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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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새는 무성한 가지를 요리조리 피하며 날았다. 닉의 꽃사슴과는 비교 못 할 튼튼함으로 무장한 료한의 순록 또한 거침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순록이 한 번 발길질을 할 때면 웬만한 잔가지는 모두 뚝뚝 부러지며 길을 내어주었다.
언뜻 보면 바로 뒤에 맹수라도 뒤쫓아 오는 게 아닌가 싶은 도망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에흐테와는 전혀 다른 거친 승차감에 희연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료한의 옷자락을 꽉 잡으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그들이 가는 방향이 아닌 곳들에 있는 잔가지를 저격했다.
조금이라도 마리아에게 그들의 행선지를 가리기 위한 작은 속임수였다.
“일단 최대한 거리를 벌릴 거니까 잘 따라와! <천사의 날개깃>!”
[천사의 날개깃! 일정 시간 동안 공격 속도, 이동 속도가 증가합니다.]
모짜렐라의 스킬에 순록의 다리 위로 하얀 깃털이 파르륵 날아올랐다. 훨씬 빨라진 속도에 희연은 총을 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료한에게 바짝 매달려야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번 평균 레벨 71 파티의 리더 역할은 모짜렐라가 맡았다.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그러면서 모짜렐라는 료한에겐 하던 존댓말도 안 하게 되었는데, 일부러라기보단 희연에겐 반말, 료한에겐 존댓말을 번갈아 사용하다 혼용된 결과물이라고 봐야 했다.
그 예로 료한에게만 말할 때면 원래 하던 대로 존댓말이 가끔 튀어나오기도 했다. 료한이 이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에 모짜렐라는 본인이 그런다는 것을 인지하질 못 했다.
이런 식으로 모짜렐라가 료한하고도 친해지면 좋을 거라고 생각한 희연이 말을 일부러 안 해준 탓도 있었다.
하늘색 뒤통수를 바라보다 희연은 시선을 비껴 주위의 풍경을 보았다. 원래라면 에흐테를 이끌고 나가느라 주변을 살필 여유 따윈 없었을 것이다.
비록 에흐테를 이번 실전에서 꺼내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직접 펫을 이끄는 게 아닌 만큼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일전에도 혼자 숲에 들어온 적 있던 희연이지만 그때는 몬스터를 잡고 다니느라 바빠 숲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만 제대로 보지 않던 그때에도, 마할라틴 성에서 숲을 바라볼 때도, 지금도, 공통적으로 생각한 것은 있었다. 무성한 숲.
마할라틴 숲은 무서울 정도로 무성했다. 수관기피 사이로 스며드는 볕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괜히 악령이가 마할라틴 성에만 오면 흑마법사의 저주받은 성, 저주받은 숲 타령을 하는 게 아니었다.
저번의 방문과 지금의 방문 중 유일한 다른 점은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키메라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정도였다.
대신, 새와 다람쥐, 토끼 같은 작은 소동물들이 이곳저곳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땅을 울리며 달리는 순록의 등장에 야생 동물은 진즉 도망갔다. 즉, 사람 구경하느라 바쁜 저 소동물들은 모두 닉의 눈이라는 의미였다.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닉의 흔적을 확인한 희연은 다시 앞을 보며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숲의 경계선은커녕 마할라틴 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들어섰다.
경로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마리아가 이곳까지 쫓아온다면 그건 이 이상 더 깊숙이 들어간들 똑같다는 의미이니 괜한 힘을 더 뺄 필요는 없었다.
희연뿐만 아니라 모짜렐라와 료한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크림은 날갯짓을, 순록은 달리던 것을 멈추었다.
커다란 나무의 둥치에 둘러앉은 그들은 각자의 펫을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려보낸 뒤 보스 마리아에게 유효타를 먹이는 법에 대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이중 마리아의 전투 스타일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모짜렐라 하나뿐이었고, 그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선 공략법과 정보를 숙지해야 함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모짜렐라는 먼저 아무것도 모를 희연과 료한에게 마리아의 정보를 퍼트렸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리아는 교국 위헬브의 성녀야. 아무리 스킬 안 쓴다고 해도 기본 패시브, 칭호 패시브부터가 우리랑 다르다는 뜻이야. 미르그에서 성녀 칭호 얻을 정도로 버텼다는 건 경험도 다를 거라는 의미고.”
“그렇지….”
굳이 스킬과 스텟뿐만이 아니더라도 마리아는 기백부터가 남다른 사람이었다. 희연은 여러 의미로 모짜렐라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벤토리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모짜렐라는 시간을 확인한 뒤 마저 말을 이었다.
“10분 지났으니까 이제 슬슬 우리를 추적하기 시작했을 거야. 그 인간 성격상 절대 안 봐주고 한 번에 우릴 끝장낼 거고.”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마리아가 놀리기라도 하는 못된 심보로 시간을 질질 끈다는 선택지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짧은 몇 번의 만남으로도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희연은 몇 개 남지 않은 악의의 응집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고심했다.
그나마 고레벨을 상대로 가장 효과 좋았던 위협이 파티 걸고 악의의 응집 쓰고 독독 거는 연계밖에 없어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다른 두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 싸움은 마리아를 한 대만 때리면 성공인 게임이었다.
모짜렐라도 그 점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무리한 장기전을 선택하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레벨, 스텟, 경험, 아이템 모두 부족한 그들이 더 불리해지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리아와 나름 다수의 실전 경험을 보내고, 마리아가 잔혹하게 몬스터를 때려잡는 걸 보기도 하며, 마리아가 PVP를 할 시 얼마나 인성질을 하는지 보기도 했던 모짜렐라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 삼아 나름의 결론을 내놓았다.
“우리가 마리아한테 한 대라도 맞추고 싶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건 근접전으로 접근하는 거야.”
“근접…?”
희연은 모짜렐라의 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모짜렐라를 안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장이 사라진 케이아일 없는 케이아일 파티 때도 훌륭하게 파티장의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힐러 둘에 원딜 하나 있는 상황에 근접전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평범하지 못한 시간을 보낸 것이 문제지, 어쨌든 희연은 보편적인 지식을 배워왔다. 그중 이런 조합으로 근접전을 시도하라는 소리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모짜렐라는 영 긍정적이지 못한 희연의 반응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근접전으로 접근하는 게 맞아. 어쭙잖은 함정 같은 걸 설치한다 해도 마리아는 순수 힘체민 스텟으로 그걸 다 격파하고 나타날 인간이야.”
“그럴 것 같긴 하지….”
“원거리전으로 하면 우리가 날린 스킬이 마리아한테 닿기도 전에 우리 목이 땅에 떨어질 거고.”
희연은 제 목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중에 마리아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살아남을 만한 체력이랑 방어력 가진 사람은 없어. 넌 말할 것도 없고, 료한 님이 그나마 우리 중에 레벨이 제일 높다고 해도 원딜이잖아. 마리아한테 덤벼 볼 정도로 높은 건 또 아니고.”
“그렇지….”
악령이에게 무시받는 말랑말랑한 방어력을 가진 모짜렐라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말이다.
“근데 지금 우린 목숨이 열 개야.”
“…….”
“열 개면 솔직히 말해서 근접전 해볼 만한 것 같지 않냐? 그리고 너도 해 봐서 알잖아. 채찍의 약점이 뭔지.”
“응….”
모짜렐라의 말대로, 우연이었고 제 목숨이 걸렸던 일이긴 하지만 희연은 채찍의 약점이 무엇인지 하나는 제대로 배웠다.
마리아가 맞는 입장이 되어야 더 잘 집중된다고 포악하게 채찍을 휘두르다 실수했을 때, 킹스메이커까지 난입했음에도 마리아는 채찍의 경로를 바꾸는 것을 실패했다.
린치가 긴 무기들의 공통된 단점이었다. 한 번 공격에 실패하거나 하면 되돌리기 힘들어 빈 곳이 생긴다는 것.
물론 근접전을 시도했다가 마리아가 채찍을 안 든 손으로 주먹질이라도 한다면 막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희연은 그들에게 여분의 목숨이 열 개나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모짜렐라의 말마따나 열 대 맞는 동안 한 대를 못 때리겠냐 싶었던 것이다.
근접전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조금 밝아지던 희연은 여전히 어둑한 료한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곤 들뜨려던 어깨를 다시 내렸다.
벌써부터 신나라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료한은 마리아의 동생이었다. 포악한 마리아의 모습만 아는 희연과 길드장인 마리아의 모습을 봐온 모짜렐라는 모르는 정보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근접전으로 가면 우리만 맞고 끝날 수도 있어요.”
“?”
“누나 취미가… 복싱이에요. 잘해요.”
“…왜요?”
희연은 스스로도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인지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서… 운동을 보내면 조금 얌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어릴 때부터 보내서….”
“…….”
“체력이랑 반사 신경만 발달했지만요.”
희연은 할 말을 잃었고 모짜렐라는 분개하였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완벽할 필요가 없는데 마리아는 전투 분야로 모든 게 너무 잘 발달되며 자라왔다.
“그 인간은 진짜…!”
모짜렐라는 뒤늦게 알게 된 정보 탓에 기껏 세운 계획이 무용지물이 될 것 같자 발을 구르는 등의 행동을 보이며 제 심정을 드러냈다.
애초에 모짜렐라는 마리아가 근접전까지 할 정도로 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이와 같은 정보에 접근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절망한 것은 희연 또한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그녀는 애써 좋은 쪽으로 지금의 상황을 해석하고자 했다. 일단, 아예 이런 정보를 모르고 덤볐다가 몰살 엔딩을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그들에겐 희망이 있었다!
마리아의 완벽함에 분노하던 모짜렐라도 조장의 책임감인지 뭔지 모를 힘으로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들은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일단 최대한 근접전은 피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뛰어난 신체 능력과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반사 신경과 실전 경험이 준비된 마리아의 주먹질을 버티면서 한 대만 반격할 수 있는 힘캐가 이 중에 하나라도 있다면 모를까, 만용을 부릴 수는 없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없나 곰곰이 생각해보던 희연은 손끝에 닿는 나무뿌리에 이전에 당했던 것을 떠올렸다. 당해봤기에 더 기억에 남던, 모짜렐라의 발 묶기 스킬이었다.
희연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모짜렐라에게 물어보았다.
“그때 그거 있잖아, 발 묶고 못 움직이게 하던 스킬!”
“CC기?”
“…아마도 그거!”
“그래, CC기가 뭔지는 안 배웠다 이거지.”
“비꼬지 말고…. 아무튼 그걸로 발 묶어서 어떻게 공격할 수 있지 않을까?”
모짜렐라는 희연의 의견을 고려해보는 듯하더니 이어 고개를 저었다.
“CC기 걸어 봤자야. 너도 잡혔을 때 스킬 잘만 썼잖아. 애초에 마리아는 발 좀 묶인다고 채찍질 못 하는 인간이 아니야.”
“그건 그렇지….”
반려된 의견에 조금 시무룩해졌던 희연은 목에 걸어두었던 총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물어보았다.
“…발도 묶인 상태에서 눈도 보이지 않으면?”
“눈? 나 암흑 디버프 없어.”
“나 있어!”
“있다고?”
희연이 모짜렐라의 의문을 답해주기도 전, 그녀와 같은 총기류 사용자인 료한이 먼저 반대표를 던졌다.
“예광탄 쓰려는 생각이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못 보게 되는 건 똑같은데, 같은 조건이면 우리가 훨씬 불리해요.”
료한의 걱정을 희연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희연도 도중 자신에게 예광탄 외에도 남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희연은 인벤토리를 열어 홀로그램이 일렁이는 것 같은 총알을 하나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전, 킹스메이커가 반쯤 억지를 부리며 챙겨줬던 총탄이었다.
총이랑은 거리가 먼 모짜렐라는 당연히 알아보지 못했고 료한 또한 긴가민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희연은 제품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킹스메이커의 이름을 거론했다.
“이거 킹 님이 시야 교란용이라고 했으니까 효과는 확실할 거예요. 이거까지 쓰고… 씨시?”
“CC.”
“응, 그거 씨시. 그거까지 쓰면 멀리서 한 대는 맞출 수 있지 않을까? 나랑 료한 님이 저격 실패해도 너는 지팡이니까 한 대는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희연은 미적지근한 료한의 반응에 말끝을 흐렸다. 료한은 살면서 마리아에게 당한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인지 웬만한 계획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지금 료한은 아무리 좋아 보이는 계획을 내놔도 모두 안 좋은 쪽으로만 상상하는 중이었다. 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료한의 그런, 걱정이 많을 때면 조금 부정적이게 생각하는 면모를 이전에 땃쥐 미에게 쫓기며 알게 된 희연은 시무룩해졌던 것도 잠시, 굴하지 않고 제 의견을 조금 더 밀어붙였다.
아직까지 모짜렐라의 입에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연은 조장의 반대표에는 대부분 따르는 편이었지만 조장의 암묵적 허락이 있을 때는 열심히 의견을 제시하는 편이었다.
“저 은신 스킬도 쓸 줄 알아요! 발 묶고 시야 교란하고 은신까지 쓰면 성공할 확률도 더 높아지잖아요. 그리고 실패해도 어차피 저희 목숨 열 개예요!”
마지막이 이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기회가 열 번이라는 건 다소 무모해 보이는 계획도 도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믿는 구석이 있어도 마리아를 상대로 근접전은 안 되지만 말이다.
한쪽은 나름 밀어붙이고 한쪽은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티의 조장 모짜렐라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러면 지금 계획은 플랜 A로 하고,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계획도 세우면 되잖아. 위험한 거 하나, 안전한 거 하나.”
“그러면 되겠….”
“어차피 상대가 마리아면 다 위험해지겠지만.”
“…….”
“안전한 계획을 짜겠다는 건 불 속에 안전하게 뛰어들겠다는 소리랑 똑같은 거야.”
모짜렐라의 잔혹한 비유에 고뇌하던 희연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플랜 C까지 세울까?”
안전하게 불 속에서 뛰노는 건 안 되어도 계획이 많으면 살아나올 수는 있을 거란 바람이 담긴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