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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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메이커가 들었다면 메인 퀘스트의 실마리가 아닌가 의심했을 의뭉스러운 릴리의 말을 들은 다음 날부터 희연의 마음은 심란했다.
그건 비단 릴리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당초 뜻 모를 이야기에만 신경 쓰기엔 희연의 주변은 평화롭지 못했다.
수도에서 또 싸웠다간 언제 시드론의 왕에게 구금당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킹스메이커는 다음 만남의 장소로 제 홈그라운드인 마할라틴 성을 골랐다.
물론 외부인에게 괜히 내부를 보였다가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성 안이 아닌 성 앞뜰에서 만났다. 그 탓이라 해야 할지 원래라면 바람과 나뭇잎이 소곤거리는 소리만 존재해야 할 평화로운 숲의 고요함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오늘도 마리아는 그 선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말본새로 이세인을 핍박했다. 이세인은 그에 절대 굴하지 않았고 말이다.
이미 한 번 그 둘을 말리다 왕궁에 구금당했던 건에 대한 앙금이 남았던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웃으며 그 둘을 부추기면 부추겼지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나마 남은 이성인지 마리아와 이세인이 끝내 무기를 들지 않자 흥이 가셨다며 다른 쪽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희연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관심의 대상이 바로 백희준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백희준이 이곳에 있게 된 건가 하니, 함께 왕궁에 구금된 것을 계기로 그 역시 희연의 수업에 참관하기로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청산가리가 있었다면 다시 한번 길드전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두근두근 눈을 빛냈을 상황이었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원망을 받기 싫어 내심 백희준이 먼저 덤벼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백희준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 친구가 싸우든 말든, 킹스메이커가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든 말든 관심 없다는 듯 멀뚱히 서 있는 백희준을 보며 희연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아와 이세인만 해도 정신없는데 백희준과 킹스메이커까지 함께였다.
하나라도 미연에 방지해 보자 싶어 희연은 수시로 백희준에게 그만 가라고 눈치를 줬다. 그러나 남에게 무심하다 뿐이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면서 백희준은 꿋꿋하게 그런 희연의 신호를 모른 척했다.
오히려 그의 옆에 서 있던 존성대명이 더 잘 반응해 줄 정도였다.
방정맞다 싶을 정도로 손을 흔들며 제 존재감을 어필하는 존성대명의 모습에 희연은 결국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리 님, 몹쓸 악마의 속삭임에….”
“안 넘어가요.”
저번 일을 계기로 존성대명을 경계하게 된 뉴비 없지를 진정시킨 희연은 이 모임의 주최자라 할 수 있는 킹스메이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희준이 영 덤빌 생각이 없어 보여서인지 킹스메이커는 그새를 못 참고 제 낫과 백희준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백희준과의 1 대 1 싸움은 최대한 피한다고 한 그녀였지만 홈그라운드라는 배경, 그리고 저번 길드전이 아쉽게 끝난 탓인지 마음속 야망에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희연과 눈이 마주치자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자긴 그런 폭력적인 거 모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가련하게 굴었다. 그 모습에 속기엔 이미 희연은 킹스메이커를 너무 잘 알았다.
이쯤 되니 희연은 제 수업이란 건 일종에 핑계이고 사실 이 모임의 취지는 싸우고 싶은 이들의 만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오늘도 수업은 그른 거죠?”
희연의 물음에 뉴비 없지는 펄쩍 뛰며 부정했다.
“설마요! 오늘은 꼭! 꼭! 진행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리 님!”
“그렇게 걱정하는 건 아니고요….”
뉴비 없지는 자기만 믿으라 큰소리치고는 그대로 킹스메이커 쪽으로 달려갔다. 내내 사냥감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백희준을 힐끔거리던 킹스메이커의 시선이 드디어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어쩌지…. 자꾸 오늘도 수업이 취소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랄 걸 바라.”
제 바람을 묵살하는 매정한 모짜렐라의 반응에 희연은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흰 눈을 하는 것도 잠시, 모짜렐라의 머리 위에 당당히 자리 잡은 하얀 새를 보고는 금세 표정이 풀리고 말았다.
“봐도 봐도 예쁜 것 같아.”
“흥.”
새를 칭찬하는 희연의 말에 모짜렐라는 새침하게도 고개를 휙 돌렸다. 모짜렐라를 따라 그의 머리 위에 앉은 새도 고개를 돌렸다. 도도한 그 모습에 조금 웃다 희연은 모짜렐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새는 갑자기 어디서 난 거야? 어제만 해도 펫은 없다고 했잖아.”
못 보던 새를 머리에 이고 온 모짜렐라를 봤을 때부터 희연은 이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다만 언제 싸워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에 예쁜 새에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질문이 늦어졌다.
“…그냥 생겼어.”
“그냥?”
그냥 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기엔 새의 자태가 평범하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희연의 시선에 울컥한 모짜렐라는 격분해서 외쳤다.
“그 인간이 펫도 없냐는 눈빛으로 보잖아! 그걸 보고도 어떻게 넘기냐고!”
“…?”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최근에 모짜렐라가 이름만 들어도 격분하게 된 상대는 한 명밖에 없었기에 희연은 어렵지 않게 그 대상을 알 수 있었다. 마담이었다.
마담이 정말 모짜렐라를 그런 눈빛으로 보았는지는 둘째 치고 희연은 겨우 그런 이유로 펫을 구했다는 점에 놀랐다.
숲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싸움꾼 토끼 같은 종류도 아니고 이런 묘하게 신성해 보이는 새를 구하는 게 쉬운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희연의 생각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뒤늦게 소리친 것이 조금 부끄러워진 모짜렐라는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신전 퀘스트 깨면 줘. 너도 나중에 해.”
나름 귀한 정보를 준 모짜렐라에게는 미안하게도 희연은 아직 신전 퀘스트를 깰 레벨이 아니었다. 희연은 조금 멋쩍어하다 제 상황을 슬쩍 털어놓았다.
“45 찍으면 하러 갈게.”
희연의 말에 모짜렐라는 바로 반박했다.
“75.”
“…….”
모짜렐라의 레벨은 며칠 전만 해도 63이었다. 설마하니 마담의 눈빛 하나 때문에 레벨을 75까지 찍고 퀘스트를 깨러 간 건가 싶어져 희연은 놀라움을 표했다. 이건 보통 독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희연의 반응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모짜렐라는 팁이라며 퀘스트에 관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었다. 하는 방법, 지름길, 들고 가면 좋은 것, 기타 등등.
“와아.”
하지만 새를 보며 예쁘다 예쁘다 생각만 했을 뿐이지 희연은 에흐테도 있고 악령들도 둘이나 있는 상태에서 책임져야 할 존재를 섣불리 늘릴 생각은 없었다. 즉, 애당초 모짜렐라가 한 퀘스트를 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인물들에게 본의 아니게 계속 치이다 뭐처럼 자랑스럽게 굴 기회가 생긴 친구의 말을 끊을 생각도 없었기에 희연은 적당히 반응해주며 조금 들뜬 모짜렐라를 상대했다.
“새 이름은 뭐야?”
“…….”
“?”
“…크림.”
“크림? 이름 맞춘 거야? 크림치즈…?”
모짜렐라는 못 들은 척했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희연은 그 반응에 조금 더 놀리고 싶어져 괜스레 다른 이에게까지 질문했다.
“이름 맞춘 거 맞는 것 같죠?”
“…아, 네. 그런 것 같아요. 귀엽네요.”
한 박자 늦게 돌아온 답에 희연은 그저 웃었다. 희연에게 답한 상대는 여전히 대화에 집중 못 하고 백희준 쪽을 바라보기 바빴다.
“료한 님, 그렇게 본다고 해서 오빠가 뒤돌아보지는 않아요.”
참관자 백희준을 따라 마할라틴 숲에 오게 된 료한은 희연의 말에도 꿋꿋한 팬심을 굽히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료한을 본 모짜렐라는 왜 저러냐는 눈빛으로 희연을 돌아보았다. 희연은 설명하기 싫어 그냥 웃고 말았다.
료한은 백희준을 존경하고 모짜렐라도 말을 안 한다뿐이지 이세인을 존경했다. 플레이 방식이 똑같고 이전에 마리아가 아닌 이세인의 편을 들었던 것만 해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단서였다.
희연은 왜 제 주변 사람들은 죄다 어딘가 성격에 문제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존경하나 싶었다.
“실력만 보는 건가…?”
그렇다면 할 말이 없어지기는 했다. 성격 같은 면모도 보라 말을 얹기에는 당장 희연만 해도 킹스메이커와 함께하고 있었다.
희연이 조금 심란해하는 사이 이 게임의 최강자들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본 것인지 당장에라도 싸움이 터질 것 같던 분위기가 소강 되었다.
그러던 와중 킹스메이커가 마리아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 주위에 서 있는 이들의 표정이 오묘해져 희연은 조금 불길함을 느꼈다.
킹스메이커가 주도하고 주변 반응이 안 좋을 때마다 희연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조 없는 킹스메이커는 희연의 불길함을 언제나 배신하지 않았다.
금빛 물결이 일렁일 것 같은 자루를 킹스메이커가 넘기자마자 마리아는 환해진 얼굴로 희연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녀의 뒤편으로 백희준이 뭐라 하고 킹스메이커가 코웃음 치는 모습이 보였다.
마리아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은근슬쩍 크림을 자랑하던 모짜렐라도 백희준만 바라보던 료한도 바짝 긴장한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절대적인 공포의 대상이라도 마주 본 것 같은 그 모습에 희연도 그들을 따라 지레 겁을 먹었다. 겁에 질린 셋의 모습에도 마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시선은 그녀에겐 상당히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마리아의 눈에 비친 희연은 황금 알을 낳는 오리였다. 킹스메이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존재는 그녀에게도 제법 기꺼운 존재였기에 마리아의 말투는 저절로 친절해졌다.
“오리라고 했던가요?”
“네에….”
“말 까도 되죠? 내 동생이랑 동갑이란 말을 들었거든요.”
“동생… 이요?”
희연은 모짜렐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놀란 크림이 날개를 파닥거릴 정도였다.
혹여라도 자신을 마리아와 혈연관계로 엮어 버리면 가만 안 두겠다는 시선에 희연의 시선은 저절로 그 옆으로 돌아갔다.
“료한 님…?”
“…….”
“어…?”
드러난 진실에 희연이 놀랄 틈도 없이 마리아는 다음 폭탄을 던졌다.
“누가 내 동생인지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으니까 내 말에 집중할래?”
“네에….”
희연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마리아가 무서웠으므로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마리아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마저 말을 이었다.
“킹이랑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오리 친구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고민해 봤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실전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나왔지 뭐야. 친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실전이요…?”
무슨 실전을 말하는 건가 싶어 섣불리 답을 못하던 희연의 어깨를 모짜렐라와 료한 둘 모두 동시에 붙잡았다. 그들의 손길에는 다급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거절해…!”
“거절해요!”
바로 앞에 마리아가 있는 걸 잊은 것 같은 다급함이었다. 마리아는 그런 둘은 무시하고 희연만 바라보았다.
“거절할 거니? 정말?”
“…….”
“물론 협박하는 건 아니야.”
협박이 아니라면서 마리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손에 채찍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