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지금 중요한 건 그쪽이 얼마나 메인 퀘스트에 관여하고 있는지 알고 있냐, 하는 문제인 거죠.”
자신의 행적을 버젓이 남인 마담이 알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희연은 일단 마담과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저는 메인 퀘스트 같은 거 잘 몰라요. 전 그냥….”
희연은 말을 흐리며 악령이를 보았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맹한 얼굴을 보며 그녀는 말을 마저 이었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거예요. 소소하게 즐겁거나 행복하면 더 좋고요.”
“…메인 퀘스트랑 엮였는데 아직도 소소한 거 타령을 하니, 쯧.”
“뭐 어때요….”
조금은 불퉁한 말에 마담은 포기했다는 듯 팔랑이던 부채를 소리 내 접었다.
“그래요, 소소하게 악령들하고 쎄쎄쎄 하면서 노는 정도면 이 이상 메인 퀘스트에 엮일 일은 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
“이건 충고니까 잘 들어요. 만약 그 레벨에 그 마음가짐으로 계속 메인 스토리에 엮이게 되면.”
“되면…?”
“지금 진행되는 메인 퀘스트 끝날 때까지 게임 접속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예요.”
“…….”
“모든 메인 퀘스트에는 선두 주자가 있고, 그 선두 주자보다 먼저 앞서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선두 주자를 없애는 거죠. 이 게임은 선두 주자에게 언제나 후해요. 레벨 50도 못 찍은 뉴비한테 그 후한 보상이 돌아가는 걸 눈 뜨고 지켜볼 만큼 사람들은 착하지 않고요.”
“그… 래요?”
“그래요는 무슨….”
마담은 다시 혀를 찼다. 현실감 없다는 듯 제 인형처럼 맹한 표정을 짓는 희연 때문이었다.
마담은 알았다. 킹스메이커는 이미 메인 퀘스트의 가닥을 잡았고, 거기에 더해 자신이 애지중지 옆에 끼고 사는 뉴비가 얼떨결에 그 선두 주자가 되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를 리가 없었다.
마리아보다는 알아채는 것이 늦었지만 선두 주자를 데리고 있다는 점에 그녀는 내심 신이 나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요목조목 이용해 먹을 생각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 사실을 모를 선두 주자 희연은 소소한 거 타령을 하고 있으니 마담의 입장에선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쉰 마담은 이 이상 말해 뭐 하겠냐는 의미로 입을 뗐다.
“의뢰받아줄게요.”
“정말요?”
“파이퍼 정보도 준다는 데 이 정도 값은 해야죠.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하지만요.”
부족하다는 말에 희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희연은 조심스레 물었다.
“5만 골드로는 안 되죠…?”
“될 것 같아요? 그쪽이 찾는 NPC 정보 값으로 내가 받은 게 경매장에서도 안 파는 이 마스커레이드 참가권인데, 겨우 5만 골드로 뭘 하라고….”
5만 골드는 희연의 거의 전 재산이라고 봐도 될 금액이었다. 그 이상 내놓을 게 없는 희연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다행히도 마담은 뉴비의 코 묻은 돈을 갈취할 정도로 악랄한 상인은 아니었다.
마담은 인벤토리에서 작은 기계 하나를 꺼내 희연에게 내밀었다.
“?”
“성향 테스트기요. 이거 하나만 해주면 파이퍼 정보 값으로 그쪽 악령의 생전 정보를 찾아줄게요.”
“성향 테스트요?”
혈액형 성격 유형, 사주팔자, MBTI 등 성향 테스트하면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하던 희연은 순순히 그 기계를 받아들였다. A형은 소심해요, 같은 정보 정도는 줘도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개인 정보 수집 이용에 동의하겠습니까?
(이용약관 확인하기+)
(개인 정보 취급 방침+)]
“어….”
위의 문구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개인 정보라 하니 경계심이 뒤늦게 든 것이다. 또한 마담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단순히 게임 정보뿐만 아니라 유저의 정보 또한 모은다는 걸 알게 된 점이 이에 한몫했다.
희연은 혹여나 실례일까 싶어 정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개인 정보도 파세요?”
“본인이 팔겠다고 하는 경우는요.”
“그게 대체 어떤 경우인데요…?”
“정보는 사고 싶은데 마땅한 값을 치를 것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정보가 사고 싶은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확신하는 경우죠.”
“개인 정보를 사서 다른 사람한테 팔고 그러는 거예요…?”
그거 범죄 아니냐는 희연의 눈빛에 마담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본인 레벨, 스킬트리, 스텟 분배법, 희귀 퀘스트 입수 정보.”
“아, 그런 정보….”
“그리고 본인 전화번호.”
“그런 정보요…?”
경악하는 희연을 보며 마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굴었다.
“자기 전화번호 같은 거 파는 사람들 의외로 많아요. 본인이랑 연락이나마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부류죠.”
“…….”
“물론 그 기계가 말하는 개인 정보는 그런 종류가 아니고요. 다 기록으로 남는데 범법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러나 긍정의 답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전화번호를 파는 사람도, 그걸 또 사는 사람도, 합의된 사안이라지만 희연은 이상하게만 보였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희연에게 마담은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봤자 그 전화번호로 하는 연락이라곤 본인들 길드에 들어와라, 레이드 파티 참가 문의, 장비 의뢰 이런 것뿐이에요.”
“그렇구나….”
“그리고 번호를 팔았다뿐이지 모르는 번호로 오는 연락을 받을지 말지 선택권이 있는 것도 그 사람들이고요. 문제 되는 연락인지 아닌지 구분 못 할 나이의 사람하고는 애초에 그런 교환도 안 해요.”
“아….”
“번호 사는 사람이 있으면 번호 주인에게 사는 사람 있다고 다시 연락도 한다고요.”
마담은 자신이 티끌 없는 깨끗한 상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희연에게 약관 동의를 꼼꼼하게 볼 것도 제안했다. 희연은 일단 그 말을 따랐다.
세세하고 빼곡한 약관 동의는 대충 봤을 때 크게 문제 되는 사안은 보이지 않았다. 흔히 보는 그런 약관 동의였다. 희연은 눈을 깜박이다 개인 정보 수집 이용에 동의했다.
“제대로 안 볼 거면 뭐하러 경계했어요?”
“저는 킹 님을 믿기로 했어요.”
“그쪽 개인 정보거든요.”
“…문제를 보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개인 정보는 물론 중요했지만, 약관 동의에 체크하자마자 떠오른 질문은 희연의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상대와 내 의견이 다를 경우 어떻게 하나요?
상대의 의견을 수용한다 < > 상대가 내 의견을 수용하게 만든다]
질문이 조금 과격한 감이 있긴 했지만, 여느 검사지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고민을 떨쳐 낸 희연은 빠르게 검사를 해치워나갔다. 모든 문제가 그랬다. 신변잡기, 뜬구름 잡기식의 질문에 어느 순간부터 희연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에 응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하는 검사가 게임 초기 이름 모를 남자아이와 진행하던 특성 찾기 시험보다도 정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런 검사는 왜 하는 거예요?”
“사람은 생각보다 본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순간이 많으니까요. 알아두면 나중에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거든요.”
마담의 말에 희연은 A형은 소심해요 같은 테스트면서 정말 진지하게 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게 정말 소용이 있긴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은 덤이었다.
마침내 모든 검사가 끝났을 때, 마담은 검사 결과가 담긴 검사지를 건네주었다.
“…?”
‘한편으론 고집 세지만 물 흐르는 듯한 성격을 가진 당신! 상식과 조화를 중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일 때면 홀라당 넘어가기도 하는군요. 고집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사기꾼에게 속았을 겁니다. 그런 당신을 정의하는 가장 옳은 표현은-.’
“…‘납득하는 반발론자’?”
납득하면 납득하는 거지 거기에 반발하는 건 뭐람.
희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검사지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검사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참고로 킹은 그 검사 결과로 ‘이성적인 이기주의자’가 나왔어요.”
“제가 그렇게 납득을 잘하는 편이에요?”
“…지금까진 검사하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검사 결과 정확하네요.”
“?”
마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검사 결과를 떠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적인 이기주의자. 이기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람만큼 위험하며 동시에 세상을 발전시키는 사람이 또 없다는 걸 떠올리면 영 틀린 표현은 아니긴 했다.
킹스메이커는 자주 이성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것 같지만 언제나 이성적이었다. 비록 지금은 연회장 한복판에서 왕녀와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단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으며 동시에 크게 감정을 드러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희연이 첫 던전 나들이에서 땃쥐 미에게 공격당했을 때도 그렇다.
킹스메이커가 땃쥐 미에게 보인 감정은 분노 같은 감정보다는 어쭙잖은 게 덤비는 꼴이 고깝다는 쪽에 가까웠다. 뉴비세스 메이커가 좋아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치곤 뉴비 없지 보다도 행동하는 게 얌전한 것도 그 생각에 한몫했다.
참 속 모를 사람이라 생각하며 희연은 마담에게 집중했다.
“그러면 이제 파이퍼에 대한 정보를 말하면 되나요?”
“알고 있는 것 전부 말해봐요.”
희연은 그레텔의 기억을 통해 보았던 뱀 눈 남자에 관하여 차분히 털어놓았다. 외양, 특징, 말투. 그가 했던 말들. 또한 파이퍼와 깊게 연관된 것이 분명한 검은 천막의 상인에 관하여도.
마담은 이미 검은 천막의 상인에 대해 안다 말했다. 그들이 목격된 곳에서는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것 역시도 말이다.
“다만 헨젤과 그레텔에 관한 건 몰랐죠. 수도 쪽은 유저한테 박해서 정보를 얻기가 힘들거든요. 그리고 이 나라는 이미 왕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서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있죠.”
“애들이 실종된 걸 일부러 숨겼다는 뜻이에요?”
“가능성은 높죠. 실제로 예전에 어느 귀족이 자기 영지에서 비밀리에 불법 몬스터 교배종을 만든 적이 있고, 이를 킹이 밝혔지만, 알려지지 않았어요. 누가 그 정보가 퍼지는 걸 막았을 것 같아요?”
“이 나라 왕…?”
정답이라며 마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론의 왕은 한때 변화를 사랑했고 기꺼이 받아들였던 저돌적인 왕자였고, 왕이었지만 이젠 아니에요. 최대한 문제없이 모든 것이 조용하게 끝나기를 바라요.”
“…….”
희연에겐, 썩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악령이의 일은 뱀의 일, 이를 파헤치면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드론의 왕이 조용한 삶을 바라 이 일을 덮으려 한다면 그녀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부디, 왕으로서 제대로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것만이 지금으로선 희연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화는 끝났다. 희연과 마담은 각자 제법 마음에 드는 거래를 마쳤다. 별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희연에게서 제법 거한 정보를 얻어낸 마담은 특별 서비스도 제공했다.
“왕녀가 그쪽한테 수집품이라 한 이유는 그놈에 뉴비세스 메이커 때문이 맞긴 한데, 원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
“그쪽 길드원들이 원래는 킹의 복수 대상자였기 때문이죠.”
“복수 대상자요?”
당황하는 희연을 보며 마담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으며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일단 그 요리사. 걔는 거래 과정에서 사기를 쳤죠. 그리고 그 회사원 씨. 본인의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다 얼결에 같은 파티였던 킹스메이커의 일일 보스 레이드 기회를 날려버렸죠.”
“네…?”
“인성이 없지, 얘 때문에 킹은 한번 죽을 뻔했고요. 청산가리는 직접 죽이려고 했죠, 암살 의뢰를 받았다면서요.”
“저기, 지금 뭐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당혹스러워하는 희연을 보면서도 마담은 담담히 말했다.
“뉴비세스 메이커는 원래 킹이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을 잡아다가 일 시키려고 만든 길드라는 뜻이에요. 요리 노예. 농사 노예, 탱커 노예, 딜러 노예. 길드는 노예들이 도망 못 가게 만드는 일종에 족쇄 같은 거였던 거죠. 길드 마스터는 길드 소속 사람들의 위치, 접속 시간 같은 것들을 모두 볼 수 있으니까요.”
“…….”
“원래 길드 이름도 ‘함무라비 법전’이었죠. 네들이 나를 죽이려 하고 피해를 줬으니 고스란히 노동으로 갚아라, 라는 의미로요. 왕녀가 수집품 운운하던 것도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고요.”
킹스메이커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행동하는 것이 조금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희연은 남은 한 명을 떠올리곤 서둘러 입을 열었다.
“닉 님은요?”
“킹스메이커가 삶이 심심해질 때쯤 없지가 뉴비세스 메이커를 제안했어요. 그때 잡혀 왔죠. 소중한 뉴비를 키울 길드가 신분제에 찌든 장소면 안 된다는 이유로 길드명도 바꾸게 되었고요.”
“아….”
“그래서 함무라비 법전 길드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닉의 별명은 마틴 루턴 킹이에요. 그러면서, 킹도 없지도 닉네임을 변경했고요.”
“…그렇구나.”
‘21세기 킹스메이커’의 의미가 왕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21세기에 노예 해방자를 만들었다는 뜻이었구나….
희연은 산골 꼬마 요정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킹스메이커는 그들을 괴롭힌 사냥꾼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게도 노예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경험에서 나온 행동이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희연은 현재를 살아가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모른 척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하고 만약 악령이에 대해 알게 되는 게 있다면 나중에 연락 주세요!”
이 이상 마담과 함께 있다가는 알고 싶지 않던 진실만 더 알게 될 것 같아 희연은 서둘러 인사하며 그와의 대화를 끝내려 했다.
그에 마담이 답하려던 그때였다.
댕-, 댕-
“?”
수도 외곽까지도 들릴 것 같은 종소리였다. 느리면서도 묵직하게 흐르는 종소리에 놀란 희연은 도망가던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깥에 나와 있던 탓에 그녀는 안쪽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종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었다.
“…12시를 알리는 종소리?”
“시드론은 신데렐라랑 관련 없거든요. 이건 그런 의미의 종소리가 아니라….”
“?”
마담은 말을 더 잇지 않고 희연의 등을 밀었다. 어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라는 재촉이었다.
얼결에 커튼을 거두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게 된 희연은 소란스러운 내부에 몸을 움츠렸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이들에게 잘못 부딪히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의 중심에는 여전히 킹스메이커와 왕녀가 서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어느새 각자의 무기도 거둔 뒤였다.
묘한 웃음을 흘리는 킹스메이커와 달리 왕녀의 표정은 바짝 굳어있었다. 아직까지도 울리는 종소리와 관련된 듯했다.
“저기 이 종소리… 아.”
뒤를 돈 희연은 이미 사라진 마담의 흔적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유난히 눈에 띄던 드레스는 보이지 않았다.
뉴비 없지나 닉은 사람 자체가 눈에 띄었기에 금세 찾을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가기에는 헤쳐나가야 할 산이 너무나 드높았다.
도저히 고렙들 사이를 파고들어 살아남을 자신이 없던 희연은 얌전히 벽에 바짝 붙어 섰다.
바람이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NPC들은 이 소란스러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서로의 귀에 속닥이기 바빴다. 레벨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는 희연을 신경 쓰는 자들은 없었기에 그녀는 얼결에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누가 죽었지?”
“누가 죽였지?”
“누구의 개였나.”
“죽은 자는 말이 없네.”
“죽은 자도 말하게 되는 것이 이 성이야.”
누가 죽었다?
희연은 고개를 기울였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탓에 더 이상 킹스메이커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희연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섬뜩하도록 간드러지고, 한숨 같은 한기를 품은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하니? 내가 말해 줄 수 있단다.”
“…….”
“이상하다. 들릴 텐데. 왜. 답을 안, 하지?”
흐릿하게 아른거리는 손이 희연의 앞에서 흔들렸다. 피 묻은 소매가 예스러웠다. 결코 옆을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듯 악령이는 희연의 팔을 힘주어 눌렀다.
혼자 있지 말아라. 킹스메이커의 경고는 괜한 겁주기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희연이 유령이 될 것이다. 희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