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는 희연의 모습을 본 마담은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희연의 반응이 제 탓인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담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 하지만 마담은 괜히 이 상태를 유지했다가 나중에 킹스메이커에게 보복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주제를 환기할 겸 괜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끌었다.
“흠흠,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그쪽 레벨이 부족하다는 거죠. 스텟 부족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가능하면 빨리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그 흔적은 보내줘요. 저거 달고 마리아한테 수업 들을 건 아니잖아요. 강제로 떼어버리는 게 목적이라면 모르지만 그건 아닐 테고.”
신성 토템이자 신전의 아이돌인 뉴비 없지만큼이나 마리아도 그 성격과는 별개로 신성함으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리아의 등장만으로도 그레텔의 흔적에게는 유효타가 들어갈지도 몰랐다.
마리아에 의해 강제 정화되는 그레텔의 흔적을 상상해 보던 희연은 그건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뭘 원하는지를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사실일 경우 희연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실질적으로 없다고 봐야만 했다. 희연이 생각한 가장 최악의 경우는 그레텔의 흔적이 헨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거였다.
헨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뿐더러 두 존재가 만났을 때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면 섣불리 이뤄줄 수 없는 소망이었다.
얼굴에 복잡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희연의 모습에 보다 못한 마담이 쉬운 길을 제시해주었다.
“흔적은 찌꺼기에 가까운 감정이라 아주 사소한 바람만 이뤄줘도 사라져요. 가령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먹여주거나 하는 것도 되고요.”
“지금 상태에서도 뭔갈 먹을 수 있어요?”
“입이 없으니까 못 먹겠죠.”
희연은 반사적으로 흔적을 힐끔 바라보았다. 확실히 입이 없기는 했다.
“제사라도 지내야 하나….”
뭘 바쳐야 그레텔의 흔적이 만족할까 고민하는 희연의 모습에 마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희연의 품에 안긴 악령이를 손을 들어 가리켰다.
“일 벌이지 말죠? 제사는 뭔 제사야. 애초에 여기 쉬운 방법이 있잖아요.”
마담이 말하는 바를 희연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빙의…. 그런데 흔적인데도 빙의를 할 수 있어요?”
“말했잖아요. 최소 평균 레벨 280인 레이드 파티나 상대 가능한 보스급 악령이라고. 그 정도면 이런 흔적이라고 해도 빙의 정도는 가능하죠. 마침 부두 인형도 있네.”
마담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악령이 쪽으로 움직였다. 갑작스레 집중된 시선에 맹한 얼굴로 눈만 끔벅이던 악령이는 한 박자 늦게 마담의 말을 이해하곤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시, 싫어…! 안 줄 거야!”
짧은 팔로 제 몸을 꼭 끌어안는 모습에서 단호한 의지가 느껴졌다. 바꾼 지 얼마 안 된 몸이라 그런 것인지 더더욱 넘기기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싫다는 애한테서 억지로 몸을 뺏을 생각은 없었던지라 희연은 악령이를 달래며 마담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른 방도는 없냐는 뜻의 눈빛이었다.
마담은 대수롭지 않게 차선책을 내놓았다.
“저 정도로 강하면야 굳이 부두 인형 아니더라도 동물에도 빙의할 수 있어요.”
“동물에도 빙의가 돼요…?”
마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의 말은 바꿔 말하면 악령이는 동물에 빙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자미엘에게 한 방 먹였던 걸 떠올리며 악령이도 제법 강한 건데 말이다. 희연은 그레텔이 정말 강하긴 강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러면 동물은….”
“데리고 있는 동물 있으면 아무 종이나 상관없으니 빙의시켜요.”
데리고 있는 동물이라는 말에 희연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데리고 있는 동물이라고 해 봤자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에흐테는 조금 그런데….”
“데리고 있는 동물이 유니콘 말곤 없어요?”
“네에….”
“쯧, 저 흔적도 유니콘 같은 성스러운 거에 빙의되고 싶은 마음은 없을걸요.”
그레텔의 흔적뿐만 아니라 에흐테도 제 몸에 악령을 빙의시키는 건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야, 너 뭐 없어?”
희연에게 마땅한 빙의체가 없자 마담은 곧바로 뉴비 없지로 타깃을 돌렸다. 그러나 제 몸 하나가 최고의 자산인 성기사 뉴비 없지에게 펫 같은 것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성기사라는 게 말도 없어?”
“달리는 말이랑 부딪히면 내가 이기는데….”
“그딴 게 자랑이야?”
오늘따라 화가 많은 마담과 눈물이 많은 뉴비 없지에게서 고개를 돌린 희연은 모짜렐라를 보며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희연보다 레벨 조금 높은 거 빼면 거의 같은 시기에 게임을 시작한 모짜렐라에게서도 마땅한 빙의 대상은 나오지 않았다.
마담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나가서 적당한 거 아무거나 잡아 와요. 쥐 같은 거에도 빙의 되니까. 골목길이라 쥐도 많은데 잘됐네요.”
“헉…!”
“?”
“쥐 싫대요! 쥐 싫대요! 쥐 싫대요!”
빠르게 깎이는 HP에 놀란 희연은 다급하게 모짜렐라를 붙잡으며 마담에게 외쳤다. 치료를 재촉하는 희연의 손길에 모짜렐라는 일단 반사적으로 스킬을 걸어주고는 거리를 두었다.
머리 위로 드리우는 빛과 함께 다시 안정적으로 차오르기 시작한 HP에 희연은 안도하면서도 그레텔의 흔적을 조금 원망했다.
왜 보복도 나한테…!
쥐 이야기를 꺼낸 건 마담인데 그에 대한 응징은 희연이 받았다. 뉴비 없지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악령의 흔적도 레벨로 사람을 차별하는구나 싶어 서러워질 지경이었다.
희연은 꼭 자미엘의 저주를 빨리 해결해버리고 레벨을 많이 높이자 다짐했다.
“일 꼬이네….”
그런 희연의 서러움을 모를 마담은 제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그가 보기에 희연에게 들러붙은 그레텔의 흔적은 흔적치고는 자아가 너무 강했다.
이럴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간단한 것에 만족 못 하고 더한 것을 요구하며 들러붙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끌끌 혀를 찬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셰온 23호.”
“셰온?”
어디선가 스치듯 들어본 단어에 희연은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 보던 것도 잠시, 희연은 빛무리와 함께 소환된 자그마한 새 한 마리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그마한 하얀 새는 마담에게로 포르르 날아가더니 입에 물고 있던 쪽지를 그의 손 위에 올려두었다. 쪽지를 갈무리한 마담은 새를 희연 쪽으로 내밀며 물어보았다.
“새도 마음에 안 든다고는 안 하죠?”
“아, 네에….”
얼결에 그레텔의 흔적을 확인하며 답하는 희연에게 마담은 새를 넘겼다. 제 손 위에서 삐롱거리는 새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던 희연은 마담에게 물었다.
“…새 소환하실 줄 알았네요?”
23호라는 건 한 마리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요.”
“…아니에요.”
더 말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새를 얹은 손을 그레텔의 흔적 쪽으로 가까이했다. 과연 흔적이 그녀의 바람대로 빙의를 해 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검은 안개는 새의 몸 위로 살포시 스며들었다.
악령이가 메리 인형에 안착할 때와 같은 몸부림 비슷한 것도 없었다. 새까만 검은색으로 물든 새는 얌전히 붉은 눈만 빛냈다. 흔적의 빙의와 함께 더 이상 HP가 깎이지 않음을 확인한 희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담은 일차적인 문제를 간신히 해결했으면서 마치 다 해결하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하는 희연의 모습에 삐뚜름하게 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그레텔이 좋아하던 음식이 뭔지는 알아요. 안 그래도 그걸 보상으로 받으러 갈 참이기도 했고요.”
“그래요? 그러면 애초에 이것도 연계 퀘스트였나 보네요. 그럼 빨리 가서 진행 끝내요. 빙의 끝나면 새는 적당히 아무 데서나 풀어주고요.”
마담은 볼일 다 봤으면 어서 나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도와줄 거 다 도와주고 삐뚜름한 태도를 보이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희연에게 의문이었다.
역시 내가 선구자인 게 마음에 안 드나….
희연이 마담의 의중을 가늠하는 사이 뉴비 없지는 희연의 어깨에 얌전히 앉은 검은 새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검은 새는 그런 뉴비 없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도 잠시, 날아올라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악!”
“시끄러! 나가!”
방 안에서 벌어지는 소란에 마담은 결국 언성을 높였다.
악령이는 뉴비 없지를 공격하는 검은 새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함께 달려들려고 했다. 악령이가 뉴비 없지를 향해 뛰어오르기 직전 낚아채는 것을 성공한 희연은 서둘러 일행을 챙겨 마담의 방을 빠져나왔다.
뉴비 없지의 머리를 콕콕 쪼던 검은 새도 얌전히 날아와 희연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그런 새를 오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희연은 슬쩍 손을 들어 새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려고 했다.
“아야….”
검은 새는 망설임 없이 희연의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귀여운 외양과 달리 들어오는 대미지가 위협적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새의 성질을 긁지 말자 다짐한 희연은 그 뒤로 노인 릴리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검은 새에게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뉴비 없지는 악령들이 자신을 너무 싫어해서 조금 섭섭했고 희연은 악령들이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여기나 싶어 조금 슬펐다. 모짜렐라는 그냥 이 이상 악령이랑 엮이고 싶지 않았다.
***
“못 보던 새를 데리고 왔구나.”
노인 릴리는 눈에 띄게 화색이 돌기 시작한 얼굴로 라느의 거리로 돌아온 일행을 반겼다. 여태껏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보이는 릴리의 모습에 희연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레텔의 물건은 잘 전해줬어요!”
언뜻 불안한 기색이 감돌던 릴리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떠올랐다. 정말로 희연에게 사격의 재능이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 이것 참… 보기와는 다른 재주꾼이었구먼 그래.”
릴리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빛바랜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NPC들은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는다고 했다. 희연은 지금도 그 바람이라는 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릴리가 눈을 뜰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면서 악령이의 머리 위에 앉은 검은 새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레텔의 흔적은 그레텔 본인이라 보기 힘들다곤 했지만 혹시나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검은 새는 붉은 눈을 빛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스템은 희연이 무덤덤한 검은 새의 반응에 실망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퀘스트의 성공을 알렸다.
[<끝나버린 작은 기쁨> 퀘스트 성공!]
보상 목록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때마침 바람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릴리 또한 눈을 떴다. 그녀는 조금 더 친근한 모습으로 일행을 대했다.
“자자, 들어가게나. 갓 구운 쿠키만큼 사람 입맛 돌게 하는 것도 없는 법이지.”
일행이 암시장으로 떠날 때까지도 희연의 사격 솜씨를 의심하고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릴리는 갓 구운 쿠키를 잔뜩 준비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에 희연은 포근한 방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릴리는 전에 그 자리에 일행을 다시 앉혔다.
“이런 밤에는 좀 달큼한 걸 먹어줘야 하는 법이지. 초콜릿을 통째로 넣은 아주 달달한 음료를 내주마.”
“…….”
단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희연은 릴리가 제 몫으로 주는 건 악령이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고, 악령이도 그것이 제 몫이란 걸 알았기에 눈을 빛냈다.
“?”
악령이와 같은 이유는 아니나 눈을 빛내는 존재는 하나 더 있었다. 둥근 접시에 가득 쌓인 쿠키 쪽으로 검은 새가 슬그머니 접근했다.
접시 주위만 서성거릴 뿐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희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쿠키 하나를 가져와 작게 부스러트렸다. 작게 쪼갠 쿠키를 얹은 손을 조심히 내미는 희연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은 새는 고민이라도 하듯 고개를 갸웃갸웃하다 쿠키 조각을 콕콕 쪼아먹었다. 그 모습에 됐다 싶어 희연의 얼굴은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성불 안 하는데?”
“하나로는 부족한가?”
희연은 고민하다 쿠키를 몇 개 더 잘게 부수었다. 하지만 검은 새는 그 이상 먹지 않고 멀쩡한 쿠키 쪽을 서성거릴 뿐이었다. 끝내는 작은 부리로 제 몸보다 커다란 쿠키를 물더니 파닥거리며 날아오르려 했다.
저러다 다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희연은 검은 새로부터 쿠키를 가져오려 했다. 그런 희연을 말린 것은 어느새 단내를 폴폴 풍기는 음료를 완성해 갖고 온 릴리였다.
“그냥 두지 그러냐. 제힘으로 꼭 갖고 가고 싶은가 본데. 정 마음에 걸리면 창문이나 열어줘. 그걸로 충분하니 말이다.”
“…….”
희연은 릴리의 말대로 했다. 검은 새는 한참을 날갯짓하다 지쳐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창틀을 넘는 데 성공했다.
밤이 되어 사위가 어두워지기도 했고 라느의 거리에는 길거리를 밝혀주는 가로등이 없어 밖이 캄캄했다. 아무리 밤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거리에서 창틀 넘어 사라진 검은 새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희연은 검은 새가 창틀을 넘어선 다음부터는 그 새가 제대로 날고 있는지, 추락하지는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갔는지 아직도 이 주위를 서성이는지도 말이다.
창문에서 눈을 못 떼는 희연의 모습에 릴리는 달디달아 씁쓸하기까지 한 음료를 입안으로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제 오라비 만나러 가겠다는 걸 우리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알고 계셨어요?”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 나이 먹으면 남들은 못 보는 걸 볼 수 있게 되는 법이라고 말이야. 작고 고운 게 딱 그레텔이구먼. 못 알아보는 게 멍청한 거 아니겠냐.”
릴리는 끌끌거리며 웃었다. 희연은 컵에 얼굴을 빠뜨리다시피 한 악령이를 바로 앉히며 생각했다.
스위니티 숲에서 그레텔의 악몽이 끝났을 때, 그레텔은 곧바로 헨젤에게로 달려들었다. 희연은 그것을 위협 내지는 그런 종류의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악령의 흔적은 최소한의 바람만 이루어주면 사라진다 했다. 검은 새의 바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헨젤….”
그레텔은 어떤 심정으로 헨젤을 찾는 걸까. 매번.
희연은 초콜릿이 묻은 악령이의 손만 만지작거렸고 그런 희연을 바라보던 릴리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깊이 생각하지 말아라. 뭘 선택하건 그건 그레텔의 마음이니까 말이야. 그 애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완벽히 알겠어. 이해 못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지.”
“…….”
“조금 이상해 보여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솔직히 말해 우리 눈에는 너희 이방인들도 이상해 보이니까 말이다.”
“…저희가요?”
“그래, 너희는 쓸데없는 것도 보상이랍시고 우리를 돕지. 각별하게도 도와줘. 그러면서 우리의 슬픔, 분노, 기쁨 이런 감정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어. 뿌듯함도 없고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
“…….”
“내가 아는 누구는 그래서 너희가 이방인이라고 하더구나. 우리의 세계와 너희의 세계는 결코 같지 않다고, 너희는… 언제든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야.”
“…….”
“가끔 너희를 보면 말이다, 도대체 누가 무슨 생각으로 너희와 우리를 만나게 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해. 너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우리의 세계로 너희들을 초대했나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리고 무섭지.”
“무섭다고요?”
“그래. 아주 커다란 변화를 앞둔 것만 같아 너희를 보면 우리는 조금 무섭다. 너희가 더 이상 이방인이라 불리지 않을 때쯤엔 이 땅이 아주 많이 변해 있을 것 같거든. 변화는 언제나 성큼 다가오는 법이지.”
조금은 알쏭달쏭한 말을 끝으로 릴리는 그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레텔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릴리가 새로 건네준 찻잔을 희연은 이번에는 악령이에게 넘기지 않고 그녀 본인이 마셨다.
생각보다 그리 달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