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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160)화 (160/251)

160화

[현재 길드 <윈>과의 길드전이 진행 중입니다. 길드전 참여를 거부할 경우 가장 가까운 마을로 이동됩니다.]

“참여!”

선택을 내리자 그제야 희연의 눈앞에 현재 길드전과 관련된 상태 창이 줄줄이 떠올랐다. 희연은 시야를 가리는 그것들을 모두 치운 뒤 곧바로 온실을 나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메이드 바이 킹스메이커표 털실 인형 하나가 호다닥 뛰어와 희연을 탑 쪽으로 안내했다.

평소에는 쫑쫑거리며 느릿느릿 돌아다니던 인형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갖 버프를 받은 것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였기에 희연은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희연이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건 탑의 계단을 찾았을 때였다.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규칙적으로 자리 잡은 창문으로 루로의 몸체가 얼핏 엿보였다. 성체로 변한 루로가 가까이 있어서인지 탑으로 올라가는 길의 내부 역시 살얼음이 껴 있었다.

하얀 드래곤의 몸체가 가리지 않은 창을 발견할 때면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씩 늦어졌다. 마할라틴 숲 외곽 쪽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생생한 전투의 현장을 그제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넝쿨 벽 탓에 본격적인 싸움은 없었지만 견제는 진행되고 있었다. 윈의 길드원 중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들은 모두 나무 위로 올라가 공격을 가하고 있었고, 근거리 딜러들은 넝쿨 벽을 공격했다.

반짝이는 마법과 화살에 오래된 고성의 벽에 조금씩 금이 가는 상황에도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을 저지하고 있어야 할 뉴비 없지나 청산가리, 심지어 닉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어딘가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걸까? 희연이 그들의 의중을 생각해 보는 사이 어느새 그녀는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마지막을 밟고 서 있었다.

목적지에 도달한 뒤에야 희연은 이곳이 단순한 탑이 아닌 일종의 망루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낮은 난간 아래에는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다양한 디버프 효과를 주는 탄환으로 킹스메이커가 희연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희연은 서둘러 그것을 열어 탄환 수집 목록에 차례로 등록시켰다.

“수면 효과, 독, 플라워 쉘… 이건가? 그리고… 아, 맞다.”

희연은 탄환 목록을 보며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들의 종류를 확인했다. 공격성이 좋은 화염 탄환만 평소에 사용해서 그렇지 그녀에게도 디버프용 탄환이 있기는 했다. 빙결과 전격.

추가된 탄환까지 합친다면 아무리 희연이 레벨이 낮아 눈에 띌 성과는 못 내더라도 다양한 디버프로나마 적을 충분히 방해할 수 있었다.

쾅-!!

“…!”

희연이 탄환을 인벤토리에 넉넉하게 챙기기를 기다린 것처럼 킹스메이커는 타이밍 좋게 땅속에 묻은 마폭탄을 터트렸다. 망루 위까지 느껴지는 진동에 몸을 낮췄던 희연은 진동이 잦아지자마자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밑을 내려다보았다.

예상 못 한 폭발 공격에 적절한 대응을 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좌중이 혼란에 빠진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희연은 지체할 것 없이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탄환 변경>.”

[탄환이 변경됩니다. 일반 탄환 >> 극독 탄환]

탕! 탕-, 탕-, 탕!

총알은 모두 명중이었다. 날아간 총알은 대상의 몸에 닿을 때쯤이면 산산이 깨지며 그 안에 들어있던 짙은 독극물을 흩뿌렸다. 폭발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거기에 극독 효과까지 더해지자 맥을 못 추렸다.

그 모습에 희연은 이대로면 수월하게 이기지 않을까 싶어 얼굴이 밝아졌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상대의 옷 색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못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상대의 옷은 난장판이 된 숲속에서 유난히 희게 빛났다. 희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힐러?”

하얗고 금빛 일색인 차림새. 이 거리에서도 구별 가능한 신관의 아이덴티티였다.

이름 모를 윈의 힐러는 몬스터 웨이브 때 보았던 디스펠 스킬을 사용해 디버프에 걸린 이들의 상태 이상을 모두 해제했다. 그 범위가 어찌나 넓던지 기껏 애쓴 희연의 노력은 무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희연은 다시 총을 들었다. 저쪽은 다시 스킬을 쓰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희연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른 탄환을 써 봐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목록을 훑던 희연에게 악령이가 경고를 날렸다.

“피해!”

“…!”

[탄환이 변경됩니다. 극독 탄환 >> (마법)전격 탄환]

높은 망루는 바람 소리가 거셌다. 누군가 탑의 외벽을 밟으며 올라오는 소리를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다. 설마하니 맨몸으로 탑을, 그것도 드래곤이 매달려 있는 탑을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방심하고 있던 희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너…!”

그리고 그 사람이 존성대명임을 깨달았을 때 이미 희연은 총을 휘두른 다음이었다.

디버프를 남발하는 저격수를 잡기 위해 망루 위로 올라왔던 존성대명은 제 눈앞으로 날아오는 총의 잔상에 굳어버렸다. 전격이 흐르는 노란 마법진에 휘감긴 총은 직접 타격으로도 마비 효과를 제대로 주었다.

몸이 저린 느낌에 존성대명이 주춤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희연은 두 손을 뻗어 그를 망루 밑으로 밀어버렸다. 맥없이 떠밀린 존성대명은 그대로 루로의 꼬리 짓에 맞아 저 멀리 날아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멍하니 있던 희연은 저 밑에서 울리는 함성 소리를 들은 뒤에야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깜짝이야….”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른 희연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루로의 꼬리에 직격으로 맞고 떨어진 존성대명 옆에 조금 전 보았던 힐러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백희준이 있었다. 색 옅은 금발과 하얀 제복은 폭발로 인해 푸릇하던 땅이 뒤집히고 상황이 난잡해진 뒤에야 눈에 띄었다.

백희준 역시 고개를 들어 망루 위에 있는 희연을 보았다. 백희준과 눈이 마주친 희연은 그제야 자신은 이 싸움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진지하게 임하기엔 남매 싸움을 길드전으로 한다는 생각 탓에 오히려 기운이 빠졌고 그렇다고 설렁설렁하기에는 또 싫었다. 희연은 여전히 백희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킹스메이커보다 오히려 그녀 자신이 백희준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백희준은 여전히, 이렇게 본격적인 길드전에서 마주친 지금도 일을 벌인 사람답지 않게 얌전했다.

이제 백희준이 어떻게 나올까 싶어 희연은 위험하단 걸 알면서도 망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덕이라 해야 할지, 그녀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검은 그림자를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희연은 처음에 저게 뭔가 싶었다. 거리가 멀었고,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구별이 힘들었다. 그림자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꼭 누구 하나 쓰러지거나 폴리곤이 된다는 걸 안 뒤에야 희연은 그 그림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림자의 정체는 청산가리였다. 그녀는 암살자라는 직업에 맞게 소리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움직이며 가장자리부터 윈의 길드원을 하나씩 제거했다.

어찌나 조용하고 날렵하던지 청산가리에게 붙잡혀 제거된 윈의 길드원들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남기지 못해 그 주위에 있던 이들 역시도 일행이 죽었음을 뒤늦게 눈치챘다.

그러나 눈치챈 뒤 범인을 잡으려고 해도 이미 청산가리는 반대편으로 이동한 뒤였다. 그렇게 차례차례, 청산가리는 마치 몰이사냥이라도 하듯 사람들을 몰아치며 사냥을 즐겼다.

저 사람이 정말 매일 종이비행기와 종이학이나 날리던 그 사람인가 싶어 희연의 얼굴에는 절로 놀라운 기색이 떠올랐다.

사람들 틈을 파고든 그림자가 이번 종착역으로 고른 것은 백희준이었다. 희연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백희준은 희연이 있는 방향을 계속 바라보면서 검을 꺼냈다. 청산가리는 뒤에서 백희준의 목을 노렸다. 뒤이어 벌어진 광경에 희연은 총을 들어야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분명 백희준은 희연을 보고 있었다. 희연은 피가 흩뿌려지는 걸 본 뒤에야 백희준이 청산가리를 검으로 찌른 것을 깨달았다.

공격에 실패한 청산가리는 바로 그림자 속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녀를 꿰뚫은 백희준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길드전을 하는 동안에는 자동으로 파티 상태 비스름한 것이 되기에 희연은 청산가리의 HP 게이지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저대로면 죽는다.

“<등불의 빛>! <등불의 천사>!”

뚝뚝 떨어지기만 하던 청산가리의 HP가 떨어지는 것을 멈추고 잠시 주춤했다. 청산가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희준에게 다시 공격을 가했다.

그 탓에 백희준은 조금 뒤로 물러났고, 청산가리는 자신의 몸을 꿰뚫은 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산가리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익숙한 리라의 음률이 퍼져 나갔다.

“아….”

리라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잽싸게 자리에 앉은 희연의 눈이 흔들렸다. 윈의 길드원 대부분이 잠깐이라도 무릎이 꺾였다. 그러나 백희준은 그들 사이에서도 홀로 굳건했다.

그 모습에 희연은 할 말을 잃었다. 킹스메이커가 괜히 1 : 1 싸움은 피한다고 한 게 아니었다. 얼마나 게임에 미쳐 살았길래 저 정도로 강한 걸까. 희연은 여러 의미의 놀라움이 담긴 시선으로 백희준을 보았다.

닉 역시 별 소용이 없다 판단한 것인지 전과 달리 빠르게 리라 연주를 그만두었다. 대신 내내 고요히 탑 위에 자리 잡고만 있던 루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앗 차가….”

망루의 가장자리에 있던 희연은 탑이 빠르게 어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손으로 짚고 있던 낮은 난간에 살얼음이 꼈다. 실상 탑뿐만이 아니었다. 마할라틴 성의 외벽을 타고 내려간 서리와 얼음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윈의 길드원들을 덮쳤다.

조금이라도 발끝이 얼음에 닿은 이들은 온몸이 얼어 움직임을 제한당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다가오는 서리를 피해 물러났다. 백희준만이 검은 든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희연은 이제 저 게임에 미친 혈육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백희준은 슬프게도 희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쾅-!

한 번이었다. 단 한 번 검을 휘두른 것으로 백희준은 그를 향해 달려들 듯 몰아치던 얼음과 서리의 기운을 쳐냈다. 놀라운 건 지금까지 백희준은 눈에 띄는 스킬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쳤나 봐 진짜….”

희연은 거의 세계관 최강자급의 패기를 보이는 백희준을 보며 약간의 경외심과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분명 대단하기는 했지만 너무 대단해서 싫었다.

희연의 괴로움을 모를 백희준은 검을 허공에 털며 얼음 조각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어, 루로가 있는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전과 달리 푸릇한 기운이 그의 검 위로 일렁거렸다. 이전에 땃쥐 미가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스킬이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썩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였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새파란 불꽃이 루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땃쥐 미의 것보다도 거대한 그 불길은 드래곤은 물론이고 탑 전체를 겨냥한 공격이었다. 탑의 망루에 있는 희연에게도 타격을 주는 공격이란 뜻이었다.

킹스메이커가 기껏 눈 감으면 안 된다고 알려준 것이 무색하게도 희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다가올 충격을 대비했다. 부디 탑이 부서지며 추락하는 결과물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쾅-!

그러나 아무런 충격 없이 저 앞에서 폭발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뒤늦게 눈을 뜬 희연이 보게 된 것은 도중 공격을 막은 것으로 보이는 뉴비 없지가 푸른 불의 흔적과 함께 땅에 착지하는 모습이었다.

희연은 내내 보이지 않던 뉴비 없지의 등장에 안도하며 다시 총을 들어 올렸다. 금빛의 망토를 두른 뉴비 없지는 방패를 들고 있었다. 완전히 방어에 치중하겠다는 모습이었다.

탱커가 앞에서 적을 막으면 힐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다. 희연은 차분히 배운 대로 해 나갔다. 일단은 버프다.

“<촛불의 숨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산란하는 빛 조각에 뉴비 없지가 희연이 있는 쪽을 잠시 힐끔 돌아봤지만 그는 금세 몸을 바로 하며 백희준에게 집중했다.

직관적인 검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백희준은 공격밖에 모른다는 것처럼 뉴비 없지를 몰아쳤고, 뉴비 없지는 오로지 방어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것은 백희준이었기에 언뜻 보면 뉴비 없지가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희연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날 때마다 뉴비 없지에게 총을 쐈다.

워낙 뉴비 없지의 피통이 크고 그에 더불어 백희준의 일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와중에 희연은 레벨이 낮아 많은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 희연의 서포트는 다른 방향으로 뉴비 없지에게 도움이 되었다. 신관의 회복 스킬 이펙트는 다수가 반짝이고 눈부신 것이 특징이었다.

뉴비 없지에게 바짝 붙어 검을 휘둘러야 하는 백희준의 입장에선 자꾸만 눈을 부시게 만드는 그 스킬들이 좋을 리가 없었다.

넓게 검을 횡으로 휘두르고 잠시 거리를 벌린 백희준은 뉴비 없지가 다시 제게로 달려드는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손짓을 보냈다.

위에서 그 모습을 모두 본 희연은 백희준이 누구를 부른 건가 싶어 빠르게 눈을 굴렸다. 반은 얼어서, 반은 그냥 구경하느라 가만히 있던 윈의 사람들 중 유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희연과 차림새가 비슷한 남자. 윈의 힐러였다. 모짜렐라와 같은 정석 힐러의 느낌이 나는 그는 새하얀 몸체에 푸른 보석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리가 장식된 지팡이를 들어 희연을 가리켰다.

제게로 향하는 지팡이의 방향에 희연은 반사적으로 주춤거렸다. 윈의 힐러가 짧게 입술을 달싹이는 것과 동시에 불길함을 감지한 루로는 하늘로 날아올랐고 희연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악령이는 몸에 힘을 주었다.

“아야….”

대책 없이 악령이의 힘에 밀려 옆으로 날아가듯 넘어진 희연은 곧이어 그녀가 원래 서 있던 자리 위로 내리꽂히는 하얀 번개에 바짝 굳었다.

쾅-!

탑의 천장과 기둥이 무너지며 망루의 한쪽이 완전히 반파되었다. 제 옆으로 쏟아져 내리는 돌무더기를 바라보며 희연은 멍하니 생각했다.

힐러가… 이렇게 강한 직업이었나…?

본의 아니게 최약체 직업의 가능성을 보게 된 희연은 괜히 힐러를 두고 갓직 갓직 노래를 부르던 게 아니구나 싶어졌다.

지팡이는 먼 거리까지 스킬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저 윈의 힐러는 망루 꼭대기에 있는 희연을 노렸다. 거의 총을 무기로 하는 희연과 사정거리가 비슷한 수준이었다. 힐러는… 사기 직업이 맞았다!

상대측 힐러가 자신을 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희연은 무방비하게 있던 전과 달리 아주 조심히 몸을 내밀어 밑의 상황을 훔쳐보았다.

윈의 힐러는 여전히 희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이상 공격할 생각은 없다는 듯 지팡이를 땅으로 늘어트렸다. 방금 전의 공격은 뉴비 없지와 백희준의 싸움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의 경고였던 듯했다.

희연의 자잘한 방해 공작이 없어진 것이 확실히 도움이 되었는지 백희준은 조금 전보다 더 거세게 뉴비 없지를 몰아쳤다.

만약 저기에 저 윈의 힐러까지 끼어들게 된다면 그때도 뉴비 없지가 버틸 수 있을까? 그 생각에 희연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 뉴비 없지는 방어만 하고 반격을 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공격을 안 하지?”

정말로 그랬다. 뉴비 없지는 일체의 반격 없이 오로지 방어만 하며 백희준을 붙잡고 있었다. 희연은 뉴비 없지가 마음먹으면 아주 강한 딜러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직접 봤기 때문이다.

희연은 첫 던전을 돌며 배웠던 것을 다시 상기했다. 파티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자 룰이었다. 백희준을 보스 몬스터로 대입해 생각해보면 답은 쉬웠다.

탱커가 발을 묶고, 힐러가 탱커를 전담해 치료하면, 딜러가 공격한다. 현재 탱커는 뉴비 없지고 힐러는 희연이었다. 킹스메이커는 아직 부재중이고 닉은 딜러가 아닌 서포터였다. 서포터로서 닉은 보스 몬스터 백희준 주변의 인물 중 다수의 발을 묶었다.

그렇다면 남은 딜러는 한 명이다.

희연은 보이지 않는 아군을 찾아 주변을 살폈다. 멀리 볼 것도 없었다. 전투 시 가장 먼저 노려지는 건 힐러.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딜러이자 암살자인 청산가리가 나타날 곳은 한 곳이었다.

윈의 힐러의 발밑으로 검은 그림자가 울렁이는 것을 확인한 희연은 곧바로 총을 들었다. 희연이 반격할 기색을 보이자 윈의 힐러 역시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윈의 힐러는 지팡이를 든 채 머뭇거리기만 할 뿐 조금 전의 벼락을 다시 날리거나 하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희연은 좋은 기회다 싶어 곧바로 상대를 저격했다.

탕-, 탕, 탕-!

연속으로 발사된 총알에 맞은 윈의 힐러의 몸 위로 노란빛의 전류가 흐르며 빛을 냈다. 전격 탄환의 효과인 마비였다. 움직임을 제한당한 윈의 힐러의 뒤로 예의 가면 따위 벗어버린 청산가리가 짧은 단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순식간이었다. 다른 윈의 길드원들이 그랬듯 윈의 힐러 역시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청산가리의 손에 의해 폴리곤이 되었다. 뒤늦게 존성대명을 비롯한 몇 명이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청산가리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하아….”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희연은 자신의 입김이 하얀 연기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급속도로 낮아지는 기온에 이상함을 감지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소복소복, 때에 맞지 않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루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루로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성체의 루로는 크기만 커졌을 뿐 하는 짓은 아기 드래곤일 때와 똑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연을 보는 금색 눈이 순했다.

그러니까 지금 루로는 때에 맞지 않는 그 순한 얼굴로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게 된 윈의 길드원들을 동사시키고 있었다는 뜻이다.

제법 도톰히 쌓인 눈 위로 폴리곤 덩어리가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본 희연은 테이머는 정말 망직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 혹시….”

직업의 네임드가 뜨면 동종 업계 종사자가 피해를 받는다. 이름 없는 그분이 한 말이었다. 어쩌면 테이머가 계속 망직 소리를 듣는 이유는 드래곤을 길들인 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는 얘기는 앞으로도 테이머는….

거기까지 생각한 희연은 혹여라도 닉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까 싶어 서둘러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을 떨쳐냈다.

다만, 귀여운 동물들과 함께하는 따뜻하고 즐거운 힐링 라이프 같은 상상에 속아 테이머를 고르지 않아 다행이라고는 생각했다. 닉이 들었다면 속상해했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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