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러나 희연의 걱정도 청산가리의 도망도 애당초 필요치 않은 거였다.
킹스메이커는 걱정부터 하고 보는 연약하디연약한 두 길드원의 모습에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돈이 없어 길드원이 직접 노동하게 할 사람으로 보였다면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보이도록 행동한 내 잘못이니까요. 그러니 그런 마음이 다시는 들지 않도록 앞으로는 확실하게 보여줄게요, 오리 님.”
“네? 뭘요? 갑자기 저는 왜요…?”
“증명해 보일게요. 나의 각오, 나의 마음가짐, 나의 기타 등등!”
“괜찮은데요? 진짜 괜찮아요! 증명 안 해도 돼요!”
희연의 외침을 못 들은 체하며 킹스메이커는 청산가리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진짜로 초코 님의 노동력은 필요 없으니까 도망 안 가도 돼요.”
“…그러면 저는 옛날에 왜 외벽을 타야 했던 건가요?”
“그때는 괘씸죄였죠 당연히.”
괘씸죄로 외벽을 탔다는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킹스메이커의 증명이란 걸 어떻게 막아야 하나 고민하던 희연도 기웃거릴 정도로 말이다.
“외벽을 탔어요?”
희연의 물음에 청산가리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네. 노예 시절에 좀 탔죠. 아, 눈오리 님은 노예 시절이 뭔지 모르죠?”
청산가리는 물어보면서도 본인이 설명할 생각은 없다는 듯 킹스메이커를 돌아보았다. 쑥스러운 과거 이야기에 킹스메이커는 웃기만 하며 답을 미뤘지만 희연은 이미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 시절 말하는 거면 알고는 있어요….”
킹스메이커의 노예 수집 시절, 노예였던 길드원들,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킨 닉의 일대기. 자세히는 아니었지만 모두 마담에게 대략적으로 들었다.
희연이 함무라비 법전 시절을 알 것이라곤 진심으로 몰랐다는 듯 킹스메이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리 님이 그때를 어떻게 알아요? 이희준이 말해줬어요? 걔는 왜 남의 쑥스러운 과거 시절을 멋대로 말하고 다니지? 저번 일도 그렇고 애가 참 보기와 달리 은근히 입이 싸네요.”
“마담이 말해주셨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이희준이 남의 이야기 함부로 하고 다니는 인간은 아니죠.”
“…….”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킹스메이커를 보며 어색하게 웃은 희연은 어깨에 실리는 무게감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연의 어깨에 팔을 두른 건 청산가리였다.
“제가 어쩌다 노예가 됐는지도 알아요?”
희연은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 고민했지만 청산가리의 재촉 어린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킹 님 암살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잡힌 거라고는 들었어요. 그거 진짜예요?”
“오, 생각보다 제대로 알고 있네요?”
“진짜 암살하려고 했어요?”
깜짝 놀라는 희연의 반응에 청산가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랬죠. 마법사한테 그렇게 맞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지팡이 휘두르는 솜씨가 예사 솜씨가 아니었죠 정말.”
“그랬을 것 같아요….”
킹스메이커가 낫질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쪽으로의 재능이 무척이나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곤소곤 대화하는 희연과 청산가리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드디어 저 둘도 좀 친해진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가 인형을 만드는 작업에 다시 집중했다. 그랬기에 희연은 궁금했던 것을 눈치 안 보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킹 님을 왜 암살하려고 했던 거예요?”
“아, 그때 킹이….”
청산가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킹스메이커의 눈치 한 번을 살피고는 희연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직접 말해주는 건 좀 그렇고, 대신 힌트를 줄게요. 붉은 그림자.”
“…?”
붉은 그림자면….
곰곰이 생각해보던 희연의 얼굴이 굳었다.
“그거 머더러 표시잖아요….”
희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킹스메이커를 보았다. 킹스메이커가 머더러 출신이었다니, 정말….
“…그랬구나.”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수긍 가능한 범위 안의 과거였다.
“그래도 킹 님이 막 레벨 낮은 사람들 괴롭히고 다니고 그러지는 않았죠?”
“그렇죠? 킹은 우월감 좀 느끼겠다고 약한 사람 잡고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덤비는 사람은 많은데 그 사람들을 죄다 죽여놔서 머더러가 된 케이스에 가깝기는 해요.”
“아… 그런 쪽…. 음, 굉장하네요.”
심각한 표정으로 과거의 킹스메이커를 상상하는 희연을 보며 청산가리를 눈을 가늘게 떴다.
“재미없는 반응이네요.”
“?”
청산가리는 흥미가 가셨다는 듯 희연에게서 떨어졌다. 희연이 조금 색다른 반응을 해주기를 바랐던 듯했다.
“하지만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닌걸요.”
킹스메이커가 사람 목을 노리고 낫질하는 모습을 본 건 한 번뿐이었지만 희연은 그 한 번으로도 그녀가 한두 번 그래 본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머더러 출신이었다는 것까지는 예상 못 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지금은 지나가는 뉴비를 납치해서 길드장 자리에 앉힌다거나 키운다거나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희연의 시선을 느낀 킹스메이커가 뒤돌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희연의 모습을 청산가리는 이렇게 정의했다.
“안전 불감증이네요.”
백희준에 이어 청산가리마저 킹스메이커를 위험 물질 취급했다. 희연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 희연과 청산가리의 대화를 모를 킹스메이커는 완성된 인형을 악령이에게 들이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빙글빙글 눈이 돌아가는 인형을 툭툭 건든 악령이는 희연의 뒤로 도망 왔다.
“?”
[이름 없는 악령 :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인형에 안 들어가고? 햇빛 아래 오래 있으면 안 되잖아.”
[이름 없는 악령 : 아니야! 괜찮아! 더더 오래 있을 수 있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그 모습에 희연은 아직까지도 눈을 굴리고 있는 부두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 안에 깃들어 있던 시간이 답답했던 걸까? 날지도 못 하고 매번 희연에게만 안겨 다녔으니 그랬을 수도 있었다.
마음이 약해진 희연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킹스메이커에게 말했다.
“기껏 만들어주셨는데, 악령이가 나중에 들어가고 싶대요. 죄송해요.”
“악령이가 본인 입으로 그러겠다고 한 거예요? 햇빛은 어쩌고?”
“조금 더 이렇게 있어도 괜찮다나 봐요.”
“음… 그래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듯하던 킹스메이커는 얼마 안 있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인벤토리에서 길고 얇은 천을 꺼내었다. 그것으로 다그락 다그락 움직이는 메리 인형을 묶은 뒤에야 킹스메이커는 악령이를 돌아보았다.
“그렇구나, 악령이는 이제 햇빛 아래서 오래오래 버틸 정도로 몸이 다 회복한 거로도 모자라 더 강해졌구나.”
“…?”
희연이 듣기엔 킹스메이커가 악령이에게 하는 말에는 달갑지 않은 심정이 깃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전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요. 악령아… 너 사람 가려가면서 의지를 전달할 줄도 아네?”
“아….”
“분명 초반에는 나도 없지도 네 문자 잘만 읽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라고 해야 하나… 너 그 모습일 때는 오리 님한테만 의지 전하더라? 지금도 그렇고.”
[이름 없는 악령 : 아, 아니야! 이건 그냥 막 다치고 힘없어서 그런 거란 말이야!]
“그래? 근데 지금은 또 나한테까지 잘만 의지를 전달하네. 어디서 이런 약은 행동을 배워왔지?”
겁먹었다. 희연은 바짝 굳어버린 악령이의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희연도 중간부터는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악령이가 그녀에게만 의지를 전달하는 것도, 이를 킹스메이커가 눈치챈 것도 말이다.
다만 킹스메이커 또한 대충 넘어가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았기에 조용히 넘어가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서 심사가 꼬인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악령이를 붙잡고 방긋방긋 웃으며 심문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악령 : 나, 나 그냥 진짜로… 진짜로 일부러 막 그런 건 아닌데….]
퐁퐁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는 악령이의 간절한 시선에 결국 희연은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킹스메이커의 손에서 빠져나온 악령이는 희연의 어깨에 매달리더니 머리카락을 커튼 삼아 킹스메이커의 시선을 차단시켰다.
희연은 그런 악령이를 반사적으로 토닥여주었다. 그럴수록 악령이는 어리광을 부리듯 더더욱 희연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흑마법사의 사악함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름 없는 악령 : 사악한 흑마법사가 노려봐! 나쁜 말만 해! 못됐어! 나빠!]
“음… 킹 님이 노려봐서 무섭대요.”
“이런. 겁쟁이구나 악령아.”
겁쟁이란 말에 자극받았는지 악령이가 머리카락을 치우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반항하긴 했지만 이미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돌린 뒤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악령이는 그런 킹스메이커의 모습에 자신의 행위를 무척이나 위협적인 무언가라고 굳게 믿어 의기양양해졌다. 희연은 그 모습을 보며 어쨌든 잘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킹스메이커는 무언가 고민하는 모양새이긴 했으나 심드렁한 얼굴인 것으로 보아 악령이의 행동에 대해 캐보는 건 이쯤 하려는 것 같았다.
꾸물꾸물 움직인 악령이가 넬과 함께 희연의 옷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쯤 킹스메이커는 다시 그녀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희연에게 하는 말이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으니까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잘 들어 악령아. 악령은 흑마법사에게 있어 언제나 귀한 재료라는 걸.”
악령이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조금 누그러진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다시 방긋 웃으며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로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자, 이 일은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겁먹은 악령이도 놀아줄 겸, 길드 성 수리하는 동안 미뤄두었던 일도 할까 하는데. 어때요 오리 님? ”
“미룬 일이요?”
희연의 물음에 킹스메이커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네, 바로바로 오리 님 방 정하기!”
“아, 그거.”
“오리 님 아직도 길드 성에서 방을 안 정했잖아요.”
“그렇죠….”
마할라틴 성 지하에는 저주받은 흑마법사의 비밀 던전 같은 공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날, 방을 정하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크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희연은 그에 대해서는 반쯤 잊고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인벤토리는 넉넉했기에 두근두근 내 집 마련이라는 게임 초반의 기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집이나 개인 방 같은 것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던 희연은 역시 필요치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애초에 편안히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정도로 그녀의 게임 생활은 평화롭고 잔잔하지 못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하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해본 생각을 하며 희연은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솔직히 방은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명백한 거절에 킹스메이커는 희연이 예상하지 못한 색다른 방식으로 대꾸했다.
“아, 혹시 독립을 원해요? 그러면 나가서 부지를 찾아볼까요? 어디에 신전을 지어야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날까요? 신전의 양식은 어떤 게 좋아요?”
“지금 당장 방을 정하러 가면 될 것 같아요. 방을 찾으러 가 볼까 악령아?”
[이름 없는 악령 : ?]
“방보다는 신전이 좋지 않을까요?”
“저는 신전보다 방이 좋은데요? 평생 이 성에서만 살면서 독립하지 않을 계획이라서요! 평생 거주민 할게요!”
희연의 빠른 태세 전환에 킹스메이커는 제법 만족했다. 물론, 내심 이참에 은근슬쩍 신전 하나 짓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긴 했지만 일단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킹스메이커는 아주 짧게 옛 기억을 떠올렸다. 화분이 필요하다는 닉의 말에 바로 온실을 대령한 적이 있었다. 그날 닉은 열댓 번째 도망을 시도했다.
다시 잡아 오긴 했지만, 굳이 옛 과거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한 발자국 물러날 때였다.
짧은 과거 회상을 마친 킹스메이커는 방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자, 그러면 신전… 이 아니라, 오리 님의 새로운 보금자리 탐방을 위해 모험을 떠나 보도록 할까요? 같이 갈 사람? 없지는 물론 갈 거고.”
뉴비 없지는 당연하게도 참가일 테니 굳이 의견을 물어볼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다.
“초코 님 같이 갈래요?”
“아뇨. 전 그런 건 취향 아니라니까요.”
일단 청산가리는 빠졌다. 전혀 흥미 없다는 태도로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익숙한 것이라 희연은 놀라지 않았다.
“길마님은요?”
“오늘은 안 돼요.”
그러나 닉 역시도 그 탐방에서 빠지겠다고 했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선히 청산가리를 보내줄 때와 달리 희연은 다급하게 물어보았다.
“진짜요…?”
닉이 없으면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릴 때 그나마 말려줄 만한 사람도 없어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툭하면 신전과 교황 엔딩을 외치는 잔뜩 신이 난 두 부길마 사이에서 시달릴 생각에 희연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지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닉도 희연의 사정을 봐줄 수 없었다.
“오늘은 정말로 안 돼요.”
연이은 두 번의 거절에 희연은 수긍하고 포기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희연의 모습이나, 미안해하는 닉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본 킹스메이커는 고개를 기울였다.
“방 찾으러 가는 것뿐인데 왜 두 사람 다 우리로부터 생존해야 하는 것처럼 구는 걸까 없지 없지?”
“나도 알 수가 없지 없지.”
모른다는 사람치고는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벌써부터 고양된 두 사람의 모습에 희연은 걱정이 절로 되었다.
“온실이랑 지하의 공방 외에는 대부분 평범한 방이에요.”
“대부분이라는 건 아닌 것도 있다는 거잖아요….”
닉의 위로는 실패했다. 부정하지 않는 닉의 모습에 희연은 더욱 절망했다.
“…피해야 하는 방은 미리 말해줄 거예요.”
“?”
피해야 하는 방?
거대하고 웅장하며 과한, 그런 사치스러운 종류의 방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희연은 닉의 말에 담긴 묘한 어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닉의 말은 마치 이 성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러니까 일종에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방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희연은 제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위험한 방은 없는 거죠?”
“…….”
“닉 님?”
닉은 희연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 모습에 다급해진 희연이 무어라 더 물으려 했지만 킹스메이커가 그런 희연을 들어 메는 것이 먼저였다.
“으앗!”
“자, 그럼 새로운 방을 찾는 모험을 시작해볼까요?”
의문문으로 말을 맺었지만 킹스메이커는 답도 듣지 않고 온실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뉴비 없지가 함께했다.
“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핳!”
즐거이 웃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희연만 차마 웃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