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희연이 어떤 괘씸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닉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넓디넓은 온실 중에서도 그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장소였다. 희연 또한 이전에 한 번 와 본 곳이었다.
“여기는….”
온실 안의 나무들은 대체로 숲처럼 빽빽하게 심겨 있고 최대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경관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이곳은 예외였다.
킹스메이커가 작물 심는 요령이랍시고 알려준 이 장소에 처음 왔을 때, 희연은 동화 속으로 성큼 한 발자국 디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고 새하얀 나무가 심겨 있는 이곳은 온실 안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장소이기도 했다. 마치 그 나무 하나만을 위한 장소라는 것처럼 이 근처에는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았고, 다양한 장식들로 한껏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빛을 한껏 뿌리는 선 캐처부터, 향 좋은 말린 꽃다발, 알 수 없는 새의 깃털 장식, 그 외에도 누구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 건지 알 수 있는 것들로 말이다.
“여기는 갑자기 왜….”
선 캐처를 통해 만들어진 색 입은 빛 조각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기에 희연은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눈부심에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닉은 녜디아의 위에서 뛰어내렸다.
“…….”
반면, 얼결에 늑대 위에서 자세는 잡았으나 차마 이 높이에서 스킬의 도움 없이 내려갈 자신이 없던 희연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바짝 굳어 있었다.
“도와줄게요.”
그런 희연의 반응에 닉은 알아서 그 뜻을 해석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드래곤 위에서 뛰어내려 유니콘을 탄다거나, 높다란 나무의 높이는 될 법한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건 되면서 조금 덩치 큰 늑대 위에서 내려오는 건 못하는 희연의 모습이 닉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후우….”
어찌 됐든, 희연은 닉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녜디아의 위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희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닉은 느릿느릿 고개를 숙였다.
“싹이 자랐어요.”
“싹이요?”
뜬금없는 말에 고개만 갸웃거리던 희연은 곧이어 이곳에 자신이 묻었던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닉의 말대로, 하얀 나무의 아래에는 옹기종기 작은 싹들이 소담히 자라나 있었다. 흙을 뚫고 자란 새순들은 아주 여려 악령이의 발짓 한 번에도 그 줄기가 똑 끊어질 것만 같았다.
희연은 조심히 싹의 잎을 손끝으로 건드려보았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조금 생소했다.
“자라긴 하는구나….”
솔직히 말해 희연은 이곳에 씨앗을 묻을 때만 해도 좋은 게 자라날 확률은 물론이거니와 무언가가 싹 틔울 거라는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다.
길가에 들꽃이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는 것과 달리 이런 종류의 섬세한 식물들은 조금만 신경을 덜 써도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식물에 주야장천 매달릴 자신도, 생각도 없었기에 심을 때부터 결과가 안 좋을 거라 단정 지은 것이다.
그러나 씨앗은 심은 사람이 관심 한 번 주지 않았음에도 싹을 틔웠다. 신기한 마음으로 싹을 구경하던 희연은 궁금해하는 넬을 새싹 위에 앉혀준 뒤 닉을 돌아보았다.
선 캐처가 만들어낸 빛 아래의 그는 이 온실과도 무척이나 잘 어울려 희연은 오랜만에 그를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이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닉은 요정 같았다. 나뭇잎이 자라나는 신비로운 머리카락을 힐끔 바라보다 희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예쁜 것, 보기 좋은 것. 그런 것들을 본 뒤라 그런지 조금은 남아 있던 불유쾌한 감정의 응어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희연은 닉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것들을 차례로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희연은 뜸을 들이다 조금 멋쩍어하며 말했다.
“일부러 우는 걸 달래줘야 할 정도로 제가 생각보다 어리거나 하지는 않은데요….”
오빠랑 싸우다가 운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희연은 짚을 건 짚고 가자고 생각했다.
비록 귀여운 소동물들이나, 폭신폭신한 늑대라거나. 이런 예쁜 풍경 같은 것들을 보며 즐기느라 나빴던 기분이 다 풀렸다는 건 사실이긴 했지만, 그녀는 부러 이런 것들이 필요할 정도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필요한 건 품속에 안긴 악령이라고 희연은 생각했다. 정작 그 악령이는 아무것도 보고 느끼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지만 말이다.
“…….”
킹스메이커가 괜찮다고 했으니 별문제 없을 거라고 믿기는 하지만 희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악령이를 볼 때면 기분이 가라앉았다.
눈을 뜨고 닉이 보여준 것들을 봤다면 악령이가 누구보다 좋아했을 것을 희연은 알았다. 그래서 더욱 속이 꼬였다.
기분이 좋아진 것이 무색하게도 다시 시무룩해진 그 모습에 닉은 잠시 고민하다 인벤토리에서 리라를 꺼냈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는 희연에게 물었다.
“연주해 줄까요?”
희연은 그런 닉을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위로가 필요한 아이는 아니라고 했던 그녀의 말은 잊은 것 같은 그 모습에 결국 희연은 맥없이 웃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 연주까지 해주시면 진짜 요정 같을 것 같긴 해요.”
“…….”
“악령이가 일어나면 그때 해주실 수 있어요?”
“그럴게요.”
잔잔한 어조였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하얀 긴 머리가 살랑거렸다. 희연은 닉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바로 했다. 조금 입이 근질거렸다.
워낙 닉이 요정같이 비현실적이고 사람 자체가 침착하다 보니 조금 어리광부리고 싶어진 듯했다. 아쉬운 대로 인형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배배 꼬던 희연은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오빠랑 싸운 것도 그렇고 운 것도 그렇고 좀 창피했거든요.”
백희준에게 불만을 토로할 때까지만 해도 희연은 그렇게까지 화낼 생각은 아니었다. 울 생각도 당연히 없었다.
닉에게 위로가 필요한 어린애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누구보다 자신이 애처럼 굴었다는 것을 희연은 알았다.
만약 고해 성사를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희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닉이 정말로 요정 같았기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나온 고백이었다.
닉 또한 희연이 자신을 대충 무엇으로 취급하고 솔직하게 말하는지 눈치챘기에 별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가끔 NPC 중, 어린아이들이 그를 요정 취급하며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에게 있어 이런 상황은 제법 익숙했다.
“진짜로 울 생각은 없었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위로마저 요정처럼 할 수는 없었기에 닉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결국 혼자 화내다 울고 다 한 걸요. 이상한 사람 취급해도 별로 할 말 없다는 거 저도 알아요….”
“많이 우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런 거로 놀리는 사람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여기에는 없어요.”
“…많이 우는 사람은 혹시 없지 님이에요?”
닉은 잔잔히 웃고 마는 것으로 희연의 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뉴비 없지가 어지간히 많이 울었구나 싶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헬르벨과 요른이 만났을 때도 뉴비 없지가 울었던 걸 떠올려 보면 저가 운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어져 조금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희연은 한결 나아진 얼굴로 새싹 주위를 누비는 넬을 바라보았다. 그런 희연을 닉이 바라보았고, 그는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
“그래도, 싸웠을 때는 빨리 화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싸운 거로도 인정 안 하는걸요.”
싸운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무슨 화해를 하라는 걸까. 희연은 조금 불퉁하게 답했다. 희연의 반응을 살피던 닉은 조금 망설이다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손에 쥐어 희연에게 내밀었다.
“머리카락 만질래요?”
“갑자기요…?”
“전부터 만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물론 희연이 전부터 닉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어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희연은 이런 상황에서 냉큼 그러겠다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 조금만….”
기회를 놓치기엔 아쉽다고 생각한 것 역시 사실이기에 희연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닉의 뒤로 자리를 이동했다. 닉은 아예 편하게 만지라는 듯 자리에 앉아 희연에게 머리카락을 맡겼다.
“빗질해 봐도 돼요?”
닉은 손수 빗을 건네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과연 빗질할 경우 나뭇잎이 떨어질까 그대로 있을까 기대하며 희연은 조심조심 긴 머리를 빗질했다.
“생각보다… 튼튼하네요.”
자그마한 나뭇잎들은 빗 사이사이를 빠져나갈 뿐 빗질 때문에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희연은 약간의 안도와 묘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닉의 머리를 이리저리 땋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들이 있는 곳에 당도한 루로와 플리를 포함한 소동물들이 꽃과 꽃바구니를 입에 물고 희연의 옆으로 걸어왔다. 크고 작은 다양한 꽃을 보며 희연은 플리에게 물었다.
“먹여 달라고?”
플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입에 물고 있던 꽃바구니를 희연의 옆에 놔두었다. 다른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의미를 깨닫고는 꽃 한 송이를 닉의 머리에 장식했다.
그게 정답이라는 듯 동물들은 폴짝폴짝 그들 주위를 뛰어다녔다.
“귀엽다 진짜….”
힐링은 이런 거다, 라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다른 꽃들 역시 차례로 닉의 머리에 장식했다. 닉은 싫은 티도 내지 않고 희연이 하는 대로 가만 놔두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희연이 혼신을 다한 제 작품에 부족한 점이 없나 둘러볼 때쯤 닉은 말문을 열었다.
“기분이 나아졌다면, 오빠랑도 한 번 얘기해 봐요. 왜 슬픈지, 왜 화가 나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그렇죠….”
들고 있던 꽃을 내려놓으며 희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면 백희준은 영원히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희연은 백희준에게 이해를 바라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해시키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는 관계라는 게 싫었다.
“…오빠는 킹 님보다도 말이 안 통해요, 진짜. 적어도 그런 식으로…. 그냥 한 번쯤은, 아닌 것 같다 싶어도 편들어 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조건 없는 편애를 마주할 때면 희연은 매번 부담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편애를 바랐던 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편애를 주기를 바란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물론 어릴 때의 이야기로 지금의 백희준에게 무조건적인 편애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쉬움이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게 제 것이라 여겼으나 그 당연한 것이 제공자의 선택에 따라 순식간에 빼앗길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한 허무함이었다.
아직은 시든 기색 없이 생생한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희연은 그것을 닉의 머리에 마저 장식했다. 꽃으로 이리저리 치장된 그의 뒷모습은 정말 요정 같아서 희연은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어릴 때 제일 좋아하던 게 멜로디언 갖고 노는 거였어요.”
킹스메이커가 백희준을 놀리겠답시고 피아노 비슷한 악기를 들고 오는 바람에 희연은 옛 기억만 떠올랐다.
숨을 불어넣어야만 소리 나는 악기를 가지고 놀면서 희연은 단 한 번도 숨 차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멜로디언에 숨을 불어넣는 것은 언제나 그녀가 아닌 백희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안 갖고 놀게 되더라고요.”
백희준이 집을 떠났다는 것을 어렸던 그녀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 이상 멜로디언을 칠 때, 그 악기가 소리 나도록 숨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처음으로 가까운 이의 빈자리를 깨달았다.
“안 가지고 노니까 엄마가 버렸어요. 정말 오랫동안 안 가지고 놀아서… 버릴지 말지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전 멜로디언을 버린 걸 한참 뒤에나 알았고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때의 희연은 울었다. 아끼는 것을 어떻게 손써볼 틈도 없이 뺏겨 본 게 그때가 처음이라 나름 충격도 받았다.
희연은 그 뒤로 한동안 인형이나 장난감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일일이 확인했고 질리거나 이제는 갖고 놀지 않는 장난감도 누가 볼 때면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빈방에 들어가 빈 침대에 누가 누워 있지는 않은지 확인을 했다. 바쁜 부모님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만. 딱 그 정도의 기간만 매번 그렇게 행동했다.
“나중에 빈자리를 알게 되는 건 생각보다… 음… 좀 그렇거든요.”
“멜로디언, 많이 좋아했어요?”
“네…, 사실 진짜로 그걸 좋아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그걸 갖고 놀 때의 순간이 좋았던 거겠지만요. 생각해 보면 좀 그렇기는 해요. 나 때문에 누가 고생하는 걸 보고 좋아했다는 뜻이 되거든요.”
“왜요?”
“멜로디언에 바람 부는 사람이 오빠였으니까요. 매번, 어지러운데 꼭 이걸 갖고 놀아야 하나면서 되게 뭐라 했어요.”
핀잔에도 어린 희연은 그저 웃었다. 미움받을 리가 없다는 대단한 확신을 품고 말이다.
“…….”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지금, 백희준이 옛날처럼 어느 날 말도 없이 집을 나간다고 해도 희연은 사실 별 상관이 없었다. 백희준은 어디를 가든 간에 알아서 잘 살아남을 인간이었으며 그녀는 빈자리가 슬퍼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집 안에 다시 생길 공백의 이유가 자신과의 다툼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희연은 더 이상 제 입에서 나 때문이냐는 종류의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오빠가 집 나갔을 때, 내가 하도 멜로디언 불어달라고 조르고 귀찮게 해서 나갔나 싶었어요.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기는 하는데…, 아예 틀린 생각도 아닌 것 같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어른도 애 보기 힘든데, 그때 오빠는 학생이었어요. 게다가 제가 말 잘 듣는 애는 아니었거든요. 여러 가지가 겹쳤지만 역시 내가 제일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은 했죠.”
“상처받았어요?”
“…글쎄요. 그렇게 상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섭섭한 거였겠죠? 가까운 사람이랑 헤어져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요. 그것도 무통보로요.”
“사과받았어요?”
“…누구한테요?”
닉은 희연을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상처 준 사람한테요.”
사과받은 적은 당연하게도, 단 한 번도 없었다. 희연은 손에 쥔 닉의 머리카락을 조금 힘주어 잡았다.
어릴 때는 무통보였고, 좀 자라서는 어색해 일상적인 대화도 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선 굳이 말로 사과 같은 게 필요한가 싶은 가족이라서, 그래서 희연은 단 한 번도 사과받은 적이 없었다. 그게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말이 안 통하는 동물들도 사과를 바라는데, 대화가 되면서 사과하지 않은 건 잘못한 거예요.”
“하지만 안 들어주잖아요. 내가 화내는 것도 투정으로만 보는데 어떻게…!”
희연은 말하던 도중 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죄 없는 사람에게 따지듯이 말했다는 것을 깨달아서였다. 곤란한 기색이 가득한 그 얼굴에 닉은 꽃 한 송이를 집어 희연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그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연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조금 전엔 화풀이였어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닉의 생각을 대신 전해준다는 듯 루로와 플리를 포함한 소동물들이 희연의 다리 위로 머리를 올린다든지 앞발을 올리는 식으로 귀여운 짓을 했다.
손끝에 스치는 보들거리는 감촉이 간지러워 희연은 손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손에 쥔 꽃잎이 손안을 간지럽혔다. 이도 저도 못 해 한참을 손만 꼼지락거리던 희연은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대화는… 한번 해보기는 할게요.”
“오늘은 제대로 들어줄 거예요.”
“?”
왜 그런 확신을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긴 했지만 희연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잠든 악령이를 톡톡 건드리는 토끼의 앞발을 잡아 준 희연은 조금 웃다 닉이 쥐여주었던 꽃을 들어 올렸다. 닉의 귓가에 꽃을 꽂으며 희연은 말했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긴 한데,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고민 상담도요. 그리고 음… 진짜 요정은 아니시죠?”
“왜요?”
“꽃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요.”
닉이 요정이라 불릴 때면 떨떠름해한다는 걸 몰랐다면 희연은 요정님 예쁘다며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닉을 잠깐이나마 상담의 요정 취급하며 이야기를 하긴 했어도 희연은 그가 현실의 사람이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요정과의 즐거운 시간은 여기까지면 되었다.
제 귓가에 꽂힌 꽃을 만지작거리던 닉은 플리가 가져온 바구니 속에서 꽃 한 송이를 더 꺼냈다. 닉은 희연이 그랬듯, 그녀의 귓가에 꽃을 꽂아주었다.
“그러네요.”
“…….”
뺨을 간질이는 꽃을 힐끔 바라보며 희연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이래서 동화 속의 조력자로 요정이 자주 나오는 건가 보다 하고 말이다.
요정 닉의 조언은 듣고 모른 척할 수 없는 묘한 힘이 있었다. 약간 홀리는 기분으로 말이다. 애초에 요정이 조언을 해준다고 하는데 사람이 돼서 어떻게 그 말을 무시할 수 있을까.
동화 속 주인공들이 초면인 요정들의 말을 잘 들었던 것이 사실은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남은 꽃을 마저 닉의 머리에 장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연은 조금 설렐 뻔했다. 그래서 희연은 속으로 요정님 요정님, 거리며 지금 여기 있는 건 인간 닉이 아닌 요정 닉이라며 스스로에게 경고하듯 되뇌었다.
요정을 보며 설레는 것 정도는 봄에 꽃이 피듯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왜 그래요?”
“요정님이 너무 예뻐서요.”
“…?”
희연은 다시 한번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