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모두가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무도회라는 건 조금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화려하게 꾸몄다곤 해도 이 나라 유행인지 모두 색이 짙은 옷을 입었기에 화사한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말쑥하게 입은 쪽이 귀족 NPC, 그들처럼 화려한 가면을 썼되 자유로운 복장인 쪽이 유저. 중세의 옷을 입은 귀족들처럼 중세 판타지의 정석 같은 옷을 유저들이 입고 있었기에 구별이 어렵지는 않았다.
가끔 킹스메이커처럼 이곳 사람들 같은 장비를 착용한 유저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은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귀족 NPC와는 행동하는 것이 달랐다.
희연은 눈치로 사람들을 구별하며 연회장 안을 돌아다녔다.
흑마법사와 암살자, 악령 꼬이는 신관, 그들이 악령을 불러내는 조합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뉴비 없지에게 맡긴 후 청산가리와 함께 자리를 떴다. 둘이서는 악령이 나와도 별문제 없다는 태도였다.
“이따 시드론의 왕이 등장하면 고민은 해결될 거예요. 그때까지는 맛있는 거 먹으면서 재밌게 놀아요 오리 님!”
뭘 할 계획인지 킹스메이커의 손에는 어느새 소환된 검은 낫이 들려 있었다. 희연은 손을 살래살래 흔드는 것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연회장 입성 이후 희연이 가장 의외라고 느낀 건 귀족 NPC들에게 닉이 인기가 좋았다는 점이다.
“자네 정말 오랜만이군!”
“이럴 때나 간신히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벽의 꽃을 자처하지 말고 이리로 오게. 물론 드래곤 님도 함께….”
정확히는 그가 안고 있는 루로가 인기가 많았다. 닉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대꾸했는데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를 에워싼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즐겁게 웃었다.
희연은 저 귀족들도 레벨이 아주 높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런 희연을 붙잡고 뉴비 없지가 슬금슬금 움직였다.
“오리 님, 오리 님. 이쪽으로…!”
저렙에 명성도 없는 희연은 귀족들에게 별 볼 일 없는 인물인지라 무도회장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뉴비 없지는 아니었다.
닉에게 그러는 것처럼 뉴비 없지에게 서슴없이 다가오는 귀족은 없었지만 은근한 시선이 그의 뒤를 쫓았다. 옆에 있느라 희연은 얼결에 그 시선을 함께 느꼈다.
“없지 님도 유명인이에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래 봬도 성기사 유저 중에선 제가 제일 유명하거든요!”
희연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뉴비 없지를 보았다. 전직관 NPC에게 선배님 운운하던 것과 이런 무도회장에서 명성을 보여주는 건 다른 느낌이었다.
뉴비 없지는 그 시선이 기껍다는 듯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저기 있는 음식 있죠? 저게 다 버프 주는 음식입니다 오리 님. 챙길 수 있을 때 인벤토리에 다 챙겨가요.”
“가져가도 돼요?”
“애초에 저거 우리 가져가라고 저기 놔둔 거예요. 귀족들도 저쪽에 있는 자기들 테이블에서만 음식 가져가고 여기는 안 오잖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실제로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는 했다. 희연은 신기하다는 듯 그 광경을 구경하다 핑거푸드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맛있다.”
“그쵸? 그쵸! 왕국 음식 완전 맛있어요!”
악령이 역시도 어느새 테이블 위에 자리 잡고 음식을 하나씩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는 중이었다. 희연은 테이블 위에 있는 것 중 입맛에 맞는 것들을 골라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왕국표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부가적인 효과 역시도 매우 훌륭했다. 나중에 요리를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며 희연은 악령이를 잡았다.
테이블 위를 종횡무진 하는 인형에게 제법 시선이 쏠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이어…!”
“입에 든 건 다 삼키고 말해야지.”
악령이는 말을 잘 들었다. 열심히 꼭꼭 음식을 씹는 인형을 보며 웃던 희연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요리 스킬도 요정들이 나와서 대신해 주나?
만약 그렇다면 그쪽 방향 스킬을 얻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장비 제작이나 강화와는 달리 요리는 매우 평화로운 기술이라는 것이 희연의 편견이었다.
“레시피 같은 거 주면 좋겠다….”
어떻게 못 얻어가나 고민하는 희연의 뒤로 낯선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왕실의 것은 함부로 밖으로 나가지 않네.”
“…!”
들고 있던 것을 떨어트릴 정도로 놀란 희연은 잽싸게 뒤를 돌았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가면을 쓰지 않은 여자는 아주아주 길고 색이 예쁜 금발에 푸른색 눈이라는 전형적인 공주님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이기도 했다.
머리에 쓴 긴 고깔모자에 달린 천 장식이 남들보다 화려하고 짙은 푸른 드레스에는 독수리가 금실로 수 놓여 있었다. 드레스의 유일한 장식이라고 할 법한 금속 허리띠 역시도 남들보다 배는 귀해 보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보통 신분이 아니겠거니 하는 추측은 가능했다. 희연은 힐끔힐끔 뉴비 없지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이 그녀의 추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빠르게 눈을 굴리는 희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무례하군.”
“네?”
“어딜 감히.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것도 모자라 그렇게 힐끔거리다니. 공작의 일행이라 하나 엄연히 이방인인 그대는 성씨 없는 평민. 아니, 실상은 출생 기록도 못 한 천민에 가깝지.”
“와…?”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일어나는 사소한 무례는 용서해 줄 수 있으나 이 정도로 기본적인 예의도 못 갖춰서야. 쯧.”
무례할 정도로 오만한 그 모습에 희연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곳에 오기 전 이 정도로 오만할 것이라 예상한 상대가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시드론의 왕이었다. 고로 눈앞에 여자가 누구일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희연은 확인 차 뉴비 없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왕녀?”
“넵….”
이 사람이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한 쪽, 즉 시드론의 왕녀다.
과연, 앞뒤가 꽉 막힌 꼰대라던 시드론의 왕의 성정을 닮은 것인지 왕녀는 희연의 모든 것이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드론의 왕에게 유감이 많은 희연에게 있어 왕녀의 태도는 썩 좋게 받아들여지긴 힘들었다.
무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긴 했으나 도저히 좋은 말을 내뱉을 자신은 없었다. 희연은 여러 의미의 뜻을 담아 말했다.
“왕녀님은 이 나라 왕을 닮으신 것 같아요.”
언뜻 들으면 칭찬으로도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칭찬이 아니라 욕이었다. 나름 삐약삐약 같은 직설적인 욕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있었기에 희연은 나름 돌려 말한 거였다.
그러나 왕녀는 제 아버지와 닮은 것 같다는 희연의 말을 명백히 욕으로 받아들였다.
“감히 나를 면전에 두고 우롱하는군.”
“…….”
욕으로 한 말은 맞았지만 이렇게까지 자기 아버지랑 닮았다는 소리를 싫어할 줄은 몰랐던지라 희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시드론의 왕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사람이기에 닮았다는 말에 내내 서늘한 표정을 짓던 왕녀의 얼굴에 분노의 감정을 떠오르게 만드나 싶기도 했다.
희연은 헬르벨과 함께하는 도주 생활 과정에서 왕자 시절의 왕이 쓴 책을 읽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드론의 왕은 성정이 괴팍한 구석은 있어도 폭군의 재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왕녀의 모습만 본다면 마치 제 아버지를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시드론의 왕은 자식에게 있어 수치스러운 존재인 걸까?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며 희연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우롱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 과연, 그 공작이 새로 들인 수집품다운 패기로구나.”
수집품…?
천민 다음엔 물건 취급이구나 싶어 희연은 허탈해졌다. 이렇게 전형적이고 노골적인 신분 차별을 느껴볼 줄은 몰랐기에 이젠 새롭기까지 했다.
“산업 혁명 왔으면 좋겠다….”
“무슨 의미지?”
물론 희연은 답하지 않았다.
희연은 에빌론에 대한 평가를 다시 했다. 비록 자본주의의 슬픔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 같은 흔적이 종종 보이곤 했지만 에빌론은 참 살기 좋은 도시였다.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며 희연은 왕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제가 왜 수집품이에요?”
물론 궁금한 건 짚고 넘어갔다. 왕녀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끝에 있는 건 닉이었다.
“아….”
뉴비세스 메이커….
킹스메이커의 뉴비 키우기는 아무래도 NPC 사이에서도 나름 이름난 행위인 듯했다.
“물론 공작의 수집품이란 그 이전의 의미 때문에 생긴 별명이지만….”
“그 이전의 의미요?”
“그대는 알 것 없다.”
“아, 네… 그러시겠죠….”
어찌 됐든 간에, 희연은 왜 눈앞에 왕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눈치챘다. 그녀가 직접 킹스메이커를 거론했기에 눈치챌 수 있었다.
“킹 님 때문에 저 찾아오신 거죠?”
킹스메이커의 이름이 나오자 왕녀의 표정이 굳었다. 희연은 살얼음판에 서 있는 기분에 슬쩍 뒷걸음질 쳐 뉴비 없지의 뒤로 숨었다.
시드론의 왕뿐만 아니라 킹스메이커는 왕녀와도 사이가 안 좋은 듯했다. 설마하니 남은 왕자와도 이런 사이인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왕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녀를 찾아온 이유가 킹스메이커 때문이라는 예상대로, 왕녀는 킹스메이커의 행방을 물었다.
“공작은 지금 어디 있지? 함께 온 것치곤 보이지 않는군.”
“킹 님은 아까 낫 들고 저기로 갔는데….”
“뭘 들고 가?”
희연은 그저 웃었다. 왕녀는 이마를 짚으며 낯을 구겼다.
“이 망나니가….”
망나니라고 부르는구나….
이 왕실에 킹스메이커가 대충 어떤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희연은 뉴비 없지의 팔을 잡았다. 이제 슬슬 뒤로 빠져도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린 건 희연뿐이었다.
“지금 어딜 가는 거지?”
“네?”
왕녀는 희연을 놔 줄 생각이 없었다.
“어어….”
“그대는 나와 함께 있도록 하지. 공작이 일을 무사히 끝마칠 때까진 약속의 징표로 함께 해주어야겠어.”
왕녀의 손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희연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왕녀는 힘 스텟이 몇이길래 이 정도인가 싶었다.
심지어 그녀는 뉴비 없지에게도 힘으로 지지 않았다. 끌려가는 희연의 반대 팔을 잡은 뉴비 없지가 힘을 주고 버텼음에도 왕녀의 걸음을 멈추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물론 혹여나 세게 쥐였다가 소중하고 연약한 뉴비가 죽을까 봐 세게 잡지 못하는 뉴비 없지의 고충 탓도 있었다.
“이러시면 매우 곤란한데요!”
“놓아라, 신전의 개.”
두 힘캐 사이에 끼게 된 희연은 누가 이겨도 상관없으니 자신은 빼고 이야기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연약한 힐러는 힘캐 사이에 붙잡혀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닳았다.
그나마 뉴비 없지는 약한 힐러의 방어력을 배려해 살살 잡아 줬지만 그 또한 튼튼한 성기사의 기준일 뿐, 희연은 둘의 기 싸움이 끝나기 전에 제 몸이 둘로 갈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으….”
놔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닳아버린 체력으로 인해 생긴 페널티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뚝뚝 떨어진 체력으로 인한 상태 이상까지 온 것이다.
서로 노려보느라 바쁜 왕녀와 뉴비 없지는 그렇다 치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도 축 처진 불쌍한 신관이 보이면서도 말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희연은 인류애가 죽는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된 거 이 싸움의 원인이자 해결책인 킹스메이커나 나타나면 좋겠다 희연이 바라던 그때였다. 드디어 제삼자의 손이 두 사람의 싸움에서 희연을 구출해냈다.
“…?”
처음에 희연은 상대가 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태 이상 빈혈 때문에 희게 질린 얼굴에 부채질해 주는 이의 손등을 덮은 반장갑이 낯설었다.
“전형적인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네요.”
“으어…?”
“잘됐네. 그 상태로 계속 입 벌려봐요.”
희연의 고개를 들게 한 상대는 그대로 입속으로 포션을 부어 넣었다. 그 과정에서 희연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금색 모노클이 장식된 반가면 탓에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청산가리 같은 푸른 기 도는 흑발을 가진 남자는 희연이 알기론 한 명뿐이었다.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희연은 저를 극적으로 살려낸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마담…?”
“이정보라니까요. 포션 값 청구는 킹한테 한다고 전해요.”
아직은 조금 정신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희연은 포션 값이라는 말에 일단 말부터 내뱉고 보았다.
“그거 제가 낼게요…!”
“그쪽이 낼 만한 금액이 아닌데요.”
“얼마길래….”
마담의 손에 들린 화려한 포션 병을 확인하느라 희연은 마담이 원래 알던 복장과 아주,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야 눈치챘다.
“어, 드레스…?”
말 그대로 마담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과 짙은 붉은색이 뒤섞인 그의 드레스는 연회장의 다른 이들과 달리 프릴과 레이스, 리본 같은 장식들이 잔뜩 달려있었고 부풀어 오른 치마의 폭이 넓었기에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홀로 세대가 다른 것 같은 차림새에 눈을 끔벅이던 희연은 전에 들었던 내용을 상기했다. 드레스를 입으면 NPC의 호감도가 오르는 것이 그의 스킬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유난히 화려한 그의 드레스는 퍽 불편해 보였기에 희연은 호감도 조금을 위해 이 정도의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가 싶었다. 심지어 그는 높은 구두까지 완벽하게 챙겨 신은 상태였다.
“안 불편하세요?”
희연의 시선이 발에 닿는 것을 확인한 마담은 날카로운 검날이 박힌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말했다.
“좀 불편하다고 효율을 버리는 멍청이가 어딨어요.”
“아…?”
“그리고 시드론의 왕은 꼰대라 복장 규정 지킬수록 추가 효과 나오는데 그걸 눈 뜨고 놓칠 순 없잖아요.”
하긴, 원래는 드레스가 무도회에 적절한 복장이니 마담은 복장 준수를 잘했다고 볼 수 있었다. 부채에 칼날이 박힌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멍이 많은 규칙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칼날 박힌 부채를 신기하다는 듯 힐끔거리는 희연을 보며 마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의 무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요.”
“?”
“저 둘.”
마담이 가리킨 방향에는 어느새 반쯤 몸싸움이나 다름없는 힘겨루기를 시작한 왕녀와 뉴비 없지가 있었다. 희연은 의미 없는 감탄을 뱉으며 어깨만 으쓱였다.
“저는 저기 끼면 죽어요. 진짜로 죽어요.”
방금도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마담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희연은 살아난 김에 저 싸움에 이 이상 얽히지 말자 결심했다. 괜히 킹스메이커가 연회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부딪히지 말라는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이 건방진 신전의 개! 감히 내 앞을 막아?”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오랜만에 죽을 뻔해서일까, 희연은 엉망진창인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귀족 NPC들은 흠흠, 헛기침하면서도 누가 이기나 연신 힐끔거렸고 유저들은 대놓고 먹거리를 즐기며 내기했다. 싸움을 말릴 사람이 없으니 언제 또 저 틈에 끼어 휘말릴지 모를 일이었다.
악령이와 넬을 챙겨 슬금슬금 도망가는 희연을 보며 마담이 말했다.
“뒷감당 못 할 거면 왕녀의 눈에 벗어날 짓 하지 말죠?”
“그치만….”
“그치만?”
“킹 님이 더 세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