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헨젤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시야가 새까매지는 것을 느낀 희연과 뉴비 없지가 이동된 곳은 마녀의 과자 집, 지하 감옥이었다. 헨젤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남으로써 둘 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희연은 익숙하게 팔랑이는 사제복의 감촉을 느끼며 조금 안도했다. 허벅지에 메인 익숙한 총의 느낌도 좋았다.
킹스메이커가 장비를 제작할 때는 부담스러워 이리저리 반대하긴 했으나 이런 상황에 다다르니 좋은 장비란 게 얼마나 사람을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건 그런 거였다.
“헨젤….”
희연은 헨젤을 동정했다. 삐뚤어지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더 나은 선택이 아닌 쪽을 고르더라도, 그녀는 헨젤을 동정했다. 마지막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의 헨젤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남보다 자신이 먼저이고 배려는 낯설고 여유란 게 없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
희연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녀의 지하 감옥은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어린 몸으로 홀로 이곳에 갇혔을 땐 이 감옥도 무척이나 넓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원래의 몸으로, 그것도 건장한 뉴비 없지와 함께 있으려니 이곳도 그리 널찍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엉엉 울던 어린 헨젤과 달리 그들에게 이곳에서 탈출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희연은 총을 들어 주르륵 늘어져 있는 창살을 차례로 명중시켰다. 속이 빈 창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너덜너덜해졌다. 뉴비 없지가 그것을 발로 차자 감옥은 제 역할을 못 하게 되었다.
뻥 뚫린 창살의 구멍을 빠져나오며 희연은 뉴비 없지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자마자 헨젤부터 잡아야 해요! 그리고….”
파이퍼. 검은 천막의 상인과 마주했을 때 나왔던 이름이었다. 뱀눈을 가진 그 남자가 파이퍼였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슬퍼하고 분노하던 악령이의 모습을 희연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 단서를 놓치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단서를 토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파이퍼를 떠올리며 고민하는 희연에게 뉴비 없지가 말했다.
“오리 님, 일단 우리는 아직도 그레텔의 악몽 속이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아….”
“헨젤을 잡는 건 여기서 나간 뒤에요. 파이퍼도 그다음이고요. 원래 장비까지 돌려준 걸 보면 아마 싸우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니까 준비합시다, 우리.”
뉴비 없지의 지적에 희연은 수긍하며 양손에 총을 들었다. 당장에 중요한 것은 이 악몽 속에서 빠져나가는 거였다.
희연이 준비된 것을 확인한 뉴비 없지 역시도 성배를 손에 들고 언제든 휘두를 준비를 끝마쳤다. 이 감옥의 문은 딱 하나였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뉴비 없지는 문을 발로 걷어찼다.
문은 창살만큼이나 가볍게 부서졌지만 두 사람은 선뜻 그 너머로 발을 내뻗지 못했다.
“와, 이건 또 뭐람….”
뉴비 없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당혹스러움 가득한 건 희연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지하 감옥의 문을 부수면 나와야 하는 건 과자의 집, 즉 마녀의 집 내부였다. 언뜻 보면 안락해 보이나 수상쩍은 물건이 아무렇지 않게 굴러다니는 거실이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건 마녀의 집이 아니었다. 안락의자도, 수상한 액체가 끓는 솥단지도 난로도, 마녀가 죽은 오븐도 없었다.
뉴비 없지는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가 벽에 손을 대었다. 끈적한 초콜릿이 묻어났다. 희연은 쿠키로 이루어진 바닥이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을 내디뎠다.
“이쪽이 오히려 진짜 과자의 집 같네요….”
바닥은 쿠키, 벽은 다양한 맛의 초콜릿, 뻥 뚫려 안개 같은 솜사탕 실이 둘린 천장에선 자잘한 과자와 사탕 같은 것들이 떨어졌다.
널찍한 통로는 어딘가로 쭉 이어져 있었고, 그들이 통과했던 지하 감옥으로 가는 문은 사라졌다. 되돌아갈 곳 없이 오로지 앞으로만 가라는 것 같은 구조의 통로였다.
“이건… 그냥 길이 아니라 미궁이에요.”
“미궁이요?”
뉴비 없지의 얼굴은 제법 심각했다. 미궁이란 말에 던전 비스름한 것을 생각한 희연은 그 얼굴에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미궁은 던전이랑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서 길 잃을 걱정은 없지만 굳이 복잡하게 길을 나누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어렵고 깨기 힘들다는 뜻이죠.”
“그럼….”
“이 미궁 끝에 다다를 때까지 우린 쉴 틈 없이 바쁘게 싸워야 한다는 뜻이 되는 거랍니다 오리 님. <롱기누스의 운명>!”
성배의 잔이 빙그르르 돌며 검게 물들더니 길쭉한 창이 되었다. 뉴비 없지의 갑옷 역시도 새까맣게 물들었다.
“오리 님은 딱 하나만 주의해 주시면 돼요.”
“뭔데요…?”
“안 죽고 제 뒤 놓치지 말고 따라오기! 수상해 보이는 거 만지지 말기! 누가 봐도 퍼즐 풀이 같은 장치 있으면 무시하기!”
주의할 게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희연이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뉴비 없지는 앞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내내 작달막한 과자만 퐁퐁 쏟아내던 솜사탕 구름 사이로 무언가 살아 있는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귀여운데?”
떨어진 건 몬스터였다. 과자의 집이라는 배경에 어울리는 온갖 빵과 과자, 사탕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몬스터.
그중 한가득 들어간 크림 덕분에 아주 풍성한 슈크림 몸체를 가진 양 모습 몬스터의 정보를 확인한 희연은 제 눈을 의심했다.
[Lv. 150 <슈크림 쉽>]
겉모습과 달리 레벨이 험악했다. 비단 슈크림 쉽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몬스터들 역시 레벨이 높았다.
다행인 점은 그 크기가 작아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인데, 그나마 있던 이 장점이 장점이 아니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몬스터들은 증식했다.
크기가 작고 무해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바글바글하게 있으면 위협적으로 보이는 법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몬스터, 폴짝이다가 흘린 부스러기가 쑥쑥 커져 자라난 몬스터. 그 수를 헤아리다 보면 수량으로 겁을 줄 목적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상한 점은 발치에서 바글거리는 몬스터 중에는 그 종에 따라 특정 선이 있는 것처럼 넘어오지 않고 멈추는 경우가 있다는 거였다.
가령 슈크림 쉽은 폴짝거리며 뛰어오다 곧바로 뉴비 없지가 휘두르는 창에 맞아 날아가곤 했지만 거북이 모양의 빵이나, 딸기를 얹은 크림으로 장식된 토끼 모양 케이크는 창이 닿는 거리까진 애초에 다가오진 않는 식이었다.
던전의 몬스터나 웨이브에서 본 몬스터와 다르다는 점에서 이는 미궁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
희연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파악하는 사이 뉴비 없지는 홀로 제법 많은 수의 몬스터를 물리쳤다. 창은 린치가 긴 무기다 보니 희연은 괜히 방해가 될까 싶어 거리를 멀리 두고 그를 뒤따르는 중이었다.
간간이 총을 들어 버프 스킬을 걸어주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으아….”
비록 험악한 레벨을 갖고 있지만 하나같이 깜찍한 외양을 가진 몬스터들이 창에 맞거나 벽에 부딪혀 크림이 무너지고 빵이 찢기는 모습은 썩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곳의 몬스터들은 바깥의 다른 몬스터처럼 폴리곤이 되지 않고 엎어진 케이크 같은 꼴로 잔해를 남겼다. 그 탓인지 뉴비 없지의 창과 갑옷 역시도 새까만 색인 것이 무색하게 크림으로 인해 다시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크림의 잔해로 인해 바닥이 미끄럽다든지, 과하게 힘을 주면 쿠키 바닥이 부서진다든지 같은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곤 그들은 큰 무리 없이 미궁을 돌파해 나갔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힐러였기에 중간부턴 희연 역시도 멀리서 뉴비 없지를 보조하곤 했다. 몬스터와의 레벨 차이는 심했지만 그들의 몸집이 작았고 크림과 쿠키, 설탕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탓에 방어력도 낮았기에 그녀의 공격도 제법 유효타를 날릴 수 있었다.
“후우….”
불티를 흘리는 총을 잠시 내려놓으며 희연은 숨을 골랐다. 어느새 MP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훨훨 날아다니는 뉴비 없지와 비교하면 그녀의 스텟은 여전히 초라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을 살피며 물약을 마시는 희연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아직까진 큰 무리가 없었고, 뉴비 없지도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다녔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희연은 이렇게 잠시간의 휴식을 갖는 것도 불가했을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뉴비 없지처럼 고이고 고인 인간을 안 데리고 왔으면 MP 부족이든, 체력이 부족해서든 절대 못 깰 뻔한 미궁이라는 소리였다.
“헨젤의 죄를 밝혀달라고 한 게 아니었나…?”
이곳이 그레텔이 악몽이고, 이 모든 게 그레텔의 의지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응당 최대한 빨리 두 사람을 내보냈어야 했다. 그런데 마치 지금의 상황은 그 반대의 것을 원하는 듯 보였다.
“…?”
그러다 문득, 희연은 떠올렸다.
“그레텔은… 이미 죽었는데?”
이 꿈의 주인은 이미 죽었음을. 그렇다면 그레텔의 악몽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 거지?
그 의문이 들었을 때 희연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최근에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깨달음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업적이 찬란하게 빛나며 그 위용을 자랑했다.
[<죽은 자의 이야기>]
[업적 효과 :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당신은 그들의 한과 바람을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운이 나쁘면 악귀가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악령 컬렉터>]
[업적 효과 : 혹시, 당신은 제 이야기를 들어줄 건가요? 악령들의 센세이션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이래서 내가 제일 적임자였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희연은 곧바로 달렸다. 최대한 뉴비 없지에게 가까이 닿기 위해서였다.
그레텔은 죽었다. 그리고 악령이 되었다. 이 모든 악몽을 실현하는 그레텔은 악령이다. 그것도 이런 미궁을 만들고, 숲 하나를 전부 과자로 이루어지게 할 정도로 강력한 악령.
그리고 희연은 본의 아니게 악령들이 관심을 두는 대상 1위가 된 비운의 신관이었다.
“없지 님!”
악령들이 가까이 닿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며 싫어하는 대상으로 킹스메이커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존재를 부르짖으며 희연은 뛰었지만, 이미 늦었다.
연약해 보일지언정 뉴비 없지가 쾅쾅 소리 나게 밟을 때가 아니면 금 하나 가지 않던 쿠키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형형색색 다양한 맛의 초콜릿 벽이 녹으며 뚝뚝 떨어지는 광경은 괴기스러웠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던 뉴비 없지가 안색을 바꾸더니 희연의 뒤로 창을 내질렀다. 희연은 뒤를 돌아 굳이 확인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지 않더라도 바닥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던 몬스터의 잔해물이 그녀의 뒤로 몰려드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뉴비 없지의 옆에 도달한 뒤에야 희연은 제 뒤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와….”
희연은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말로 놀랍다거나, 감동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을 그 짧은 감탄사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것에 가까웠다.
온갖 잔해물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거대한 몬스터에 마땅히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동물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달빛 요람의 숲에서 자미엘에게 덤비던 악령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할 수 있었다.
비록 온몸을 이루는 크림은 온갖 빵과 쿠키 같은 잔해물을 안은 채 뚝뚝 떨어지고, 눈으로 추정되는 뻥 뚫린 구멍에서는 불꽃을 쏘아냈지만 말이다.
“쟤는 왜 불까지 쏘는 걸까요?”
어느새 자동으로 되돌아온 창에 묻어난 잔해물을 털어내던 뉴비 없지가 나름 고뇌한 끝에 답을 내놨다.
“빵이나 쿠키는 구워야 하니까요? 스스로 굽겠다는 의지?”
“아, 네에….”
뉴비 없지가 잘 싸워서 정말 다행이다 여기며 희연은 총을 들었다. 무너진 쿠키 바닥 아래에서 살그머니 나온 하얀 팔들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눈앞에 거대한 크림 덩어리 몬스터를 상대할 때였다.
크림 몬스터가 천천히 기어 올 때마다 미궁은 부서졌다. 무너진 벽과 바닥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몬스터의 몸에 뒤섞였고, 그에 따라 몬스터의 몸집은 점차 점차 커다래졌다.
기어 오며 미궁을 흡수하는 몬스터 덕분에 희연과 뉴비 없지는 미궁을 이루는 벽과 바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까만 암흑이었다. 떨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혹여라도 이리저리 무너져 내리느라 생긴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우워워웡-!
크림 괴물의 첫 공격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음을 뱉는 거였다. 아무런 타격이 없었기에 희연과 뉴비 없지는 서로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크림 괴물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입안에 가득 들어있는 과자와 빵의 잔해를 와작와작 씹은 괴물이 깊은숨을 뱉자 사방에 밀가루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 엣취!”
“엣취! 엣취! 엣츄우!”
갑작스러운 가루에 희연과 뉴비 없지는 정신없이 재채기를 했다. 두 사람이 비틀거리는 사이 크림 괴물은 눈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보다 더 화려하고 커다랗게.
그것이 진짜 공격임을 눈치챈 뉴비 없지가 서둘러 스킬을 사용했다.
“으엣취! 파릇…츄! <파르지팔의 기도>! <변환>!”
새까맣게 물들었던 뉴비 없지의 갑옷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창 역시도 원래의 성배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뉴비 없지가 성배를 한 바퀴 더 돌리자 이번에는 거대하고 새하얀 방패로 뒤바뀌었다.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면 뉴비 없지는 희연을 붙잡았다.
“<사원의 빛이여>!”
방패에서 시작된 빛의 막이 그들 주위를 감싸는 순간, 불이 붙은 밀가루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뉴비 없지의 방어막은 그 폭발로부터 그들을 감싸줄 수는 있어도 주변 지형으로 인한 피해까지는 막아주지 못했다.
안 그래도 너덜너덜해졌던 쿠키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
“으악!”
들썩이는 바닥에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밑으로 떨어질 뻔한 희연은 그녀를 잡아챈 뉴비 없지 덕에 간신히 쿠키 잔해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크림 괴물의 경우 자폭 몬스터였는지 분자 폭발 기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더 이상 뒤에 적이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은 안전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거였다.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미궁의 잔해를 밟고 달리며 희연은 길이 하나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달려요?”
“미궁이 끝날 때까지요!”
저 멀리 환하게 빛나는 입구가 보였다.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두 사람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번졌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환한 빛은 그들이 원했던 입구가 아니었다.
“와우….”
뉴비 없지는 의미 없는 감탄을 내뱉었다. 만약 두 사람 다 입구라 생각해서 뛰던 것을 멈추지 않았다면 경사로를 데굴데굴 굴렀을 것이다. 환한 빛은 새하얀 크림 경사로에 빛이 반사된 효과였다.
미궁의 붕괴는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현상이었기에 두 사람은 이 길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크림으로 이루어진 경사로를 맨몸으로 건너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크림인 이상 발이 빠질 것을 각오해야 했고 만일 미궁의 붕괴가 끝나지 않고 이곳에까지 이어진다면 도중 크림 속에 파묻히는 것에 대비도 해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뉴비 없지는 들고 있던 방패를 땅에 내려놓고 그 위에 발을 올렸다. 그 방패가 실질적으론 성배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경한 행위였다.
“오리 님, 손!”
그러나 이 자리에 르센의 신도는 둘일지언정 신실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희연은 망설임 없이 뉴비 없지의 손을 잡고 방패 위에 올라탔다. 뉴비 없지가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빠른 속도로 경사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패의 크기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성인 둘이 올라타고 놀기에 넉넉한 크기도 아니었다. 스노보드 하나를 둘이서 타도 위험한데 두 사람이 타고 있는 건 방패였다. 안전하게 앉아서 타는 것도 아니고 엉거주춤 일어나 타는 과정이 평화로웠을 리가 없었다.
평생 멀미라곤 해본 적도 없던 희연은 이게 바로 멀미라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 정도였다.
두 사람을 태운 방패는 똑바로 일직선으로 내려가지를 못하고 연신 에스 자를 그리며 떨어졌는데, 이는 뉴비 없지가 기술적으로 속도 조절을 한 것이 아닌 순전히 방패가 뒤집히지 않게 힘으로 내리눌러 생긴 효과였다.
경사로는 갈수록 점점 더 가팔라져 나중에 가서는 간신히 벽에 붙어 추락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리 님, 앉아요! 잘못하면 날아가요!”
힘으로 버틸 재간이 없는 희연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뉴비 없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희연의 등을 누르는 상태로 방패를 조절했다.
더 이상 날아갈 걱정을 하지 않게 된 희연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사방이 막혀 있던 첫 번째 미궁의 방과 크림 눈밭은 조금 달랐다.
길이라곤 그들이 내려가는 경사로 하나뿐이고, 양쪽으론 상록수가 빽빽하게 심겨 있긴 했지만, 확실히 하나의 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솜사탕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위에서 떨어지는 건 새하얀 별사탕뿐이었다.
희연이 기시감을 느낀 것은 크림으로 덮인 상록수 때문이었다. 이름 모를 나무는 헨젤과 그레텔의 집 주변을 에워싼 숲속의 나무를 닮아 있었다.
나무를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그 나무가 그 나무일 수도 있었지만 희연은 그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그러자 마치 마법이 풀린 것처럼 희연의 눈에 다른 것들이 들어왔다.
모든 나무에는 나뭇가지를 묶은 줄이 매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몸을 맡긴 나뭇가지가 탁탁, 소리를 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지러울 정도였다.
과자의 미궁, 크림으로 덮인 숲속. 그리고 희연과 뉴비 없지가 본격적인 미궁에 입장하기 전 있었던 장소는 지하 감옥이다. 미궁의 패턴을 깨달은 희연이 외쳤다.
“이 미궁,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에요!”
배경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과정은 들어맞았다. 희연의 외침이 답이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나무를 두들기는 나뭇가지가 더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크림으로 덮인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출렁이는 크림 때문에 뉴비 없지가 잠시 비틀거렸고 희연은 팔 한쪽을 크림 속에 빠트렸다.
하마터면 크림 속에 빠질 뻔했으면서도 희연은 그쪽으론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몸이 뒤집히며 이 흔들림의 원인이 무엇인지 봤기 때문이었다.
“없지 님, 더 빨리! 더 빨리 내려가요!”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은 거대한 크림 눈사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