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희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세인을 보았다. 료한을 키우는 게 백희준인지 존성대명인지 모르겠지만 이세인은 자신의 길드에서 뉴비세스 메이커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길드 자체가 뉴비세스 메이커인 희연은 굳이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과 그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겠거니 싶어 이세인이 바라는 대로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희연은 질문할 거리를 찾아냈다.
“이번 길드전 진 것 때문에 오빠 욕먹지는 않았어요?”
두근두근 이벤트 제조기가 물어 온 길드전과 길드 마스터가 강행한 길드전의 무게가 같은 것일 리가 없었다. 심지어 백희준은 그 길드전에서 패배하기까지 했다. 충분히 본인 길드 내에서 말이 나올 법한 일이었다.
나름 백희준을 걱정하는 희연의 모습을 보며 이세인은 흐리게 웃었다.
“…?”
희연이 보기에 그 웃음은 묘하게 삐뚤어진 구석이 있었다. 오죽하면 순간적으로 이세인은 백희준에게 적개심을 가진 건가 하고 희연이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실은 사이 안 좋은 건가?
부모님이 백희준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다는 말을 할 때부터 희연은 이세인이 백희준을 싫어했을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기는 했다. 상대가 백희준이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희연이 이세인과 대화할 때는 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이세인은 입을 열었다.
“희준이는 욕먹지 않았어. 애초에 길드전 열기 전에 주의 사항을 몇 번이나 말했거든.”
“주의 사항이요?”
“응…. 이번 길드전은 이기는 게 목적도 아니고, 계획도 없고, 죽을 때 생기는 페널티 같은 것도 책임 안 진다고. 대신에 만약 진다면 길드 단위의 책임은 자기가 질 거니 심심한 사람들만 참가하라고 했지.”
“아, 그래서….”
길드전이 진행 중임에도 윈의 길드 하우스에 사람들이 제법 많았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주의를 줬음에도 제법 많은 인원이 마할라틴 성에 찾아왔던 걸 보면 여기나 저기나 레벨 좀 높다 싶은 사람들은 어지간히 무료하구나 싶기도 해서 희연은 조금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기는 했다. 가령 희연의 앞에 서 있는 이세인 같은 사람 말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세인은 뉴비 키우기나 무계획으로 달려드는 심심풀이 길드 행사 같은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백희준은 본인이 확고히 정한 것에 대해서는 이세인이 싫다고 말한들 받아줄 만한 인사는 아니었기에 희연은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이세인이 백희준을 조금 싫어한다고 해도 희연은 이해할 수는 있었다.
“힐러 쪽으로는 물어볼 거 없어? 어지간한 건 다 내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세인은 이 이상 이런 쪽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희연에게 다른 대화를 할 것을 돌려 말했다. 희연도 따로 궁금한 것은 더 없었기에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었다.
“길드전에서 보여줬던 벼락 날리는 스킬 있잖아요, 그건 언제 얻을 수 있어요?”
“벼락? 아… 천벌 말하는 거구나.”
이름부터가 멋지다. 희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희연이 그런 질문을 한 건 비단 이세인이 화제를 돌리기 바라서만은 아니었다.
그날 희연은 그 천벌을 통해 최약체 힐러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 정도 스킬이면 공격 미스 같은 웃기지도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눈을 빛내는 희연의 모습에 이세인은 방긋 웃으며 화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소리를 했다.
“희연이는 그 스킬 쓰려면 한참 멀었어. 레벨이 너무 낮잖아.”
“…….”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대놓고 레벨 낮다는 소리를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희연은 영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 이세인은 실망감으로 물드는 희연의 모습을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에 오기가 생긴 희연은 이세인의 말을 부정하며 물었다.
“어떻게 확신하세요?”
이세인은 희연의 레벨을 모른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고 백희준 역시 모르니 말이다.
혹시 레벨이 낮은 게 겉으로 보아도 티가 나나 싶어 희연은 제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신관이라는 직업 콘셉트 탓인지 희연의 장비나 이세인의 장비나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희연의 모습에 이세인은 하는 짓이 귀엽다는 듯 다시 하하 웃더니 자연스럽게 바짝 굳어 있던 악령이의 머리를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
뜬금없이 왜 가만히 있는 악령이를 건드는 건가 싶어 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희연은 악령이가 접근을 시도하는 이세인을 피해 달아날 것이라 생각했다. 진즉 도망간 넬처럼 말이다.
그러나 악령이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서서 이세인의 손을 바라만 보았다. 희연이 그 모습에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령아?”
희연의 부름에도 악령이는 반응이 없었다.
이세인은 인형의 머리끝에 살짝 닿았던 손을 내렸다. 그의 손끝이 인형의 뺨에 닿았다.
손짓을 따라 이세인의 소매가 약간 들추어졌고 그의 옷소매에 가려져 있던 금색 보석이 박힌 팔찌가 드러나며 은은하게 빛났다. 치료 스킬을 사용할 때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빛이었다.
빛을 쬔 동글동글한 인형의 뺨은 따스하게 녹는 게 아닌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하며 동시에 금이 갔다. 마치 도자기 인형이 망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변화에 굳었던 희연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세인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리본 뭉치가 떨어져 흙 위를 굴러다니고 희연이 앉아 있던 의자가 힘없이 밀리며 넘어졌다. 푹신한 풀이 쑥쑥 자란 흙바닥으로 넘어진 의자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현재 이 온실에는 희연의 외침을 못 들을 정도로 귀가 나쁜 사람은 없었다.
예의상 다시 가져다 놓은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던 백희준과 킹스메이커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어딘가에 존성대명을 버려두고 온 뉴비 없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닉과 청산가리는 그들처럼 곧바로 달려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희연과 이세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겉으로나마 평화로웠던 온실에는 묘한 기류만이 흘렀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백희준의 물음에도 희연은 답하지 않고 붙잡고 있던 이세인의 손만 거칠게 놔주었다. 내쳐진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세인 역시 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희연은 손을 들어 악령이의 뺨을 감쌌다. 흰 도자기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이상 현상이 번지는 것을 막고 싶은 몸부림이었다.
도자기에 금이 간 감각이 손안에 선명하게 느껴져 희연의 표정은 더더욱 굳었다. 그녀는 다급함을 감추지 못한 채 킹스메이커를 찾았다.
“킹 님! 악령이 좀 봐주세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세인을 노려보고 있던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부름에 일단 그녀의 옆으로 이동했다. 희연은 손을 떼고 킹스메이커에게 문제 되는 부분을 보였다.
금이 간 인형의 뺨을 손끝으로 만져 본 킹스메이커는 불쾌함이 그득한 헛웃음을 뱉었다.
“하….”
그 모습에 희연의 낯은 더더욱 나빠졌다. 금이 간 메리 인형, 그 속에서 기절한 악령이, 그리고 인형 제작자인 킹스메이커의 좋지 않은 반응. 그 모든 게 걱정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었다.
그런 희연의 걱정대로 현재 악령이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형의 제작자이자 유저 중 가장 위대한 흑마법사인 킹스메이커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이건 실수가 아닌 명백한 위협이라는 것 역시도 말이다. 신전의 아이돌인 뉴비 없지조차도 고의가 아닌 이상 부두 인형을 이 꼴로 만들지는 못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이딴 장난질을 다 치네….”
무척이나 불쾌한 상황이었다. 킹스메이커는 저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해 보다 불안해하는 희연을 위해 일의 우선순위를 일단 바꾸었다.
“오리 님. 넬은요?”
그쪽은 망가지기라도 하면 수습이 완전히 불가능했기에 킹스메이커는 희연에게 곧바로 확인부터 했다.
“…아까 전에 도망갔어요.”
그쪽은 약해서 더 생존 본능이 강했나 보다. 그리 생각하며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인벤토리에서 검은 천을 꺼내 인형을 돌돌 말아 희연에게 안겨주었다. 응급조치는 끝냈으니 이제는 일을 해결해야 할 때였다.
“내가 이런 건 또 예상을 못 했네. 친구 관리 좀 잘하는 게 어때 이희준?”
지금 이 자리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명확했다. 길드원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한 길드장. 걸리는 점은 그 사람이 백희준이라는 것. 킹스메이커는 하필이면 왜 백희준은 희연의 오빠인 걸까 생각하며 낫 위로 올린 손끝을 툭툭 두들겼다.
킹스메이커에게 지적받은 백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세인을 돌아보았다. 악령이가 응급 처치를 받은 뒤에야 여유가 생긴 희연 또한 그런 백희준을 볼 수 있었다.
백희준은 화내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만큼 상대에게 친애도 실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해 봐.”
그게 다였다. 누구의 편도 아닌 것 같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이세인은 그런 백희준에게 씁쓸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내 변명을 듣겠다는 거야, 아니면 너를 설득시키라는 거야?”
“이세인.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난 이런 상황을 아주 싫어해.”
험악해지는 분위기에도 이세인은 태연하게 웃으며 희연에게 사과했다. 진정성은 없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너랑 같이 있길래 악령이라도 괜찮을 줄 알았어.”
“나는 경고했어 이세인. 마지막이야.”
곧바로 백희준의 반박이 들어왔다. 그 반응에 이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그제야 제 행동이 무슨 의미였는지 설명했다.
이세인은 희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악령이 너랑 붙어 있어도 멀쩡한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악령이와 넬이 희연과 같이 있어도 멀쩡한 이유는 그냥 희연이 약해서였다.
뉴비 없지나 이세인은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악령들에게 위협이지만 희연이나 모짜렐라는 두 악령과 닿는 것도 가능했다. 결국 레벨의 영향이 크리라 예상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희연의 예상이 맞다는 것은 이어지는 이세인의 말로 증명되었다.
“지금은 레벨이 낮아서 괜찮아 보이지만 나중에 레벨이 높아지면 그렇게 가까이 지내지 못하게 될 거야. 아직 50레벨 전이지?”
“…….”
“신앙 패시브가 기초가 아닌 이상에야 악령이 이렇게까지 쉽게 붙어 있을 수가 없어. 50이 되면 신앙 패시브는 기초에서 하급이 돼. 150에 중급, 250에 상급이 되지. 하급만 돼도 이렇게는 못 지내는 게 보통이야. 중급에는… 더 좋지 않겠지.”
이세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희연도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급까지는 악령이도 넬도 괜찮다는 것을 모짜렐라를 통해 확인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다음도 괜찮다고 확신 못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대해 희연이 모른 척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회피하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당장은 괜찮으니까.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지적당한 듯한 상황에 희연은 울컥해서 이세인을 노려보았다.
“…그래서요.”
요른의 말을 들었을 때도, 그레텔의 죽음을 봤을 때도. 마담에게서 확답을 들었을 때도. 희연은 악령이와 영원히 함께한다, 같은 동화 같은 결말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희연이 할 일이지 명백히 타인인 이세인은 멋대로 끼어들 자격 따위 없었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음의 준비를 먼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희연에게 이세인의 말은 변명일 뿐이었다. 또한 무례였다.
“그 말이 맞든 아니든, 무슨 자격으로 참견해요?”
“희연아…, 나는 걱정돼서 그런 거야. 희준이는 악령에 대해 잘 모르고, 킹스메이커도 이런 점은 안 챙겨줄 테니까 나라도 알려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무슨 자격으로 그러냐고요!”
기어이 희연의 언성은 높아졌다.
“그쪽 말이 맞다고 쳐도 이런 식으로밖에 설명 못 하는 사람 말을 듣고 싶겠어요? 애초에 이건 설명도 아니잖아요! 가만있던 애 괴롭힌 거뿐이면서 정당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화를 참지 못하는 희연의 모습에 지켜보던 백희준이 나섰다. 그는 씩씩대는 희연을 붙잡아 킹스메이커에게 넘기려 했지만 희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거 놔!”
“네가 말해서 될 일 아니야.”
“뭐가 아니야! 저 사람은 지금 나한테…!”
“말 들어 백희연. 넌 지금 흥분했고, 화내느라 대화가 안 돼. 그러니까 말 들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해.”
“…….”
백희준의 말이 맞았다. 희연은 흥분했고 화내는 것에 바빠 이세인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말리는 듯한 백희준에게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희준을 노려보던 희연은 결국 손을 들어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내리쳤다. 뉴비 없지가 존성대명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위였지만 그 결과물은 당연하게도 전혀 달랐다.
희연의 목적은 백희준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었고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기에 도리어 제 피가 닳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맞은 부위를 힐끔 바라본 백희준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화풀이 다 했으면 이제 저리 가 있어. 이세인이랑은 내가 대화할 거니까.”
“끝까지….”
끝까지 백희준은 설령 이성적이지 못할지라도 희연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기어이 논리로 일을 해결하려 하고 잘잘못을 따지려 든다.
지금 상황에서 희연이 바라는 게 제대로 된 대화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욱해서 행동한 것을 내심 후회했던 희연은 다시 주먹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귓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희연은 화가 났음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포기였다. 그런 희연의 모습은 백희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거라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희연을 뒤로 물러서게 하고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 백희준의 일련의 행동은 항상 그래왔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희연은 백희준과 싸우는 게 싫었다. 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화가 나도 화를 내는 것을 포기하곤 했다. 그녀라고 해서 화내는 것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는데도 말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상대가 화를 내도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않기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포기를 학습하게 된 것에 가까웠다.
이를 백희준이 알 리 없었고, 희연도 굳이 말로 설명하면서까지 백희준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망감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백희준과는 항상 이런 게 문제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이 안 통하지….”
허무함을 담아 중얼거리는 희연의 낯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