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희연은 슬슬 도망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킹스메이커로 인해 희연은 도망쳐 보려는 시도조차 못 하고 붙잡혔다.
“자, 초코 님 방으로 가 볼까요 오리 님?”
“자자, 가봅시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손을 꼭 잡았다. 킹스메이커가 잡지 않은 희연의 반대 손은 뉴비 없지가 잡았다. 어린애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다니는 것처럼 양손을 포박당한 희연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청산가리 님 방은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귀농 님 방으로도 충분해요!”
희연에게 있어 청산가리의 방은 목숨을 걸고 입장해야 하는 마할라틴 성의 또 다른 던전이었다. 킹스메이커의 공방이 저주받은 흑마법사의 비밀의 방이라면 청산가리의 방은 입장하는 순간부터 온갖 흉기가 날아드는 함정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희연의 간절한 발언이 효과가 있었는지 킹스메이커는 무척 아쉬워하긴 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뉴비 없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오리 님, 어떤 유형의 방을 원해요?”
청산가리의 방을 안 가도 괜찮다 한 이상 희연은 두 사람의 마음에도 들만한 방을 선정해야 했다. 희연은 잠깐의 고심 끝에 원하는 방의 조건을 골랐다.
“저도 볕이 잘 드는 게 좋아요! 그리고… 위험한 방이랑 헷갈릴 일 없는 위치면 좋겠어요…!”
“볕 드는 거 좋죠! 후자는… 중요하죠.”
뉴비 없지는 희연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조건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대로면 다시 청산가리의 방에 입장하자는 말이 나올 것만 같아 희연이 절망하려던 차, 예상치 못한 상대가 희연을 구원했다.
[이름 없는 악령 : 나는 아주아주 높은 방이 좋아!]
희연과 킹스메이커의 사이에 끼어든 악령이가 손을 파닥거리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령이는 희연과의 소통만을 고집했다. 희연은 조금 눈치를 보며 악령이의 말을 전해주었다.
“악령이는 층수가 좀 있는 방이 좋대요.”
“층수 있는 방이요?”
킹스메이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악령이는 희연에게 본인의 생각을 추가로 들려주었다.
[이름 없는 악령 : 하늘만큼 높은 성 꼭대기에서 잠을 자면 커다란 드래곤이 날아와 친구가 되어준다고 했어!]
“…보통은 성 꼭대기에 사람을 가둔 게 드래곤 아닐까?”
[이름 없는 악령 : 높은 방에서 하늘 보고 구름 덮으면서 자고 싶어!]
희연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악령이는 어서어서 높은 곳으로 가자며 재촉했다. 여태껏 희연이 방을 정하는 모험을 할 동안 관심 없다는 듯 굴던 것과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무슨 바람이 들어 그런 걸까 싶었다. 악령이도 마할라틴 성의 제2 던전 암살자의 방에는 가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물었다.
“그런데 드래곤이랑 친구 하고 싶으면 루로랑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악령이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얼굴로 희연을 돌아보았다.
[이름 없는 악령 : 친구 아니야! 못된 드래곤!]
루로에게 무척이나 유감이 많은 것 같았다. 윌로우 농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나 싶어 희연은 그 이상 악령이에게 루로와 친구가 되어 보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희연이 악령이에게 인형을 물어뜯는 드래곤은 나쁘다 동조해주는 사이 무언가 고민해 보는 듯하던 킹스메이커가 입을 열었다.
“조건에 맞는 방이 있기는 해요.”
“네?”
“방이요. 오리 님이랑 악령이가 말한 조건에 맞는 방이 하나 있어요. 볕이 잘 들고 위험한 방이랑 헷갈릴 일 없고, 드래곤이 와서 친구 해주지는 않지만 근사하기는 참 근사한, 높디높은 첨탑에 위치한 방이죠.”
“그런 방도 있었어요?”
“네, 뭐…. 그런데 방이 구조상 그렇게 넓지는 않아서요. 별로 추천하지는 않아요. 꾸미는 것도 제한이 많고 사람이 생활 공간으로 써먹기에는 적합하지는 않거든요.”
킹스메이커는 정말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듯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그러나 희연은 이미 반쯤은 그 방으로 하자 마음먹은 참이었다.
어차피 실질적으로 방을 사용하는 건 희연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희연은 로그아웃을 할 때면 앞서 악령이와 넬을 꼭 온실에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게임에 접속하지 않는 동안 두 악령은 에흐테와 달리 자유롭게 메르헨 호라이즌의 세상을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괜히 엉뚱한 곳에서 두 악령을 헤매게 할 바에야 번잡스럽더라도 일일이 온실에 데려다주는 게 희연으로서도 마음이 편했다.
희연이 접속하지 않을 때면 악령이와 넬은 온실에 오도카니 앉아 희연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멍하니 있을 때가 많다고 했다. 킹스메이커를 비롯한 여러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희연은 그 점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방을 고르는 게 확정되었을 때쯤부터 희연은 방을 고른다면 그 방을 그녀 자신의 것이라기보단 악령이와 넬을 위한 장소로 써먹을 생각을 했다.
그러니 킹스메이커가 말하는 방이 사람에게는 썩 맞지 않는 구조의 방이라고 해도 악령이와 넬만 좋다고 한다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침 악령이는 높다란 방이란 말 하나에도 좋다며 빙글빙글 날아다니고 있었다. 희연은 잘됐다 여기며 킹스메이커를 돌아보았다.
이미 결정을 내린 게 분명한 희연의 얼굴에 킹스메이커도 결국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한테는 아직 신전이 있으니까요.”
“…….”
정말 끝까지 포기 안 하는구나 생각하며 희연은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웃었다.
***
킹스메이커가 말한 방은 이전 길드전 당시 희연이 타고 올랐던 망루가 있는 첨탑에 위치해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오르며 희연은 말했다.
“전에 여기 올라갈 때는 문 같은 걸 따로 보지는 못했어요.”
“그럴 거예요. 나름 숨겨져 있는 방이거든요. 그런 것치고는 든 게 없는 방이지만요.”
첨탑의 절반쯤 올랐을 때 앞서 계단을 오르던 킹스메이커의 걸음이 멈추었다. 유심히 벽을 바라보는 킹스메이커의 모습에 희연과 뉴비 없지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이게… 이렇게 하는 거였던 것 같은데….”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벽돌 중 유난히 색이 짙은 벽돌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홈이 나 있었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에게 잘 기억하라 말한 뒤 문을 여는 법을 알려주었다.
홈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킹스메이커는 반대 손으로 바로 아래 있던 벽돌을 가볍게 툭 쳤다. 그러자 그녀가 짚고 있던 벽돌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금 앞으로 빠져나왔다.
킹스메이커는 그 벽돌을 손으로 잡아 밖으로 빼내었다. 벽돌은 하나의 장치였다. 희연은 벽돌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온 기둥에 여러 태엽이 함께하는 것을 보며 감탄했다.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 두 번. 다시 오른쪽 한번 돌려주고 이렇게 넣으면서 밑에서 세 번째에 있는 벽돌을 발로 차 주면….”
빼곡하게 들어맞아 있던 벽돌 사이사이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붙어 있던 벽돌은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모든 게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사라졌다. 비밀의 방에 입구가 드러났다.
“우와….”
[이름 없는 악령 : 우와…!]
장치 조작이 끝난 뒤에야 드러난 비밀의 방은 킹스메이커의 말처럼 생활 공간으로 쓰기에 적절한 구조는 아니었다. 나선형 계단의 외벽에 만들어진 방이기에 마치 중앙에 구멍이 있는 도넛 같은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벽과 벽 사이가 그렇게 좁은 건 아니었지만 침대 같은 생활감 있고 크기가 있는 물건을 갖다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희연은 이 방이 마음에 쏙 들었다.
바닥에는 간지러울 정도로 푹신하고 부드러운 짙은 남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소파 같은 가구를 들일 수 없어서인지 크고 작은 쿠션도 잔뜩 깔려 있었다.
천장과 외벽은 투명한 유리라 바깥의 풍경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유리 벽을 고정하는 골조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벽에서부터 시작해 천장까지 이어지는 그 골조에는 별과 달 같은 장식물들이 잔뜩 늘어져 있었다.
희연은 그 중 손에 닿는 위치에 있는 것을 툭 건드려 보았다.
“예쁘다….”
별 장식에선 반짝이는 빛이 어른거렸다. 조금 더 어두워진 밤에 본다면 무척이나 아름다울 터였다. 여긴 별을 보는 방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희연은 조금 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에 있는 물건을 보면 그 방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은 정말로 누워서 별을 보는 목적이 전부라는 것처럼 푹신푹신한 쿠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새 쿠션 속으로 파고들어 폴짝폴짝 뛰노는 악령이와 넬을 바라보며 희연은 웃었다. 아무렴 어떤가 싶어서였다. 두 악령들이 좋아하니 이 방은 희연이 바라는 용도를 모두 충족한 셈이었다.
“이런 방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무래도 그렇죠. 첨탑의 구조상으로도 나올 수가 없는 방이라 밖에서 봐도 있는 줄 모르거든요.”
“킹 님은 여기 어떻게 찾은 거예요?”
“처음 이 성을 갖게 됐을 때, 뭐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 이리저리 온갖 방법을 동원한 탐험을 했었거든요. 고전적인 방법으로 땅을 파본다거나 벽을 부숴본다거나 하면서요.”
“…?”
땅 파고 벽 부수는 게 고전적인 건가…?
혼란스러워하는 희연의 얼굴에도 킹스메이커는 마저 말을 이었다.
“이 방을 찾은 건 우연이었어요. 마할라틴 성의 원주인은 은둔한 마법사였던 것 같은데, 혹시나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성안 이곳저곳에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찾아봤었죠.”
“여기 말고도 더 있어요?”
“그럼요. 일단 내가 쓰고 있는 공방도 원래 비밀의 방 중 하나였어요.”
신기해하는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인벤토리를 열어 어느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무척이나 낡은 고서적의 표지에는 아주 커다란 별과 그런 별을 감싸는 마법진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희연은 그 마법진을 대충 훑어본 뒤 제목을 읽었다.
“Spry recluse Mr. Mahalatine? 영어로 되어 있네요? ‘활발한’ 은둔자…? 미스터 마할라틴?”
“‘활발한’보다는 ‘빈틈없는’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을 거예요. 정확히는 나이에 비해 ‘빈틈없는’ 은둔자. 미스터 마할라틴.”
“마할라틴이라는 사람은 나이가 조금 있었나 보네요? 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도 같고요. 이 방도 그렇고 공방의 천장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요. 별로 꾸며진 게 많아요.”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리 님 말대로 그거 하나는 명확하죠.”
킹스메이커는 맞장구친 뒤 들고 있던 책을 다시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무튼, 결국 오리 님은 이 방으로 결정을 내린 거죠?”
“네! 저도 이 방이 마음에 들어요.”
“조금 좁긴 하지만, 이미 꾸며져 있기도 하고, 특이한 구조이기도 하니 나름 꾸밀 맛이 있기는 하겠네요.”
부정적이었던 조금 전과 달리 킹스메이커는 막상 희연이 정말로 이 방을 선택하자 긍정적인 면모를 고르고 골라 말해주었다.
악령이가 말한 대로 높고, 희연이 바란 대로 다른 위험한 방과 헷갈릴 일 없으면서 채광도 좋았다.
[이름 없는 악령 : 이 방 좋아! 너무 좋아! 근데 햇빛이 따가워….]
“아….”
채광이 좋은 것의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햇빛을 피해 다시 쿠션 사이로 파고드는 악령이의 모습에 킹스메이커가 무슨 대화를 한 것이냐며 희연에게 물었다.
“햇빛이 따갑대요….”
“그러게 고집부리지 말고 인형 속으로 들어갔어야지.”
킹스메이커의 타박에 악령이는 듣기 싫다는 듯 눈만 찡그렸다.
“어차피 인형이야 다 완성된 참이었으니까 가지고 오기만 하면 돼요. 이렇게 된 거 나랑 없지가 인형 가지고 올 동안 오리 님은 천천히 방 구경도 하고, 어떻게 꾸밀지도 구상해 보도록 해요.”
“네!”
“필요한 거 있으면 여기서 가져다 쓰고요. 이거 길드 공용 창고랑 연결된 거니까 마음대로 써도 돼요! 꼭! 꼭 써요!”
“네에….”
희연에게 몇 번이나 더 당부한 뒤에야 킹스메이커는 뉴비 없지를 데리고 첨탑의 방을 나갔다.
악령이와 넬이 쿠션 속을 파고드는 소리 외에는 적막한 방 안에서 희연은 낯선 방과 내외라도 하듯 멀뚱히 서 있다 이내 슬금슬금 자리에 앉았다.
“푹신푹신하네….”
데굴데굴 굴러다니면 무척이나 기분 좋아질 것 같은 그런 감촉이었다. 몇 번 더 카펫을 손으로 꾹꾹 눌러보던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당부하고 간 말을 상기하며 그녀가 두고 간 보물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거구나.”
우편배달부 새의 가방을 열었을 때처럼 보물 상자를 여니 인벤토리 같은 창이 떠올랐다. 희연은 차곡차곡 정리된 그 안의 물건들을 훑어보다 조용히 상자의 문을 닫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꺼내 가라고 했지 굳이 굳이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까지 꺼내 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킹스메이커가 들었다면 섭섭해했을 생각을 하며 희연은 두 악령들을 찾아 쿠션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얘들아?”
희연의 부름에 넬은 곧바로 쿠션 속에서 나왔다. 반면 악령이는 바스락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던 것이 무색하게도 숨죽이며 인기척을 죽였다.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유령과 하는 숨바꼭질이라니. 희연은 제게 너무나 불리한 종목 선택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쿠션 속에 숨은 악령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던 희연은 조금 유치하지만 효과 좋은 방법을 써먹기로 했다.
“악령이가 안 나오니까 어쩔 수 없다. 넬이랑 둘이서만 방 꾸미기 해야겠네.”
삣?
“여기에 침대를 놔달라고? 인형 침대 갖다 놓으면 되겠다!”
삐윳?
“인형의 집에서 살고 싶다고? 우와 정말 멋있겠다. 아주 커다란 인형의 집을 갖고 오면 악령이 물건은 여기 둘 곳이 없겠네. 이를 어쩌나.”
[이름 없는 악령 : 안 돼!]
쿠션을 헤치고 튀어나온 악령이는 울먹이며 희연의 품에 안겼다. 자신만 빼놓고 방 꾸미기 하지 말라며 투정 부리는 모습에 희연도 장난치던 것을 멈추었다.
“너희 방이기도 하니까 같이 꾸며야지.”
[이름 없는 악령 : 놀고 싶은데….]
“다 꾸미고 놀자.”
악령이는 조금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금세 기운을 차리고는 넬과 함께 이리저리 방 안을 날아다니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름 없는 악령 : 달콤한 걸로 가득가득 채우고 싶어!]
어린아이다운 희망찬 발상에 희연은 현실을 덧붙였다.
“…벌레 생기지 않을까?”
[이름 없는 악령 : 벌레는 싫은데….]
악령도 벌레는 싫구나….
희연은 악령이에게 동조해주며 다른 의견을 구해보았다. 넬의 경우 쿠션 위에 앉아 손을 파닥이는 것으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푹신푹신한 것들이 많으면 좋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인형 가져다 놓을까?”
아직 <구둣방 요정들의 밤>의 스킬이 낮아 만들 수 있는 가짓수가 적긴 했지만 조금만 더 레벨을 높이면 아마도 인형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런 식으로 꾸민다면 가장 좋아할 만한 사람은 닉일 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희연은 악령이가 다시 한번 내놓은 제안에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 없는 악령 : 그러면, 그러면! 꽃으로 가득 채워줘!]
“꽃으로 꾸미면 예쁠 것 같긴 한데….”
문제는 꽃은 시간이 지나면 시든다는 것과, 꽃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화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넓지 않은 방을 악령이의 마음이 흡족할 정도로 꽃으로 꾸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희연은 해보는 데까지는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꽃이 시드는가를 먼저 실험해 보기로 했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게임이니 꽃이 시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인벤토리를 열어 전체적으로 훑은 희연은 어렵지 않게도 가장 위의 칸에서 꽃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
[<회색빛 들꽃> : 에흐테흐의 숲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들꽃이다. 미약한 독성이 있다.]
그 꽃은 에흐테흐 숲의 독초였다. 이름 없는 그분에게 한 송이 나눠주었음에도 희연의 인벤토리에 남아 있던 것이다.
희연은 그 당시 자신은 왜 이 쓸데도 없는 잡템 중에 잡템 초보존의 꽃을 채집했던 건가 잠시 생각해보다 들고 있던 것을 다시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름 없는 악령 : 그거 꽃인데!]
“꽃인데… 이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독초로 방을 꾸며 이 성에 세 번째 던전이라 불릴 만한 장소를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