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희연이 직업에 관한 심도 깊은 고찰을 짧게나마 하는 사이 밑에서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닉이 등장했고, 청산가리는 백희준의 목을 노리며 과격하게 달려들었다. 2 : 1의 싸움이었다. 백희준은 밀리지 않았다. 과연, 괜히 료한이 지고지순 10년의 세월을 갖다 바친 게 아니었다.
아는 것이 있어야 보는 눈도 있다. 그런 면에서 희연은 솔직히 볼 줄 몰랐다. 그러나 그 볼 줄 모르는 눈임에도 백희준이 대단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백희준은 속도 면에서 발군이었으며 힘으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스킬, 스텟, 칭호가 좋다기보다는 이희준이라는 캐릭터를 사용하는 백희준의 능력 자체가 뛰어났다.
킹스메이커가 내린 백희준의 평가 중에는 머리가 타렌으로 찌들었다는 말도 있었다. 희연은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지금에 와서야 알았다. 그건 칭찬이었다. 아니꼬움이 한가득 담긴 칭찬.
같은 조건, 꾀를 부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1 : 1로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은 인간을 향한 불유쾌한 감정이었다.
본인의 편이 밀리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희연은 2 : 1의 싸움에서 기꺼이 승기를 잡는 백희준을 보며 묘한 감상에 빠졌다.
잘한다. 정말로 잘한다. 저러니, 그렇게 주위 어른들에게 온갖 잔소리와 조언을 빙자한 비난과 욕을 먹을 걸 알면서도 프로 게이머를 하겠다 집을 나갔겠지.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총을 잡고 있던 희연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희연은 백희준이 게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백희준이 정서상 안 좋다고 기를 쓰고 안 보여주려고 해서. 좀 커서는 관심이 없어서. 그보다 더 나이를 먹어서는 백희준이 싫어서였다.
어른들은 지금까지도 백희준을 보면 이제 게임은 그만하고 남들 같은 평범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칭찬은 했다. 애가 잘나기는 했어, 하고.
백희준은 잘났다. 잘난 인간의 주변 사람이라는 건 결국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고, 희연은 하필이면 그런 잘난 백희준의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었다.
솔직히 말해 희연은 조금 전 킹스메이커가 그녀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동생 쪽에 공감했다.
희연은 네 오빠만큼은 못 하는구나, 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네 오빠랑은 다르게 남들처럼, 이라는 말도 참 많이 들었다. 질릴 정도였다.
그래서 희연은 백희준이 싫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열등감이었으면 나았을 것을, 희연이 백희준에게 느끼던 감정은 질투나 그런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불쾌함은 오로지 자신이 무엇을 하던 사사건건 백희준이 거론된다는 점에서 오는 짜증뿐이었다.
어렴풋이나마 백희준도 어른들이 저를 두고 주위 애들, 특히 그의 동생인 희연에게 무어라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희연이 가끔 못되게 굴거나 틱틱거리는 것도 봐주었다. 봐주는 거였지 결코 희연이 그를 이겨 먹은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희연은 백희준을 한 번쯤은 꼭, 이겨 먹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희연은 조용히 총을 들어 올렸다.
“<탄환 변경>.”
[탄환이 변경됩니다. (마법)전격 탄환 >> 플라워 쉘]
희연은 이곳에 오기 전 킹스메이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잊지 마요, 오리 님. 숲이 죽을 때 꽃을 피우는 거예요.’
“숲이 죽을 때….”
저 멀리, 마할라틴이라는 이름 아래 종속된 숲이 외곽부터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직은 망루 위에 서 있는 희연만이 알아챈 변화였다.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처럼 숲의 바람에 죽음의 냄새가 섞였다. 기온이 떨어지고 절로 몸이 으슬으슬한 추위가 왔다. 겨울의 추위와는 궤가 다른 종류의 으스스함이었다.
눈에 띄는 변화였지만 루로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서리가 내리는 날씨 탓에 밑에 있는 사람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같은 편을 제외하곤 말이다.
둘이 자석의 N극과 S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희준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뉴비 없지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죽을지언정 네 목을 따고 죽을 것이다 라는 마인드로 달려들던 청산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조차 함부로 못 떼게 할 정도로 끈덕지게 굴던 두 사람이 훌쩍 물러남에 따라 백희준은 홀로 남았다.
백희준이 수상함을 느꼈다 한들 이미 늦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된 윈의 길들원들을 리라로 하나하나 후려치고 다니던 닉이 루로의 꼬리를 타고 올라갔다. 하얀 드래곤은 아주 높게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하늘 자체를 가렸던 루로의 날개가 멀어지며 해를 가렸다. 마할라틴 성 주변에만 그림자가 졌다. 그때쯤에야 희연은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 대상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희연은 망설이지 않고 백희준에게 겨냥했다.
탕-!
미친 반사 신경을 가진 백희준은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총알을 검으로 베어냈다. 희연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안도의 뜻을 담아 조금 웃었다.
백희준의 검에 의해 반으로 갈라진 꽃봉오리를 닮은 초록색 총알에서 씨앗 여러 개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작은 씨앗들은 눈이 쌓인 척박한 땅에서도 알아서 뿌리를 내렸고 자라나 마침내 꽃을 피워냈다.
죽어가는 땅의 기운을 흡수한 것처럼 새까만 검은 줄기의 꽃을.
불길한 색의 꽃은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줄기는 더 억세게, 꽃잎은 날카롭게, 잎에는 가시를 달며 자라나더니 자신들을 짓밟고 서 있던 백희준의 몸에 엉켜 들었다.
마치 죽어가는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꽃의 생장은 몸부림처럼 보였다. 아무리 보스 몬스터 같은 백희준이라고 해도 쉽게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희연은 곧바로 다음 스킬을 연속으로 사용했다.
“<장미 화환의 비둘기>, <나무 위의 친구>!”
[스킬 <장미 화환의 비둘기>를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상대의 의지, 체력, 속도를 저하시키며 알 수 없는 걱정과 애환에 젖게 만듭니다.
‘오늘 밤, 내가 죽는 꿈을 꿀 거야’]
[스킬 <나무 위의 친구>를 사용합니다. 머리, 심장을 비롯한 약점에 무조건 공격이 적중하며 일시적으로 모든 불행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오, 불쌍한 친구… 영 좋지 못한 곳을 맞았네그려’]
새하얀 비둘기 떼가 죽음을 피하듯 백희준 주위에서 날아올랐다. 검은 꽃줄기 틈을 피해 자라난 나무는 순식간에 비쩍 마르더니 나뭇가지에 붉은 열매를 맺었다. 열매는 으깨지며 붉은 액체를 흩뿌렸다.
숲에 죽음을 몰고 온 흑마법사 킹스메이커가 등장한 건 그때였다. 성큼성큼 걸어온 죽음은 낫을 들고 있지 않았다. 검은 낫을 대신해 손에 든 것은 석영이 꽃처럼 자란 흑단 나무 지팡이였다.
묘하게 불길한 그 지팡이가 땅에 꽂히자 마치 숲 전체의 뿌리가 얽힌 것처럼 마할라틴의 땅은 맥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했던 그 박동은 점차 거세지며 끝내는 마치 지진처럼 땅을 뒤흔들었다.
성도 숲도. 마할라틴은 일종에 거대한 마법사의 공방이다. 그 말을 증명하듯 새까만 문자와 도형이 뒤섞인 마법진이 마할라틴의 땅 위로 떠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겼다. 이건 무조건 이겼다.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승패의 승복이었고, 아무리 굳센 마음을 다잡고 버티려고 해도 그 마음의 기세를 꺾어버리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실제로 길드 윈의 사람들 모두 멍하니 그 마법진을 바라볼 뿐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중에는 백희준도 포함되어 있었다.
차마 온갖 디버프를 다 맞은 상태에서 저 마법까지 맞고 살아남을 자신은 없던 백희준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길드 <윈>과의 길드전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아….”
눈앞에 뜬 문구를 읽으며 희연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처음으로 백희준을 이겼다. 그 사실이 조금 믿기지 않기도 하고, 기껏 첫 승리가 게임의 길드전이라는 게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결국은 그녀 홀로 백희준을 이겨 먹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패배를 선언한 백희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곧바로 희연이 서 있던 망루 위로 올라오는 거였다. 그는 단 세 번의 도약만으로 망루 위에 도착했다.
희연은 그 모습에 료한이 벽 타는 기술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알 것 같다는 태평한 생각을 했다.
화려한 세검을 칼집에 꽂아 넣은 백희준은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희연을 보며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희연이 조금 장난기가 도는 웃음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봐?”
“내가 이겼어.”
“…….”
“그렇지?”
마치 물어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하는 희연의 모습에 백희준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그는 이내 다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희연에게 물었다.
“이걸 네가 날 이긴 거라고 봐도 된다고 생각해?”
1 : 1 싸움도 아니었고, 홈그라운드에서 쪽수로 몰아붙여서야 간신히 얻어낸 승리를 비꼬는 말이었다. 내심 마음에 걸렸던 지점을 상대가 콕 집자 희연은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이긴 건 이긴 거였으니 말이다.
“그러는 지는 무통보로 침공한 거면서….”
“지?”
“먼저 치사하게 굴었으면서 정정당당한 걸 왜 따져!”
“…….”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백희준은 이쯤 하기로 했다. 이 이상 대화해봤자 나이에 맞지 않는 유치한 싸움만 하게 될뿐더러….
“그래. 네가 이겼어.”
말뿐인 인정으로도 좋다 웃는 애를 두고 기 싸움할 생각도, 놀릴 생각도 없었다.
게임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백희준이 누그러졌다는 걸 눈치챈 희연은 기분이 묘해져 그 이상 웃지는 못했다. 어색해질 수도 있던 그 분위기는 저 밑에서 들리는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의 외침에 흐지부지 사라졌다.
“오리 님 괴롭히지 말고 내려와라, 패배자 이희준!”
“오리 님! 위험한 상황이면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희연은 자신은 안전하다는 의미를 담아 허공에 총을 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백희준이 옆에서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몰랐다.
“너 총….”
“응?”
“…아니야, 됐어.”
“?”
희연은 백희준이 왜 저러나 싶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런 희연에게 백희준은 또다시 그녀는 모를 소리만 했다.
“협상은 멀쩡해지면 하자고 해. 골골거리는 거 안 들키겠다고 허세 부리는 애랑 얘기해 봤자 피곤하기만 하니까.”
“골골거려? 누가…?”
“아. 내가 봐주는 거란 말도 전해. 꼭.”
“…?”
***
백희준이 말한 골골거리면서 허세 부리는 사람은 킹스메이커였다.
희연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백희준이 제 일행을 데리고 모두 떠난 뒤 멀쩡하게 서 있던 킹스메이커가 풀썩 쓰러지는 것을 본 뒤였다.
“킹 님!”
깜짝 놀란 희연은 서둘러 킹스메이커에게로 뛰어갔다. 킹스메이커는 가련한 표정과 몸짓으로 유언 비스름한 것을 말했다.
“내가 죽으면… 다시 부활하기 전에 이희준의 목을….”
“그런 말 그렇게 비장하게 하지 마세요….”
“매정해졌어요, 오리 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을 반쯤 흘려들은 뒤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오른 HP 게이지를 확인했다.
1%.
혹여 다시 보게 될까 무서운 수치인 1%였다. 희연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총을 들어 올렸다. 그런 희연의 총구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HP 1% 킹스메이커였다.
“치료 안 되니까 괜한 스킬 빼지 마세요, 오리 님. 쿨타임 30분짜리는 소중하게 여겨야죠.”
“그렇지만….”
“이거 스킬 후폭풍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일종에 페널티인 셈이죠. 오리 님 눈에는 보일 텐데….”
킹스메이커는 친절하게도 제 머리 위에 떠 오른 아이콘을 손으로 짚어 주었다. 희연은 그녀의 머리 위로 떠 오른 새까만 아이콘을 보며 조금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거 버프 아니었어요?”
“이게 버프 아이콘으로 보였어요…?”
물론 아니다. 희연은 남들과 대체로 비슷한, 평범한 상식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누가 봐도 디버프로 보이는 아이콘을 버프로 착각한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킹 님 스킬은 대부분 까마니까 이것도 그런 건 줄 알았죠….”
“푸핫….”
희연의 말에 웃은 건 뉴비 없지였다. 뒤늦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기는 했지만 소리가 너무 컸다. 킹스메이커는 두고 보자는 의미를 담아 잔잔히 웃었다.
그사이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머리 위로 떠 오른 아이콘의 의미를 헤아려 보았다. 혀를 내빼고 눈이 엑스자로 표시된 검은 사람의 형체, 칼을 들고 우는 형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전에도 본 적 있던 약화의 의미인 머리를 붙잡은 사람의 형체였다. 다른 점은 아이콘 옆에 숫자가 덧붙여져 있다는 점이었다. x8. 중첩 8의 약화 디버프였다.
희연은 저런 것도 가능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처음 보는 디버프를 살펴보았다.
“HP 1 고정 저주, 치명상…?”
“HP 1 고정은 말 그대로의 의미고, 치명상은 전체 HP 총량을 줄여버리는 디버프예요.”
“아….”
<장미 화환의 비둘기>와 비슷한 효과의 저주였다. 희연의 표정을 확인한 킹스메이커는 나머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주랑 디버프는 다른 거예요, 오리 님. 디버프는 해제가 가능하지만 저주는 임의로 해제 못 하죠. 오리 님의 저주, 악마와의 내기처럼요.”
“어, 그러면….”
“이 저주는 시간이 지나야 풀린다는 말이죠. 그때까지는 제가 최약체인 거고요. 지금의 난 오리 님이 실수로 툭 쳐도 죽는 그런 슬라임보다도 약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의미예요.”
그건 정말 놀라운 발언이었다. 희연은 들고 있던 총을 잽싸게 내려놓았다. 실수로라도 킹스메이커를 건드릴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저주 상태인 거예요?”
“음… 대충 이틀 정도? 약화 디버프만 풀린다면야 이틀 정도는 뭐….”
킹스메이커의 말뜻은 이틀 동안은 단 한 대도 맞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지만 희연은 조금 다르게 알아들었다. 킹스메이커도 몸을 사릴 때가 있구나, 하고 말이다.
당분간은 평화롭겠구나 생각하는 희연과 달리 몸 사릴 생각은 곧 죽어도 없는 킹스메이커는 누워 있는 상태에서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뉴비 없지가 튼튼 성기사 갓직 거리며 킹스메이커의 옆에서 깐족거리고 청산가리가 생각에 잠긴 킹스메이커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는 사이 희연은 마할라틴 성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시 조그마한 몸으로 돌아온 루로는 닉의 품에 안겼고 숲을 얼렸던 서리도 햇볕에 녹았다.
스킬의 발동자인 킹스메이커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마할라틴 숲에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는 찬찬히 물러났다.
킹스메이커가 보여준 건 숲 하나를 전부 범위로 두는 스킬이었다. 지금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지만 마할라틴 숲은 한순간이나마 죽음의 땅이 되었다. 숲 전체를 아우르듯 가닥가닥 늘어지던 마법진을 떠올린 희연은 몸서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HP 1 고정이라는 페널티는 같은 팀 힐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질겁하고 싫어하게 만드는 페널티였지만 동시에 적절하게 느껴지는 처사이기도 했다.
보스 몬스터 같던 백희준이 스킬이 발동되자마자 더 싸워보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던 것만 봐도 그랬다. 지금도 충분히 사기라는 말이 나오는 스킬이었다.
“같은 편이라 다행이다 진짜….”
희연은 그리 생각하며 다시 푸릇해진 숲을 구경했다. 킹스메이커가 생각 속에서 빠져나온 것도 그쯤이었는데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자마자 하는 소리에 희연은 헛헛하게 웃었다.
“빨리 가서 이희준의 곳간을 털어먹어야 하는데…!”
“협상 말하는 거죠? 오늘 못 하면 이따가 제가 집에서 말 전할게요.”
“안 돼요! 이희준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데요.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인간과의 협상 테이블에 오리 님을 앉힐 수는 없어요! 걔는 잔인할 정도로 오리 님을 말로 유린할 거예요!”
“…….”
분명 처음 가족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굉장히 말을 조심하지 않았나?
이제는 서슴없이 막말하는 모습에 희연은 이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