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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110)화 (110/251)

110화

아나토는… 내가, 약속을 저버렸다고… 여길… 까?

“그건 모르는 일이야! 아나토는 네 이야기를 모르잖아. 내가 전해줄 테니까….”

병사 악령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기로 이루어진 몸이 조각조각 나뉘었다. 사라지는 자신의 몸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로 붉은 눈은 오롯하게 희연만을 보았다.

동공도 없는 그 단순한 붉은 눈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빛이라는 건 드러나는 사람의 표정과 어우러져 느껴지는 것인데 악령은 얼굴이 없어 눈빛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래서 희연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그 눈빛이 병사 악령의 진심이라는 것을 아주 늦게 알아차렸다. 침묵하는 눈앞에 악령과 달리 제 모자 속 악령이 자신이 바라는 걸 얼마나 솔직하게 말하는지 떠올려 봤다면 금세 알 수 있던 사실임에도 말이다.

힘 빠진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검이 바닥을 굴렀다.

“혹시, 네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말을 헤매던 희연은 마침내 적절한 단어를 찾아 문장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병사 악령은 눈만 깜박였다. 어느새 주위가 조용해졌다. 희연은 어깨에 톡 기대는 작은 인형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엉망이 된 방 안. 여기저기 지친 몸을 추스르는 파티원들. 그리고 악령이의 힘에 묶여 병사 악령처럼 벽에 박제된 땃쥐 미.

여태껏 답하지 않던 악령이가 이제 와 도와주는 이유를 그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악령이는 바라고 있었다. 희연이 병사 악령과 대화하기를.

희연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땃쥐 미의 머리를 지팡이로 툭툭 치던 모짜렐라는 그녀를 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재촉을 한다거나 제지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자신이 제시한 공략법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시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정도는 해주겠다는 태도였다. 희연은 약간의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품고 다시 병사 악령을 보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검은 안개가 슬금슬금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처음 맞잡았을 때와 비교해보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이었다.

“…….”

그녀는 전쟁을 몰랐다. 그게 게임 속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아주 오래전 과거의 것이라고 한다면 더더욱이 알 수가 없었다. 눈 앞에 병사는 그 전쟁의 잔재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병사의 이야기는 끝난 적이 없었다.

[병사는 지쳤다. 쉬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병사는 생각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제게 돌아오라고 한 이에게 돌아가는 꿈. 살아남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꿈. 그런 꿈을 병사는 정말로 원했을까?

[약속은?]

“너… 사실 아나토도 만나고 싶지 않은 거지?”

[복수는?]

“널 죽이고 도망갔던 소년병도 그냥 다 잊고 쉬고 싶었어?”

[유일하게 돌아갈 곳이 되어 준 아나토와의 약속을 져버리고, 소년병에 의한 배신감 속에 사무치는 감정 사이에서도.

사실 병사는 그저 쉬고 싶었다. 아니, 훨씬 더 오래전부터. 아나토가 살아 돌아오라, 제게로 오라 했던 그 순간에도. 그 이전에도. 손에 누군가를 죽이는 무기가 쥐어지는 순간부터.

병사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의 비화를 확인했습니다.]

희연은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병사는 전쟁에서 사람을 죽였다. 그 죽은 사람은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누군가의 가족을 빼앗은 자신을 병사는 싫다 말했다.

병사는 잊히고 싶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잊히길 바랐다. 잊힌 자는 무엇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결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희연은 붙잡혀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람인 존재가 말했다.

나는…, 쉬고 싶어. 이제는 그냥 쉬고 싶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런 존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 그저 동조다.

“…그래.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약속을 안 지켜도 되고, 복수도 안 해도 돼.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붉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눈물은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기체가 되어 사라졌다. 병사는 더 이상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얼추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땃쥐 미를 경계하던 일행들이 하나둘 그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땃쥐 미는 여전히 악령이가 걸어놓은 주박에 묶인 상태였다.

땅을 굴러다니던 검을 주워 든 모짜렐라는 찡그린 낯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 희연은 멋대로 행동한 자신에 대한 뒤늦은 화인가 걱정했지만 괜한 기우였다.

“시스템에… 칼로 찌르는 게 공략법이라고 떴어요.”

“아, 네….”

“진짜 그렇게 떴어요. 그러니까… 평화적인 방법이 있으면 물론 그렇게 하는데 내 앞에 뜬 건 그런 방향이었으니까….”

그는 희연에게 냅다 검으로 찌르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병사 악령의 비화와 희연과 한 대화 때문에 정작 중요한 던전 공략이 아직 다 끝난 게 아님을 잠시 잊은 듯했다.

“어….”

“?”

머뭇거리는 희연의 기색이 무슨 뜻인지 빠르게 알아챈 모짜렐라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 보여줘 놓고 그래도 던전 공략하려면 검으로 찔러야 합니다, 전개면 개발자 새끼들은 세상에 다시 없을 사이코패스겠죠. 좀 기다려봐요. 특성 퀘스트 뜰 테니까.”

다행히 얼마 안 있어 그의 말처럼 희연의 앞에 처음 보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특성 퀘스트!]

[길 잃은 영혼의 인도 : 오랜 시간 헤매며 지친 영혼을 안식의 터로 보내주자.

‘이제는 덧없는 바람이 묻혀 꽃이 피네.’]

“특성 퀘스트…. 저기, 모짜렐라 님도 퀘스트가 떴던 거죠?”

희연의 물음에 모짜렐라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 잃은 영혼의 복수>가 제가 받은 퀘스트예요. 특성이 그쪽 방향이라….”

“그러면 혹시 다른 분들도 퀘스트 받았나요?”

그녀와 모짜렐라 둘만 받았다기엔 여기 있는 모두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긍정의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뜨기는 했는데 바로 특성 불합이라면서 취소당했어요.”

“아, 저도요.”

“음….”

사랑은 달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희연은 고개를 기울였다. 특성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이리 와.”

희연은 손을 뻗었다. 갈래갈래 흩어진 병사 악령은 어느새 손바닥만 해져 있었다. 다시 모자 속으로 숨은 악령이와 비슷한 크기였다.

검은 악령을 품에 안으며 희연은 피가 닳을 것을 각오했지만 퀘스트 덕인지 그녀의 HP는 닳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네.”

“!”

대화하는 사이 홀로 방치되어있던 땃쥐 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두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악령이의 힘에 의해 속박된 상태인 땃쥐 미가 빙긋 웃고 있었다.

“보아하니 히든 루트 깨는 식으로 던전 공략했고, 원래 보스도 죽였고. 남은 건 정산 끝나고 여기서 나가는 거뿐이네요?”

“갑자기 왜 또 존대하는데. 네 성격 이미 다 알거든.”

까칠한 모짜렐라의 말에 땃쥐 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유종의 미는 남겨야 하니까 예의 차려주는 거잖아요, 모짜렐라 님. 우리 오래오래 볼지도 모르는데.”

“뭐래는 거야.”

“여기서 나간다고 끝이 아닌 거 알면서 왜 그러지?”

끝이 아니라고?

땃쥐 미의 말에 희연은 표정을 굳혔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것이다. 던전에서 나간다고 해서 그들이 곧바로 뿔뿔이 흩어지는 게 아니었다.

땃쥐 미에게는 악령이의 속박에 반항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던전에서 나가자마자 그들 전부를 죽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기여도 측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 던전 기여도 순위

1. 눈오리의 돌격

2. 12시의 모짜렐라

3. 돈 땃쥐 미

4. 휘핑크림 유자차

5. 료한

6. 사랑은 달콤달콤]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 던전 공략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 던전의 히든 루트를 최초로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에 추가 보너스가 들어갑니다.]

[레벨 업! x4]

[행운의 토끼 발 x2, 여우 넝쿨 x4, 나뭇잎 깃털 x10, 그림자 덧니 x5, 회색 털가죽 x3, 질긴 나무줄기 x5, 스톤 베어의 곰 가죽 1평 x10, 녹음의 하급 조각 x5. 질 좋은 스톤 베어의 곰 가죽 1평 x50]

[<악령 콜렉터> 업적 달성!]

[업적 효과 : ‘혹시, 당신은 제 이야기를 들어줄 건가요?’

악령들의 센세이션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30초 뒤 던전 밖으로 이동됩니다.]

“이게 뭐야….”

업적 목록에 또다시 이상한 것이 추가되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희연은 그 눈에 띄는 업적 목록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희연의 팔을 툭 치며 모짜렐라가 말했다.

“이제 곧 여기서 나가게 되니까 집중해요.”

“아, 네.”

“이제부터 서로 챙겨주거나 할 여유 없으니까 각자 알아서 자기 목숨 챙겨요. 기껏 던전까지 다 깨놓고 죽어서 레벨 날리지들 말고요,”

묘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모두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모짜렐라는 희연에게 가까이 오더니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쉿. 말했죠? 알아서 챙기라고. 여유 없어요.”

“…그러는 모짜렐라 님도 지금 저 챙기는 거 아닌가요?”

“아닌데요.”

단호히 부정하는 모습에 희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을 착실하게 흘렀다. 마침내 그들 머리 위에 떠올랐던 타이머가 0을 가리킨 순간, 그들의 발밑이 둘러진 둥근 띠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촛불의 숨결>. 다들 알아서 잘 살아남아요.”

모짜렐라가 모두에게 마지막 버프를 걸어줌과 동시에 드디어 그들은 지긋지긋했던 던전 밖으로 이동됐다.

***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의 던전 앞에는 제법 많은 수의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쉼터에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거나 파티를 찾던 이들 모두가 던전의 입구 앞에 서 있었으니 그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술렁임은 잦아질 기색이 없었다. 그들 모두가 던전 안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한 지진에 의문을 가지고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측 가능한 것은 앞서 들어간 파티가 안에서 무슨 짓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평균적인 던전 공략 시간이 지난 지는 이미 한참인지라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의 다음 순번을 뽑았던 파티의 경우 불만이 얼굴로 드러난 상황이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거야.”

“어, 저기. 이제 나온다!”

여섯 개의 동그란 선에서 환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은 누가 나올까 궁금해하며 지켜보았고 시간을 버린 것이 불만이었던 파티는 항의를 위해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

그러나 그들은 이동되자마자 몸을 앞으로 내빼다시피 서둘러 발을 뻗는 상대로 인해 항의는커녕 얼빠진 소리만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그 상대인 희연도 마찬가지였다.

“으왓…?”

“비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던전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는 점에 희연은 당황했다. 뒤에서 손을 뻗어 그녀 앞에 있던 사람을 밀어내는 휘핑크림 유자차가 아니었다면 도망가던 것도 잊고 그 앞에서 머뭇거렸을 것이다.

“잠깐,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그녀는 자신의 피투성이 신관복 차림에 시선이 모이는 것을 무시하며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나갔다.

[파티를 탈퇴합니다.]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한 희연은 달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처럼 다른 이들 역시 사람들 사이로 숨어든 것이다.

이대로 땃쥐 미가 그들을 잡는 것을 포기하면 좋을 테지만, 유저 학살을 즐기는 머더러 유저가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제 먹잇감 삼으면 모를까 사람 좀 많다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런 희연의 예상대로 땃쥐 미는 히죽 웃으며 검을 들었다. 유일하게 도망가지 않고 서 있던 그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몰린 상황에도 거리낄 것이 없단 태도였다.

검이 반달 모양으로 휘둘러지며 그 잔재를 쫓듯 흔적을 남겼다. 검선의 끝이 밑을 향했던 건가 싶은 착각이 드는 흔적이었다.

흙 위로 깨끗하게 그어진 선 위로 금이 간 순간, 그 일대의 땅이 모두 갈라지며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구경꾼들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저 미친 새끼…!”

희연은 어렴풋이 들리는 모짜렐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더 빠르게 뛰어나갔다. 사냥감을 쫓는 사냥개처럼 땃쥐 미의 공격은 희연의 뒤를 쫓았다.

간신히 땃쥐 미의 공격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난 순간, 희연은 목 뒤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오싹한 감각에 잠시 주춤하던 그녀는 갑작스럽게 목 뒤를 누르는 묵직한 느낌에 앞으로 넘어졌다.

“윽…!”

땃쥐 미로 인해 땅이 들썩였기에 힘없는 그녀는 데굴데굴 수풀 사이로 굴러갔다. 희연은 목 뒤가 얼얼한 상황에서도 용케 총을 들어 올렸다.

탕-!

[스킬 <산골 꼬마 요정의 친구>를 사용합니다.]

희연은 멍하니 누워 몸체가 잘려나간 나무를 보았다. 악령이가 목 뒤를 짓눌러 넘어트리지 않았다면 베인 건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쭉 닳아 없어진 HP를 보면 차마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말은 나오지가 않았다. 희연은 오늘 내내 몇 번이나 오고 갔는지 모르겠는 죽음의 문턱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사람은 목이 꺾여도 죽어 악령아….”

“앗….”

[목뼈에 심각한 손상이 일어났습니다. 15분 동안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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