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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143)화 (143/251)

143화

***

한순간에 달콤했던 숲이 사라지고 재투성이 숲의 잔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거리가 되는 위치에 있는 에빌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커다란 변화였다.

희연에게 헨젤의 퀘스트를 전달했던 레이는 이변을 넘기지 않았다. 자신이 맡긴 일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 그는 확신했다.

재투성이의 숲은 대낮에 봐도 음습함이 감돌았다. 보통 일이 아닐 거라 생각한 레이는 혼자가 아닌 에벨론의 병사들과 함께 숲을 방문했다.

병사들과 함께 스위니티 숲에 들어간 레이가 보게 된 것은 넝쿨에 몸이 칭칭 감긴 헨젤과 그런 헨젤을 붙잡은 희연이었다. 만남은 언제나 짧았지만 그가 봐온 희연은 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레이의 입장에선 붙잡힌 헨젤의 얼굴에 망설임 없이 주먹질하는 그녀의 모습이 매우 낯설 수밖에 없었다. 기실, 그런 희연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레이뿐만이 아니었다.

뉴비 없지는 입을 틀어막았고 킹스메이커와 닉도 놀란 티를 감추지 못했다.

모두의 놀라움이 담긴 시선 속에서 희연은 한참을 씩씩거리다 몸을 틀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것은 해골 인형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인형이었다.

희연은 악령이를 챙겨 꽉 끌어안았다. 그제야 악령이는 검은 재가 된 그레텔의 흔적으로부터 눈을 뗄 수 있었다.

아직까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에 레이는 조심스레 희연을 불렀다. 사람은 많았지만 정확한 상황 파악은 퀘스트의 진행자인 희연에게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방인님?”

레이의 부름에 희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묻히면 안 되는 진실만을 이야기했다.

“…그레텔은 죽었어요.”

“아….”

안타까움의 탄식을 흘리는 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희연은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에 있는 건 헨젤이었다.

“헨젤이, 그레텔을 죽였어요.”

그레텔의 죽음은 사고면서 동시에 사고가 아니었다. 헨젤은 온전히 사고였다 변명했지만 그 장면을 직접 본 희연은 알았다. 그걸 사고라고만 부를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레텔이 계단에서 넘어질 때, 헨젤은 그레텔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럴 거리였다. 손만 뻗으면 되었다. 호리호리하다 해도 험한 상인 일도 하던 헨젤이 어린 여자애 하나 못 붙잡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잡을 수 있으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끝까지 그레텔과 눈이 마주쳤으면서 말이다.

그레텔이 영원한 잠에 빠지기까지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헨젤은 그 옆에서 울기만 했다. 정말로 울기만 했다.

비난 일색의 눈초리가 헨젤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희연을 보며 헨젤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는 그 모습에 레이는 이 이상 진실을 가릴 필요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로써 그레텔의 악몽은 끝났다. 끝을 맺었다.

레이와 함께 온 병사들이 헨젤을 붙잡았다. 넝쿨에 칭칭 감겨 있던 헨젤은 애초에 도망갈 의지조차 없다는 듯 축 처진 채 병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죄송하지만 이 넝쿨을 좀 풀어주겠습니까?”

닉이 넝쿨을 풀어주자 병사들이 줄로 헨젤을 묶었다. 한쪽 뺨이 부은 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을 뚝뚝 흘리던 헨젤은 그를 붙잡은 병사들이 발을 뗄 때쯤에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망연자실한 얼굴로 헨젤은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레텔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흔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악령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재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이미 사라진 뒤였다.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가던 중 희연의 옆을 지나가게 될 때 헨젤은 물었다.

“왜 말하지 않죠? 이 숲에서 죽은 건 그레텔이 아닌데….”

“…….”

그의 말마따나 이 숲에서 죽은 건 그레텔이 아니었다. 그레텔의 악몽을 직접 본 희연과 뉴비 없지도 그 진실을 알았다. 이곳에서 죽은 건 헨젤과 그레텔 남매의 아버지였다. 그를 죽인 것 또한 헨젤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헨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으로 희연을 바라보다 순순히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떠났다.

가혹한 진실을 밝혀낸 희연에게 레이는 몇 마디 공치사를 내렸다. 어찌 됐든 간에 그녀는 퀘스트를 훌륭히 완수했다. 엄연히 감사의 인사를 들어야 할 일이었다.

“…….”

희연은 솔직히, 레이의 말을 조금도 귀에 담지 않았다. 품 안에 안겨 덜덜 떠는 인형을, 그 안에 든 악령을 달래기에도 바빴다.

그런 희연을 대신해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레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어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하마터면 그레텔의 억울함이 영영 묻힐 뻔했으니….”

“묻힐 뻔한 건 그레텔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저 백골에 관한 조사도 해야죠.”

“그렇죠….”

반항도 없고, 도망갈 의지도 없는 헨젤은 이제 뒷전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과자의 집이 사라지고 나타난 구덩이 속을 가득 메운 해골 인형에게로 쏠렸다.

희연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구덩이 속을 보았다. 구멍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그 안을 채운 것의 수가 많았다. 구멍이 하얀 것들을 뱉어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레이와 함께 온 병사 중에는 의료 지식을 가진 이가 있었다. 그는 구덩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모두…, 모두 어린아이의 백골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어투였다. 마음 약한 병사들은 눈물을 흘렸고 레이는 나지막이 신을 찾았다.

무더기로 나온 인형 모두가 백골 사체라는 말에 희연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뜬금없이 나타난 해골 인형이 무엇의 은유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모두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뉴비 없지와 과자의 집을 살필 때 보았던 흔적들이 이젠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레이는 도시에서 사람을 더 불러왔다. 그들 중 유저는 없었다. 모두 에빌론의 주민이었다. 그들은 백골을 수습했고, 톨러는 나무의 재를 그레텔의 흔적 삼아 짧고 간결한 장례를 치렀다.

손수건에 재를 정성스레 담는 톨러에게 희연은 그 재는 그레텔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턱 끝까지 말이 올라온 순간 마주친 노인의 눈이 아니었다면 기어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가끔 현명해지는 노인의 눈은 자신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희연은 그를 말리는 대신 인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희연 역시도 완벽히 알기 힘들었다. 드문드문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헨젤은 처벌을 받을 것이고, 실종되었다 죽음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신원을 찾을 예정이며 그들을 납치한 집단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것. 그것이 희연이 알게 된 전부였다.

원한다면야 레이를 찾아가 제대로 된 전후 사정을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딱 한 번, 희연은 헨젤을 만났다. 헨젤의 요청이었다. 그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헨젤은 레이가 있는 행정지구 지하 감옥 시설에 갇혀 있었다. 원래라면 평범한 유저인 희연은 그런 내밀한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레이라는 감시자를 둔다는 조건으로 헨젤을 만날 수 있었다.

며칠 만에 만난 헨젤은 안 그래도 호리호리하던 몸이 더 말라 있었다. 그 모습은 일견 동정심을 들게 할 정도였지만 희연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비난 역시 하지 않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헨젤과의 만남 내내 희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레텔에 대한 건으로 생긴 비난의 감정은 이미 값을 치렀다. 부기가 가라앉지 않은 헨젤의 뺨이 그를 증명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 그 이후의 것들에 관하여 희연은 비난도 옹호도 할 자격이 없었다. 자격이 있다 해도 희연은 그 권리를 내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헨젤은 비난만 받기엔 피해자였으며 어쩔 수 없었다는 옹호를 듣기엔 결국은 가해자였다. 비난도 옹호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더욱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헨젤은 입을 열었다.

“…아주 옛날에, 정말로 배곯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레텔에게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며칠간 물 한 방울 제대로 마시지 못한 사람처럼 헨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찢어져 흐른 피가 엉겨 붙은 입술만큼이나 목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런 목소리로 그는 계속 이야기했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그레텔, 사람들이 가장 자주 다니는 길목에 나를 묻어주렴. 그리고 그레텔, 항상 내 무덤에는 채 다 피지 못한 꽃송이를 올려주렴.”

“…….”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나의 죽음이 얼마나 앳되었는지 알 수 있도록. 이토록…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물론, 헨젤의 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무덤의 주인이… 제가 아니게 되었군요.”

앳된 이의 무덤, 그곳에 묻히는 건 헨젤이 아닌 그레텔이었으니까 말이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디 들어주세요. 그레텔…, 그 애의 무덤에 꽃을 놔 주세요. 채 다 피지 못한 그런 꽃을….”

“…….”

“저를 포함한 세상 모든 것이 그 애한테 너무 가혹했어요, 저를 비난하되 부디, 그레텔은 동정해 주세요…. 그 애는 진심으로, 정말로, 저와 달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

“…여전히 저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이란 걸 잘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어요. 그레텔 그 아이는 나 같은 오라비를 두지 않았다면, 부모가 달랐다면, 아주 조금만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정말로, 정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부디, 제발… 그 애를 동정하세요. 가여워해 주세요….”

희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할 말은 더 없다는 듯 헨젤은 알 수 없는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숙였다.

뒤에 가만 서 있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만 일어나도록 하죠.”

“네….”

레이의 뒤를 따라 감옥을 나가던 중, 희연은 닫히는 문틈 새로 헨젤을 돌아보며 물었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아버지가 당신과 그레텔을 팔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머니의 죽음이 의심스럽다는 걸 눈치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예요?”

희연이 묻는 것은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의 끝이었다. 그들을 괴롭히던 온갖 근심 걱정은 모두 사라지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마침표 찍히던 그때.

헨젤이 진실을 물어보기 전까지만 유효했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던 그 순간 말이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헨젤은 답했다.

“…아뇨. 저는 멍청하게 눈앞에 보이는 행복만 믿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행복한 게 아니에요. 어리석을 뿐이죠.”

그 말을 끝으로 문은 닫혔다. 레이는 이 이상 봐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희연도 부러 지하 감옥에서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기에 순순히 레이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나왔다.

차갑고 삭막한 감옥의 복도를 걷던 중 희연은 레이에게 물었다.

“이제 헨젤은 어떻게 되나요?”

“규정상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는 행복한 어른은 되지 못할 겁니다. 한 아이에게서 모든 기회를 뺏은 자는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군요.”

그레텔의 악몽은 이로써 정말 끝난 것이다. 앞으로 희연이 헨젤을 보게 될 날은 없을 것이다.

“…끝났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희연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행정지구를 나와 상업지구로 들어선 그녀는 꽃집을 찾았다. 하얀 꽃이 거의 동난 꽃집에서 간신히 채 다 피지 못한 꽃 세 송이를 구할 수 있었다. 꽃집 주인은 값을 받지 않았다.

피지 못해 향기도 없는 꽃을 들고 희연은 곧바로 동문의 언덕을 올랐다. 가는 길에 희연은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에빌론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이름 모를 아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이들의 가족을 대신해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전쟁으로 사람을 잃는 시간을 겪어 본 이들의 추모 방식이었다.

희연이 얼굴을 아는 이들도 있었다. 요른과 아나토. 뉴비 없지의 선배라던 성기사와 루시페라제. 그 외 오고 가며 얼굴을 익혔던 이들.

가능한 신원을 파악해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서 과자의 집 밑에서 발견된 아이들의 무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에빌론에서는 임의의 합동 장례식을 열었다. 무덤가의 입구 앞에 아이들을 위한 꽃을 놔두고 가는 방식으로 말이다. 새로 만들어진 무덤은 하나였다.

희연은 느긋하게 걸었다. 그녀가 그득 쌓인 꽃무덤을 지날 때쯤에는 노을이 지고 있어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동문의 언덕, 수많은 영웅과 전사들이 묻힌 그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았기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두 개의 무덤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억세게 자란 풀이 휘감긴 다른 비석과 달리 두 개의 무덤에 꽂힌 비석이 깨끗해서만은 아니었다. 다른 것들과 달리 비석 앞이 묻힌 것 없이 밋밋해서였다.

그나마 개중 하나는 검이라도 꽂혔는데 그 옆의 것은 그런 것도 없었다. 비석에 새길 이름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였다.

희연은 들고 있던 꽃을 빈 무덤 위로 올렸다. 아직 꽃망울을 채 터트리지 않은 어린 꽃은 앳된 무덤의 주인에게 어울렸다. 남은 두 송이를 희연은 넬과 악령이에게 각각 쥐여주었다.

“이건 아나토의 선물인가 봐.”

병사의 무덤에는 알록달록한 제비꽃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물끄러미 제 손에 쥐어진 꽃과 제 무덤에 바쳐진 꽃을 번갈아 바라보던 넬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레텔에게 줄 거야?”

삐이-

하얀 토끼 망토를 뒤집어쓴 넬이 제 몸집보다 커다란 꽃을 질질 끌고 가더니 그레텔의 무덤 위에 올려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연은 그대로 시선을 내려 작은 인형을 보았다.

그레텔의 무덤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악령이는 악령의 죽음을 본 이후 계속 저 상태였다. 무덤덤한 넬과 달리 악령이는 악령으로 변한 그레텔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두 악령의 반응이 차이 나는 이유가 삶의 미련에 대한 무게가 달라서인지, 실제 정신 연령의 차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악령이는 한없이 슬퍼했다. 허무함을 느꼈다.

위로에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문득 희연의 시야에 들어온 꽃무덤처럼 말이다. 희연은 그 꽃들을 보며 아주아주 슬픈 생각을 했다.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악령아…. 저 꽃 중에 네가…, 너희가 받아야 할 꽃도 있어?”

악령이는 답했다.

“원래는 없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이젠 아니라는 건, 지금은 맞다는 소리였다. 그레텔의 악몽에서 희연과 떨어져 있는 사이 악령이는 새로운 슬픔을 다시 꾸역꾸역 삼킨 것이다. 저 꽃의 주인 중 몇몇이나 되는 아이가 악령이와 뒤섞인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 너희 중에 저 꽃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디에 있었어?”

“…우리는 너무너무 많은 곳에 있었어. 하지만 나도, 나도, 나도. 우리 중 대부분이 있던 곳이 있어.”

“…….”

“우리는 말이지, 나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차가운 곳에 있었어.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깜깜한 곳에. 피리 소리가 막 이리저리 울려서 무서웠어. 추웠고 배가 고팠어. 하지만 있지, 추웠는데 아주 가끔 꼬박 자고 나면 무지무지 더워지는 그런 곳이었어. 그래도 추웠어.”

“…….”

“우리는 모두 기억해. 잊지 않았어. 무서워. 죽고 난 뒤에도 무서워서 우리끼리 함께하기로 했어. 우리가 모이고 모이면 아주 많이 강해지니까. 하지만… 그런데… 그레텔이 죽었어. 그레텔은 우리보다 강했는데. 그런데 죽었어.”

희연은 손을 뻗어 작은 악령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작은 눈물방울이 꼭 끌어안은 꽃 위로 떨어지다 땅을 적셨다. 악령이는 희연에게 물었다.

“나도… 이렇게 죽는 거야? 나는 이미 죽었는데…, 또, 또 죽어야 하는 거야? 우리는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우리가 됐는데…, 결국은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

“악령아….”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 모두가 우리를 잊어. 우리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해. 세상의 모든 것이 살아가며 흔적을 남기고 죽어서도 흔적을 남기는데 우리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악령이를 끌어안으며 희연은 말했다.

“그렇게 안 되게 할게. 약속할게, 악령아.”

흔적도 의미도 남기지 못하는 죽음을 맞게 하지 않을 것이다. 희연은 악령이에게 약속하며 요정 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영혼을 달래는 법.

요정 왕은 악령이가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야 구원받을지 모른다고 했다. 희연은 상관없다 답했다. 시간은 많았고 가능성 있는 것에 도전하는 것을 꺼릴 이유도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하나. 또한, 확실한 단서이기도 했다.

시드론의 왕.

희연은 그를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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