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둘이 한판 할 것 같은데 우리끼리 도망가는 거 어때요 오리 님?”
“없지 님….”
뉴비 없지가 타이밍 좋게도 유혹을 해왔다. 평소라면 떨떠름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희연에게 있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버리고 대놓고 도망간다고 하기란 조금 민망한 일이었기에 희연은 은근슬쩍 말을 조금 바꾸었다.
“…도망가는 거 말고, 이제 그만 돌아가는 건 안 돼요?”
“물론 됩니다! 킹? 쟤는 강인해서 오지에 던져놔도 그곳을 정복하고 돌아올 인간이에요. 걱정하지 말고 갑시다!”
“네에….”
희연은 어서 빨리 이곳을 몰래 벗어나자는 뜻을 담아 닉의 팔을 붙잡았다. 지고지순 료한에게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들어 입에 가까이 댔다.
“하지만….”
“오빠한테 말하지 마세요. 얘기할 것 있으면 어차피 이따 집에서 하면 된단 말이에요.”
수긍한 것인지 료한은 백희준을 연신 힐끔거리긴 했지만 결국 조용히 희연을 보내주었다.
올 때는 다섯이었으나 갈 때는 셋이 되어버린 일행은 문을 열고 나가기엔 너무 눈에 띈다는 판단하에 테라스 쪽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조금 전 마담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장소가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외진 구석이었기에 이번에도 비어 있을 거라 생각하며 희연은 그곳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그녀의 예상대로 테라스를 차지한 사람은 없었다.
“에흐테.”
[펫 소환 불가 지역입니다.]
“?”
던전도 아니고 싸우는 중도 아닌데 펫 소환을 거부당했다. 당황한 희연은 닉을 돌아보았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루로가 얌전히 안겨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에흐테가 소환이 안 돼요.”
“원래 궁전에서는 펫 소환이 불가능해요.”
“루로는….”
“루로는 드래곤이니까요.”
“아.”
많은 것이 생략된 설명이었지만 드래곤이라는 이름은 그걸 이해하게끔 했다.
“하지만 스킬도 사용이 되는데 왜 펫은 안 되는 거예요?”
지금도 연회장 중심에선 한 마법사와 한 검사가 스킬을 남발하며 화려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구경하다 얼결에 맞은 이들까지 참전해 어느새 가면무도회는 막을 내린 지 오래고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게요….”
닉 또한 자세히는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들 중엔 알 만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뉴비 없지는 입이 근질거린다는 얼굴로 기다리다 희연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마자 입을 뗐다.
“옛날에 파벌 싸움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때 궁전 안에서도 스킬을 써야 할 일이 많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만 제약이 풀렸어요. 호위, 암살, 소규모 전투 같은 소소한 이벤트가 너무 자주 열렸는데, 스킬을 사용하지 못하면 순수 힘체민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아, 탱커 직업 많은 쪽이 유리했겠네요?”
“네! 그래서 불공평하다는 말이 많이 나와서 시드론의 왕이 그때 스킬에 대한 부분만 제약을 풀어줬어요.”
“그랬구나.”
결론은, 스킬을 사용해 내려가야 한다는 거였다.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에서 뛰어내릴 만한 스킬이 뭐가 있나 목록을 훑어보았다.
“음….”
딱 적절하다 싶은 건 없었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희연은 일단 악령이를 닉에게 맡겼다.
“?”
“악령이 좀 부탁드릴게요!”
닉이라면 악령이를 잘 챙겨주리라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악령이가 워낙에 뉴비 없지를 싫어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악령이까지 챙기자니 희연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웠다.
악령이의 안위를 챙긴 희연은 그 이상 지체할 필요 없다는 듯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저 먼저 내려갈게요!”
“어? 오리 님 착지는 어떻게 하려고….”
뉴비 없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연은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오리니이이이임…!”
웃자란 나무의 자잘한 나뭇가지에 부딪히며 땅으로 떨어진 희연은 당연하게도 안전하게 착지하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모습에 난간에 기대어 있던 뉴비 없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호들갑스럽게 구는 뉴비 없지와 달리 무통에 가까운 통각 수치를 설정한 희연은 구르는 것이 멈추자 대수롭지 않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치유의 손길>.”
탕-!
야무지게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는 것까지 마친 희연은 제 몸을 감싸고 사라지는 새하얀 천사의 잔재를 눈으로 좇다 그대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요란스럽게 추락한 그녀와 달리 뉴비 없지와 닉은 가볍고 날랜 몸짓으로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밑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닉의 품에서 벗어나는 악령이의 모습에 희연은 두 팔을 벌려주었다.
총소리 정도야 연회장 안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연회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오리 님! 세상에! 아니! 아니, 왜, 진짜! 와, 저 지금 너무 놀라서 손이 다 떨리거든요…!”
“놀라셨어요?”
“당연히 놀라죠!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고요! 낙하 대미지 같은 주변 지형지물로 인한 피해는 장비로도 못 막는다고요!”
“아, 어쩐지.”
피가 많이 닳았더라.
간편하게 <치유의 빛> 몇 방 쏘고 말 생각을 했던 희연이 재사용 대기 시간이 30분이나 되는 <치유의 손길>을 사용해야 했던 이유였다.
생각보다 피가 간당간당해서 그녀도 제법 놀란 참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안 죽었으니 됐지! 하고 간단히 생각했다.
너무 놀라 손발이 떨리는 것도 모자라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 로그아웃 권유를 받았다 주장하는 뉴비 없지와는 많이 다른 반응이었다.
사실 뉴비 없지가 호들갑 떨수록 희연의 놀랐던 마음이 진정된다는 쪽에 가까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희연은 몇 번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보며 어디 하나 부러졌다 하는 상태 이상 문구가 뜨지 않는지 확인했다.
목뼈 손상 같은 문구가 뜨지 않음을 확인한 희연은 그제야 뉴비 없지를 돌아보며 생각보다 튼튼한 힐러의 몸을 자랑했다.
“저 생각보다 튼튼한가 봐요!”
“그거 아니에요 오리 님! 진짜 아니에요! 힐러는 약해요! 그냥 약해요! 힐러라는 족속은 원래가 방어력이 없는 직종이라고요…!”
“…….”
뉴비 없지는 희연이 헛된 꿈을 꾸고 비슷한 일을 또 벌일까 싶어 과하다시피 힐러의 저주받은 방어력에 대해 줄줄이 말했다. 희연은 그의 걱정하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빈정 상했다.
“그렇게 안 약한데….”
물론 말만 그랬지 희연도 두 번은 못 할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한 레벨 100쯤 넘으면 다시 시도해볼 법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말이다.
옷자락에 묻어난 흙을 털어내 해프닝과도 같았던 추락 사건을 마무리한 희연은 뒤늦게 킹스메이커에 대한 걱정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데 진짜 저희끼리만 가도 돼요? 킹 님이 서운해하시면 어떻게 해요?”
“걔는 지금 광란의 파티를 즐기고 있어서 오히려 우리가 밖으로 나온 게 기꺼울걸요? 저 안에 우리가 있어봤자 범위 공격 날리기 번잡스럽다고 싫어했을 인간이라서요. 내기해도 좋습니다.”
“아하….”
“그리고 정 같이 가고 싶으면 진즉 나왔게….”
쨍그랑-!
“나도 같이 가-!”
창문을 깨는 것도 모자라 멋지게 커튼까지 찢으며 뛰어내린 킹스메이커를 보며 뉴비 없지는 마저 말을 이었다.
“짜잔-!”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정말 서로를 잘 알았다.
연회장에 싸움의 불씨를 지핀 당사자이면서 본인만 재미 볼 것 다 봤으니 쏙 빠지겠다는 태도는 왜 왕과 왕녀가 킹스메이커를 망나니라 부르는지 알게 해주었다.
망나니 공작은 쨍강쨍강 깨지는 창문을 보며 경쾌한 음악을 듣는다는 듯이 굴었다.
“아, 오랜만에 좀 재미있었다.”
“저기 오빠는….”
“이희준이요? 걔 지금 5 : 1로 싸우고 있어요.”
“아….”
“물론 이희준이 5예요.”
그래도 나름 가족이니 약간 걱정했던 희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미련 없이 발을 돌렸다. 어서 가자는 그 무언의 재촉에 킹스메이커는 낮게 웃었다.
하늘로 날아가려면 일단은 궁전의 부지에서 벗어나야 했기에 그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벽을 찾아 숲길 같은 정원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킹스메이커는 살뜰하게도 귀해 보이는 것들이 있으면 모두 뜯어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킹스메이커를 따라 혹시 비싼 게 있나 꽃 몇 송이를 채집하던 희연은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 떠올라 그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청산가리 님은 진짜 어디 간 거예요?”
“초코 님이요?”
나무 묘목 하나를 통째로 인벤토리 안에 쑤셔 넣던 킹스메이커가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짜잔-!”
뉴비 없지랑 똑같았다. 그리고 그런 킹스메이커에게 맞추어주듯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청산가리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어둠에 녹아들었던 암살자는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걸어왔다. 희연은 거리가 근접해진 청산가리로부터 진한 초콜릿 냄새를 맡았다.
모자의 검은 베일 장식 너머로 붉게 얼룩덜룩해진 옷이 보였다.
“…….”
말수가 없어진 희연과 달리 킹스메이커는 아직도 고양된 기분이 감춰지지 않는 모습으로 청산가리에게 말을 걸었다.
“타이밍 맞춰서 잘 왔네요?”
“네, 뭐…. 아슬아슬했죠. 설마하니 거기서 이희준이 나올 줄이야. 놀라서 바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잖아요 저.”
“아. 초코 님 이희준 말인데요….”
“그 여우 새끼.”
“앟….”
“하여간에 매번 잘도 알아차리고 나타난단 말이야. 그….”
“초코 님 쉿! 쉿!”
“ㅆ…?”
“아니! 그거 아니에요! 삐약거리는 상황 아니에요 지금!”
킹스메이커는 다급하게 청산가리의 입을 막았다. 가면을 벗은 탓에 맨얼굴이 드러나 있던 청산가리는 왜 그러냐는 눈으로 킹스메이커를 보았다.
희연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그런 둘을 바라보다 먼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오빠예요.”
“?”
“그러니까… 제 친오빠예요. 백희준, 백희연.”
차례로 연회장 방향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킨 희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대체로 의뭉스럽게 생글거리는 일이 많던 청산가리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 갔다.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한 것이 티가 나는 얼굴로 교차 검증에 들어갔다.
청산가리는 일차적으로는 킹스메이커를, 이차, 삼차로는 그 자리에 있던 뉴비 없지와 닉에게까지 확답을 들은 뒤에야 굳은 얼굴로 희연을 돌아봤다.
청산가리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패륜적으로 굴 생각은 없었어요.”
“아뇨… 욕 좀 했다고 패륜적일 것까지야….”
희연은 제 오빠를 모르지 않았다. 청산가리와 킹스메이커가 뒤에서 백희준을 씹은 것만큼이나 백희준도 이 둘을 욕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니 희연은 사실 두 사람이 백희준을 삐약삐약 하고 욕하는 것 정도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킹스메이커는 예상외로 이 상황을 무척이나 불편해했다.
“오리 님, 우리가 말이죠. 정말로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 난 사이는 아니고요 일종에 이것도 비즈니스적 보여주기식 싫어하기로도 볼 수 있는데 원래 게임은 입으로도 해야 재밌거든요!”
“그렇구나.”
희연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자 킹스메이커는 이 이상 변명은 소용없다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지금은 점잔 빼는데, 백희준도 소싯적 타렌 할 때 입 좀 털었어요.”
대신 다른 쪽으로 관심을 가지라며 떡밥을 던졌다. 희연은 입 좀 털던 시절의 백희준이란 말에 제법 관심을 보였다.
“그래요?”
“네. 특히 어릴 때 게임 실력보다 입으로 상대방 털어서 더 유명했죠. 그리고 이건 백희준 흑역산데요. 걔 데뷔하기 전에 하도 입 털어서 계정 정지당한 적도 있어요.”
희연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킹스메이커가 하는 말에 집중했다. 모두 그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열 살 희연은 게임에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 좀 먹고도 없었으므로 그녀가 아는 백희준의 게임 생활은 선수 은퇴 이후밖에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 와중에 욕하다가 계정 정지당한 백희준의 과거를 들으니 무척이나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전혀 모르는 가족의 개인사를 타인에게 들으니 묘한 기분이기도 했다.
“음….”
어릴 때 욕을 많이 했었던가?
백희준은 열일곱에 선수로 데뷔하면서 숙소로 들어가게 되었고 은퇴할 때까지 집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희연은 백희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무척이나 낯선 사람 대하듯이 굴었다.
나이 차 많은 동생을 둔 죄로 희연을 업어 키우다시피 한 백희준의 입장에선 억울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열 살 아이에게 7년이란 그런 시간이었다.
백희준이 없던 7년이란 시간을 희연은 다른 것으로 채워나가며 살아가기에도 바빴고 말이다.
“…….”
희연이 백희준과 관련해 게임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하나였다.
백희준은 절대 자신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희연에게 안 보여줬다. 그때는 왜 그랬나 싶었는데 킹스메이커의 말을 들으니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욕 많이 써서. 차마 정서상 못 보여줬었던 것 같다.
“이따 놀려야겠다.”
면전에 대고 소싯적 아가리 파이터였다며? 하고 물어본다면 백희준은 그 성격상 뒤집어질 것이다. 놀릴 마음에 신나 방긋방긋 웃는 희연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리 님. 이희준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게임은 그만하고 남들 같은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 조금 더 건전한 미래를 계획해야지?”
“아, 그건 나도 싫은데….”
처음으로 백희준에게 공감이란 감정을 느껴 본 킹스메이커는 서둘러 그 감정을 떨쳐낸 뒤 희연에게 속닥거렸다.
“이 말만 하면 오리 님은 백희준 속을 매번 뒤집을 수 있어요. 뭐냐면요….”
희연은 게임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좋은 집중력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