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두 힐러의 스킬 덕에 새까만 몸체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빛으로 반짝반짝해진 병사 악령을 보며 땃쥐 미는 말했다.
“놀고들 있네.”
같잖은 수작질이 가소롭다는 태도였다. 희연은 그 모습에 어떻게 저 성격을 숨기고 이상적인 파티의 리더인 척했던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어찌 됐든 간에 시간은 확실하게 벌었다. 병사 악령과 땃쥐 미가 싸우는 동안 괜히 휘말릴까 싶어 몸을 피하기로 한 그들은 다시 벽을 탈 준비를 했다.
아직까지도 벽면에는 새까만 안개 줄기가 나무뿌리처럼 분포해 있었기에 안전성 확보가 필요했다. 위험하다 싶을 때 가장 먼저 몸을 빼는 것이 가능한 료한이 먼저 벽 위로 발을 올렸다.
희연은 휘핑크림 유자차에게 매달렸고 모짜렐라는 사랑은 달콤에게 매달렸다. 그들이 검은 안개를 클라이밍 삼아 벽을 타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땃쥐 미와 병사 악령은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와씨…!”
막 손을 댄 안개 줄기가 꿈틀거리는 바람에 떨어질 뻔한 휘핑크림 유자차가 술렁인 마음을 달래며 벽에 방패를 쑤셔 넣었다. 바짝 긴장한 것은 그녀에게 매달린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희연과 모짜렐라는 매달려 있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병사 악령을 서포트 하는 중이었다. 땃쥐 미가 아무리 이 던전 안에서 규격 외 강자이기는 하나 악령은 그렇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도 힐러 둘이 서포트 하는 악령은 말이다.
그렇게 병사 악령 덕에 무사히 틈새로 몸을 집어넣는 것에 성공한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밑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구경했다.
둘 중 우위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구별 짓기 힘든 싸움이었다. 땃쥐 미는 검사였고 이는 물리 공격이 주를 이룬다는 뜻이었다. 병사 악령은 물리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병사 악령은 희연 일행을 상대할 때와 비교하면 미약한 공격력으로 땃쥐 미를 공격했다. 그러나 갈래갈래 나뉜 검은 안개 줄기는 그 속도가 빨랐고 수가 많았다. 속도 면에서 보면 땃쥐 미보다도 한 수 위일 정도였다.
아무리 땃쥐 미라고 해도 여유롭게 포션이나 까먹으며 싸울 수는 없었고 결국 착실하게 피가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마법 공격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나 번번이 유효타를 날릴 때마다 희연과 모짜렐라가 곧바로 치료 스킬을 남발했기에 땃쥐 미의 입장에선 여간 번잡스러운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을 내듯 이따금 그들이 숨은 틈새 쪽으로 스킬을 날렸다. 대부분의 스킬이 크기가 컸기에 틈새 깊숙한 곳으로 숨으면 그들은 무사히 그 스킬로부터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전하는 땃쥐 미의 모습에 좋다며 비웃던 모짜렐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낯빛이 안 좋아졌다. 힐러 둘이 붙었음에도 조금씩 병사 악령이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 이렇게 시간만 끌 수는 없는데….”
고뇌하는 이들을 지켜보던 희연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저기, 아까 횃불 방으로 다시 가 보는 건 어때요?”
“횃불 방? 거긴 왜요?”
희연은 머뭇거리다 제 생각을 이야기했다.
“횃불을 다 끈 다음에 무슨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우리는 제대로 확인을 못 했었잖아요. 어쩌면 처음부터 그 방 안에 병사 악령을 이기는 힌트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병사 악령보다는 지금은 땃쥐 놈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우린 꼭 악령을 이겨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여긴 던전이고 우리 목적은 최대한 빨리 이 던전을 공략해서 나가는 거였으니까….”
병사 악령과 싸워 이기는 게 히든 루트의 방향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희연의 생각이었다. 이 게임이 사랑하는 건 치고받고 싸우는 게 아닌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희연은 이미 경험도 있었다. 레벨 208 땃쥐 미를 가볍게 날려버리는 제 모자 속 악령이에게 내 경험치가 되어라! 하며 총을 쐈던 과거에 말이다. 악령이나 유령이나 정말로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지 죽어라 싸우는 게 아니었다.
희연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모두가 서로를 힐끔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횃불 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병사 악령에게 치료 스킬을 쏘며 희연도 뒤돌았다.
***
“…여기서 나가면 무조건 룬어 중급 스킬 따고 만다.”
모짜렐라의 다짐을 들으며 희연은 쓰게 웃었다. 청산가리가 배우는 게 좋을 거라 했던 조언을 반쯤 흘려들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워져서였다.
횃불 방에는 변화가 생겼다. 다만 그들은 그 변화를 눈앞에 두고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붉은 온기가 사라진 벽 위로 빼곡하게 새겨진 푸른 글자가 한국어 패치가 된 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연은 벽 위를 더듬었다. 까슬한 벽면 위로 새겨진 글자가 밝게 빛났다.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던 마지막 그림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박살 난 상태였다.
“일단 저쪽 방 싸움 끝나려면 먼 것 같으니 각자 방 안을 돌아다니며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료한의 말에 모두 긍정하며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희연은 모자 속에서 악령이를 끄집어내 바닥 위로 내려놓았다. 같은 악령이니 혹시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아내지 않을까 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악령이는 무슨 생각인지 아무 말 없이 가만 서 있기만 했다. 그 모습에 희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벽 위에 나타난 글자 해석만이 답인가 해서였다.
희연은 답답한 마음에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해석 가능한 것이 상형 문자에 가까운 천장의 그림이라는 점이 절망스러웠다. 끝내 그녀는 결국 없는 사람마저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곳에 킹스메이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떠올린 것이다.
“…….”
새로운 방향의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다.
희연은 서둘러 제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을 지워냈다. 그 빈자리에 킹스메이커가 있었다면 애초에 병사 악령과도 만날 일이 없었을 거란 예상이 채워졌다.
악령이가 킹스메이커를 무서워하듯 병사 악령 역시도 그녀를 무서워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달빛 요람의 숲에서 그녀 홀로 있을 때만 악령이가 나타났던 것처럼 병사 악령 역시 킹스메이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희연은 문득 방 안을 돌아다니던 걸음을 멈추었다.
흑마법사와 악령. 그 둘의 관계.
“…악령아. 악령은 흑마법사랑 관련 있는 거 맞지?”
“…….”
“혹시 저 웃는 사람 그림이… 병사 악령한테 도와준다고 접근했다는 사람이 흑마법사일까?”
악령이는 답하지 않았지만 희연의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갔다. 생각해보니 횃불 방의 구조가 어디선가 본 것 같았던 것이다. 특히 그림이 새겨진 나선형 천장 같은 것이 말이다.
킹스메이커의 공방. 그곳과 닮았다.
비록 그녀의 공방은 이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본의 힘이 느껴지긴 했으나 저 벽에 새겨진 글자를 마법진으로 치환해 생각해 보면 구조는 엇비슷했다. 그녀의 공방 역시도 천장이 나선형이며 빼곡한 그림이 채워져 있었다.
희연은 바닥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깨끗했다. 울퉁불퉁한 것 하나 없이 매끄러운 바닥은 동굴의 안에 흙바닥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인위적이었다.
벽은 료한이 맨몸으로 타고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대충 정리된 것과 달리 말이다. 하나하나 사실을 확인할수록 희연의 생각에는 확신이 더해졌다.
분명 킹스메이커는 마법사의 공방은 원래 지하에 있는 거라 했다. 그녀는 마법사의 공방은 단 한 번밖에 가 본 적 없지만 그 구조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귀한 것, 중요한 것일수록 더 깊은 지하에 숨긴다. 희연은 곧바로 총을 꺼내 바닥을 향해 겨누었다.
탕-!
갑작스러운 총성에 방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이들이 모두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해요?”
“여기 바닥 좀 보세요.”
희연은 자신이 총으로 구멍을 뚫어놓은 바닥을 가리켰다. 하나둘 그녀의 주위로 모인 그들은 처음에는 의아해했으나 구멍 안을 들여다보곤 얼굴을 굳혔다.
새까만 구멍 안쪽에서 흘러나온 바람이 구멍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한 이들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이 아래 다른 공간이 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니면 말고, 란 마음으로 총을 쐈던 희연도 내심 놀란 상태였다.
“이 바닥 가짜였어…?”
휘핑크림 유자차는 황당하다는 듯 머리를 쓸다 곧바로 망치를 손에 쥐었다.
“다들 뒤로 좀 가 보세요.”
위협적인 망치의 모습에 그들을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나름 안전거리를 확보했다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휘핑크림 유자차는 온 힘을 다해 바닥 위로 망치를 내리쳤다.
쾅-!!
바닥 위로 얇은 금이 퍼졌다. 휘핑크림 유자차가 다시 한번 망치를 휘두르자 금이 간 바닥의 일부라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와…?”
희연은 감탄사를 툭 내뱉으며 몸을 기울여 밑을 내려다보았다. 바닥 아래 숨겨진 공간은 어두웠고 오래 방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풀거리며 올라오는 먼지가 비단 그 위로 쏟아진 바닥의 잔해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 양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희연은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렸다. 피가 묻은 쪽이라 달달한 초콜릿 냄새가 진동을 했다.
손을 휘저어 먼지를 내쫓으며 그녀는 공간을 관찰했다. 벽에 새겨진 것과 같은 종류의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공간의 중심에는 네모난 바위가 놓여 있었다. 바위 위에는 검 모양의 구멍이 있어 거푸집을 연상시켰다.
희연은 내내 손에서 놓은 적 없던 칼날 조각을 들어 올렸다. 언뜻 눈대중으로 보아도 저 바위 위의 구멍이 그녀가 들고 있는 칼날 조각 두 개를 합친 모습과 크기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그 밑으로 내려갔다. 하루 종일 몇 번이나 벽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한 그들에게 그다지 높지도 않은 곳을 뛰어내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희연과 모짜렐라를 제외한 이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네에….”
“3분 동안 골절이라 왼쪽 다리 못 쓴다는데요.”
“저런….”
모짜렐라는 휘핑크림 유자차에게 덜렁 들려진 모습으로 거대한 거푸집 쪽으로 이동되었다. 희연은 그나마 본인의 다리로 이동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희연은 피가 묻어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소매 쪽으로 돌 위에 가득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그러곤 곧바로 들고 있던 칼날 조각을 차례로 그 위에 올려놓았다. 구멍은 생각보다 깊숙했다.
칼날 조각이 빛나며 부러진 부분의 이음새가 다시 맞붙었다. 횃불 방의 벽, 바닥에 빼곡하게 새겨졌던 글자가 울렁거리며 바위 아래로 사사삭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벌레 떼의 이동 같아 징그러울 법한 모습이기도 했지만 그 색이 워낙에 신비로웠기에 거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거부감보다는 놀라움이 먼저인 탓도 있었다.
“우와….”
단조로운 회색빛 흔한 돌이던 바위가 글자의 색을 따라 물들었다. 깊숙한 구멍에 물이 찰랑거리며 차올랐다. 물속에서 다시 제련되기 시작한 것처럼 탕-, 탕- 하고 철을 울리는 소리가 맑게 퍼져 나갔다.
그 소리가 점차 점차 줄어드는 것과 동시에 바위 위로 글자가 새겨졌다.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료한이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부끄럼 아는 자가 밝혀졌다. 그자를 베라.”
“이거 그냥 이 검으로 악령 잡으라는 소리였네. 나름 공략법이 있기는 했네요.”
“와, 그러면 우린 공략법 중간에 건너뛰고 헛고생한 거네요. 어쩐지 물리 공격 무효화에 마법 공격 내성인 몬스터를 어떻게 잡나 했네….”
“그래 봤자 악령 잡기 전에 땃쥐 미 그 새끼가 문제지만요.”
드디어 공략법을 찾았다는 마음에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희연은 영 표정이 좋지 못했다. 기어이 찾아낸 방법이 병사 악령을 죽일 수 있는 검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해치우는 것밖에 답이 없나?
악령이는 여전히 아무 말 없는 상태였다. 희연은 답답한 심정으로 일단 구멍 안에서 멀쩡해진 검을 끄집어냈다.
[<부러진 칼> : 아주 가끔 덧없이 솔직해지는 방법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꺾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
“?”
뭔가를 베고 죽이는 검이라기엔 이름도 설명도 무언가 이상했다. 그에 희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쾅-!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저 위에서 울려 퍼졌다. 그들은 서둘러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희연이 휘핑크림 유자차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위로 올라오자마자 보게 된 것은 박제된 것처럼 벽 위에 박힌 병사 악령이었다.
새까만 안개 같던 몸이 갈기갈기 찢긴 것처럼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몸체의 크기가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작아져 있었다. 느릿느릿 깜박이는 붉은 눈이 점멸하는 불빛 같았다.
“은근히 애먹이네….”
땅에 박힌 검을 뽑으며 걸어오는 땃쥐 미 역시 그리 성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충 집어 던지는 빈 포션에 조금 남아 찰랑이는 것이 붉은 액체인 것으로 보아 겉모습은 의미 있는 게 아니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 같은 무형의 힘에 입술을 짓씹던 모짜렐라가 희연의 등을 밀며 외쳤다.
“그 검으로 저 악령 찔러요!”
“이거 검이 그런 용도가 아닌 것 같아요…!”
희연이 검의 설명에 대해 말하려던 참이었다. 모짜렐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찌르는 거 맞아요! 특성 때문에 내 앞에 따로 공략법 떴으니까 그냥 가서 찔러요!”
특성?
낯설지 않은 개념의 단어에 잠시 멈칫했던 희연은 재촉하는 손길과 다가오는 위협에 일단 병사 악령을 향해 달렸다. 그녀를 제외한 파티원들이 땃쥐 미를 견제하며 시간을 끌기 위해 애를 썼다.
“날 막기엔 너희 레벨이나 무기가 너무 조잡하지 않나?”
“여기서 제일 잡스러운 새끼가 뭐래. 저렙용 던전 보스한테 빌빌거리다 이제야 여기로 넘어온 새끼가 입만 나불나불 놀리면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 보지?”
“모짜렐라 님은 탱커 했으면 참 잘했을 거예요.”
살포시 웃은 땃쥐 미가 검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고 무언가를 무너트리는 연속되는 소리만으로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땃쥐 미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희연은 자신의 뒤에서 벌어졌을 일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뒤돌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
모짜렐라의 말에 따라 곧바로 병사 악령을 찌르기 위해 검을 들면서도 머릿속으로 특성이라는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바빴기 때문이다.
특성은 희연에겐 아직 낯설기만 한 개념이었다. 첫 캐릭터 생성을 할 때 부여받았고, 톨러의 퀘스트를 할 때 처음 나타났다. 가장 최근에 한 퀘스트인 헬르벨의 퀘스트에서 다시 한번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발동 조건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무슨 효과가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특성이었다. 앞으로의 게임 진행에 영향을 주고 나아갈 길에도 영향을 준다. 그것이 처음 특성을 받았을 때 안내된 설명의 전부였다.
희연은 특성은 <헤매는 자>. 그녀의 특성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질문하는 역할을 했다. 티티가 답했고 톨러가 답했다. 헬르벨 역시도 답했다. 그러나 완벽한 정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병사 악령 앞에 다다라 검을 치켜들었던 희연은 그새 차오른 숨을 정돈하며 머뭇거렸다. 검은 안개 속 붉은 눈이 희연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결국 희연은 가까이 들이밀었던 검을 늘어트리며 물었다.
“…아나토에게 네 이야기를 전해주기를 바라?”
돌아오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매며 그녀는 계속 말을 걸었다. 머리로는 확실한 공략법을 제시한 모짜렐라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다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돌아올 답을 바랐다.
“아나토를 찾아볼게. 네 이야기를 전해주고 편지도, 꽃도 전해줄게!”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의 끝이 바닥에 닿았다. 병사 악령은 그 검의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들려주길 청하는 희연에게 병사는 마침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