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쨍그랑…!
“…?”
또다시 꼬마 별을 보겠구나 싶어 희연은 미리 각오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희연은 타격감 비슷한 것도 느끼지 못했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만 들었다.
일이 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희연은 슬쩍 눈을 떴다. 희연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꼬마 별의 반짝반짝이 아닌 시리고 하얀 냉기였다.
“얼음…?”
웬만한 사람의 키를 훨씬 웃도는 얼음 기둥이었다. 뜬금없이 땅에서 솟아난 얼음 기둥은 코앞에서 냉기를 내뿜었기에 이것이 가짜라든가 환상이라든가 하는 착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희연은 조심히 얼음 기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치에 채인 얼음 조각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직까지도 얼떨떨했기에 희연은 그것을 보며 눈만 깜박거렸다.
손끝이 시린 것도 사실이었고 안 죽은 것도 사실이었다. 희연은 일단 가장 중요한 사실만 떠올리며 기둥 너머로 걸어 나왔다. 기둥에 가려진 뒤쪽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희연은 금세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희연에게 날아오던 마리아의 채찍은 도중 백희준이 던진 검에 의해 땅에 박히게 되었다. 그러나 검으로 채찍을 잡았다곤 해도 길이가 긴 만큼 공격을 완전히 저지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백희준은 마리아의 채찍을 잡았지만, 희연에게 향하던 끄트머리까지는 잡아채지 못했다. 검에서 눈을 뗀 희연은 얼음 기둥을 훑어보았다.
매끈한 겉면을 잘 보니 그리 크지 않게, 깊고 얇게 패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딱 채찍의 끝자락에 패였다고 한다면 알맞을 흔적이었다.
그리고 마할라틴 성의 거주민 중 이런 얼음을 쓰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닉 님…?”
먀앗…!
마치 그 이름을 부르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익숙한 아기 드래곤의 울음소리가 위에서 울려 퍼졌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새의 형상에 올라탄 닉과 얼음을 불러낸 당사자일 루로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희연은 뒤늦게야 긴장이 풀려 얼음에 몸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레벨을 지켜냈다는 사실이 그녀는 조금 감격스러웠다.
등 뒤에서 스며드는 냉기가 내내 마리아의 공격을 피해 도망 다니던 희연의 열을 식혀주었다.
희연이 몸 전체를 냉찜질하던 그 잠깐 사이 주위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뉴비 없지가 눈물을 흩뿌리며 희연에게 가장 먼저 달려왔다.
“오리 님…!”
냉기 덕에 침착해진 희연은 차분하게 제 상태를 이야기했다.
“저 멀쩡해요.”
“오리 니이이이임…!”
뉴비 없지는 울부짖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희연은 주위를 살폈다. 이번 것은 정말 실수였는지 놀라 굳은 마리아와 표정이 굳은 킹스메이커가 가장 먼저 눈에 보였다.
검을 회수하는 백희준까지 확인한 희연은 다리를 콩콩 두들긴 뒤 애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희연의 머리 위로 하얀빛이 쏟아져 내렸다. 모짜렐라와 이세인이 쏟아부은 힐 스킬이었다.
차마 그 눈부시고 성스러운 빛을 뚫고 들어올 용기는 없어 희연의 주위만 서성거리던 악령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희연은 아직은 비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빛 사이를 빠져나온 뒤 악령이를 꼭 끌어안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무사 귀환을 알렸다.
악령이는 서러워 죽겠다는 듯이 외쳤다.
“또 죽을 뻔했어!”
“그래도 이번엔 안 죽었어.”
희연의 대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악령이는 솜 주먹으로 투닥투닥 가슴팍을 때렸다. 골난 인형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던 희연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마리아였다.
“…이번 건 진짜 실수야.”
마리아는 희연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드센 자존심 탓에 차마 사과는 못 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료한은 인상을 찡그렸고 킹스메이커는 손을 올렸다. 마리아의 팔을 꽉 잡은 킹스메이커는 생긋생긋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
“실수라고!”
“이젠 실수라고 말만 하면 다 되는 나이 아니잖아 너.”
“겨우 게임에서 한 번 죽일 뻔한 것 같고…!”
“한 번은 아니지. 이미 네 번이나 죽였으니까.”
“…….”
마리아는 분한 듯 씩씩거렸지만 킹스메이커에게 그 이상 반항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참 꿋꿋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그런 마리아를 대신해 희연에게 사과를 한 것은 료한이었다.
“미안해요….”
“아뇨, 료한 님이 사과할 일은 아닌데요 뭘….”
“그래도 저희 누나가….”
땅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심각해진 료한의 모습에 희연은 일단 그를 백희준 쪽으로 밀어 넣었다. 백희준이라면 알아서 인과 관계를 따지며 료한이 죄가 없다는 걸 말해 줄 거란 걸 알아서였다.
료한을 해결한 희연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아직까지도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중인 닉을 바라보았다.
빛으로 이루어진 새의 형상은 형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바람같이 이리저리 흐트러지곤 했다. 그 모습이 꼭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 같아 닉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놀란 루로를 달래느라 곧바로 내려오지 못했던 것인지 닉은 팔에 코알라처럼 매달린 루로를 조금 곤란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희연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닉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무척이나 느릿느릿 땅으로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아가 요정 강림이라는 둥 헛소리를 하다 킹스메이커에게 사과나 하라며 혼이 났다.
희연은 내심 마리아의 말에 공감했지만 요정 닉이 요정 소리 듣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요정 강림을 마친 닉에게 희연은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다. 타이밍 좋게 닉이 얼음 기둥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희연은 정말로 오늘 레벨 다운이라는 슬픈 경험을 할 뻔했다.
그러나 희연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작은 인형이 먼저 큰 소리로 외쳤다.
“헬르벨!”
“헬르벨?”
“헬르벨! 헬르벨!”
악령이는 희연의 품에 안긴 상태로 바동거리면서 동시에 손을 들어 닉을 가리켰다.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희연은 왜 그러는 건가 싶어 닉을 보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닉은 악령이의 외침이 곤란하다는 듯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루로 또한 마치 악령이의 말을 경계하듯 언제나 동글동글했던 눈에 힘을 주는 것도 모자라 꼬리까지 닉의 팔에 말며 더더욱 그에게 밀착했다.
하지만 도리어 루로의 그런 행동은 모두의 시선을 끌게 만들 뿐이었다. 희연도 다른 이들도 모두 소매 밑으로 드러난 닉의 손이 새까맣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언뜻 보면 재가 묻은 것처럼 얼룩덜룩해진 손을 보며 희연은 악령이가 왜 닉을 보며 헬르벨을 찾았는지 깨달았다. 현재 닉의 손 상태가 자미엘의 독에 당했을 당시의 헬르벨의 손과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희연은 자연스레 표정이 굳었고 그건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희연이라는 새로운 뉴비를 애지중지 끼우고 다니느라 조금 덜 신경 쓰는 것일 뿐 닉에게도 만만치 않은 관심을 표하는 킹스메이커는 웃음기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억울하다 소리 지르던 마리아도 그런 킹스메이커의 얼굴에 얌전한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될 정도였다. 얌전해진 마리아를 풀어 준 킹스메이커는 성큼성큼 닉에게로 향했다.
“길마님 그거 뭐예요?”
“…별거 아니에요.”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 없다는 거 알면서 왜 그러지 우리 길마님.”
“…….”
닉은 곤란하다는 듯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킹스메이커는 상당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알아내면 되죠 뭐,”
상대가 꺼린다면 가끔은 모른 척도 해주어야 하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애초에 닉도 그녀에게서 그런 미덕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담담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킹스메이커는 닉에게로 가 그의 소매를 걷어 상태를 확인했다. 닉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제 손을 그녀에게 맡겼다.
“저주네요. 상태 이상도 동반해요?”
“아뇨….”
“효과는요?”
“그쪽 팔의 움직임이 더뎌진 거 외에는 없어요.”
“그야 당연히 통각 수치 내렸으니까 더딘 것밖에 못 느끼는 거겠죠? 이 상태론 리라 연주도 할 수 없으니 퀘스트도 통과 못 했겠네요.”
이리저리 닉의 팔을 눌러보고 살펴본 끝에 진단을 마친 킹스메이커는 몸을 틀다 희연과 눈이 마주쳤다.
희연은 여차할 때 에흐테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닉을 진찰하는 킹스메이커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희연의 얼굴은 유니콘의 뿔 생각에 고뇌에 차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방긋 웃음을 지어주었다.
에흐테의 뿔이 필요했던 당시야 있는 힐러라곤 희연밖에 없었다지만 지금은 만렙 힐러만 둘인 상황이었다. 굳이 희연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유니콘의 뿔을 갈 필요가 없었다.
“야. 힐 노예. 이리로 와 봐.”
킹스메이커에게 중요한 건 희연의 마음이지 이세인의 마음은 아니었다. 힐 셔틀에서 노예로 강등된 이세인의 입에서는 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힐 노예라니…. 무례하네요.”
그러나 이세인의 마음은 안 중요한 킹스메이커에게 이세인의 평가 따위가 중요할 리가 없었다. 저를 비난하는 말 따윈 가뿐하게 무시한 킹스메이커는 닉의 팔을 치료할 것을 명령했다.
이세인은 마음 같아선 노예 취급이나 하는 킹스메이커에게 천벌이나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제 목숨 귀한 것을 알았고 백희준이 킹스메이커의 말에 아무 말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또한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결국 한숨만 내쉬었다.
나름대로 또다시 에흐테의 뿔을 갈 각오를 하던 희연은 돌아가는 상황에 처음으로 이세인이 이 자리에 있는 점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후 몇 번 닉에게 스킬을 사용하던 이세인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는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저주라서 그런가, 스킬이 효과가 없네요.”
“쯧, 그렇게 평소에 잘난 척하더니.”
“누가 잘난 척을 하고 다녔다고….”
이세인이 항변했지만 킹스메이커는 볼일 없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마리아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린 희연도 마리아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헬르벨을 치료할 당시 킹스메이커는 교국의 성녀라도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교국 위헬브. 신 미르그의 신앙이 모든 것의 중심인 나라. 그리고 그곳에서 성녀의 칭호를 받은 건….
“마리아.”
“흥….”
“네 실수를 만회할 기회야.”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은 냉큼 말을 얹었다.
“닉 님 치료해 주시면 아까 전 실수는 없던 일로 할게요!”
본인 입으로도 실수라 인정한 일이라서 그런 것인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리아의 얼굴에 변화가 일었다.
원래라면 그런 마리아의 반응이 무서워서라도 희연은 입을 다물고 얌전히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에흐테의 뿔과 닉의 손과 루로의 눈물이 걸린 이상 마리아의 확답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고민했고 희연은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서라도 입을 뗄 만도 하건만 마리아는 닉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섣불리 말을 내뱉지 않았다.
언제나 거침없는 모습만 보여주던 마리아의 색다른 모습에 희연은 그 치료라는 게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건가 싶었다. 그런 희연의 예상은 정답에 가까웠다.
“쿨타임 일 주일짜리인데….”
마리아는 정말로 겨우 이런 일에 제 스킬을 써야 하냐면서 괴로워했다. 킹스메이커는 마치 고뇌하는 성녀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악마처럼 소곤거렸다.
“어차피 잘 쓰지도 않는 스킬이잖아. 이거 한 번이면 남한테 사과 안 해도 되는데? 내가 보복도 안 할 텐데? 오리 님도 널 용서해 줄 텐데.?
“…시끄러워! 겨우 그런 것들 때문에 나한테 불리한 일을 할 것 같아!”
“우리 마리아는 언제쯤 철이 들까.”
킹스메이커가 마리아를 설득하는 사이 희연은 닉에게로 가 그의 팔 상태를 확인했다. 정 심하다 싶으면 마리아 대신 에흐테에게 뿔 가루를 내어줄 수 있는지 물어볼 심산이었다.
에흐테는 영리하면서도 동시에 닉을 무척이나 좋아하니 부탁한다면 뿔 가루를 조금 내어 줄 가능성이 높았다.
“많이 아프신 거면 에흐테를….”
그런 희연의 속내를 진즉 눈치챈 닉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프지는 않아요.”
“…그거 통각 수치 때문에 안 아픈 거 아니에요?”
하지만 매일같이 통각 수치를 내리고 다니느라 고통과는 먼 시간을 보낸 희연은 안 아프다는 닉의 말에 불신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