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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119)화 (119/251)

119화

아주 잠시, 빛의 조각 귀걸이가 르센 신의 성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가설이었다. 성물이 겨우 레벨 28용 아이템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희연은 아무리 앞서 예시가 있었다고는 하나 함부로 의심하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다.

“귀걸이가 하나인 건 한쪽에만 끼우는 거라 그런 거죠?”

“네네! 원하는 쪽에 가져다 대면 그쪽에 끼워질 거예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고민하던 희연은 귀걸이를 왼쪽으로 가까이 가져다 댔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액세서리 투명화까지 완료한 희연은 묘하게 지친 기분으로 킹스메이커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제 아나토한테 가서 신발 맡기는 걸 빼면 장비 맞추는 건 끝난 거죠?”

“네? 아뇨? 무기가 남았어요.”

“아. 그러면 무기가 마지막 맞죠?”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으며 킹스메이커는 말했다.

“장비의 꽃은 인챈트죠?”

“그건 또 뭐예요…?”

“좋은 거요!”

킹스 메이커는 자세히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희연은 인챈트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녀와 같은 총을 사용하는 유저 료한에게서 말이다.

당시 그는 힐러이면서 총을 아주 잘 쏘는 것처럼 보이는 희연의 무기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많은 질문을 했다. 그중 하나가 인챈트가 뭐냐는 질문이었다.

어렴풋이 짐작 가능한 것은 그 인챈트, 라는 것이 무기에 뭔가를 한다는 정도의 사실이었다. 반지를 거절당했던 킹스 메이커는 그 이상 거절당할 생각이 없었는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커튼 밖을 나섰다.

그 모습에 테이블 위에 앉아 있던 악령들이 희연의 옷자락에 차례로 매달렸다.

[월드 메시지 (21세기 킹스메이커) : 무기 제작 의뢰 / 총 / 렙 33용 (렙 33이 쓰게 만들기만 하면 됨) / 주 스텟 마력, 민첩 / 필요한 재료 지원 (주 재료 지원) / 강화 +12 이상 (+15 시 추가금 지급) / 강화석, 강화 비용 지원 – 나중에 한 번에 정산 / 선착 1 – 귓말ㄱㄱ]

얼떨결에 킹스메이커를 따라 밖으로 나왔던 희연은 눈앞에 뜬 메시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희연의 반응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아쉬움이 듬뿍 담긴 어조로 말했다.

“가능하면 내가 무기까지 만들어주고 싶긴 한데 총기 관련 쪽으로는 경험이 없어서요. 괜히 오기 부리기보단 만들어 본 애들한테 의뢰 맡기는 게 낫거든요.”

총은 못 만드는구나….

희연은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킹스메이커를 보았다. 그사이 누군가 연락을 넣은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허공에 손짓을 했다.

“지금 하는 작업 끝내고 이쪽으로 오겠다는데요. 음…, 여기 시간으로 하루는 걸린다네요. 어떻게 할까요? 지금 연락 온 애가 화기류 쪽을 제일 잘 만드는 대장장이이긴 한데.”

“저는 상관없어요.”

“그래요? 그러면 연락 올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도록 해요. 아나토 쪽도 지금 가면 될 것 같긴 한데….”

지도를 꺼낸 킹스메이커가 아나토의 가죽 공방 위치를 찾는 사이 뉴비 없지가 슬그머니 다가와 희연에게 말했다.

“오리 님, 오리 님. 아나토한테 가기 전에 제작 스킬 얻으러 가지 않을래요?”

“제작 스킬이요? 저도 얻을 수 있어요?”

“네! 당연하죠! 가서 그냥 얘기 들어주면 제작 스킬 주거든요. 이 근처니까 시간 있을 때 가서 받으면 좋아요. 제작 스킬이 있어야 장비템에 추가 정보가 뜨거든요. 그 스킬이 없으면 내구도 같은 걸 못 봐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킹스메이커가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러면 없지랑 같이 가서 제작 스킬 얻고 와요 오리 님. 나도 가서 뭐 좀 사 와야 할 게 있거든요. 아나토 공방 어딨는지 알지? 스킬 받고 거기서 만나자.”

“뭐 사게?”

“스파이가 여기 있었네.”

“?”

“아냐. 이따 봐.”

킹스메이커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고는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희연은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뉴비 없지의 질문을 통해 킹스메이커가 또 무기에 뭘 하려나 짐작이라도 해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뉴비 없지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어서 가자며 희연을 채근했다. 희연은 뉴비 없지에게서 알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 뒤를 쫓았다. 함께 가는 사람 중에는 닉도 있었기에 질문의 대상자는 바꾸면 되었다.

“혹시 닉 님은 킹 님이 뭐 사러 갔는지 아시나요?”

“인챈트용 보석을 사러 간 걸 거예요.”

다행히 닉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희연은 반색하며 물었다.

“그 인챈트 라는 게 대체 뭐에요?”

“장비에 붙는 추가 옵션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강화보단 쉽고, 돈도 많이 안 들어요.”

“…그 강화보다 쉽고 돈이 많이 안 든다는 기준이 이 장비 기준인가요?”

희연이 가리키는 것은 당연하게도 유구한 긍휼 세트였다. 사실이었는지 닉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희연은 그 이상 닉을 더 추궁해본다거나 하지 못했다.

제작 스킬을 주는 NPC가 근처에 있다던 뉴비 없지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이동한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걷던 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닉을 보느라 앞을 안 봤던 희연은 딱딱한 갑옷에 부딪혀 튕겨 나간 뒤에야 제대로 앞을 보았다.

“윽…!”

“으악! 오리 님 괜찮아요?”

“네에…. 확실히 장비 좋네요. 저 안 죽었어요.”

“제 뒤에서 부딪히면 넉백이랑 반사 효과 때문에 날아가거든요. 장비 안 바꾸고 부딪혔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그의 말에 희연은 당황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장비 안 바꿨으면 저 진짜로 죽었어요? 농담이었는데….”

뉴비 없지는 답을 피했다. 그래서 희연은 조금 슬퍼졌다. 그런 희연을 위로하듯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악령이가 뭉툭한 손으로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악령이의 모자에 매달려 있던 병사 악령이 그 행동을 따라 했고, 악령이는 자신의 머리를 두들기는 병사 악령의 모습에 충격받은 듯 입을 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두 악령의 행동을 구경하던 희연을 뉴비 없지가 조심스럽게 툭툭 두들겼다. 혹여나 또 자신과 부딪혀 튕겨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으로 말이다.

어깨가 마주 닿을 정도로 몸을 웅크리고 구긴 뉴비 없지는 갑옷을 입고 그런 몸짓을 하는 것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태연한 얼굴로 손끝을 들었다.

“오리 님, 저기 저 노부부가 제작 스킬을 주는 NPC예요.”

“화단에 앉은 사람들이요?”

“네! 가서 구두가 멋지네요, 라고 말하면 옛날얘기를 해주는데 그걸 다 듣고 나면 아까 킹이 쓴 제작 스킬을 줘요.”

“제작 스킬 얻는 방법이 어렵지 않네요?”

희연의 말에 뉴비 없지는 손끝으로 눈 사이를 꾹 눌렀다.

“거기에는 슬픈 과거가 있죠.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아. 아까 말하려다 만 그 게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사건이요?”

“네! 그거! 하지만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스킬부터 먼저 얻읍시다!”

뉴비 없지는 웅크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노부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성기사와 부딪히면 튕겨 나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현재 그들 주변에 있는 이들 중 대다수가 그리 튼튼하지 못한 제작직 유저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길은 만들어졌다.

중앙 광장의 인구 밀집도가 에빌론의 중앙 광장과 비슷한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참 쉽게 길이 만들어졌다 볼 수 있었다. 희연과 닉은 뉴비 없지의 뒤를 바짝 붙어 감으로써 편안히 노부부 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다만 뉴비 없지의 바로 뒤에 서는 것은 희연이 아닌 닉이었다. 힐러보다는 테이머가 튼튼하기 때문이었다. 실수로 그가 뉴비 없지와 부딪힌다 해도 희연처럼 튕겨 나갈 일은 없었다. 덕분에 뉴비 없지는 불편하게 몸을 구긴다거나 하지 않았다.

다행히 노부부가 있는 화단 쪽으로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널찍했기에 그는 그 뒤로도 편안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가벼운 나들이를 나온 복장으로 화단에 앉아 있던 노부부는 희연의 인사에 포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젊은 이방인 친구구나. 이거, 집에서 구운 쿠키인데 좀 먹어보겠니?”

“아, 고맙습니다.”

반사적으로 노부인이 내미는 쿠키를 받아 든 희연은 언질 받았던 키워드를 내밀었다.

“구두가 멋있어요.”

“내 구두 말인가?”

반응은 내내 미소만 짓던 노신사 쪽에서 나왔다. 그는 부인과 맞춘듯한 짙은 남색의 말쑥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는데, 깔끔하고 단정한 옷만큼이나 구두는 반질반질 윤이 났다. 구두가 멋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흠흠, 이 구두로 말하면 말이지….”

[밤마다 찾아온 꼬마 손님들 : 구두장이 페토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그는 자신의 추억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좋아해 곧잘 이야기하곤 했다. 페토는 에빌론에 온 이방인들 역시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다치지 않기를’]

[퀘스트 조건 : 페토의 이야기 들어주기]

[보상 : 스킬 <구둣방 요정들의 밤>]

희연은 빠르게 퀘스트를 수락했다. 페토는 곧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희연도 아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구두장이 페토의 이야기는 에빌론의 주민이라는 점에 맞추어 각색되었다.

“에빌론이 전쟁 지역이었다는 건 자네도 알지? 나는 장인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이곳에 오래 산 덕을 보아 장인이라 불리게 된 구두장이라네. 지금은 은퇴했지만 말일세.”

페토는 즐겁다는 듯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히 늘어트렸다.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구두 만드는 법을 배웠다네. 하지만 정작 구두를 만들었던 적은 별로 없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그땐 전쟁 중이었거든. 병사들에게 필요한 건 구두가 아니었다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사람들이 구두를 찾기 시작했지. 새 출발을 위해서 말이야.”

“…….”

“하지만 말이야, 난 손이 다 굳고 말았다네. 구두를 만들어야 할 손으로 내가 한 것은 성벽을 보수할 돌을 옮기거나 다친 병사들을 옮기는 거였으니 말일세. 어찌어찌 기억에 의존하여 만든다 해도 영 속도가 붙지 않았고 좋은 물건이 나오지도 않았지.”

페토는 숨이 차다는 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희연은 페토의 손을 보았다. 손마디가 굽은 손은 거칠었다. 가죽을 다루고 구두를 만드느라 거칠어진 것도 맞았지만 손끝 곳곳에 남은 흉터는 그로 인해 생긴 것들이 아니었다.

그 흉터 위로 주름진 다른 손이 덮였다. 노부인의 손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기밖에 안 됐다네. 구두를 팔고, 구두 만들 가죽 하나를 사면 남는 건 그날 한 끼 간신히 먹을까 말까 한 돈이었지. 다른 일을 해볼까도 했지만 말이야…, 내가 배운 게 그것뿐인데 뭐 어쩌겠나.”

“…….”

“그러던 어느 날, 신비한 일이 일어난 걸세. 그날은 너무 지쳐서 구두 만들 가죽만 준비해두고 잠자리에 들었지. 그런데 글쎄, 다음날이 되니 구두가 완성된 거 아닌가. 그것도 아주 훌륭한 구두가 말일세. 그 구두를 팔았어. 구두 한 켤레 값 치곤 아주 후하게 받았지.”

그 뒤로는 희연이 아는 이야기 그대로였다. 구두장이 노인은 두 켤레 분의 가죽을 샀고, 다음 날에 두 켤레의 구두가 생겼다. 그것이 반복되어 노인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 구두를 만들었던 것은 요정들이었고 노부부는 요정들에게 답례했다.

“요정들은 참 귀엽지. 신기하고 말일세. 그들의 친절에 적절한 답례를 한다면 요정의 축복은 계속될걸세. 혹여나 자네도 나중에 요정의 도움을 받게 된다면 말이야 쿠키 하나, 양말 한 켤레라도 선물로 주게나.”

[<밤마다 찾아온 꼬마 손님들> 퀘스트 성공!]

[스킬 <구둣방 요정들의 밤>을 얻었습니다.]

[구둣방 요정들의 밤

요정 lv. 1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어려운 장비를 만들수록 요정들의 손재주가 늘어납니다)

요정과의 소통 lv. 1 (요정들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수록 원하는 장비를 얻기 쉬워집니다)

요정의 장인 정신 lv. 1 (요정들의 의지가 불타오를수록 더욱 더 좋은 장비가 완성됩니다)

: 장인의 정신을 가진 요정들을 불러낸다. 꼬마 요정들에게 장비 제작을 의뢰해 보자.

현재 부를 수 있는 요정의 수 (2/2)

‘요정들의 밤에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우이. 덕분에 오늘의 내 하루는 아주 즐거워. 벌써부터 내일이 기대되고 아쉬울 정도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연의 답인사에 페토는 손을 저었다. 그 모습에 가만 미소짓던 희연은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기, 가죽 구두를 만드셨다고 했잖아요. 혹시 구두에 쓰이는 가죽을 판 사람의 이름이 아나토인가요?”

“음? 자네 아나토를 아나? 맞다네. 내 구두에 쓰이는 가죽은 모두 아나토가 정제한 것들이지. 내 아버지는 그 애 아버지에게서 가죽을 받았고 말이야.”

혹시나 하고 물은 말에 답이 돌아왔다. 희연은 놀란 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러면 혹시 그 아나토라는 사람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페토는 희연을 보며 눈을 끔벅이다 고개를 저었다. 거절의 의미인가 해서 희연은 조금 실망했지만 페토가 고개를 저은 것은 그 이유가 아니었다.

“아무거나가 아니지 않나. 젊은 이방인 친구, 자네가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맞지?”

“…맞아요.”

악령이의 머리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병사 악령 쪽을 힐끔 바라본 희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빌론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나토와 친하게 지냈던 병사에 대해서 혹시 아시나요? 정확히 언제라고 확실히 말은 못 하는데, 분명 있었을 거예요. 눈물이 많았던 병사인데….”

“…미안하지만, 내가 이름을 외운 병사들은 모두 전사들의 무덤에 묻힌 자들이라네. 연고 없는 이들인지라 나라도 기억해줘야겠다 생각했었거든. 그렇다 보니 무덤에 묻히지 않은 이들을 나는 모른다네.”

“…….”

“혹시 이름은 모르나? 내가 모르는 이름이라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았다는 의미인데….”

“이름은….”

모른다. 희연은 병사의 이름을 몰랐다. 병사 악령 본인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희연을 지그시 바라보던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죽었구나.”

“…….”

“이방인 친구, 자네가 말하는 그 병사는 죽었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이야.”

“…네.”

평온하던 노부인의 얼굴이 슬픔으로 흐려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나토 그 애는 병사들을 참 싫어했지. 전쟁을 참 싫어했어. 마침내, 위헬브의 군대가 떠나던 날 그 애의 모습이 참 기억에 남아.”

“…어땠는데요?”

“그날 아나토는 산을 올랐어. 한낮에 올라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내려왔지. 그 애 품에 꽃이 한가득하였는데, 그중 시들지 않은 게 없었고 멀쩡한 게 없었지. 아나토 그 애는, 그 꽃 뭉치를 들고 아주 오래, 오래 마을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단다. 날이 바뀌어 발이 퉁퉁 부어도,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도.”

“…….”

“그러다 이내 그 꽃 속에 얼굴을 묻으며 울었지. 꽃 따위 안 갖고 와도 된다고 하더구나. 꽃 따위, 자기에게 얼마든지 있다며.”

뭐라고 해야 할까. 희연은 말을 고를 수가 없어 다무는 쪽을 택했다.

“꽃은 시들었단다. 아나토는 그 꽃을 전사들의 무덤에 묻었지.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꽃을 묻었는지 나는 몰라. 다만, 그 애는 이렇게 말할 뿐이지. 아주 먼 곳에서 잘살고 있다는 소식, 그 소식 하나면 꽃값으로, 꽃을 꺾으러 산을 헤매던 고생의 대가로 충분하다고.”

“…….”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나토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병사는 살아 있다.

멀쩡히 살아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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