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126)화 (126/251)

126화

그 소리에 희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스킬 창을 열어 점검을 시작했다. 아직까지 새로 생긴 스킬을 제대로 써본 적도 없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도시를 수호하라는 퀘스트는 제법 부담되는 종류였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이 향한 곳은 이름 없는 그분 쪽이었다. 희연의 시선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봤자 뒤집어쓴 망토의 후드 탓에 올라간 입꼬리와 하관만 보였다.

“…….”

희연의 고민은 간단했다. 마법사를 케어하는 법을 모르겠다는 것. 하필이면 케이아일과 친구들 파티에는 마법사가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훌륭한 마법사였지만 너무나 훌륭한 나머지 힐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마법사와 함께하는 실질적인 파티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모두가 마법사는 물몸이라 하는데 그 물몸이 얼마나 약하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신경 써줘야 한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실수한다고 해서 이름 없는 그분이 뭐라 하지는 않겠지마는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미숙함으로 남에게 폐 끼치기 싫다는 것이 희연의 심리였다.

연신 총을 잡은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정신없이 주위를 살피는 희연의 모습은 누가 봐도 긴장했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름 없는 그분이 먼저 나서 입을 뗄 정도였다.

“뉴비님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이건 아-주! 쉬운 싸움이니까요! 보니까 장비도 좋은 거로 맞춘 것 같은데 너무 그렇게 안 떨어도 돼요!”

장비 얘기에 희연은 조금 용기를 얻었다. 타이밍 좋게 킹스메이커가 맞춰 준 장비는 정말로 좋았기 때문이다. 희연은 확연히 달라진 상태 창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닉네임 : 눈오리의 돌격 (뉴비세스 메이커)

레벨 : 33 (????)

직업 : 신관 / 무기 : 총

HP: 872(872) / MP : 2240(2440)

공복 57(100)

힘 - 2(+100) / 민첩 - 55(+284) / 마력 - 105(+550)

특수 스텟 : 신성 - 82 / ??? - 15

칭호 : 나의 그리운 이웃 / 마탄의 사수

상태 이상 : 악마와의 내기(저주)』

무려 2500에 근접하는 MP와 100에 도달한 힘 스텟이 용기를 주었다. 차례차례 스텟을 확인하던 그녀의 시선은 이윽고 신성 외에도 새로 생긴 특수 스텟 쪽을 향했다.

특수 스텟 ‘???’. 병사 악령의 퀘스트를 달성하고 받은 스텟이었다. 뭔지 알 수 없던지라 희연은 오류인가 싶어 그냥 놔두었다. 다시 본 지금도 여전했지만 그 점에 대해 신경 쓰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후우….”

입술을 달싹이며 스킬 이름을 되뇌는 희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름 없는 그분은 잠시 고민하다 자리에 털썩 앉았다.

“뉴비님도 앉아서 기다리세요. 우리가 나서려면 멀었어요.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 아프니까 어서요.”

이름 없는 그분은 옆자리를 두들기며 재촉했지만 희연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이름 없는 그분은 눈썹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진짜예요, 뉴비님. 애초에 우리는 원딜이라 나중에 나설 거거든요. 지금은 성 밖으로 나간 근딜들 놀 때라서 우린 편하게 있어도 돼요. 자자, 긴장 풀고.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이것 좀 먹고.”

인벤토리에서 피크닉 가방을 꺼내 그 안에 들어있던 샌드위치를 희연과 닉에게 나눠주는 이름 없는 그분은 여유가 넘쳤다.

그의 말이 사실인가 긴가민가하던 희연은 닉이 샌드위치에 입을 대고 다소 깐깐한 성격 같던 지호마저 와서 샌드위치를 받아 간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정말이죠…?”

“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나서면 깐족이들이 싫어해요.”

“깐족이?”

“헙. 이놈에 입, 이놈에 입…!”

이름 없는 그분은 급하게 입을 오므렸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찰싹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희연은 닉 쪽을 돌아봤다. 한 입 먹은 샌드위치를 루로의 입에 물려주고 있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답을 알려주었다.

“…근접 딜러를 뜻하는 말이에요. 멀리 못 가고 몬스터 주변에서 치고 빠지며 공격하는 모습을 비꼰 거고요.”

“아. 그러면 아까 붙박이라고 한 건 원거리 딜러를 뜻하는 거예요?”

“정확히는 마법사만요.”

“그렇구나.”

희연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름 없는 그분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다가 희연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

“킹스메이커한테 제가 깐족이, 붙박이 알려줬다는 말 하면 안 돼요, 뉴비님….”

“어… 왜요?”

“그…, 일단 상대 직업 비꼬느라 만들어진 단어라서….”

이미 공공연하게 쓰이는 단어였음에도 이름 없는 그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는 파릇파릇 뉴비에게 나쁜 물을 들였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한 거 가르쳐 놨다고 나중에 나 PK 당하면 어쩌지?”

“어쩌긴. 재미있어지는 거지.”

“지호야…!”

그는 혹여나 나중에 이를 빌미로 킹스메이커에게 목이 썰릴까 걱정한 것이다. 같은 마법사라 할지라도 상대는 근접 딜러에 가까운 마법사인지라 정석적인 마법사인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징징거리는 이름 없는 그분을 지호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배를 채우고 남들이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는 사이 희연의 긴장도 많이 풀려 있었다. 그녀는 저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MP 포션을 꺼내 빈 홀스터에 꽂아놓았다.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악령이들은 그녀의 옷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어깨 위까지 올라왔고 총은 두 손에 들린 채였다. 아직까지 몬스터 군락이 성벽에 가까이 올 정도가 되려면 멀었다지만 언제든 만일의 사태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스킬 창을 열어 새로운 공격 스킬이 어떤 걸까 짐작해 보던 희연을 이름 없는 그분이 불렀다.

“그건 뭐예요 뉴비님?”

“총이요?”

“아뇨. 어깨에 그것들이요. 하나는 악령이고 하나는… 부두 인형 같은데…. 맞나?”

이름 없는 그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몸을 앞으로 빼며 부두 인형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려 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슬그머니 발을 뺐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이 무색하게도 낯가림 심하던 악령이가 한 손을 번쩍 들더니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 내 이름은 메리. 지금 네 눈앞에 있어.”

그것도 본인이 사용하고 있는 부두 인형의 이름을 대면서 말이다.

“?”

“?”

희연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름 없는 그분은 아주 해괴한 것을 본다는 듯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어…, 저 인형 머리 위에 악령이 조종하는 그런 건가요?”

이름 없는 그분의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다. 조종의 주체가 머리 위가 아닌 몸속에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희연은 악령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까만 악령, 이제는 넬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병사 악령을 보며 눈을 굴렸다.

보아하니 넬과 악령이 간에 어떠한 합의가 오간 듯했다. 힘이 약한 넬은 모습을 못 감추고 악령이는 인형인 척을 해야 하느라 운신의 자유가 없으니, 인형을 움직이는 주체가 넬인 것처럼 하는 일명 라따뚜이 전법을 사용한 것이다.

킹스메이커와 달리 이름 없는 그분은 흑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악령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악령이 아주 위험하며 흑마법의 재료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정도의 지식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관련 지식이 부족한 그라고 해도 악령이 뉴비 힐러가 펫처럼 데리고 다닐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넬과 메리 인형을 바라보던 이름 없는 그분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와…, 킹 걔는 이제 악령 사역도 할 줄 아나 보네요. 혼자서 아타마드흐한테 스킬 전수받았나? 후,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는데….”

“…….”

“역시 나도 그때 흑마법사로 직업 바꿨어야 했나….”

이걸 속는구나….

악령이는 무척이나 뿌듯할 것이다. 희연은 오늘 받은 장비 전부를 걸 수 있을 정도로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인형인 척이 하기 싫었으면 넬과 합의까지 봤을까 싶기도 해서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약간의 안도와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던 희연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근접 딜러들과 뒤엉켜 싸우던 몬스터 군락이 어느새 성벽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자유 도시 에빌론은 넓었기에 성문이 동, 서, 남, 북 모두 네 개나 있었다. 톨러의 저택으로 갈 수 있는 문이 동문이었고 넬을 만난 던전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곳이 서문이었다. 남문은 행정 지구 방향에 있었다.

현재 희연이 서 있는 곳은 처음 에빌론에 입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게 되는 북문으로, 실질적인 에빌론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이 북문에 모였으며 남문은 싸움이 가능한 NPC들이 지키고 나머지 동문과 서문을 미어터지는 북문의 인원수에 밀려 나간 사람들이 지키는 구조였다.

몬스터 웨이브는 그런 유저들의 밀집도를 아는 것처럼 북문에 가장 많은 수의 몬스터를 배치했는데, 그 수를 헤아리다 보면 밀려드는 파도를 보는 듯했다. 마치 인간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를 앞둔 것 같은 공포심을 느끼도록 말이다.

지금 희연이 그런 기분이었다. 분명 저 멀리 있을 때만 해도 유저 측이 유리해 보이던 싸움이었다.

이름 없는 그분을 비롯한 몇몇 마법사 유저들이 깐족이라고 낮잡아 불렀고,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벤트에 레벨이 아주 높은 쪽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빠졌다고는 하나 당당하게 도시 밖으로 나갔던 이들이 결코 약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현재, 성벽 바로 앞까지 밀려온 싸움의 승패를 가리자면 명백하게 몬스터 쪽이 유리했다.

예상하지 못한 이변에 당황한 것은 이름 없는 그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이게 왜 밀리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계획은 근접 딜러들이 어느 정도 몬스터를 잡거나 피를 많이 깎아놨구나 싶을 때 길드원들과 함께 대규모 마법을 날려 여유롭게 막타를 먹는 것이었다.

최종적인 딜량과 몬스터 처치 수로 이번 몬스터 웨이브의 점수를 높게 받으려 한 것이다. 마법이 떨어지는 멋진 장면을 배경 삼아 자신의 길드를 뉴비인 희연에게 어필하는 것은 덤이었다.

전원 마법사인 길드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만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대규모로 마법을 사용할 때면 스킬 발동을 위한 캐스팅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발동 조건은 까다로우면서도 간결했다. 캐스팅이 끝날 때까지 앞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 줄 사람이 있을 것.

그리고 현재, 에빌론 북문의 유저들은 마법사들이 무언가 준비할 틈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은 길드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를 제외해도 대부분이 원거리 쪽인 직업들이었다. 앞이 밀리면 그들에겐 답이 없었다.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이름 없는 그분은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예상 못 한 방식으로 상황이 흘러갔던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겨우 이 정도 일로 호들갑스럽게 굴 정도로 그의 멘탈은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그는 바짝 얼어붙은 희연을 일단 난간에서 멀리 떨어트린 뒤 지호와 현재 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앞에 왜 밀렸지?”

“저 밑에 있는 몬스터 대부분이 기껏해야 레벨 100 좀 넘을까 말까야.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렇지 그 많던 인원이 다 밀릴 리가 없잖아. 뭔가 변수가 생긴 거겠지.”

“이상하네 진짜…. 웨이브 보스가 벌써 떴나? 그래봤자 150 정도일 텐데…. 일단 마법부터 준비하자. 애들 모이라고 해 지호야.”

지호의 지도하에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 길드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손을 들고 무언가 가늠해 보던 이름 없는 그분은 뒤늦게 희연을 돌아보곤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뉴비님! 전장의 꽃은 뭐다? 바로 마법사! 우리가 마법 하나 날리면 천재지변 수준이거든요? 걱정할 것 하나 없어요! 진짜, 진짜로요…!”

그 마법을 날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지만 이름 없는 그분은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희연은 꽃 타령하는 그의 모습에 킹스메이커가 떠올라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이름 없는 그분은 말을 덧붙였다.

“물론 힐러도 전장의 꽃이죠. 판을 뒤엎는 직업, 그게 바로 힐러잖아요!”

“네에…, 꽃 많으면 좋죠….”

희연은 대충 대답하며 방해되지 않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다행히 이번 행동의 의미는 제대로 이해한 이름 없는 그분은 조금 머뭇거리다 본인의 길드원이 모인 곳으로 이동했다.

일사불란하게 모여드는 검은 무리를 바라보던 희연은 다시 성벽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인지 사람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뒤엉켰다.

그 아수라장에서 희연이 알 수 있는 사실은 몬스터들의 눈이 모두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힐러 특성으로 다양한 상태 이상을 볼 수 있게 된 희연의 눈에는 붉은 눈 외에도 몬스터들의 머리 위에 광폭을 뜻하는 그림이 보였다.

머리 위 그림과 몬스터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던 희연이 시선을 돌린 건 악령이의 외침을 들었을 때였다.

“저 사람 막 날아다녀!”

“난다고?”

펫을 타고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려 했지만, 악령이가 가리키는 방향은 그쪽이 아니었다. 뭉툭한 인형의 손끝은 뒤엉켜 싸우는 무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그분이 난간에서 떨어트린 것이 무색하게도 희연은 다시 앞으로 가 몸을 내밀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어…?”

몬스터의 등에 매달려 공격하던 사람 중 하나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등에서 떨어진 거라고 하기엔 공중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밑으로 추락하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폴리곤이 되어 사라졌다. 죽은 것이다.

자신만 본 것일까? 희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려 하는 이름은 말할 수가 없어 길드를 구경할지언정 패색 짙은 성 밖을 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성 밖으로 지팡이를 쭉 내밀어 공격하곤 했지만,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공격에 집중하느라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닉 님!”

때마침 녜디아를 밑으로 내려보내고 멀리까지 들릴 하프를 연주하고 있던 닉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희연의 모습에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희연은 자신이 본 것에 관하여 말했다. 연한 색의 눈이 희연이 말한 현상을 찾기 위해 바쁘게 성벽 아래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닉 또한 희연과 같은 것을 보았다. 누군가 허공으로 낚아채이는 것과 동시에 죽으며 폴리곤이 되는 광경을 말이다.

“뭐가 있는 것 같기는 하네요.”

“그렇죠?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은신? 그런 스킬인 거 맞죠?”

“그런 것 같아요.”

희연은 은신 스킬을 사용했을 때 풀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총을 잡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역시 총으로 맞혀야 하는 걸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닉의 손에 있던 하얀 리라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새까만 흑단 나무로 만들어진 바이올린을 닮은 모습의 크레타식 리라와 활이었다.

세 개의 현 위로 활이 올라갔다. 리라처럼 검은 흑단으로 만들어진 활대와 반대되는 하얀 활 털이 현 위로 빠르게 움직이며 짧은 음을 냈다.

손끝으로 줄을 튕기면 맑고 울림 깊던 소리가 나던 이전의 리라와 달리 지금의 리라가 내는 소리는 깊고 묵직하며 조금 음울했다.

[<설원의 노래(디버프)>! 테이머가 길들일 수 있는 존재가 노래가 울려 퍼지는 범위 안에 있는 경우 예외 없이 모두 5초간 경직에 걸립니다.]

“어…?”

희연은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온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비단 희연뿐만이 아니었다.

성벽 위에서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던 마법사 무리도, 다른 유저들도. 심지어 성벽 아래에서 뒤엉켜 싸우던 유저와 몬스터 군락 모두가 온몸이 굳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5초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다. 일대에 두 발로 우뚝 서 있는 인간은 스킬의 시전자인 닉뿐이었다.

온갖 곳에서 야유가 울려 퍼졌다. 몸은 굳었지만 입은 자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연은 자유로운 입으로 파티 창을 불러냈다. 여전히 닉과 그녀는 파티 상태였다.

“…팀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