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비세스 메이커 (169)화 (169/251)

169화

***

쾅-!!

“…….”

“…할 말 있어.”

요란스레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는 희연을 보며 백희준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백희준의 반응에 조금 머뭇거리던 희연은 상대가 입을 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쏟아붓듯 내뱉었다.

“오늘 있던 일은 내가 화낼 만한 일 맞잖아. 잘잘못 따지는 게 먼저라는 게 틀렸다고는 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도 못 내게 하는 건 오빠 잘못이야.”

“…….”

“먼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었잖아. 그런데 거기서 오빠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 편드는 것밖에 더 돼? 그리고,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지 못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일이니까 내가 해결할 수 있게 놔뒀어야지!”

“계속 말해 봐.”

“내가…, 내가 화낼 때마다 어린애 투정 취급 좀 하지 마….”

이제 백희준은 뭐라고 말할까. 희연은 괜히 긴장되어 식은땀이 나는 손으로 제 옷을 꽉 쥐었다. 침묵을 지키던 백희준이 입을 연 것은 희연이 그냥 방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며 발끝을 꿈질거릴 때였다.

“킹스메이커가….”

“?”

“걔가 나보고 그러더라.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것에 감사하고, 기회가 있을 때 귀 기울이고 들으라고.”

“…….”

“난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고, 뭐가 문제라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백희준은 희연이 제대로 닫지 않아 반쯤 열린 문을 마저 밀며 방을 나갔다, 대화를 거부하고 도망가기를 택한 건가 싶어 희연의 얼굴은 조금 굳었지만 백희준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얘기해.”

“…….”

“난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네가 나한테 먼저 얘기해. 뭐가 문제인지 알 수라도 있게.”

희연은 말없이 백희준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 집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굳이 방에서 나올 필요가 있나 싶어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앉아 있어.”

백희준은 고갯짓으로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희연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부엌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돌아온 백희준에 손에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중 유자차가 든 쪽을 희연에게 건넨 백희준은 조금 거리를 두고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눈높이가 위에 있었기에 희연은 백희준의 컵에는 코코아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번거롭게 다른 것을 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유자차를 조금 홀짝거렸다. 몸속에 온기가 도니 저절로 몸에 힘이 조금 빠졌다.

컵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유자를 보며 희연은 생각했다. 닉이 말한 대화가 되리라는 것의 의미가 이거였구나 하고 말이다.

킹스메이커와 백희준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닮은 사람의 충고는 그 위력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백희준이 희연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것은, 대화하자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상대가 정말로 대화 좀 해보자 하고 나오니 희연은 오히려 입이 더 딱 붙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백희준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말을 고르고 골랐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손에 든 것을 다 마실 때까지 희연을 기다려주던 백희준은 하염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해 봐. 뭐가 문제인 건지.”

다 식어 이제는 차갑기만 한 컵은 손에 꽉 쥐며 희연은 망설였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무척이나 말이다.

“옛날에… 그러니까, 나 어릴 때….”

희연도 어리고 백희준도 어리던 시절.

“…사실은, 나 돌보던 거 귀찮았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러니까 많이 귀찮았는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는 걸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 희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됐어. 다음에 얘기하자.”

금세 포기하는 희연의 모습에 백희준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까? 남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다른 점은 희연은 포기가 빨랐고, 백희준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백희준 또한 알고는 있었다. 두 사람 간에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알 수 없는 골칫거리 문제가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는 곧 죽어도 그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알 수가 없다는 것 역시도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결국 백희준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문제가 뭔지 말을 안 하는데, 대체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알려고 한 적도 없잖아!”

기어이 희연의 언성 또한 높아졌다. 숨을 고르며, 희연은 닉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그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하기까지 무척이나 오래 걸렸던 말이었다. 희연은 쥐어짜듯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그때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그때라는 게 언제인지 정확히 말부터….”

“집 나갔을 때!”

“…….”

“그때, 나한테만 말 안 했잖아. 왜, 10살짜리 애랑은 말이 안 통하고 설득시키기 귀찮아서? 아니면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백희연.”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백희준은 희연이 이런 쪽의 질문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희연은 힘없이 웃었다. 백희준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것이다. 10살짜리 애는 그런 일로도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희연이 백희준의 저런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항상 자신이 옳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던 백희준이 혼란스러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조금 쌤통이기까지 했다.

백희준은 한참 만에 답했다.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 못 했어. 그리고 말하면 울 게 뻔한데, 굳이 말할 필요가….”

“말했어야지 직접…, 울든 아니든, 일단 말은 했어야지….”

희연은 손을 들어 눈가를 꾹꾹 눌렀다. 눈물이 나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상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어 고민하느라 피곤해져서 그런 거였다.

백희준은 모른다.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전혀 모르고 상대의 감정이 어떤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백희준의 그런 점은 그의 결함과도 같았다.

문득 희연은 왜 자신만 이렇게 정리되지 못한 두서없는 말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고민해야 하나 싶었다. 억울했다. 그래서 그녀는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툭툭 내뱉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는 나한테 절대 미안하다는 말 안 해….”

한 번 내뱉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왜 그렇게 말할까 말까 매번 고민했는지 희연이 조금 후회할 정도였다.

“오빠가 조금, 남들한테 공감 못 하는 거. 그거, 사실 난 상관없거든? 근데 그것도 지금이니까 상관없는 거잖아. 그때는 아니었잖아….”

멜로디언 하나 버린 거로 몇 날 며칠 우는 어린애는, 말로써 표현하는 사과와 귀찮더라도 공을 들여야 하는 설명이 꼭 필요한 나이였다.

“그때 마지막까지… 나만 몰랐어. 왜 말 안 해줬는지는 알겠는데 이유가 뭐든 결국 나중에 통보한 거라는 사실은 안 변하잖아. 그런 걸 통보받는 기분이 어떤지 생각도… 안 했겠지. 했을 리가 없지….”

“…….”

“빈자리를 가장 많이 느끼는 건 나일 수밖에 없는데….”

맞벌이 부모님을 둔 집안에선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희연에게 백희준은 손위 형제보다는 부모에 가까웠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더 그랬다.

열 살쯤 돼서야 그녀도 백희준이 부모님의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는 걸 알았다. 그게 썩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닐 거라는 것 역시도 말이다.

아무도 백희준이 집을 나간 이유를 쉬쉬하며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서, 희연은 혼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집 나간 줄 알았어.”

“…뭐?”

“나 돌보는 거 귀찮아서 나가버렸다고 생각했어.”

사실 희연은 그 옛날, 부모님 몰래 집을 나가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장에서 버려진 멜로디언을 찾아냈었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들고 가지는 않았다.

정말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때의 희연은 울먹이며 멜로디언을 집어 던졌었다. 오래된 플라스틱 장난감은 어린애가 던졌을 뿐인데도 쉽게 망가졌다.

열 살 아이의 상상력의 한계였다. 나 때문에 나갔나?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뭘 하면 싫어했지?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게 멜로디언을 불어주며 숨차다며 싫어하던 백희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멜로디언이 없으면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면 싫어하는 짓 안 한다고 약속하고 이젠 멜로디언도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백희준이 안 돌아왔다. 주변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 나간 인간은 그렇게 쉽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저가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고 난 다음에야 돌아왔다.

그사이 희연은 나이를 먹었고 백희준은 가출이 아니었으며 단지 자기 꿈 때문에 집을 나간 거였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랬구나 하며 넘겼다. 사실을 알게 되었을 즈음에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희연이 주변 어른들의 성화에 백희준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던 열일곱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렇게 엉망진창 백희연과 백희준은 어영부영 다시 같이 살았다.

“오빠가 성격이 조금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고 해서… 내가 조금은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한 번쯤은 오빠도 그 노력 한 번은 해볼 수 있는 거였잖아.”

닉의 말이 맞았다. 상처 준 사람은 백희준이었고 희연은 사과받지 못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사과해야 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요구해도 되는지를 몰랐다.

답지 않게 희게 질린 백희준의 얼굴을 보며 희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와 이런 요구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사과받고 싶다면 요구하는 게 맞았다.

동화에서 괜히 요정 말을 듣는 게 아니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백희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백희준을 노려본 적은 많아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 생소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는 해. 그런데… 그냥….”

“…….”

“변명도 설명도 다 필요 없으니까 나한테 사과해. 따지지 말고, 왜인지 알려 하지 말고 그냥 사과해….”

백희준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현재 생각하기에 바빠 말까지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쁜 부모님 대신 어린 동생을 돌봤던 것에 대하여 백희준은 불만이 없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자신을 보며 어른들은 되바라졌다고 했고, 또래는 저들과 좀 다르다며 그를 기피했다.

희연은 백희준에게 있어 그를 가장 흰 눈으로 보지 않는 상대였다. 당연했다. 애였으니까.

어린아이에게 있어 나이 차 많이 나는 오빠 정도는 어른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좀 이상하다 싶어도 어른이라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많은 걸 넘겨짚고 말았다.

어른들과 또래가 기피하는 점이 아이에겐 별것 아니었고, 돌봄이 필요한 아이의 잘못을 백희준은 관대하게 넘길 수 있었다. 희연은 백희준에게 있어 아주 운 좋게, 정말 운 좋게 얻은 무언가였다.

부모님의 걱정 어린 시선이 귀찮다는 이유에서나마 친구를 사귈 수 있던 사회성과 배려심, 도덕심, 인내심 같은 것이 백희준에게 생길 수 있던 것에는 희연이 있었다. 애를 돌보려면 그런 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린애가 자라고 자란 지금, 그에게 사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제야 백희준은 자신이 아주, 정말 아주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 인정했다.

백희준은 내내 주변 어른들만이 희연에게 잘못한 거라 믿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지금에 와선 모를 일이었다. 백희연은 백희준과 비교하는 주변 어른들을 아니꼽게 생각했을지언정 그들 때문에 운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당연하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믿었다. 나이를 먹어도 기질은 변하지 않았고 때문에 제 행동으로 상처받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었다.

어린애도 화낼 수 있다는 걸, 그 화는 생각보다 정당하다는 것도 몰랐다. 상실감이 뭔지 처음으로 알게 했으면서, 심지어 아무런 설명 없이 사라졌으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처럼 넘어갔다.

적어도 너 때문에 집 나가는 게 아니라는 말 한마디라도 해야 했는데 말이다.

“하….”

스스로가 한심해 백희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집을 나가고 혼자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돌아와 놓고 자신이 떠날 때 뒤로한 아이는 여전히 애일 거라고 착각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고, 화를 내는 것이 떼쓰는 어린애들의 거짓 울음 같은 게 아니었는데 매번 그 화를 투정 취급했다.

백희준은 정말로,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혼자 착각했다.

“…….”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사과해 본 적 없던 그의 입은 생각과는 달리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희연은 참을성 있게 백희준을 기다렸다.

백희준은 정말 오래,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태어나 처음으로 사과라는 걸 입에 담았다.

“…미안.”

“…….”

“…미안해.”

희연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처음으로 백희준에게 사과를 받았다. 그건, 생각보다 시시했고 별거 아닌 일이었으며 당장에 어떠한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오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별거 아닌 사과를 받아내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받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백희준을 이겨 먹은 것 같다는 감상이 든다고 한다면 나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희연은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왜 어려웠을까. 왜 백희준은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한도 끝도 없이 떠올랐다.

“미안해.”

그래서 희연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이 순간에도 희연은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희준에게 있어 사과는, 자신이 잘못하고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이제 됐다. 이 정도면 그녀는 충분히 만족했다. 더 이상 슬픈 사람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사실 난 오늘도 말이 제대로 안 통하면 끝장내려고 했어. 물론 오빠를 끝장냈을 거라는 소리야.”

어떻게 끝장내려고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백희준은 입만 꾹 다물었다. 희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개의치 않아 하며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 슬그머니 웃었다.

“하지만 사과했으니 이번만 봐줄게. 정말로 이번만 봐 줄 거야. 그러니까 잘 기억해 오늘 일. 나는, 두 번은 이런 일로 오빠랑 말하고 싸울 자신 같은 거 없어….”

두 번의 잘못은 봐주지 않겠다는 말에 백희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지 않게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침묵을 지키는 그 모습에 희연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안 어울리니까 풀 죽은 것처럼 그러고 있지 마.”

“보통은, 이런 걸 반성의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나….”

언제부터 그렇게 반성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희연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반성은 다른 거로 해. 혼자 하면 무슨 소용이야, 내가 만족해야 반성이지.”

“뭘 원하는데?”

백희준이 대놓고 원하는 바를 말하라 할 줄은 몰랐기에 희연은 조금 당황했다. 잠시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녀의 시야에 적절한 것이 잡혔다. 달력이었다.

“명절에 어른들 상대 오빠가 다 해. 애들도 오빠가 데리고 놀아.”

예정된 현실의 고난이 괴로운 것인지 백희준은 벌써부터 질린 낯을 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백희준을 보며 희연은 그제야 조금 편하게 웃었다. 명절 때 좀 편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건 덤이었다.

이걸 누구의 덕이라고 해야 할까. 백희준을 힐난한 킹스메이커? 희연에게 충고한 닉?

백희준은 저와 가장 동등하다 싶은 사람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들어먹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희연은 누가 등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계속 망설였을 것이다.

괜스레 귓가와 뺨 부근이 간지러운 것 같아 희연은 손으로 그곳을 문지르다 백희준을 돌아보았다. 백희준은 힘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소파 위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희연은, 솔직하게 답한 상대를 위해 조금 더 솔직하게 굴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고마워.”

“뭐를.”

“게임 할 거니까 휴학하겠다는 말을 엄마, 아빠가 허락한 거 오빠가 설득한 거잖아.”

놀란 듯 감고 있던 눈을 뜨는 백희준을 보며 희연은 조금 서먹하게 굴었다. 백희준이 자신을 위해 그런 수고로운 짓을 했다는 것이, 그걸 이런 식으로 짚고 넘어간다는 점이 낯간지러웠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할머니랑 통화하는 거 듣고….”

“다른 사람 통화 엿듣는 거 아니야.”

“엿들은 거 아니거든.”

와중에 잔소리다. 그리 생각하며 희연은 불퉁하게 굴었다. 그러면서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딱 이 정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킹스메이커나 뉴비 없지가 희연에게 보이는 그런 편파적인 편애를 백희준이 보이기엔 이제 그들은 옛날과 같지 않았다. 희연은 보호자가 없으면 안 되는 어린이가 아니었고, 백희준은 품속에 끼고 살던 어린애를 독립시켜야 할 때가 왔다.

그냥 그런 거였다. 다만, 이제 희연은 어린 날의 멜로디언을 떠올릴 때면 그리 슬프지 않을 자신이 조금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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