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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165)화 (165/251)

165화

회복을 마친 몸을 이끌고 넘어져 있는 의자 하나를 질질 끌고 온 희연은 백희준과 킹스메이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은 필요 없었다. 있어 봤자 또 누구 하나가 부술 것이 분명했으므로 의자만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 뜻이 분명한 행동에 백희준과 킹스메이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희연의 의도를 잘 파악했다.

백희준과 킹스메이커는 조금만 기분 상해도 다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리란 걸 본인들이 제일 잘 알았다.

그들에 비하면 연약하디연약한 희연을 가운데에 둔다면 본의 아니게 평화로움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 역시도 말이다.

비록 백희준이 희연이 자신에게만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지어 조금 기분이 상했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평화의 벽을 사이에 두고 협상을 진행하는 광경은 그렇게 연출되었다.

뉴비 없지는 기꺼이 희생하기로 한 희연을 보며 눈물을 머금었고, 청산가리는 아쉬워하며 관심을 돌렸다. 닉은 안도했다. 온실의 주인다운 모습이었다.

킹스메이커는 그렇게 노래하던 대주교 냐드엘의 목걸이가 제 손에 들어온다는 확답을 들은 뒤에야 그것을 제외한 원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협상을 할 때만큼은 진지했고, 의외로 요구는 정당했으며, 내용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킹스메이커는 공사를 냉정히 구분했다.

얼결에 잡혀 와 길마가 된 닉을 대신해 실질적인 길드의 주인으로서 받아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승리자로서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백희준 역시 상식적인 선 안에서는 킹스메이커가 요구하는 바를 모두 받아들였기에 협상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협상에 희연은 이쯤 되면 평화의 벽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부활 템 달라고? 네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말해 봐.”

“부활 템 줘.”

“넌 그게 양심이야?”

“몰랐구나? 내 낫의 이름이 양심이야.”

그리고 희연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킹스메이커는 공사를 잘 구분했다. 공적으로 얻을 것을 모두 챙기자마자 사적으로 원하는 바를 강탈하기 위해 곧바로 낫에 손을 뻗었다.

킹스메이커가 끝까지 낫의 이름이 양심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을 굽히지 않자 백희준도 제 검으로 슬금슬금 손을 뻗었다. 아까와 같이 반복되는 상황에 이쯤 되니 희연도 나름 익숙해졌다.

일단은 말로만 싸우고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하는 여유까지 생긴 것이다. 오죽하면 희연은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리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환된 나무토막 같은 요정들이 가위질할 때마다 악령이는 리듬을 타듯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나름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던 희연을 방해한 것은 백희준의 타박이었다.

“리본 만들기 같은 거 하루 종일 해도 스킬 레벨 안 올라. 만들 거면 다른 거 만들어.”

“우리 오리 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지 왜 끼어들고 그래!”

양옆에 있는 사람들만 모른 체하면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희연은 완성된 리본을 악령이의 몸에 빙글빙글 감을 뿐 두 사람의 대화에는 일절 끼어들지 않았다.

사실 협상은 진즉에 끝났고 서로가 곧 죽어도 싫은 두 사람이 어디 싸울 핑계 없나 기회를 엿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상황에서 희연을 구해준 것은 예상 못 한 사람이었다.

“어…?”

“저 둘이 알아서 대화하라고 할까?”

희연을 앉아 있던 의자를 포함해 통째로 끌어당긴 사람은 이세인이었다. 희연은 아주 의외라고 생각했다.

백희준이 희연을 치료해 주라고 말했을 때는 곧바로 움직이긴 했으나 이세인은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자마자 잽싸게 닉 옆으로 도망갔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뜬금없이 끼어들어 평화와 중재의 벽을 탈취하는 건 희연이 본 이세인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당황하는 티를 감추지 못하는 희연에게 이세인은 말했다.

“괜찮아. 저 둘도 진짜로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실제로 이세인의 손에 이끌려 뒤로 질질 끌려가는 희연을 보며 백희준과 킹스메이커는 묘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부러 평화와 중재의 벽을 붙잡지는 않았다.

얼결이지만,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희연은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는 건가 긴가민가해 이세인의 얼굴만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유약한 색에 어울리는 말랑말랑한 인상의 그는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눈이 다 접히듯 웃음 지었다.

희연은 어색하게 마주 웃다 일단 그녀의 다리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구둣방 요정들부터 돌려보냈다. 리본에 둘둘 말려 움직임을 제한당한 악령이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그 잠깐 새에 구둣방 요정들이 얼마나 리본을 많이 만들어놨는지 돌돌 뭉친 리본으로 작은 둥지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리본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실수로 악령이가 건든 리본 뭉치가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것들은 희연을 대신해 이세인이 몸을 낮춰 주워주었다.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거로.”

웃음이 헤프다 싶을 정도로 내내 웃기만 하는 이세인의 모습에 희연은 조금 곤란해졌다.

길드전에서 서로 벼락을 날리고 총으로 저격하던 사이인데 이렇게 갑자기 성큼 거리를 좁히니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심지어 이세인은 희연이 날린 디버프에 당해 청산가리의 손에 죽기까지 했다. 원한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그런데도 이세인이 친절하게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희연은 이세인을 살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대로 마주 보고 대화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확실하지 않았지만 희연이 보기엔 단순히 친구 동생이라 잘 해주는 것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세인이 희연에게 보이는 태도가 호의에서 비롯된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이세인은 호감과 친애 가득한 눈빛으로 희연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성 대 이성으로서 호감 같은 게 아닌 닉이 루로를 볼 때 같은 그런 친애의 종류의 호감이었다. 문제는 그 호감이 쌍방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치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 이름 없는 그분이 희연이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뉴비라는 이유만으로 무한한 편애를 쏟아붓는 걸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희연은 이세인이 좀 부담스러웠다.

희연의 얼굴에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탓인지 이세인 역시 오래가지 않아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많이 어색해?”

이세인이 지칭하는 우리란, 그 자신,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쌍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존성대명이었다. 고개를 돌렸다가 존성대명과 눈이 마주친 희연은 슬그머니 고개를 바로 하며 답했다.

“조금 그렇죠…?”

“대명이만 싫어할 줄 알았는데.”

“…?”

“대명이가 어릴 때 많이 울렸잖아. 대명이가 어릴 때는 좀… 정신 연령이 너랑 비슷했거든.”

반사적으로 존성대명을 다시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존성대명은 이세인을 눈으로 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입으로도 불만을 내뱉었다.

“내 정신 연령이 뭐…!”

희연은 제법 거리가 되는데도 존성대명이 대화를 들었다는 점에 놀랐다. 그런 희연의 반응에 실없이 웃은 이세인은 존성대명을 가볍게 타박했다.

“포스터 배경 무슨 색으로 칠할지로 어린애랑 싸운 대명이가 지금 상황에서 과연 할 말이 있을까?”

“표어 포스터 배경은 노란색이 국룰이란 말이야!”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나 봐.”

표어 포스터라는, 조금 어처구니없고 단순한 이야기에 희연은 조금 경계심을 풀었다. 정말 소소한 추억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기억 못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대충 존성대명과 이세인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인지 희연은 알 것 같았다. 부모님이나 백희준이 옛날 일을 이야기하며 그땐 그랬지, 하고 추억 여행하는 기분인 듯했다.

희연이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옛적에 읽었던 동화 이야기를 듣자마자 퀘스트를 하겠다며 달려든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가족도 아닌 타인에게 그런 식의 추억거리가 된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해 차마 희연은 그들처럼 거리감 없이 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친했어요?”

대신에 희연은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었다. 이세인은 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실바람처럼 웃음 지었다.

왁왁 소리 지르는 존성대명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손짓하며 이세인은 희연에게 말했다.

“조금? 내가 희준이랑 인상이 비슷하거든. 그래서인지 대명이보단 나한테 자주 놀아달라고 했었지.”

게임 속 세인은 백희준과 전혀 다른 말랑말랑한 인상이었다. 현실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이구나 생각하며 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는 너희 집에 자주 놀러 갔어. 내가 위로 형만 셋이라 동생이 있는 희준이를 많이 부러워했거든. 우리 부모님도 내가 희준이랑 어울려 노는 걸 좋아하시기도 했고.”

“아….”

“이사 가게 되면서 가끔 놀러 가기는커녕 희준이랑 연락도 잘 안 하게 됐지만…. 그러다 게임에서 우연히 만났어. 오랜만에 같이 놀고 대화도 나누다 길드까지 만들게 됐지.”

간략하게 줄인 설명이었지만 희연은 빈 부분의 내용이 무엇일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세인은 능력 좋은 힐러이니 분명 백희준에게 잡힌 것일 터였다. 닉이 지나가다 킹스메이커에게 납치당해 길드 마스터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세인을 바라보는 희연의 눈빛에 약간의 안쓰러움이 더해졌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이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현재 희연과의 대화에 집중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희준이가 너도 게임 시작했다고 해서 궁금했어. 내가 기억하기론 게임을 안 좋아한다고 희준이가 그랬었거든.”

“안 좋아한다기보단 관심이 없었죠.”

“그래? 그런데 어쩌다 시작하게 된 거야?”

“오빠가 이거 힐링 게임이라고 해서요….”

“…희준이가, 그랬구나.”

순간적으로 방긋방긋 웃던 이세인의 얼굴에 금이 갔다. 희연은 그 모습에 역시 힐링 게임이라는 말을 거짓부렁이구나 싶어 백희준을 조금 흘겨보았다.

무슨 바람이 들었던 건지 킹스메이커가 나름 백희준의 발언을 포장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희연은 믿지 않았다. 숲 하나 잘못 들어선 거로 힐링 게임이 킬링 게임이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감출 수 없는 불신으로 샐쭉해진 희연의 얼굴을 보며 이세인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계속하는 걸 보면 재미있는 거지?”

“…재밌죠.”

사실이었다. 비록 속아서 했지만, 어쨌든 속아서 했지만. 중요한 건 속아서 하게 되었다는 거지만.

그럼에도, 낯선 세계에서 이방인이 되어 겪게 되는 모험은 즐거웠다. 가끔은 슬퍼지고 때로는 화가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모두를 포함해 이 세상은 즐거웠다.

희연의 대답에 이세인은 웃었다.

“다행이네.”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그래서 결국 희연도 실없이 웃고 말았다.

희연과 이세인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 보였는지 존성대명 역시도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왔다.

비록 존성대명이 자신을 납치하고 총을 뺏고 진실을 감추었으며 망루에서 한 번 더 공격하려고 하긴 했지만, 희연은 어쩔 수 없던 일이다, 여기기로 했다. 백희준이 시켜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존성대명은 어떠한 기대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희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게임 재밌고 계속할 거면 우리 길드로 들어오옭…!”

“이 몹쓸 악마의 속삭임!”

순식간에 날아와 존성대명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찔러넣은 뉴비 없지는 훌륭한 힘 스텟을 이용해 그대로 존성대명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뉴비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다짐이 느껴지는 속도였다.

“…….”

이래서 존성대명 안다고 했을 때 경계한 건가?

급작스레 일어난 일이 당혹스러워 데굴데굴 눈만 굴리던 희연은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입을 벌렸다.

뉴비 없지는 처음부터 알았던 것이다. 존성대명의 취미가 그와 비슷하다는 걸 말이다. 또한 뉴비 없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희연에게 몹쓸 악마의 속삭임을 시전할 것도 말이다.

“길드 안 옮긴다고 말했는데….”

여러 번 말했음에도 뉴비 없지는 여전히 희연이 도망갈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희연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 되면 저러는 뉴비 없지가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희연은 뉴비 없지가 저럴 때마다 새로움을 느꼈다. 매번 새롭게 당황스러웠다는 뜻이다.

더불어 존성대명이 뉴비 없지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다들 왜 저러는 걸까 진지한 고민마저 하게 되었다.

심각해진 희연의 얼굴을 보며 이세인은 겉으로는 웃었으나 속으로는 존성대명을 욕했다.

“티 좀 내지 말라니까….”

“네?”

“하하, 대명이가 같이 놀고 싶었나 보네.”

“네에….”

이세인은 빠르게 말을 바꿨지만 희연은 이미 그가 눈으로 욕하는 것을 본 상태였다. 애쓰는 이세인을 위해 희연은 기꺼이 본 것을 모른 척해 주었다.

그러나 그런 희연의 배려에도 묘해진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는지 이세인은 대화의 주제를 바꾸고자 애썼다.

“혹시 궁금한 건 없어? 게임이 그렇게 친절한 편은 아니잖아. 알려줄 수 있는 건 모두 알려줄게.”

“어….”

궁금한 거라면 물론 있었다. 희연은 이세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빠가 길드에서 료한 님 데리고 뉴비세스 메이커 해요?”

“희연이는 직업이 신관이지? 잘 됐다, 나도 신관인데. 스킬 트리 알려줄까?”

“아니 그거 말고….”

“보스 레이드랑 PVP 할 때 힐 사이클이 완전히 다른 거 알고 있어? 언제든 물어봐. 알려줄게.”

“…….”

알려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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