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희연이 백희준과 대화하게 된 것은 새벽, 둘 모두 지친 몸을 이끌고 게임 캡슐에서 나왔을 때였다.
정확히는 희연은 바로 자려고 했지만 백희준의 난입 때문에 반쯤 졸면서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봐야 했다. 희연은 백희준의 재촉에 못 이겨 결국 게임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의 발자취에 관하여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어야 했다.
“그러니까, 걔랑 만난 건 게임을 한 첫날부터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게임을 같이 했다, 이 말이야?”
“그렇지.”
“중간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
“별로?”
“제멋대로 군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게끔 행동을 하는데 이상한 걸 몰랐냐고…!”
“그 정도야 뭐….”
희연은 연신 하품하며 설렁설렁 답했다. 그녀가 그럴수록 지켜보는 백희준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가 아는 킹스메이커는 성격이 좀 이상하다고 설명되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하고, 멀어질 수 있으면 최대한 거리를 둬야 안전한 위험 물질. 그것이 백희준이 정의 내린 킹스메이커였다.
최근 들어서는 뉴비나 키우면서 노후를 즐기는 노장처럼 군다지만 그런다고 해서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위험 물질이 새로 데리고 놀기로 정한 게 제 동생이라 하니 백희준은 미칠 것 같았다.
인생의 팍팍함이 괴로워 쉰다고 게임 좀 하겠다고 한 애가 스스로 더 팍팍한 삶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심지어 희연은 킹스메이커를 좀 이상하고 좀 이성이 없는 것처럼 굴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차마 정서상 그 실체에 대해 전부 말할 수는 없어 백희준은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인형의 배만 주먹으로 때렸다. 희생되는 제 인형에 애도를 표하며 희연은 슬금슬금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 백희연. 말 안 끝났어.”
“졸린데….”
백희준은 희연의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짜증이 담긴 얼굴로 백희준을 흘겨보던 희연은 차라리 얼른 얘기하고 끝내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뒤늦게나마 제대로 대화에 참여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난 솔직히 킹 님 얘기보다는 왜 오빠 닉네임이 그런 건지가 더 궁금해. 왜 이희준이야?”
“실명 그대로 하면 개인정보 바로 털리잖아.”
“…?”
성씨 하나 바꾼다고 그게 막아지지는 않을 텐데?
실제로 료한은 백희준이 이희준이어도 잘만 알아낸 눈치였다. 심지어 프로게이머 백희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별 어려움 없이 이희준이 백희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얼굴도 안 바꿨으면서 개인정보 운운하는 백희준이 희연은 좀 웃겼다.
“개인정보가 중요하면 약관 동의를 잘 봐야지 이름을 바꾸는 게 무슨 소용이야….”
“…약관 동의 얘기가 지금 왜 나와. 너 설마 이정보 성격 테스트인가 뭔가 그것도 했어?”
어떻게 알았지?
잠이 확 깬 희연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침묵했지만 백희준은 알아서 그 침묵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너는 그걸 왜 하는데! 수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조심할 생각을 안 해! 걔가 어디다 어떻게 정보를 팔 줄 알고 냅다 동의하는 건데!”
“…그러게.”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잔소리를 하지….
백희준이 마담의 성격 테스트를 알고 있다는 건 그 또한 그 테스트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희연은 왜 나만 갖고 그러냐 툴툴거리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참에 아예 자려는 심산이었다.
졸려서 제대로 눈도 못 뜨는 희연을 보며 결국 백희준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백희준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말고 희연은 입을 열었다.
“아…!”
“왜.”
“나갈 때 불 꺼주라.”
“…….”
눈으로 욕하는 모습에 희연은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백희준은 끝내 불도 안 꺼주고 문만 닫고 나갔다.
“치사하다…!”
“어쩌라고.”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희연은 골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희연은 백희준을 다시 방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마법의 주문을 배우고 온 참이었다.
“조용한 밤이로군!”
쾅-!
“야…!”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이 정도로 효과 있을 줄은 몰랐기에 희연의 얼굴에는 저절로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왕녀는 분명 잠들어 있겠지. 그렇지만, 레오디아, 나의 그대여…!”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입을 막으려 달려드는 백희준을 피해 희연은 이불까지 걷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희준의 손을 피해 침대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도 희연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대는 아직도 잠들지 않았구려! 그대의 방, 창문에선 램프의 불이 아직도 비추고 있잖소! 아! 내 몸은 그대의 사랑으로 불태워지는군!”
“조용히 안 해!”
백희준은 떨어진 동물 쿠션을 들고 희연에게 던지는 둥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 봤자 솜 인형이라 어차피 아프지도 않았고, 희연은 백희준의 반응이 더 재밌을 뿐이었다.
“난 그대를 만날 것이고, 그대 역시 내 것이 되어야만 하오. 지금 당장 그대를 만나러…!”
“아, 백희연! 아, 짜증나 진짜…!”
신경질적으로 던져진 쿠션이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리며 방을 나가는 백희준을 보며 희연은 침대 위에 반쯤 쓰러져 한참을 웃었다. 하도 뛰어다니느라 힘들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킹스메이커가 알려 준 장황한 문장은 정황상 백희준이 퀘스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왕녀에게 한 말인 듯싶었다. 어찌 됐든 간에 백희준이 절절한 사랑 고백을 했다는 소리였다.
킹스메이커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백희준을 놀린다? 무척이나 드문 기회이니 할 수 있을 때 실컷 해라.
백희준이 알았다면 참 좋은 거 배워왔다고 뭐라 했을 이야기였다.
“불 꺼주고 가세요 루나 백작…!”
“조용히 해!”
잠은 다 깼지만 희연은 뿌듯했다. 킹스메이커가 하는 말을 받아 적으며 외운 보람이 있는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후회했다.
백희준은 그녀가 아는 것보다도 더 집요했고, 유치했으며, 광적인 인간이었다.
***
시드론 왕의 공인 이후 시작된 메인 퀘스트 <길을 잃은 아이들>은 마스커레이드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시드론에 적을 두지 않았어도 유저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참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나온 메인 퀘스트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샀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단서가 없고 해결법도 두루뭉술하다. 왕녀와 왕자를 두고 파벌을 나눠 작은 전쟁을 벌였던 이전의 메인 퀘스트와 궤가 달랐다.
호승심을 일으키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않은 이야기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하필이면 같은 날 새벽에 새로운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묻힐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루나 백작 운운하며 백희준을 놀린 뒤 신나서 게임에 접속한 희연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뚝딱 해결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건 희연의 바람일 뿐 사람들은 메인 퀘스트라 해서 무조건 달려들지는 않았다. 관심받지 못하는 만큼 진전도 없었다.
킹스메이커는 다들 말을 안 하는 거지 남들 몰래 퀘스트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했지만, 희연이 보기엔 아니었다. 시기가 나빴다.
“미안해요 오리 님, 이번 건 빠지기 조금 곤란해서요….”
“괜찮아요, 저 신경 쓰지 마세요!”
메인 퀘스트를 뒤로하고 신규 던전에 집중하는 건 킹스메이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메인 퀘스트를 깨는 것도 좋아했지만 동시에 사냥, 던전, 레이드 같은 콘텐츠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희연은 자신의 개인적 바람 때문에 킹스메이커의 즐거움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괜찮다고 하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우리 오리 님도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아뇨. 전 거기 입장하기도 전에 죽어요.”
희연은 흑흑거리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뉴비 없지에게 현실을 말했다. 꿈꾸는 것은 자유라지만 그 꿈에 취해 정말로 뉴비 없지가 그녀를 데리고 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뉴비 없지는 충분히 그 꿈을 실현시킬만한 인간이었다.
킹스메이커는 그 모습을 보며 흐리게 웃었다.
“최대한 빨리 던전 공략하고 돌아올게요 오리 님. 보스 레이드는 아니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대충 어떤 스타일로 돌아갈지 알 것 같기도 하고요.”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킹스메이커로부터 들었던 새로운 지식을 다시 되새겼다.
메르헨 호라이즌에서 던전은 원래 차례대로 한 파티씩 들어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지만, 만약 그 던전이 아무도 공략한 적 없는 신규 던전일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군가 먼저 공략을 마치기 전까진 모든 파티가 동시에 던전 입장이 가능하며 최초 공략 파티에게는 아주 후한 보상이 돌아간다.
모든 파티가 입장 가능한 만큼 던전 안에서 상대해야 하는 건 몬스터보다는 유저로, 심지어 최초 공략 전까지는 일반 필드의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어 유저간의 PK는 물론 상대를 죽인 이후 파밍까지 가능했기에 일시적으로 무법 지대나 다름없었다.
무척이나 살벌하지만, 할 일 없고 심심한 이들에겐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이벤트였다. 심지어 며칠 전 허무하게 끝난 보스 레이드를 기억하는 킹스메이커에겐 이번 던전은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메인 퀘스트와 희연을 두고 가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느 것 하나 양보할 생각이 없는 킹스메이커는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에서 만나는 족족 모두 별님의 곁으로 보내는 것으로 경쟁자를 없애 던전도, 메인 퀘스트도 차지하기로 말이다.
이런 킹스메이커의 속내를 모르는 희연은 괜스레 그녀가 자신의 눈치를 보게 만든 것만 같아 조금 미안한 감정을 가졌다.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상반된 생각을 품고 희연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그때, 누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 언제 출발하니?”
“인내심이 부족해 마리아.”
핀잔을 받은 것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섭섭하다며 입을 삐쭉거렸지만 이어 킹스메이커가 품 안에 황금이 가득 든 주머니를 쥐여주자 언제 자신이 그랬냐는 듯 매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인사는 중요하지. 언제 출발하던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신경 안 써도 되니 천천히 인사 나눠 친구야.”
“하하, 이 속물.”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상처받은 내 마음에 금융 치료가 필요한 게 보이지 않아?”
킹스메이커는 착실하게 돈을 냈고 마리아는 성호를 그었다.
“나는 네가 영원히 회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도 한결같은 마리아의 모습에 희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던전은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던 황무지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몬스터의 기본 레벨이 높은 필드에서 발견된 던전은 입장 조건으로도 상당한 레벨을 요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희연은 그 근처에도 못 가고, 심지어는 닉마저 레벨 제한으로 입장이 불가능했다.
비록 직업 특성상 함께해야 하는 콘텐츠에는 쥐약이지만 그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을 다양한 버프 능력을 가진 서포터인 닉을 제외해야 하는 상황에 킹스메이커는 용병을 불렀고, 그게 바로 마리아였다.
서버 내 최고의 힐러이자 동시에 훌륭한 딜러이며 때론 탱커 역할까지도 하는 마리아는 본인 길드에 소속된 사람 몇 명을 이끌고 킹스메이커의 파티에 합류했다.
희연은 마리아를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서먹하게 굴었는데, 그 이유는 마담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런 희연의 찝찝한 감정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마리아는 길드 성에 온 이후로 이따금 희연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넬을 힐끔거렸다. 그건 악령이 신기해서 바라보는 그런 종류의 눈은 아니었다.
순간순간 번뜩이는 금색 눈을 볼 때면 당장에라도 그녀의 채찍이 날아올 것만 같아 희연은 경계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함께 던전을 돌며 희연과 친분을 다졌다는 죄로 마리아에게 끌려온 12시의 모짜렐라가 툭툭 치며 경고를 줄 정도였다.
“티 나요.”
“네에….”
마리아와 마담의 거래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에도 희연에게 병사 악령의 퀘스트를 양보했던 12시의 모짜렐라는 이 자리가 불편해 죽겠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다행히 불쌍한 두 힐러가 더 눈치 볼 일 없게 킹스메이커는 슬슬 출발하자며 운을 뗐고 그에 희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뉴비세스 메이커에서 이번 던전에 참여하는 건 총 셋. 킹스메이커, 뉴비 없지, 청산가리. 마리아의 길드 양떼목장에서 참여하는 건 마리아 본인과 힐러 하나, 성기사 하나였다.
탱커 둘에, 힐러 둘. 근딜, 근딜 같지만 어쨌든 원딜인 위대한 마법사 킹스메이커라는 안정적인 파티 구성원이었다.
“승리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오리 님!”
“와아… 파이팅!”
여전히 아쉬운 마음을 떨쳐내지 못하는 뉴비 없지를 제외하고 모두가 진지하게 이번 던전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킹스메이커는 일명 도핑이라 불리는 작업에 몰두하며 온갖 물약을 마시고 뿌리고 묻혔는데 그 가짓수를 세어보던 희연이 도중 포기할 정도로 그 양이 많았다.
심지어 마스커레이드에서 보았던 그 최종 장비까지 다시 착용했다는 점에서 그녀가 이번 던전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여전히 무기는 낫이라 희연은 이번에도 합법 도박이 말했던 지팡이를 보지 못했다.
청산가리 역시 장난스러운 종이비행기가 아닌 제대로 된 무기를 들었는데, 제 몸에 도핑을 두르는 킹스메이커와 달리 청산가리는 무기에 도핑을 둘렀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닉의 온실 속 장식용 화분 받침대가 희생되었다. 그녀가 받침대에 온갖 독약을 풀어 채운 다음, 무기를 그 안에 담갔기 때문이다.
원래는 새하얬지만, 독극물 색으로 물들어버린 장식을 보며 닉은 조금 슬퍼했다.
“누구 목부터 노려야 하지.”
청산가리의 말에 희연은 그녀의 공략 대상이 던전인지, 그 안에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어찌 됐든 이름값 하는 그녀의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마리아를 포함한 외부인들은 바꿔치기 스크롤을 통해 이동했고 뉴비세스 메이커 길드원들은 길드 성의 포탈기를 이용했다. 여섯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 번에 빠지니 희연은 주변이 조금 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만 남았네요?”
희연의 말에 닉은 잔잔히 응했고 모짜렐라는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 표정인지라 그 모습에 닉은 선뜻 대화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짜렐라는 닉이 조금 멀어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어디서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앞에서 너무 수상하게 굴지 마요. 어지간히 성격 나쁘니까.”
“아….”
어색하게 웃는 희연을 보며 모짜렐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닉은 인벤토리에서 물뿌리개를 꺼내 주변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조금씩 멀어지는 닉의 위치를 확인했으면서도 모짜렐라는 목소리를 더욱 낮춰 말을 이었다.
“그쪽 길마랑 친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봐줄 거라고 믿지 마요.”
“길마는 닉 님인데….”
“대충 알아들었잖아요. 그리고 여기 길마 사실은 얼굴마담, 바지사장인 거 누가 모르나. 진짜 실세는 따로 있는 거 다 알거든요?”
물론 닉은 못 들은 척한 것이지 희연과 모짜렐라가 하는 대화를 모두 들었다. 신체 조건 나쁜 두 힐러는 그 사실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 주고받았다.
“여차하면 그 병사 악령 다시 뺏어 올 생각도 하고 있을 거라고요.”
“킹 님이랑 친한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할까요?”
“…그쪽이 말하는 그 킹이라는 사람도 그 친한 사람 뒤통수 여럿 치고 다녔어요. 거기엔 마리아도 포함이고요.”
“…….”
“그리고 돈으로 화해했대요.”
진짜 그랬을 것 같아서 희연은 할 말이 없었다. 어느새 악령이의 머리 위에 앉은 넬을 보며 희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특성 퀘스트까지 깼는데도 그럴까요? 솔직히 말하면 넬은 메인 퀘스트랑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판단은 본인 몫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확신을 얻을 때까지 계속 그러겠죠. 안 그래도 그쪽이 이번 메인의 선구자고, 하필이면 그 병사 악령을 데리고 간 이후에 메인 퀘스트가 시작돼서 내가 얼마나 쪼였는데요.”
“아….”
모짜렐라의 양보를 기억하는 희연은 안 됐다며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짜렐라가 본인에게 내려진 퀘스트를 포기해 준 덕에 병사는 아나토와 만날 수 있었다. 그가 포기해주지 않았다면 불가했을 일이었다.
내심 희연은 그 점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고맙다고 해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희연은 잔잔한 어투로 물었다.
“그런데 제가 선구자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희연은 마스커레이드 이후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자신이 선구자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지금의 대화에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