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몬스터 웨이브….”
희연은 눈앞에 뜬 문구를 중얼거리며 꽤나 오래전에 보았던 문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일대에 있던 모든 생명체가 최상위 종족이 주는 두려움에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근처 민가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확률이 증가합니다!]
요정과 목동 퀘스트 진행 중 루로가 우는 순간 떠올랐던 경고였다. 희연은 닉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 닿는 것은 새하얀 드래곤 루로였다.
먀-!
눈이 마주친 드래곤은 방싯 웃으며 짧은 손을 파닥거렸다. 그 무해한 모습에 희연은 역시 제 착각이겠거니 하며 생각을 바꾸려 했지만 그런 그녀의 의도는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말 몇 마디로 엎어버렸다.
“우리 길마님 덕에 이런 소소하고 즐거운 이벤트도 다 하고…, 이래서 잘 키운 뉴비 하나가 만렙 부하 10명 안 부럽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죠?”
“여윽시 우리 길마님! 우리 심심할까 봐 언제 이런 이벤트를 준비 했…! 아, 루로 울 때 내가 같이 있었네.”
“…….”
닉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착실하게 물약을 마시고 반지를 끼고 팔찌를 착용하고 머리를 묶었다. 어느새 그의 옆에는 녜디아도 소환되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병사들은 그를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제지하지 않는 것을 넘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치 격려하듯 희연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본인들의 짐을 챙겨 떠났다.
희연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에 킹스메이커가 흥이 서린 어조로 설명했다.
“몬스터 웨이브처럼 이방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발생하면 심각한 범법 행위를 저지른 게 아닌 이상 모두 사면해 줘요. 나가서 몬스터 잡고 이 도시를 지켜라! 하는 거죠.”
“…지금 일어났다는 웨이브가 저번에 그 농장에서 있었던 거랑 비슷한 거죠?”
“그렇죠? 그때랑은 달리 이번 웨이브는 수성전이지만요. 밖에 나가서 싸워도 되고 성벽 위로 올라가서 원거리로 싸워도 돼요. 어찌 됐든 목적은 이 도시를 지키는 거니까요.”
“그렇구나….”
“지금 레벨이 33이죠? 잘됐다. 경험치가 제 발로 걸어오고 있어요, 오리 님. 이번에 우리 레벨 35까지 찍어봐요. 새로 맞춘 장비 성능도 보고 아주 좋네요.”
킹스메이커의 말만 들으면 이 상황이 무척이나 긍정적인 상황인 것처럼 보였다. 또한, 애초에 안 싸운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희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무기를 꺼냈다.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편승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 주위에 이름 모를 사람들도 하나둘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가 재빠르게 교환 신청을 걸었다.
[‘21세기 킹스메이커’가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거부합니다.]
희연은 반사적으로 거절을 눌렀다. 거절 버튼을 누른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서 있는 희연을 돌아보며 킹스메이커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오리 님?”
“저도 모르게 그만….”
두 사람이 잠시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홀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뉴비 없지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뒤이어 킹스메이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악, 악! 어떻게 해! 나나나 수도 쪽으로 가야 해! 대신전 호출 왔어! 수도 지키래! 왜지? 왜지? 수도면 윈도 있고, Y.D도 있는데 왜 나도 부르지?”
“아 진짜? 정말 안 됐다. 잘 가 없지이… 뺙.”
남의 일이라고 웃던 킹스메이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그녀는 일견 살벌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허공에 손을 몇 번 두들기더니 욕설을 짓씹었다.
“오라 가라 명령을 하네….”
“함께 가시죠 공작님.”
공작 칭호를 갖고 있다는 죄로 킹스메이커 또한 수도의 부름을 받았다. 혼자가 아니란 점에 신나 냉큼 까불거리던 뉴비 없지를 응징한 킹스메이커는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덧씌우고는 희연을 돌아보았다.
“오리 님…, 어떻게 하지? 수도 쪽 몬스터는 레벨이 너무 높아서 데리고 가기 좀 그런데.”
“그야 저는 여기 있어야 겠죠…?”
“끽해야 여기 오는 몬스터 최고 레벨이 150일 테니까 크게 걱정은 안 되는데….”
“네? 몇이요?”
“물론 길마님이 챙겨주긴 하겠지만 바빠지면 그것도 어려워질 거란 말이죠.”
곰곰이 생각해 보던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허공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더니 희연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
“오리 님 약속하는 거예요?”
“뭐를요?”
“길탈 금지. 꼬시는 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우리의 우정과 추억과 함께할 미래를 언제나 되새기며 악마의 목소리를 무시해 주세요.”
“네…?”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시키더니 그녀를 낫에 태운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뒤를 전에 보았던 빛나는 새 스킬을 사용한 닉과 그런 닉에게 얻어 탄 뉴비 없지가 뒤따랐다.
희연은 영문 모르고 하늘을 나는 동안 주위를 살펴보았다. 도시 에빌론 안에 상주하던 유저들이 모두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몇몇은 그들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이미 견제까지 하고 있었다.
견제하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희연은 저 멀리 성벽 밖에서 먼지구름과 함께 우글우글 달려오는 무리를 보았다. 점처럼 보일 정도의 거리감이었다. 그러나 몰려드는 몬스터 무리의 수는 작은 파도와 같았다.
일전에 파드의 싱싱농장에서 겪어봤던 몬스터 웨이브는 맛보기였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 광경을 본 희연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희게 질렸다.
“너무 많은데요?”
“괜찮아요, 괜찮아. 여기 상주 중인 애들이 몇이고 평균 레벨이 몇인데요.”
그 평균 레벨을 확실하게 깎아 먹고 있는 렙 33 초보 힐러 눈오리의 돌격은 살아 있는 마법의 신 21세기 킹스메이커의 말에 조금도 안심하지 못했다.
희연은 이제야 왜 킹스메이커가 수도로 가는 것을 그리도 망설였는지 절절히 이해되었다. 그녀가 어설프게 굴다 실수해서 죽을까 봐 걱정한 게 아니었다. 그냥 죽을까 봐 걱정한 것이다.
저 압도적인 수량에 깔려 죽든, 그냥 몬스터한테 치이다 죽든 희연이 이번 웨이브에서 죽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았다.
몬스터의 수를 헤아려 보려는 의미 없는 행위를 하던 희연은 낮아지는 고도에 퍼뜩 주위를 살폈다. 뒤에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싸움에 선두, 성벽 위로 데리고 왔다.
성벽 위에는 넘치는 자신감만큼이나 번쩍이는 장비를 차려입고 화려한 펫에 올라탄 유저들이 가득했다. 땃쥐 미의 영험한 기운이 도는 것 같던 검마저 이곳의 장비에 비하면 장난감 검이었던가 하는 기억 보정이 들어갈 정도였다.
물론 그녀 하나 잡겠다고 땃쥐 미가 바로 무기를 던졌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에게도 그 검이 그리 중요했던 물건은 아니었겠지만 서도 안도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묻혀가기만 잘해도 반은 갈 것 같았다.
킹스메이커는 작은 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파고들어 길을 만들었다. 뉴비 없지가 그 길을 따랐고 닉과 희연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새까만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뉴비 없지의 뒤에 있느라 그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희연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킹스메이커가 그녀를 누구에게 인계한 것인지 깨달았다.
“뉴비님!”
게임 초반을 제외하곤 상당히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뉴비라는 호칭은 고렙들만 모인 성벽 위에서 상당한 주목을 끌게 만드는 요소였기에 희연은 시선의 틈새에 낀 기분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희연이 곤란해하는 사이에도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상대는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로 연신 그녀를 불렀다.
“뉴비님, 뉴비님, 뉴비님, 뉴비님! 늅늅늅 뉴비님!”
그 간절한 부름에 희연은 결국 다시 고개를 들었다. 뉴비 없지를 방패 삼아 슬쩍 고개를 내민 희연은 킹스메이커에게 멱살이 붙잡힌 채 매달려 있는 이름 없는 그분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 없는 그분은 킹스메이커의 손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도 희연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이전에 지호라 불리던 부엉이를 매달고 다니는 마법사가 킹스메이커와 짧은 대화를 한 뒤에야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이름 없는 그분은 곧바로 희연에게로 뛰어왔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이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희연은 빠르게 거절하고 입을 뗐다.
“소매 넣기 하지 마세요.”
이름 없는 그분은 충격을 받았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매정해요, 뉴비님…! 우리의 만남이 그렇게 끝나버린 이후 저는 뉴비님에게 전달하지 못한 물건들을 끌어안고 눈물로 매일을 지새웠는데…!”
“아, 네….”
“뉴비님이 저 없지 없지 인성이 없지의 간악한 계획에엑-!”
“?”
마지막 말은 중간에 난입한 뉴비 없지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름 없는 그분의 입을 틀어막은 뉴비 없지를 보며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없지 없지 인성이 없지가 뉴비 없지를 뜻하는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발버둥 치는 이름 없는 그분과 달리 뉴비 없지는 상쾌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희연을 보며 말했다.
“악마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맙시다, 오리 님.”
“…….”
희연은 조금,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 없는 그분은 킹스메이커에게 붙잡혔을 때보다 더 빠르게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다. 뉴비 없지를 공격함으로써 말이다.
“악, 치사하게!”
“저번의 복수다!”
불길에 휘감긴 손이 얼굴로 날아왔음에도 뉴비 없지는 치사하다, 한 번 외치고 말았다. 그는 머리에 붙은 불을 손으로 흩트리는 것으로 꺼트렸다. 오히려 놀란 것은 희연이었다.
손에서 불이 나온 것도 신기했고, 그걸 얼굴에 던져서 당황했고, 손으로 불을 꺼버려서 황당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총을 꺼내 뉴비 없지의 몸에 겨누었다.
“<치유의 빛>.”
작고 귀여운 미미한 치료량에 뉴비 없지는 훈훈하게 웃었다. 아무리 희연이 장비를 바꾸고 좋은 무기를 착용해도 레벨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는 파티 상태가 아니라 다행이라 여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오리 님이 이렇게 훌륭한 힐러예요! 거기 인성질 한 당신! 보고 배웁시다. 당신의 인성에 조의를 표합니다!”
팔을 교차해 엑스자를 만드는 뉴비 없지를 보며 이름 없는 그분은 분노로 발을 굴렀다. 몬스터 웨이브를 앞둔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두 사람의 투덕거림이 끝날 것 같지 않다 판단한 킹스메이커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희연의 앞에 섰다.
“오리 님 이쪽은 지호. 전에도 본 적 있죠? 길드 매지컬 나치의 부길마로 쟤 대신 길드의 행정을 관리하는 친구죠.”
“내 닉넴은 마법 세계는 망했어요, 고, 멋대로 길드 이름 바꾸지 마라.”
“새침데기 같은 면모가 있지만 성실하답니다.”
“저번에 그 수학 문제….”
“네네! 그 수학 문제 마법사예요.”
지호는 킹스메이커의 설명에 슬쩍 인상을 찡그리긴 했지만, 희연에게 가볍게 목을 까닥이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렙, 보유한 회복 스킬 개수, 공격 가능 범위 어디까지예요.”
“…네?”
당황한 희연을 대신하여 킹스메이커가 입에 칼을 물었다.
“실례잖니 지호야. 그런 걸 다짜고짜 물으니까 네가 사회성 부족이라고 사사게에 올라갔던 거야.”
“사사게 단골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지 마라. 게임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사회면에 이름 나왔을 인간이 뭐라는 거야.”
“우리 지호…, 자꾸 그러면 네 길드원들이 모두 x를 외치며 네 조의를 표하게 만들어 줄 거야.”
당당하게 네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을 하는 킹스메이커를 보며 희연은 눈을 굴렸다. 역시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었다.
희연은 슬쩍 발을 빼려 했지만, 동체 시력 좋은 두 마법사의 손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어디 가요. 파티 맺고 움직여요.”
“오리 님, 오리 님! 비록 지호가 사회성이 약간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얘네 길드의 마법 실력은 그럭저럭 봐줄 만해요. 여기랑 파티 맺는 게 좋아요.”
“잠깐! 뉴비님 저랑 파티! 저랑 파티해요! 제가 버스 태워 드릴게요!”
“너는 길마라는 놈이 길드원 관리를 할 것이지 자꾸 어디로 빠지는 건데!”
“지호야! 너 너무 매정해…!”
세 명의 마법사가 싸우는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희연은 손을 들어 닉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희연은 최선의 선택을 했다.
“파티 초대해 주세요, 닉 님.”
닉은 말없이 희연을 파티에 초대해 주었다. 그 모습에 이름 없는 그분이 빠르게 반응했다.
“뉴비님…! 저 집 중고 뉴비한테 물들어버렸어!”
“중고 뉴비?”
“아무것도 몰라서 이거예요, 저거예요, 물어보던 뉴비님이 이제는 스스로 행동하다니! 하…! 정말 기쁘면서도 슬프고 한탄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제 한 몸 뉴비님을 위해 불사르겠습니다.”
[파티장 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의 파티 가입을 거절하였습니다.]
“…저기요? 님아?”
“…….”
“면 대 면을 하면서 씹지 말아 주세요.”
“…….”
“감히 붙박이 주제에 테이머님께 나댔습니다. 파티 받아주세요…!”
구구절절한 말이 한참을 이어진 뒤에야 닉은 이름 없는 그분을 파티로 받아주었다.
그사이 지호는 자신의 길마를 포기하기로 결심했고, 킹스메이커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 님. 여차하면 얘를 몬스터 앞으로 던져서 목숨을 보전해야 해요. 무리하게 힐 하지 말고, 힘들면 그냥 딜만 넣어요.”
“…잠깐만. 난 물몸 마법사고 뉴비님은 딜 넣는 게 아니라 힐 넣는 힐러 아니야?”
“저런 편견에 사로잡힌 악마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말고요.”
순식간에 이름 없는 그분은 편견에 똘똘 쌓인 악마가 되었다. 열리다 못해 문짝이 날아가 버린 것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 자신하던 이름 없는 그분은 킹스메이커의 모함에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었다.
“약속이에요? 길탈 금지. 길드 이동 금지. 그리고 마음이 흔들릴 때면 이 사실을 명심해요.”
“?”
“매지컬 나치 길드는 전원 마법사라 만약 오리 님이 그 길드 들어가잖아요? 저 바글바글한 검은 무리 전부 오리 님이 힐 해줘야 해요.”
킹스메이커가 하는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던 희연은 마지막 말에는 반응했다. 빠르게 굳어가는 희연의 얼굴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우리는 가볼게요!”
“오리 님! 길마님! 즐거운 몬스터 웨이브 되세요!”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스크롤을 찢으며 인사했다. 바꿔치기 스크롤로 사라진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조그만 털실 인형이었다.
희연은 인형 두 개를 주워 인벤토리에 넣었다. 따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고,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했기에 나중에 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숙였던 몸을 피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주목하는 검은 무리의 시선에 어깨를 움찔거려야 했다.
매지컬 나치, 아니 길드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의 길드원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희연이 신기하다는 듯이 웅성거렸다.
“누구야? 힐러?”
“킹이 새로 키우는 뉴비래. 힐러. 수도 가야 해서 우리 쪽에 맡기고 갔다는데.”
“와, 걔 뉴비세스 메이컨가 그거 아직도 해?”
“야, 우리 길마도 그거 하려고 순번 뽑고 기다리고 있어.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와, 그 순번 아직도 차례가 안 왔어?”
“오, 두 번 죽이는데. 입으로 하는 것만큼 딜량이 나와야 하는데 말이지.”
“방금 누구야.”
다수의 시선에 쭈뼛거리던 희연은 그나마 안면 있는 이름 없는 그분과 닉이 있는 방향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검은 망토 무리는 그런 희연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더니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포션 줄까요?”
“힐러면 마력이지? 반지 하나 낄래요? 손이 휑한데….”
“웨이브 막아 본 적 있어요?”
“디버프 걸 줄 알아요? 힐량 어느 정도예요?”
“늅메 길드 성에 진짜로 세계ㅅ….”
“그만! 그만 물어! 우리 작고 소중한 뉴비님 겁먹은 거 안 보여?”
이름 없는 그분의 외침에 그의 마법사 길드원들은 멋쩍어하며 몸을 물렸다.
“아니…, 뉴비도 우리는 너무 오랜만에 봐서요.”
“그니까. 평화를 만끽하러 돌아온 복귀 아닌 이상에야 유입이 없어서….”
희연은 희귀한 보호종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앞만 보았다. 어느새 저 멀리 있던 몬스터 군락이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잦아지고 종탑의 종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