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아나토의 이야기가 끝나자 뒤이어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의 비화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희연은 비롯한 일행은 말없이 살아 움직이는 옛이야기를 눈에 담았다.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
: 병사는 언제나, 전쟁에 대한 불만으로, 설움으로, 반항으로 눈물 흘렸다. 한낱 병사는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눈물 흘리던 병사에게 에빌론의 아나토가 말했다. 자신에게 오라. 붉은 땅에서도 피어나는 꽃 한 송이를 갖고 자신에게 오라. 그 말에 병사는 눈물을 그치고 웃었다. 아나토는 울었다.
병사는 약속을 위해 살았다. 친애하는 밀빛 머리카락, 잔잔한 회색 눈. 가죽 다루는 사람에게 흔히 맡을 수 있는 약품 냄새. 그것들을 찾아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병장기를 피해 숨어든 어느 동굴. 친애하는 밀빛 머리를 가진 소년병과 만난 병사는 전쟁의 무심함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적군이었다.
병사는 차마 검을 들 수 없었다. 겁먹은 밀빛 머리칼의 소년병은 그에 안도했다. 둘은 피와 빗물과 진흙에 절은 몸을 기대며 차가운 동굴 안에서 생존했다.
소년병은 잠들지 않기 위해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반드시 돌아가리. 병사 또한 말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돌아가리.
전쟁터에서도 꽃 한 송이가 기어이 피어나는 것처럼, 메마른 동굴 안에서도 꽃 한 송이는 피어났다. 그 꽃 앞에서 손을 맞잡으며 둘은 약속했다. 살아서 돌아가자.
그래서 병사는 죽었다.
소년병은 울었다. 소년병은 병사에게 울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품을 뒤지는 소년병의 밀빛 머리카락을 눈에 담으며 병사는 그렇게 죽었다. 소년병은 병사의 이름을 품에 안고 도망쳤다.
이름을 잃고, 돌아갈 곳을 잃고, 품 안에 메말라가는 꽃 한 송이를 품에 안고 병사는 그렇게 죽었다.
원망만이 꽃피었다.]
어느 날… 이름 잃은 병사에게… 나타났다.
“!”
급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화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본래라면 비화를 보는 유저들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이 멈춰있어야 했다.
그런데 비화의 주인공인 동굴의 악령이 태연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난입한 것이다. 희연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어깨를 짚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 동굴의 악령은 눈을 끔벅이다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동굴의 악령의 등장으로 인해 그들이 보던 비화는 끊긴 뒤였다.
말했다…. 이름을 뺏긴 너를 위해, 내가, 도, 와줄게…. 너도 이름을 뺏… 자.
동굴의 악령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이 보던 비화의 글자가 무너지고 글자 속에 담긴 이야기도 일그러졌다. 무너지고 재조립되는 이야기가 어지러웠다. 노이즈 낀 이야기는 그들의 시야를 방해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횃불이 늘어진 방안에 홀로 남은 병사는 온기 속에 죽었고, 부패했고, 끝내 사라졌다. 혼자인 방,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죽음에서 돌아온 병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아나토. 꽃. 약속.
소년병, 이름, 배신.
나, 병사, 죽음.
가볍게 정의 내려지는 지난날의 기억.
원망, 미움. 억울함, 분노. 슬픔. 그런 새까만 감정.
단편적인 단어가 되어버린 기억을 품은 상태로 병사는 원했다. 정말로 원했다. 무언가를 정말로 원했다. 그러나 외로이 홀로 죽고, 아주 오랜 시간 혼자가 된 병사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고 말았다.
도와준다던 자가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병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이름을 뺏은 자로부터 무언가를 뺏었다. 고작 이름으론 정의 내릴 수 없는 무언가를.
그러나 그 또한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서글플 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바라던 거였을까?
병사는 소년병이 미웠다. 전쟁이 미웠다. 왕이 미웠고, 세상이 미웠다. 병사 자신이 미웠다.]
까드드득-
거친 손길로 땅을 긁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동굴의 악령, 아니 병사는 붉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일행을 보았다. 병사는 새까매진 감정을 내뱉었다. 희연에게만 들리는 감정이었다.
나는 정말로, 정말로 돌아가야 했어….
기체로 이루어진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명확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면 부러진 목이 사방으로 꺾이는 것처럼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비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원만한 대화를 통해 이어지지 않을까 했던 히든 루트는 기어이 그들에게 무기를 들게끔 강요했다.
기여도를 측정 중이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병사 악령과 끝을 보지 않는 이상 설령 보스를 해치웠다 해도 나갈 수 없음을.
“…무기 들어요.”
나지막이 울리는 말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얼결에 중간부터 파티장 비스름한 역할을 맡게 되었던 모짜렐라의 목소리였다.
비화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여전히 끊기지 않는 글자가 병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여유롭게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희연과 모짜렐라가 떨어지며 맞붙었던 검에 다시 금이 갔다. 모짜렐라는 자신이 들고 있던 칼날 조각을 희연에게 넘긴 뒤 그녀를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앞을 방패를 든 유자차가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병사 악령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병사는 바랐기에 어둠 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길게 늘어나며 휘둘러지는 병사 악령의 팔은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채찍 같았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제법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하나 빗나가지 않고 매끄럽게 막아냈음에도 그녀의 HP 게이지는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빠르게 닳았다.
“아프다, 아프다!”
유자차의 외침에 모짜렐라와 희연은 그녀에게 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두 힐러가 매달렸음에도 그녀의 게이지 바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했다.
[아나토.]
“물리 공격이 안 먹혀요…! 마법 내성도 너무 높아서 스킬을 써도 타격이 없어요!”
료한의 외침에 모짜렐라의 혀 차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던 희연에게도 들렸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상대는 기체에 가까운 모습답게 공격이 유연했다. 물리 공격은 무효화, 마법은 높은 내성. 그렇다고 완전한 악 타입도 아니라 힐러 둘이 나서서 공격해도 의미가 없다. 그 와중에 공격력은 높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이 제자리에 서서 채찍 같은 팔만 사방으로 휘두른다는 점이었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게 유일하게 돌아오라 해준,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 되어 준 이가 활짝 웃는 그런 꿈.]
기체 덩어리 같았던 몸이 납작해지며 갈래갈래 나뉘기 시작했다. 나무뿌리가 땅속을 파고들어 잔뿌리를 길러내는 것처럼 갈라진 안개 줄기가 벽을 타고 방안을 에워쌌다.
그건 마치 사방에 두꺼운 거미줄이 쳐진 것 같기도 하고 수챗구멍에 엉킨 머리카락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혹은 벽에 미로를 그려낸 것 같기도 했다.
벽에 깊숙이 뿌린 내린 안개 줄기가 꿈틀거리는 순간 휘핑크림 유자차가 료한과 사랑은 달콤을 양팔에 끼더니 모여 있던 두 힐러 쪽으로 집어 던졌다.
“엎드려요!”
[자신은 꽃 한 송이를 들고 찾아가는 그런 꿈. 그런데 정말로 바라 마지않던 꿈이었을까?]
한데 엉키며 넘어지듯 서로를 끌어안고 웅크린 그들 위로 유자차의 방패가 드리워졌다. 그들은 감싸 에울 정도의 작은 돔 형태의 반투명한 방어막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벽을 가득 메웠던 안개 줄기가 일제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힐! 힐! 힐!”
장대비가 쏟아지듯 내리쳐지는 공격에 유자차는 간절히 힐러들을 불렀다. 모짜렐라가 쿨타임이 찰 때마다 끝없이 <치유의 빛>을 외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도트 힐을 주는 <등불의 천사> 스킬을 사용했다면 그의 고생이 덜했겠으나 조금 전 희연을 위해 사용한 터라 아직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유자차는 한 손으로 방패를 잡은 상태로 물약을 꺼내 입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녀의 방패는 두툼한 쇠를 두들겨 만든 방패로 그 단단함이 상당했지만 그 위로 쏟아지는 안개 줄기 역시 그 강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
유자차의 방패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들은 서로를 더 꽉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휘핑크림 유자차의 팔이 흔들거리고 그녀의 무릎이 점점 굽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따라 그들을 둘러싼 반투명한 방어막 역시 좁아지기 시작했다.
희연은 온몸이 꽉 짓눌리는 답답함 속에서 애써 눈을 굴리며 병사 악령을 찾았다. 그녀의 힐 스킬은 아직 쿨타임이 차지 않은 상태였다.
잠깐 생긴 여유 동안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희연은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점검했다. 스킬, 아이템. 혹은 업적과 칭호 같은 것들을.
그러나 가진 것들을 위기 상황에서 적재적소에 사용하기엔 경험이 부족했고 지식이 부족했다.
“이제 더 못 버텨요!”
휘핑크림 유자차의 외침에 다들 불안한 눈을 하며 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병사 악령의 공격은 끝날 줄을 모르고 쏟아지는 중이었다. 그녀의 방어막이 깨지는 순간 그들을 꼬챙이 신세가 되어 무조건 사망 판정이 날 것이다.
쩍-
얇은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보호막에 금이 갔다. 이어 금은 성에 서린 유리창처럼 사방으로 번졌다. 이제 곧 깨질 것이다.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희연과 모짜렐라는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들에게 곧바로 쏟아질 공격 속에서 힘닿는 데까지 버텨보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내내 그들을 지켜주던 방어막이 간지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에 닿아도 깨지는 설탕 조각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그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뭐야…?”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다. 병사 악령이 공격을 멈춘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이변은 너무나 의외였던 것이라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보다도 의문이 먼저였다. 내내 그들을 지켜보던 붉은 악령의 눈이 스르륵 이동했다.
그 눈이 향하는 곳은 원래라면 보스 방의 입구가 되어줬어야 할 문 쪽이었다. 그제야 그들은 이 던전 안에는 병사 악령 외에도 그들의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한동안 벌어진 일에 반쯤 잊고 있던 땃쥐 미가 보스 방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듣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쾅-! 쾅-!
문을 부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단한 돌문 위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병사 악령의 공격으로 유자차의 방어막에 금이 가던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였다.
땃쥐 미는 적정 레벨 20~35 던전에서 레벨 208 유저가 얼만큼의 깽판을 치는지 보여주겠다는 정신으로 퀘스트 아이템 없인 열 수 없는 문을 부수고 있었다.
그 어이없는 광경에 희연을 포함한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멍하니 부서지기 시작한 문을 구경했다. 마침내 먼지구름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문 너머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묶은 은발을 휘날리며 보스 방으로 입장하는 땃쥐 미의 그림자는 여전히 새빨간 색이었다. 어깨에 느슨히 걸친 긴 검은 적어도 이 던전 안에선 그가 최고의 강자임을 증명하는 오만함이 서려 있었다.
입맛을 다시는 표정으로 케이아일과 친구들 일행을 보는 탁한 노란 눈이 얼마나 번들거렸는지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악령이 화이팅….”
“…….”
작은 목소리였지만 본의 아니게 바짝 붙어 있느라 그 말을 들은 모짜렐라는 아주 묘한 표정이 되어 희연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민망해진 희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인 점은 그녀의 응원이 의미 없는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보스 방에 새롭게 입장한 확실한 강자는 모든 어그로를 가져갔다.
던전의 새로운 보스로 등극한 병사 악령이 땃쥐 미를 가장 위험한 적이자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하는 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힐러를 둘이나 두고 검사를 노린다는 점에서 그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병사 악령이 땃쥐 미에게 관심을 쏟는 만큼, 땃쥐 미가 그 관심에 힘입은 공격을 신경 쓰는 만큼 자신들의 몸과 마음이 편해짐을 깨달은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는 마음속으로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기는 놈이 우리 편인 건 아니었으나 둘이 싸우다 공멸하면 가장 좋은 엔딩인 건 사실이었다.
노골적인 기대를 품고 반짝이는 눈들을 확인한 땃쥐 미는 그들을 비웃으며 병사 악령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건 또 뭐야?”
땃쥐 미의 검 위로 낯설지 않은 푸른 불꽃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벽에 퍼져나갔던 검은 안개 줄기가 일제히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해치웠나…?”
기대심을 품고 휘핑크림 유자차가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사 악령의 무자비한 강함은 그들 대상으로 해당되는 사안이었지 208 검사에게도 해당하는 사안은 아니었다.
마치 검은 고치처럼 뭉친 안개 속에서 땃쥐 미는 반달 모양의 푸른 불을 사방으로 쏘아내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희연의 입장에선 더없이 아쉬울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다만 완전히 타격 없는 공격은 아니었는지 땃쥐 미의 얼굴엔 이것 봐라? 하는 의미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본 희연은 슬그머니 총을 들어 병사 악령 쪽으로 총구를 기울였다.
“…<촛불의 숨결>.”
소곤거리듯 내뱉은 말과 동시에 쏘아져 나간 총알이 병사 악령의 머리 위에서 깨지며 산란하는 빛이 되었다. 그녀의 일행도 땃쥐 미도, 심지어 얼결에 버프를 받은 병사 악령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뭐 해요…?”
“몬스터한테 대체 왜…?”
“몬스터한테도… 버프를 걸어줄 수 있어요?”
희연은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나 뒤이어 모짜렐라 역시 병사 악령에게 <치유의 빛>을 선사했기에 그 부담감은 덜어졌다.
“둘 중에 꼭 해치워야 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저놈이지.”
모짜렐라의 목소리에는 흡사 부모님의 원수를 처단하는 것을 앞둔 자 같은 결연함과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