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어찌 됐든 간에 원하는 것은 모두 얻었으므로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희연은 루시페라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뉴비 없지가 기껏 성기사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준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그녀가 곤란해할 만한 주제를 입에 담지 않고 조용히 손을 흔들며 배웅만 해주었다. 이럴 거면 왜 악령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약간 억울하다는 감정이 들어 희연은 입을 삐죽였지만 지그시 바라보는 회색 눈에 결국 먼저 등을 돌렸다. 괜스레 붙잡힐까 봐 빠른 걸음으로 걷던 희연은 때마침 만난 뉴비 없지와 함께 신전을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금방 나왔네요?”
킹스메이커는 희연과 뉴비 없지를 보곤 붙들고 있던 신관을 이만 가봐도 좋다며 놔주었다. 그녀의 옆에서 흑흑 소리를 내며 울던 신관은 다시 빗자루를 들고 신전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신관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희연은 모자를 뒤져 작은 인형을 끄집어냈다. 2차 전직을 하던 와중에 받은 신의 축복에 혹여나 안 좋은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였다.
“…….”
“…….”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악령이를 잠시 킹스메이커에게 맡긴 희연은 모자 속을 다시 열심히 뒤졌다. 병사 악령이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악령아?”
그렇게 싫어하는 킹스메이커의 품속에 얌전히 안겨 있던 악령이는 희연의 부름에 그제야 입을 벌렸다. 인형의 입속에서 까만 덩어리가 삐져나왔다.
삣….
“빛이 따가워서 죽을까 봐 그랬어….”
희연은 악령이의 발언을 믿어야 할까 고민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병사 악령의 크기가 더 줄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분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희연은 오늘 하루 심신이 고달픈 병사 악령을 모자에 집어넣고 악령이를 품에 안기로 결정 내렸다.
희연의 품에서 기분이 좋은 것인지 발을 동동 굴리는 악령이를 보던 킹스메이커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제 장비를 맞추러 가볼까요?”
***
특색에 따라 총 네 개의 골목길이 자리 잡은 에빌론의 장인 거리에는 그 모든 골목길의 교차점이 되는 중앙광장이 있다. 원래는 각 거리의 상인들이 한데 모이는 작은 친목의 장소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곳을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유저들이 되었다.
모든 골목과 연결된다는 이점은 마땅한 거래 장소가 없던 유저, 혹은 이것저것 재료를 산 다음 물건을 제작하던 이들, 그런 제작자들에게 의뢰를 맡기고 싶던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가벼운 거래 장소가 본격적인 작은 경매장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시스템을 통한 경매소는 이전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면대면이 불가한 경매소는 거래가 명확하다는 장점이 있으면서도 흥정이 불가하다는 단점 또한 존재했다.
중앙 광장에는 하나둘, 천막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가벼운 물건을 팔러 온 유저들이 좌판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장인 거리의 중앙 광장에도 작은 시장이 형성되었다.
희연이 처음 장인 거리의 중앙 광장에 왔을 때 보게 된 것은 르센의 동상이 세워진 분수대에 기부금을 쏟아부으며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게 자리 잡고 바느질을 하거나 쇠를 두들기는 사람들 사이에도 통곡의 울음소리는 끝없이 울려 퍼졌다.
“딱, 딱 큰 거 한 장만 더 기부하신다면 우리의 신께서 크나큰 축복을 내려주실지도 모른답니다 이방인님.”
“황금의 축복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방인님?”
“젠장! 젠장!”
하얀 신관복을 입은 신관 둘이 손을 샥샥 비비며 유저들에게 기부금을 받아내는 것을 보며 희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다고 해서 정말로 축복을 받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그런 희연의 의심을 풀어준 것은 그녀가 전혀 예상 못 한 상대였다.
“잠깐 좀 비켜줄래요?”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자루를 꺼낸 킹스메이커가 분수대 앞에 서자 신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연은 이번에도 흑마법사라 뭐라 하려는 건가 하고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오오! 신께서 아뢰시길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비록 그대가 흑마법사라 할지언정 신의 안배가 있기를! 구원이 있기를! 신의 구제를 받을 그대의 영혼에 축복을!”
킹스메이커는 환영인지 거부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두 신관을 지나쳐 분수대를 향해 자루에 있던 것을 탈탈 털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황금의 향연에 처음에는 감탄하던 희연은 얼마 안 있어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돈도 아닌데 순식간에 사라지는 금화가 질릴 정도였기 때문이다.
“킹 님이 왜 돈을 버리는 걸까요?”
“아, 저거요? 분수대에 기부하면 행운 스텟이 일시적으로 생기거든요.”
“행운이요?”
“네! 제한적 특수 스텟인데 특정 시간 동안만 나타나는 스텟이에요. 보통은 저런 식으로 기부를 통해 신의 축복을 받아야만 생기는 스텟이죠.”
“신기하네요….”
퐁당퐁당 빠지는 금화 무더기가 어찌나 화려했는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희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주는 스텟이 행운이라고요?”
“네!”
“…보통 행운은 어디에 쓰이는 스텟이에요?”
“장비 만들 때. 강화할 때. 인챈트 박을 때.”
“…….”
나 때문에 쏟아붓는 돈이라는 뜻이잖아!
희연은 뒤늦게나마 킹스메이커를 말리기 위해 발을 뗐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킹스메이커는 빈 자루를 멋지게 휘날리며 돌아왔다.
“행운 스텟 몇 나왔어?”
“205. 돈으로 때운 것 치고는 제법 높게 나왔어. 이 정도는 돼야 장비를 만들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희연은 한가지 스스로와 약속을 했다. 장비 제작은 절대 하지 말자. 저것은 돈 먹는 하마 같은 콘텐츠가 아니라 돈 없으면 어설프게 손도 대면 안 되는 콘텐츠였다.
희연의 질린 낯을 무어라 해석한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어서 작업에 돌입하자며 그녀를 이끌고 천막 안으로 이동했다.
천막 안에는 장비 제작을 하는 유저들을 위한 모루나 불씨, 의자, 재단 테이블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공용으로 쓰이는 물건임에도 제법 질 좋은 물건들이었다.
제작이라는 것이 원체 집중이 필요한 작업인 만큼 괜한 반목이 일어나지 않도록 1인의 몫으로 구비된 물건들 사이사이에는 두툼한 커튼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에 자리 잡은 그들은 먼저 커튼을 치고 위에 매달린 전등을 켰다. 킹스메이커가 요정의 옷감을 꺼내는 것을 본 희연은 서둘러 자신의 인벤토리를 열어 재료를 끄집어냈다.
“제 걸로…!”
“오리 님 것도 쓰고 이것도 쓸 거예요.”
“하지만 그거 킹 님 거잖아요.”
“전 어차피 제 장비 다 만들어서 이거 안 쓰는걸요. 애초에 나중에 오리 님 장비 만들 때 쓰려고 뜯어낸 거였어요.”
“그래도…. 장비 하나 만드는데 제 것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아.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라 그래요.”
“?”
희연은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은 하나였다. 고로 장비 역시도 하나인 게 맞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오리 님. 장비의 꽃이 뭔지 아시나요?”
“재료…?”
“아뇨. 장비의 꽃은 강화예요.”
그 말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커튼 사이로 여전히 분수대에 매달려 울부짖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잠깐 입고 말 게 아니라면, 아니. 설령 잠깐 입고 말지라도 장비는 강화를 시켜줘야 해요. 최소 강화 +12에 추가 옵션 세 개, 스텟이 +가 아닌 %가 나오는 거로.”
“그… 어, 음….”
미지의 세계에 발 디디기도 전에 학부터 땐 희연이 킹스메이커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다만 여전히 왜 여러 개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그래도… 하나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세 번 실패하면 터지거든요.”
“?”
“강화 세 번 실패하면 장비가 깨져요. 쨍그랑.”
가벼운 어조와 달리 내용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희연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번 강화 성공률이 몇이에요?”
“한 번도 실패 안 하고 스트레잇으로 가는 거요?”
킹스메이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희연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때론 모르는 게 아름다운 결말일 때가 있는 법이에요 오리 님.”
“…….”
“그리고 어떻게 겨우 12번에 만족을 해요. 내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아마추어 제작자도 아니고. 겨우 강화 12로 만족하기엔 제 자존심은 드높은걸요.”
“며, 몇으로 하실 거예요? 아니, 최대 강화 횟수가 몇이에요?”
“제 위명과 명예에 흠가지 않을 정도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킹스메이커의 위명과 명예가 언급되자 희연은 더더욱 불안해졌다. 결국 고개를 돌려 뉴비 없지를 찾았지만 그는 희연의 시선을 외면하고 모르는 척 딴짓을 부렸다.
“없지 님….”
“역시 신관은 흰색이지…!”
“그럼 그럼. 우리 오리 님이 흰색이 참 잘 받아. 흰색, 검은색, 금색 필요한 색 다 집어넣어야지.”
“친구 친구! 금박에는 뭐다?”
“당연히 연금술사의 금이 최고지!”
틀렸어. 이 사람들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아….
희연은 허무한 마음으로 장단이 잘 맞는 두 부길마를 배신에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왜 킹스메이커가 온실에서 옷감과 실을 언급하는 희연을 보며 왜 그런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왜 뉴비 없지가 흐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이곳에 닉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닉이었다면 분명 끝도 모르는 사치스러운 무언가를 만드는 킹스메이커를 말려줬으리란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어? 길마님 여기로 온다는데?”
“정말? 벌써 끝났대?”
“어어…. 결국 못 만났다나 봐. 요 앞이라는데….”
뉴비 없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튼을 걷고 익숙한 신비로운 백발의 남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닉 님…!”
“?”
만난 이래로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을 반기는 희연의 모습에 닉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은 희연을 지나 킹스메이커에게로, 끝내 그녀의 앞에 쌓인 옷감과 실 쪽으로 움직였다.
“아.”
대충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닉은 인벤토리를 연 뒤 자신의 몫으로 받았던 요정의 옷감을 꺼내 옷감 더미 위로 올려두었다. 담담한 그 모습에 희연은 충격을 받았다.
“닉 님까지 그럴 줄 몰랐어요….”
허탈한 희연의 말에 닉은 조금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비는… 중요하니까요.”
평소에 남들과 비교했을 때 얌전한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지 그도 결국은 하드 플레이를 즐기는 유저였다. 드래곤을 키운다는 점부터 희연은 의심을 했어야 했다.
“오리 님….”
킹스메이커는 옷감을 올려둔 테이블 앞을 서성이며 어떻게든 자신을 말리려 하는 희연에게 결국 뼈아픈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행운 스텟 제한시간이 생각보다 짧아요.”
“…….”
“오리 님이 예상하는 시간보다 훨씬. 아주 많이.”
차마 자신 때문에 또다시 킹스메이커가 분수대를 황금으로 채우는 꼴을 볼 수는 없던 희연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뒤로 물러났다.
킹스메이커는 그 모습에 즐겁다는 듯 웃으며 테이블 한쪽에 다른 재료들을 하나씩 올려두기 시작했다. 기이하게 빛나는 금괴, 날카로운 단면이 눈에 띄는 흑요석, 푸른 물결을 담은 것 같은 새하얀 가리비 뭉치였다.
희연은 그중 가장 평범해 보이는 가리비를 손에 쥐었다가 화들짝 놀라 고이 테이블 위에 돌려놓았다.
[<순례자의 가리비(설화)> : 신성의 땅 위헬브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눈물 흘린 신의 흔적이 남아있다. 미르그의 신도들은 매해 그 흔적을 찾아 순례자의 고행길을 걸어가는데, 이때 마침내 신에게 고해하고 용서받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대신하여 가리비를 가장 귀한 것, 가장 천한 것과 한데 묶어 신에게 바친다. 그 가리비를 순례자의 가리비라 한다.]
“…내가 뭘 본거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가리비를 힐끔이는 희연의 모습을 오해한 킹스메이커가 그중 하나를 잡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예쁘죠? 심심하면 이걸로 아무거나 한번 만들어볼래요?”
“이젠 무섭기까지 하니까 그러지 말아 주세요….”
“?”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 번 더 희연에게 권유했다. 희연은 거부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가리비를 천 위에 한데 모으더니 망치를 꺼내 부수기 시작했다.
가루가 되는 가리비를 보며 희연은 괴로워했다. 심지어 처음으로 보는 등급이 매겨진 아이템이 저 가리비였다. 핼쑥해지는 희연을 보다 못한 닉이 심심한 위로를 건넸으나 이미 한번 배신을 당한 터라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닉 님도 저런 재료로 만들어진 장비를 받았었나요?”
닉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목 부근을 가리켰다. 그의 목을 장식하고 있는 건 화려한 목걸이였다.
금실로 수가 놓인 보라색 바탕의 천 두 줄이 나란히 늘어진 목걸이는 사이에 금장식과 보라색 보석이 대칭을 이루며 장식되어 있었다.
움직일 때면 짤랑짤랑 흔들리는 보라색 보석에 자연스레 시선을 빼앗긴 희연을 보며 닉은 말했다.
“…이 목걸이에 장식된 보석이 미르그 교단의 성물이에요.”
“아.”
킹스메이커의 뉴비 사랑은 참으로 지독했다. 남의 교단 성물을 신관도, 성기사도 아닌 테이머에게 걸어줄 정도로.
희연은 더 이상 놀라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다. 그 다짐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령 킹스메이커가 가루가 된 순례자의 가리비를 물과 섞는 것을 보아도, 흑요석을 솥에 넣고 이상한 가루를 뿌려 액체로 만드는 것을 보아도, 금 역시도 액체가 되는 것을 보아도 말이다.
“…저 금도 평범한 금은 아니죠?”
“이 목걸이에 금도 저 금이에요.”
고로 너 또한 이만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