 눅눅한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확연히 좋아지는 몸 상태를 의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횃불 어디서 난 거예요?”
“이 앞에서요! 마지막 갈림길을 찾았거든요. 그 편지의 주인을 찾은 것 같아요!”
희연의 말에 그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괜찮아진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그들이 마지막 방에 도착했을 때도 방의 주인은 얌전히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령이는 횃불에 담긴 힘을 질색하며 희연의 모자 속으로 숨은 뒤였다.
“그래서, 저건 뭐예요?”
들고 있던 횃불을 원래 자리에 집어넣으며 희연은 모짜렐라에게 답했다.
“아마도 유령 아니면 악령… 비슷한 걸 거예요.”
“유령이면 NPC고 악령이면 몬스터 아닌가?”
그의 말에 희연의 후드 속에 숨은 악령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건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유령과 악령의 차이점을 비롯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저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어지는 휘핑크림 유자차의 말에 다른 이들 역시 까만 덩어리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호랑이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서린 시선들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름 모를 까만 덩어리는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리던 전과는 달리 오로지 희연만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도르륵 굴러온 눈이 희연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 저들에게 말을 전달해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악령이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먹이를 바라보는 듯한 그 당시 악령이의 눈빛에 비해 눈앞에 까만 덩어리는 무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까만 걸 보면 몬스터 쪽이 맞는 것 같긴 한데….”
“공격 의사는 없는 것 같지만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쵸? 우리 그냥 나갈까요?”
“저기, 잠시만요.”
이야기에 끼어든 희연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실질적으로 이곳에 오게 만든 능력은 그녀의 업적 덕이었다. 그에 혹시 희연은 다른 점을 짚어낸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가 그들의 눈에 어려 있었다.
희연은 그 시선들 틈에서 머뭇거리다 까만 덩어리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들어줘. 나. 이야기. 안 잊었어. 잊었어. 싫어. 기억할래. 잡아 줘.
손으로 추정되는 덩어리가 잡아달라며 쑥 뻗어 나왔다. 희연은 조심히 그 손을 잡았다. 겉으로 보기엔 기체에 가까웠지만 손에 닿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건 분명 사람의 손을 마주 잡는 느낌이었다.
몬스터구나….
불안정한 악령이조차도 이 정도로 선명한 감각을 남긴 적이 없었다. 선명한 검은색이라는 점에서부터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희연은 조금 입안이 썼다.
눈앞에 있는 덩어리가 몬스터고 히든 루트라고 했을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괜한 정이라도 들까 싶어 희연이 잡은 손을 놓으려 하자 그녀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희연은 곤란함을 담은 표정을 지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왜요?”
“그게… 안 놓네요.”
그녀의 말에 모짜렐라는 슬쩍 인상을 찡그리더니 편지와 압화를 차례로 까만 덩어리 앞에서 흔들었다.
“이거 줄 테니까 놔 줘. 네 물건 맞지?”
맞아. 아니야. 맞아. 맞아. 아니야.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희연의 물음에 까만 덩어리 속 눈이 끔벅거렸다. 이리저리 데룩데룩 굴러가는 모습이 불안정해 보였다.
내 거, 근데 나. 아냐. 그건 내가 아냐. 나. 아나토. 아나토. 나. 아니야.
악령이보다 심한데….
희연은 묵직한 모자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적어도 악령이는 자기 의사에 대해서는 굉장히 뚜렷한 편이었다. 물론 가끔 흥분하거나 하면 알아보기 어려워지긴 했지만 말이다.
모짜렐라는 어느새 희연을 중간에 두고 까만 덩어리와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거. 아나토한테 주려고 그쪽이 만들고 쓴 거 맞죠?”
몰라. 나. 맞아. 아냐. 몰라. 나. 나. 나. 누구.
“뭐래요?”
“어… 모르, 아니 맞아, 아니 모른다고 하네요.”
“모른다는 거죠?”
얼떨결에 까만 덩어리의 말을 전해주는 역할을 맡은 희연은 고역이었다. 악령이처럼 텍스트화된 대화였다면 결론만 말했을 텐데 까만 덩어리는 육성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덕분에 그녀는 말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갈수록 말이 더 짧아지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 홀로 이 방에 찾아왔을 때 대화 비스름했던 것이 이젠 단어를 툭툭 내뱉는 정도가 되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