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오리 님.”
“아, 킹 님….”
희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염색 거리, 그중에서 가죽을 다루는 공방의 앞에 서 있었던 터라 코끝이 조금 찡했다. 가죽 약품의 독한 냄새 때문이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희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가면 아나토를 바로 만나게 되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공방주 아나토는 자신의 제자들이 어엿한 자기 가게를 차릴 때까지 일을 맡기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들어가요.”
문 앞에 선 희연은 두꺼운 나무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숨을 골랐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근처를 서성일 때도 코를 찔렀던 약품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러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오히려 그 향은 옅어지고 대신 다른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향기의 출처는 집안 곳곳에 장식된 꽃이 피지 않은 푸른 이파리의 로즈마리였다.
이곳저곳에 가죽이 크게 늘어져 있었지만 공방은 주인의 성격을 엿보여주듯 깔끔하단 인상을 주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무난했고, 솔직히 평가한다면 어느 한 곳에도 시선이 가지 않았다.
벽과 바닥, 안을 채운 모든 물건이 조화롭게 평범했기 때문이다. 숲속에 나무 한 그루 더 심는다고 눈에 띄는 게 아니듯 아나토의 가죽 공방 또한 그랬다.
다만 딱 하나.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하는 물건이 있었는데, 차례로 늘어진 가죽 사이에 숨겨지듯 놓인 커다란 가죽 지도였다. 벽면 전체를 덮는 그 지도가 얼마나 크던지 그 앞에 아무리 많은 가죽을 늘어트려도 차마 다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희연의 시선 역시도 그 지도에서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저 지도는….”
“시드론의 지도예요. 저렇게 커다란 지도로 보니까 생소하죠?”
희연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는 오래되어 보이는 만큼이나 그 정성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손때와 낡고 헤진 흔적이 있음에도 떨어지지 않는 가치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크기가 크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죽을 다루던 이의 솜씨가 유난히 뛰어났던 것일까. 지도에 새겨진 것은 단순히 산과 큰 강줄기, 지역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죽 지도는 모든 것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희연의 시선이 차근차근 내려와 마침내 그들이 있는 에빌론에 닿을 때쯤 낯선 목소리가 공방 안을 울렸다.
“손님이 오셨군요. 안에 있느라 미처 몰랐습니다.”
“아….”
목소리의 주인을 본 순간 희연은 탄식을 뱉었다. 두툼한 앞치마를 메고 그들에게 오는 여자의 밀 빛 머리는 촘촘하게 땋여 있었다. 눈매는 서늘했고 굳은 입매는 그녀의 성격이 살가운 편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나토였다. 병사에게 돌아올 곳이 되어주겠다 하고, 돌아오지 않는 병사 대신 제품에 스스로 꽃을 꺾어 안아 들었던 그 아나토.
눈가에는 주름이 지고, 격분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던 얼굴이 아주 오래전 밀랍처럼 굳어 버린 것 같은 모습일지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병사의 기억에서 아나토는 선명했다. 그녀가 아나토다.
희연은 말문이 막히는 기분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눈만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희연을 대신해 킹스메이커가 입을 뗐다.
“오랜만이에요 아나토. 의뢰를 맡기러 왔어요.”
“무엇을 맡길 거죠?”
“신발, 그리고 총을 넣고 다닐 홀스터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따로 쓰고 싶은 재료가 있나요?”
“네, 아나토. 오리 님?”
킹스메이커의 부름에 희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 아나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건조한 회색 눈과 눈이 마주친 희연은 진정하기 위해 입안에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슬프게도 조금도 아프지 않아 별 효과가 없었다.
“…곰 가죽을 쓸 거예요.”
인벤토리를 열어 던전에서 얻었던 가죽을 꺼낸 희연은 가죽을 받기 위해 가까이 다가온 아나토를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병사 악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사 악령은 그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나토를 보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에 병사 악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인 것인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신은 어떤 것을 원하죠?”
“발목이 짧은 디자인이 좋겠어요.”
“홀스터는?”
“허리와 허벅지 모두에 매는 방식이요. 아, 나중에 총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 주머니는 부착형으로 해줘요.”
아나토와 킹스메이커는 빠르게 대화를 했다. 각자가 사무적인 말만 하니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희연이 불린 것은 디자인이 모두 정해졌을 때였다.
“착용하실 분은 절 따라오세요. 치수를 재야 합니다.”
“네….”
줄자가 아나토의 손에 들렸다. 희연은 아나토가 서 있는 커다란 재단 테이블 앞으로 이동했다. 줄자가 차례로 희연의 허리와 허벅지, 발목과 발의 둘레를 쟸다. 꼼꼼히 체크하는 아나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희연은 답답한 심정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공방에 들어설 때부터 눈에 띄었던 가죽 지도가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늘어진 가죽 탓에 보이지 않던 부위가 자리를 이동한 덕에 보인 것이다.
멍하니 그 지도를 훑어보던 희연의 눈이 커진 것은 에빌론의 아래 지역을 훑어볼 때였다. 시드론이라는 나라의 이름으로 묶인 땅의 끝.
굳어버린 희연을 눈치채지 못한 아나토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재단 테이블에 올려둔 두꺼운 곰 가죽 쪽을 향해 있었다.
“쓰이는 것은 이것뿐인가요?”
희연은 여전히 가죽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답했다.
“네….”
“그렇군요. 얼마 걸리지 않는 작업이니 조금만 기다….”
“아나토…!”
아나토의 입이 다물렸다. 희연을 보는 그녀의 회색 눈은 가죽을 살펴볼 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눈빛에 망설이던 희연은 결국 입을 열었다.
“저 지도에, 그러니까…, 제가 가진 지도랑 저 지도에 나온 지명이 다른데….”
“옛 지도라 그렇습니다. 전쟁 이전에 쓰이던 지도죠. 많은 지역의 이름이 바뀌었고 땅에도 변화가 생겼으니 진즉 버렸어야 했으나 아버지의 유품이라 두었습니다.”
“옛날 지도….”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가 있었다. 희연은 떨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암베르니아….”
“…….”
“저 지도에 나온 암베르니아도, 지역명이 바뀐 건가요?”
암베르니아. 던전에서 바닐라가 들고 도망갔던 신분패에 나온 지역명이었다. 병사의 신분패는 아니었다. 그건 소년병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동굴에 남아 있던 또 하나의 신분패는 누구의 것일까.
소년병의 것이다. 병사를 죽이고 도망간 밀 빛 머리를 가지고 있던 그 소년병의 것.
아나토는 물끄러미 지도에 새겨진 암베르니아라는 이름을 보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답을 들려주었다.
“아니요. 저 땅은 더 이상 시드론의 땅이 아니게 되었기에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
“위헬브와의 전쟁에서 빼앗긴 국경 도시죠.”
말을 하는 아나토의 회색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는 효용성 없어진 지도를 치우지 않은 이유가 정말로 아버지의 유품이어서만 일까.
“…그러면, 저 땅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이 되었죠.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머나먼 타국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전쟁은 끝났다고 해서 정말로 끝났다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아는 사람이 혹시 저기에 있나요…?”
“…예.”
“어떻게 알아요? 아는 사람이 저기에 있다는 걸?”
희연은 물어보면서도 아나토가 답해줄까 싶었다. 매정할 거라는 킹스메이커의 말과 달리 아나토는 매번, 이상할 정도로 희연의 질문에 곧잘 대답해주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답해주었다.
“암베르니아는 전쟁 이전부터 국경 도시였기 때문에, 가는 길에 있는 관문소를 지날 때면 신분패로 신분을 증명하고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
“그래서 알아요.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요.”
기록이 남았다는 말에, 희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꽃을, 전해주러 왔어요….”
희연의 손 위로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볼품 없는 메말라 비틀어진 꽃이었다.
처음 얻었을 때는 나름 곱게 말린 것처럼 보였던 꽃은 던전을 나오는 순간 세월의 흐름을 맞이한 것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희연은 그것을 아나토에게 내밀었다. 아주 조심히.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바스러져 가루가 되는 꽃이었기 때문이다.
아나토는 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꽃이 무엇인지, 왜 자신에게 그것을 내미는지에 관해 물음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희연이 물으면 족족 답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에 초조해진 것은 희연이었다.
“이 꽃은…!”
“곰 가죽의 질이 좋군요. 서둘러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죠.”
“아나토!”
“이 이상 물건에 추가할 사항이 없나요?”
“잠깐만요, 아나토. 할 말이 있어요.”
“저는 없습니다.”
돌아오는 답이 서늘했다. 밀랍 인형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희연을 잠시 노려보던 아나토는 뒤돌아 가죽을 살폈지만, 그마저도 아주 잠시일 뿐이었다.
거칠게 몸을 돌린 아나토는 성큼성큼 희연에게로 다가오더니 손을 들었다.
짝-!
“…!”
“당신도 이제 없겠군요.”
희연은 얼얼한 손등을 보다 시선을 내렸다. 맥없이 팔랑거리며 떨어진 마른 꽃은 나무 바닥에 닿자마자 완전히 바스러져 버렸다.
“…나가요.”
“…….”
아나토는 문을 가리켰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새빨개진 눈이 희연의 입을 막았다. 희연은 결국 입을 닫았다.
***
“아무래도 이번 퀘스트는 실패인 것 같죠?”
힘없는 희연의 물음에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서였다. 아나토는 병사가 죽었음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진실을 밀어붙이기엔 희연은 그리 모진 성격이 못됐다.
빨대 끝만 잘근잘근 씹는 희연을 보며 고민하던 킹스메이커가 입을 열었다.
“특성을 써먹어 보는 건 어때요?”
“…….”
“짐작했겠지만 특성은 퀘스트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대화나 행동을 통해 상대 NPC에게 특정 감정을 어느 정도 끌어내면 발동하는 이벤트예요. 겹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특성이 갈리고 거기서 퀘스트의 분기점이 달라지죠.”
“…킹 님은 특성이 뭐예요?”
“조금 폭력적인 거요.”
“그렇구나….”
잘근잘근 물던 빨대 끝을 놓지 않으며 희연은 머리를 테이블 위로 뉘었다. 빨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보라색 액체가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제가 잘못한 걸까요?”
입에서 떨어진 빨대가 테이블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끝에는 붉은 눈만 깜박이는 병사 악령이 앉아 있었다. 아나토와 모든 대화를 들었음에도 여전히 아무 반응 없는 병사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까요 조금 감상적인 조언을 해줄까요?”
“많이 달라요?”
“일단 전자를 먼저 말하면 없지랑 길마님이 뭐라 할 것 같다는 점이 다르죠.”
“…….”
희연은 자세를 바로 했다. 손에 턱을 괸 킹스메이커가 그런 희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현실적으로 조언하자면, 아나토 쪽은 그냥 포기해요. 오리 님이 받은 퀘스트는 병사 악령을 성불하자는 방향이지 아나토랑 잘 풀게 해줘라, 가 아니잖아요. 솔직히 내가 보기엔 이 악령이 아나토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잘 구별도 안 되거든요.”
“…감상적인 조언은 뭐예요?”
“감정 호소죠. 아까 아나토한테 일부러 편지 안 준 거죠? 그거 하나면 아나토도 바로 병사의 죽음을 인정했을 거예요.”
“…그게 감상적인 조언이에요?”
“감상을 끌어낸다는 점에서요.”
“이야….”
뉴비 없지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희연은 다시 테이블 위로 이마를 박았다. 에빌론의 중앙 광장에는 오늘도 사람이 많았고 사건, 사고도 많았다. 그 소란스러운 만큼 희연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닉 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가만히 앉아 있다 지목당한 닉에게서도 별다른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진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고민이 깊은가요?”
“!”
“이런.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주인은 광장 카폐의 주인 레몬이었다. 화사한 금발의 카폐 주인은 헬르벨의 정보를 찾을 때도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희연은 혹시나 하는 기대심으로 그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두 제외하고 겉핥기 식의 이야기만 들려줬음에도 레몬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굴었다.
“저라면 모두 묻을 겁니다. 가끔은 알면서도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진실도 있으니까요.”
“…….”
“모두가 지쳐서 없던 일로 치부하고 싶은 일을 곪을 것이 무섭다는 이유로 상처를 헤집을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이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요. 다만 저는 겁쟁이라서요. 피할 수 있다면 끝까지 피할 거랍니다.”
레몬은 고개를 까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도시의 토박이들은 그 수가 몇 되지 않아, 서로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죠. 특히 요른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가령, 구두장이 페토 씨가 요른의 빵집에서 평소 먹던 것과 다른 빵을 사 간다면 그날 저녁 직공 장인 례는 식탁에서 수프에 적신 빵을 먹으며 자신의 동생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겠죠.”
“…….”
떠나는 레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희연이 입을 뗐다.
“…저 뭐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
“지금 시간에도 요른의 빵집이 열려 있어요?”
희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킹스메이커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곧 닫을 텐데….”
“…도시에서 펫 쓴다고 바로 쫓겨나진 않겠죠?”
***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잉거는 고개를 들었다. 이런 시간에 올 손님이 없는지라 그녀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문이 똑똑거리는 구나.”
“그러게요. 제가 나가볼게요, 아버지.”
잉거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문을 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는 낯설지 않은 손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 톨러와 잉거의 집에 찾아온 손님은 희연이었다. 잉거는 희연의 옆에 서서 투레질하는 유니콘 에흐테를 바라보다 그 뒤편으로 눈을 굴렸다.
“범법자다!”
“잡아라!”
“뒤로 가세요, 뒤로. 잠깐만 대화할 거예요.”
성을 내는 병사들을 검은 낫으로 쭉 밀어버린 킹스메이커가 잉거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땅을 뚫고 나온 장미 덩굴이 병사들을 묶었고 뉴비 없지가 그들을 한대 모아 놓고 설득을 시도했다.
“이번만 모른 척해주면 오늘 식탁에 귀하디귀한 포도주가…!”
잉거는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만 끔벅였다. 그런 그녀의 앞에 희연이 끼어들며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숨기고자 했다.
그런 희연에게선 아주 진한 단내가 났는데, 비록 동문 언덕의 저택에서 따로 생활했으나 에빌론 토박이라 할 수 있는 잉거에게는 낯설지 않은 향이었다. 에빌론의 특산품 설탕 제비꽃의 냄새였다.
“잉거, 혹시 톨러 있나요?”
“나 불렀나?”
소란에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톨러를 보며 희연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톨러.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급한 나머지 본론부터 말한 희연이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무덤이요. 무덤을 만들고 싶어요.”
무덤이란 말에, 오랜 생활 무덤 지기의 삶을 살았던 톨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