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씁쓸함은 원망이 되었고 원망은 응어리진 마음을 자극했다.
저가 잘난 것을 아는 인간과 싸울 때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이 답답하고 서러워진다. 그녀는 진심인데 상대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즉 그 사실을 깨우친 희연은 백희준과 진지하게 싸우는 것을 늘 꺼렸다. 그래서 잘 지냈다.
사실 그게 잘 지내는 것이라 포장된 관계뿐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희연은 고개를 푹 숙이며 진정하자 스스로 되뇌었다.
남들 앞에서 할 만한 대화도 아니었고, 지금 상황에선 그녀가 화내야 하는 대상은 백희준이 아닌 이세인이었다.
희연이 그렇게 되뇌며 나름 진정했을 즈음, 뉴비 없지가 어딘가에 버려두었던 존성대명이 돌아왔다.
멀리서부터 상황을 본 그는 백희준과 희연이 싸우는 줄 알고 놀라 헐레벌떡 달려온 참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오해를 풀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존성대명은 일단 백희준부터 붙잡고 보았다,
“야, 왜 또 싸워! 싸우지 마!”
그런 존성대명을 밀어내며 백희준은 담담히 말했다.
“내가 쟤랑 왜 싸워. 안 싸운다고 말했잖아. 이 나이 먹고 무슨….”
“…….”
백희준에게 희연은 진심으로 싸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희연의 화는 투정일 뿐이었다. 심지어는 분한 마음에 아프라고 옆구리를 때린 행동마저도 투정이라 여겼다. 이전에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희연은 백희준과 대화할 때면 가끔 벽을 보는 기분이었다. 격하게 감정을 표출할수록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착하게 대화를 하기에는 억울했다.
간신히 진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희연은 싸움 상대도 아니라는 말에 다시 울컥해 백희준에게 덤비려 했지만 그런 희연을 킹스메이커가 붙잡는 게 더 빨랐다.
“오리 님, 위험해요.”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꽉 끌어안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 대만 더 부딪히면 희연이 별님을 만나러 떠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희연도 알았다. 제 HP가 상당히 간당간당한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가만히 있던 악령이가 위협당한 것도 속상했고, 화내는 것도 못 하게 하는 백희준은 미웠다. 때린 건 자신인데 아픈 것도 자신인 게 억울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게임에서마저 백희준은 못 이길 인간이라 그가 투정 취급하는 화풀이조차 못 한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오리 님…?”
희연의 눈앞이 흐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킹스메이커가 껴안던 팔의 힘을 푼 것을 느꼈음에도 희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란 백희준이 성큼성큼 다가올 때까지도 가만히 있었다.
“너 왜 울어.”
백희준이 손을 뻗을 때까지 희연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의 손은 홀스터에 꽂아놓았던 총을 찾아 쥔 상태였다. 그런 희연을 발견한 존성대명이 왠지 모르게 아파오는 턱을 문지르며 백희준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때는 늦은 상태였다.
백희준이 가까이 온 순간 희연은 곧바로 들고 있던 총을 그에게로 휘둘렀다.
“윽…!”
“안 울어! 누가 운다고 그래!”
백희준의 머리를 제대로 노린 공격이었다.
희연이 공격하는 것까지 지켜본 킹스메이커는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희연을 번쩍 들어 올려 제 뒤로 보낸 킹스메이커는 혹여나 백희준이 덤빌까 싶어 낫을 들어 올렸다.
그런 킹스메이커의 걱정과 달리 한 대 정도 맞았다고 해서 백희준은 희연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말 안 듣는 제 동생을 조금 짜증스럽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에두른 그 표현에 희연은 총을 들어 올렸다. 다만 이번 공격의 대상은 백희준이 아니었다. 초록색 띠가 둘린 희연의 눈에 상대의 약점이 들어왔다.
“<회개하세요>!”
탕-!
희연이 쏜 총알은 정확히 이세인의 심장을 노렸다. 레벨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해도 이세인은 방어력 낮은 힐러였기에 백희준처럼 멀쩡하지는 못했다.
비틀거리는 이세인을 보며 희연은 외쳤다.
“한 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이세인을 노려보다 마지막으로 백희준을 한 번 더 때려준 희연은 훌쩍거리며 악령이를 끌어안고는 온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따라오지 마!”
백희준에게 경고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런 희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킹스메이커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뒤 닉의 등을 떠밀었다.
“난 달래는 건 영 자신이 없어서요.”
“…….”
“파이팅! 요정 닉. 요정의 힘으로 잘 달래주세요.”
뉴비 없지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고, 청산가리는 누군가를 달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싸움의 대상인 백희준이나 원인인 이세인, 이 순간에도 참 쓸모없는 존성대명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땅히 보낼 인사가 없다고 해서 희연을 그냥 둘 수도 없으니 킹스메이커로서는 닉이라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은 예쁜 걸 보면 일단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니 말이다.
닉은 별말 없이 희연이 간 길을 따라 발을 옮겼다. 온실의 주인인 만큼 이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위치 정보를 모두 입수할 수 있음에도 닉은 혹여나 희연을 놓칠까 싶어 걸음을 서둘렀다.
***
그런 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희준이 움직인 것은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나무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백희준은 희연을 제지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심장에 직격으로 가해진 충격에 못 움직이고 있던 이세인의 멱살을 붙잡고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연약한 신관은 종잇장처럼 붙잡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백희준!”
그런 백희준을 말리기 위해 존성대명이 나서려 했지만, 백희준은 조용히 손을 들어 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할 뿐이었다.
“괜찮아. 안 와도 돼 대명아.”
이세인 역시 존성대명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말했다. 그런 이세인에게 백희준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세인. 전에도 경고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
“선 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희준아.”
부정하는 이세인을 비웃으며 백희준은 상대가 듣기 싫어할 말만 쏙쏙 골라 내뱉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아니. 맞아. 네 열등감은 나한테만 풀어. 괜한 애 데리고 수작 부리지 말고.”
“…….”
“네 열등감 이딴 식으로 풀지 말라고 경고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봐줄 때 적당히 해. 한 번만 더 신경 거슬리게 만들면 내 앞에 다신 못 나타나게 만들어 버릴 거니까.”
이세인을 놔준 백희준은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쉰 뒤 킹스메이커를 돌아보았다.
“협상 결과물이나 빨리 정해. 저 새끼들 데리고 돌아갈 거니까.”
희연을 분노케 한 원인들이 한 번에 제집에서 나간다는 이야기는 킹스메이커에게 있어서도 퍽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나랑 태평하게 협상할 때가 아닐 텐데…. 오리 님한테 먼저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오지 말라잖아. 지금 가봤자 싸우기만 해.”
킹스메이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가족이라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걸까?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
킹스메이커가 보기에 백희준과 백희연의 남매 관계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희연의 덕이었다. 희연이 아니었다면 진즉 끝장 봤을 관계라는 뜻이었다. 그녀처럼 말이다.
자신이 운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훨훨 날뛰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킹스메이커는 배알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따박따박 말대꾸라도 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는구나, 너.”
“뭐?”
대화한다는 건 개선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가장 어렵고도 쉬운 방법이었다. 그녀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포기했다. 그녀가 문제인 것으로 판명 내리는 것으로 끝을 보았다.
킹스메이커는 오랜만에 제 동생을 떠올렸다. 모든 게 누나 탓이라며 엉엉 울던 동생이었다.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며 무릎 꿇고 빌던 모습이 제법 인상 깊었던지라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평범한 집안에서 비범하게 태어난 죄였다. 그걸 잘 알았기에 그녀는 울고 비는 동생을 보며 알겠다,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때 어떤 감정이었더라? 우는 동생의 모습은 선명한데 그때의 감정은 흐릿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 당시에도 별다른 감정의 고조를 느끼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연은 그녀에게 있어 꽤나 유쾌한 존재였다. 남의 가족사에 끼어드는 취미 따윈 없는 킹스메이커가 기꺼이 백희준을 훈계하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괜히 백희준 때문에, 그와 닮은 그녀까지 싫어하게 된다면 킹스메이커는 무척이나 아쉽고 조금 슬플 것 같았다. 그녀는 별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면 귀 기울이기라도 해, 백희준.”
꼬박꼬박 닉네임인 이희준이라 부르던 킹스메이커가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백희준 역시 그 사실을 알았기에 조금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
킹스메이커와 백희준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 시각, 온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 희연은 걸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백희준에게 바락바락 대들 때까지만 해도 조금 글썽이다 만 눈물은 혼자 있게 되자 억울함과 서러움이 뒤섞이며 묵직해졌다.
희연이 이세인과 멀어지자마자 냉큼 돌아온 넬이 그런 희연의 뺨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는 눈물을 받으려 했지만 작은 몸으로 그것을 모두 받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나, 괜찮아….”
삣!
“진짜 괜찮은데….”
삐윳-!
눈물에 흠뻑 젖은 망토의 토끼 귀가 축 처졌음에도 넬은 희연의 뺨에 몸을 비비며 뭉그적거렸다. 나름의 위로가 왠지 모르게 더 서럽게 느껴져 희연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백희준 짜증나아….”
사실 희연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싸워봤자 백희준은 싸운 거라는 인지도 없을 것이고, 그녀 홀로 씩씩거리다 흐지부지 이 일 역시도 묻히게 될 것이란 걸 말이다.
이번에는 정말 그냥 안 넘길 거라고 생각해도 그 역시도 잠깐일 뿐이었다.
“바보 같아….”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매번 열 내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희연은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집에서 그녀는 홀로 분을 삭이지 못해 백희준을 소소하게 괴롭히는 것으로 분노를 잠재워야 할 것이다.
희연은 속으로 백희준에게 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말들을 구시렁거리며 한참 온실 안을 맴돌았다. 온실 안에서는 신기하게도 바람이 불었다. 울음에 달아올랐던 뺨을 그 바람이 식혀주었다.
바람을 쐬다 보니 어느새 차츰차츰 희연의 눈물은 그쳐갔다. 딸꾹질하듯 헐떡이던 숨소리도 진정되었을 즈음 희연은 홀딱 젖은 넬을 악령이의 위에 올려준 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희연은 백희준 때문에 생긴 오늘치 화와 슬픔의 감정을 여기서 끝내자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서 킹스메이커에게 백희준을 아주 세게 때려달라고 말하고 나면 아직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 괜찮아질 것 같았다. 희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여기가 어디더라.”
그리고 뒤늦게야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실은 그녀가 아는 것보다도 더 커다랗고, 길이라고 할 법한 게 없었다. 목가적인 것을 좋아하는 닉이 온실을 꾸밀 때 휴식을 위한 공간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물은 아주 훌륭했다. 희연은 유리 천장이 있는 숲에서 길을 잃은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젠 하다 하다 길까지 잃었다는 점이 다시 서러워져 말랐던 눈물까지 다시 아롱아롱 맺히려 했다.
툭-
“?”
그런 희연의 눈물을 그치게 한 것은 발치로 굴러온 작은 도토리 한 알이었다. 희연은 이게 뭔가 싶어 도토리가 날아온 방향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삣!
“저쪽?”
넬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희연은 때마침 수풀 사이에서 새로운 도토리 한 알이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하나, 두 개, 세 개.
도토리는 마치 희연에게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거리를 벌리며 굴러왔다. 잠시 고민하던 희연은 발치에 떨어진 도토리를 한알 한알 주우면서 발을 옮겼다.
도토리가 도중 떨어진 것인지 발치로 떨어지는 물건들은 자주 그 종목이 바뀌었다. 당근 조각, 씨앗, 색이 예쁜 돌멩이와 작달막한 열매 같은 것들.
어느새 한 손으로는 다 들기 힘들 정도가 되어 희연은 중간부터는 더 이상 줍지 않고 떨어진 것들을 찾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것처럼 잡다한 것들을 던져놓고 정작 그 상대는 그녀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것인지 빠르게 이동하는 수풀 소리가 연신 사박사박거렸다.
작고 여러 개인 그 발소리를 쫓아 뛰기 시작한 희연은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
수풀 너머에서 이제 막 씨앗 하나를 던지려다 굳어버린 것은 이전에 희연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었던 다람쥐였다. 그 옆에는 꽃을 입에 문 토끼가 있었고, 리본을 맨 작은 새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아기 드래곤 루로가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작당 모임을 벌이던 소동물들은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바짝 굳어 버렸다. 때마침 작은 꽃송이가 가득 든 바구니를 입에 물고 등장한 꽃사슴 플리 역시 희연을 보고는 오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플리를 본 희연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흔들리는 몸을 따라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소동물들의 보물이 땅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제 몫의 보물들을 챙겨가는 동물들은 본 희연은 힘없이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플리, 닉 님 어디 계셔?”
제 주인의 이름에 플리는 순하게도 고개를 치켜들어 희연에게 닉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닉은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플리가 순한 것은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연은 플리가 들고 온 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꽃을 먹이로 주며 닉이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꽃사슴답게 꽃을 좋아하는 플리는 꽃을 먹는 속도 역시 무척이나 빨랐다. 다행히 닉은 플리가 빈 바구니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아쉬워할 때쯤 모습을 드러냈다.
“음… 저 달래러 온 거예요?”
정황상 그것밖에는 닉이 희연을 따라온 이유가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희연은 조금 이 상황이 창피하다 싶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희연을 바라보던 닉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녜디아.”
“?”
갑자기 녜디아는 왜 부르나 싶어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닉의 부름에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낸 녜디아는 희연에게 가까이 오더니 코끝을 그녀의 품속에 묻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푹신푹신한 털로 뒤덮인 거대한 개가 애교 부리는 것 같은 상황에 희연은 이 행위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 희연의 반응을 바랐다는 듯 녜디아는 한동안 엉겨 붙으며 희연을 즐겁게 해주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늑대의 촉촉한 코끝을 만지던 희연의 손은 자연스럽게 갈기를 만지게 되었고 손과 팔에만 느껴지던 온기를 어느새 온몸으로 만끽하게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늑대의 등 위로 안착한 뒤였다. 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닉을 바라보았다.
“닉 님…?”
닉은 희연의 부름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손짓할 뿐이었다. 엎드린 상태에서의 키가 성인과 비슷한 늑대가 벌떡 일어나자 그 위에 매달리게 된 희연의 다리 역시 허공에 달랑달랑 흔들렸다.
어설프게 늑대 위에 매달려 있던 희연은 서둘러 자세를 잡았다. 지금까지 승마 스킬을 사용하며 몸에 행동이 익은 덕을 보는지 늑대는 처음 타보는 것임에도 그녀는 제법 안정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다만 자세는 안정적이라도 잡을 곳은 여전히 없었기에 희연의 두 손은 어색하게 녜디아의 털 속만 헤집었다. 그런 희연의 뒤로 닉이 가볍게 올라탔다.
닉은 길 잃은 희연의 손을 붙잡아 손수 녜디아의 갈기 위로 올려주었지만 차마 털이 뽑히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희연은 갈기를 세게 쥐지 못했다.
상당히 위험한 짓이었음에도 희연이 달리는 녜디아의 등 위에서 튕겨 나가지 않을 수 있던 것은 기수 역할을 하는 닉 덕분이었다.
적어도 뒤에 닉이 있는 이상 떨어질 일은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희연은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다. 그런 희연을 배려한 것인지 닉은 몸을 조금 물리며 그녀가 편히 주변을 살필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종류의 배려에 관하여 희연은 무척이나 고맙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행동을 하기 전에 설명을 먼저 해주면 안 되는 것인가에 관하여 고민 또한 안 할 수가 없었다.
가끔 닉은 킹스메이커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다. 일단 행동부터 하고 나서 당황한 주변 사람이 물어보면 그제야 살뜰히 설명해 주는 것 같은 모습들이 말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기에 닉이 한두 번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게 아님을 짐작 가능하게 만들었다. 희연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그랬던 닉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보고 배웠나…?
이럴 때면 닉이 킹스메이커가 애지중지 키운 뉴비세스 메이커 1기라는 게 새삼스레 느껴져 희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건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