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잘근잘근 입술을 짓씹던 모짜렐라는 이대론 포기 못 한다는 독기 가득한 눈을 했다. 그 모습에 희연도 포기하지 말자 말하려던 순간, 그녀는 입을 떼는 것이 아닌 손을 뻗어 모짜렐라의 멱살을 붙잡았다.
“으와악…!”
희연은 소리를 지르며 모짜렐라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희연과 데굴데굴 구른 모짜렐라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쨍그랑…!
“…미친.”
방금까지 모짜렐라가 앉아 있던 자리에 채찍이 내리꽂혔다. 은화 하나가 더 깨지는 것을 본 모짜렐라는 거친 말을 내뱉으며 저를 붙잡은 희연의 손을 꼭 잡았다. 공포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피했으나 모짜렐라와 함께 은화 하나를 더 깨먹은 희연도 그리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덜덜 떨며 주저앉은 두 힐러를 챙겨 든 것은 그나마 이 중 가장 힘 스텟이 좋은 료한이었다. 그는 두 사람의 팔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료한에게 끌려가면서 뒤를 보게 된 희연은 채찍을 휘두르며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마리아를 발견했다.
“바, 바, 바로 쫓아오는데?”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바로 뒤에 맹수가 쫓아오는데 제정신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반응도 아니었다.
희연과 마찬가지로 앞길 시야는 료한에게 떠넘긴 모짜렐라도 마리아를 보았다. 짧은 순간 조장 모짜렐라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이성적 판단은 이딴 내기 지금이라도 집어치우라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말 안 듣는 치즈치즈 하며 괴롭히는 마리아 정도는 제법 무시할 줄 알았던 그에게 이 내기는 그리 필요치 않은 거였다. 그러니 이 고생 따윈 할 필요 없었다. 정말로 말이다.
“아오, 삣…!”
모짜렐라는 료한의 손을 뿌리쳤다. 희연도 료한으로부터 떨어트렸다. 놀란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본 그는 각자를 다른 곳으로 밀쳐내며 말했다.
“어차피 도망 못 가! 계획대로 가!”
계획대로라 함은, 희연이 주도적으로 세웠던 플랜 A를 뜻하는 거였다.
“지금?”
마리아가 바로 뒤까지 쫓아온 마당에 그게 가능하냐는 의미가 함축된 희연의 질문에 모짜렐라는 재촉으로 답을 대신했다.
“총 들어!”
“<탄환 변경>!”
[탄환이 변경됩니다. 일반 탄환 >> 교란의 춤]
희연의 총 위로 홀로그램 같은 빛이 일렁임과 동시에 료한도 총을 들었다. 료한의 총에는 소음기가 부착되어 있었기에 희연의 것처럼 큰 소리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시야 교란용 탄환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마리아의 발부터 묶고 봐야 했기에 모짜렐라는 서둘러 나무 위로 올라탔다. 모짜렐라는 희연이나 료한처럼 저격 관련 패시브가 없었기에 직접 스킬 범위를 설정해야 했다.
상대가 잘 보이는 장소라는 건 반대로 상대도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음을 뜻했다. 위험에 노출된 모짜렐라가 스킬을 사용하기 전까진 밑에 있는 두 사람이 마리아를 저지해야 했다.
희연은 일반 탄환인 든 총으로 료한과 함께 마리아를 겨냥했다.
료한의 함정 때부터 드러난 사실이지만, 마리아는 유연성은 물론이고 힐러답지 않게 몸놀림이 날랬다. 채찍만으론 연사하는 총알을 모두 막아낼 수 없다는 걸 아는 마리아는 지형지물을 적절히 사용하며 점차 거리를 좁혀왔다.
희연은 마리아가 나무 뒤로 숨거나 할 때면 저격을 할 수가 없었고, 끊임없이 연사하는 만큼 료한의 자세는 점차 흐트러졌다.
반면 비까지 맞아 정신이 확 깬 마리아는 아스팔트도 뚫는 잡초와도 같은 강인함을 내세우며 방긋 웃고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어서 아주 무서웠다.
마음이 급해진 희연은 인벤토리를 열어 뭐라도 던질 만한 게 없나 뒤져 본 끝에 마폭탄을 발견했다. 붉은 보석과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희연은 그것을 무더기로 꺼내 료한에게 건넸다.
“?”
“던져요!”
총을 들며 외치는 희연의 말에 료한은 머뭇거릴 틈도 없이 그것을 마리아에게 던졌다.
멀리서 보아도 마폭탄인 물건의 등장에 마리아는 너 잘 걸렸다 하는 표정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으로 마폭탄을 휘감아 희연이 있는 쪽으로 던질 심산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마리아의 반격을 예상한 희연은 마폭탄에 채찍이 휘감기기 전,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쾅-!
코앞에서 터진 마폭탄에 마리아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희연은 료한을 재촉했다.
“계속 던져요!”
료한의 평소 저격 실력은 비단 패시브 스킬의 힘만이 아닌 나름 재능의 영역이었는지 그는 마폭탄을 하나같이 마리아가 있는 방향으로 던지는 데 성공했다.
희연은 마리아가 마폭탄을 붙잡을 틈을 주지 않았다. 나름 수세에 몰린 마리아는 주춤거렸고, 사방으로 떨어지고 폭발하는 마폭탄에 발도 묶였다.
“<떡갈나무의 분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짜렐라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땅을 뚫고 나오기 시작한 하얀 나무뿌리를 본 마리아는 들고 있던 채찍을 조금 늘어트렸다.
설마 포기하려는 건가?
희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심을 품으며 총을 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인간이었다면 마리아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발 한쪽이 묶인 상태로 몸을 틀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채찍이 그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마리아가 채찍을 휘두를 때면 그 주위의 공기가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나곤 했다. 그리고 지금, 희연은 마리아가 채찍으로 정말 공기를 가르는 게 가능하다는 걸 목격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 나풀거리던 재와 불길이 채찍에 휘감기더니 일제히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저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따져 볼 틈 따윈 없었다.
튼튼한 줄기를 자랑하던 마할라틴 표 나무의 잎사귀가 무자비한 불길과 바람에 맥을 못 추렸다.
희연과 료한은 나무에 매달려 나뭇잎과 같은 꼴이 되지 않도록 버텼고, 나무 위에 앉아 있느라 조금 더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모짜렐라는 기어이 은화가 하나 더 깨졌다.
흩날리는 잿가루에 희연의 시야는 눈물로 얼룩졌다. 그러나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하더라도 시스템 창의 경고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상태 이상 ‘화상’에 걸렸습니다. 초당 10의 대미지를 입습니다.]
12초의 설움을 기억하는 희연은 곧바로 총을 들어 올렸다.
“<등불의 천사>!”
“<등불의 천사>!”
모짜렐라도 희연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다행히 이번 마리아의 반격은 나무 뒤에 숨는 데 성공한 희연과 료한의 은화가 깨질 정도의 위협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아의 보복이란, 결코 이렇게 가벼이 끝날 게 아니었다.
두 개의 날개 달린 등불이 그들의 목숨을 연명해주는 사이 희연은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눈가에 잿가루를 씻어냈다. 료한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아직 빨갛기는 했으나 언제나 고통과는 먼 삶을 위해 통각 수치를 절반 이상으로 올려 본 적 없던 희연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희연과 료한은 나무에 기댄 채 주위를 둘러보며 마리아를 찾았다. 마리아가 만들어낸 바람이 워낙 강해서인지 불은 모두 꺼졌지만 매캐하고 뿌연 연기는 잿가루와 함께 아직까지 숲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무성한 마할라틴 숲의 나무까지 공기의 순환을 막는 중이라 환기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선 상대에게 먼저 위치를 발각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불리한지 앞서 이세인이 말해주었기에 희연은 마리아를 찾는 데 애를 썼다.
그나마 희연은 료한과 붙어 있는 상태였지만 나무 위에 있던 모짜렐라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등불이 하나 더 떠오르지 않았다면 희연은 모짜렐라가 기절 같은 상태 이상에 걸린 거라 여겼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 이름을 불러 찾고 싶었지만 말이라도 했다가 마리아에게 걸릴까 애써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희연은 문득 든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연기로 모든 게 회색으로 물든 공간에서 희연과 모짜렐라가 만들어낸 등불은 반짝반짝 여린 빛을 흘려내고 있었다.
희연도 이 빛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레텔의 악몽에서 눈 내리는 설원을 날아다니는 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써먹었다.
그러니 그녀도 모를 수가 없는 거였다. 지금, 그들이 대놓고 마리아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경험의 부족이 만들어낸 실수였다.
설마 이걸 노리고 일부러 화상 대미지를 입힌 건가?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진 희연은 다급하게 외쳤다.
“피해…!”
이미 위치는 발각되었다. 여기서 말을 하건 안 하건 마리아에게는 그리 다를 게 없었다. 희연은 모짜렐라가 어서 빨리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를 바랐지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은화가 깨지는 소리에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로써 모짜렐라는 총 네 개의 은화가 깨졌다. 메인 힐러의 은화만 4개가 깨졌다는 건 이 파티에 망조가 들었음을 뜻하는 것만 같아 희연은 속이 쓰렸다.
희연의 외침과 은화가 깨지는 소리에 마리아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은 료한도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불리한 건 실상 총을 드는 두 사람이었다.
료한은 다급해진 상황에 소음기가 부착된 총을 사방으로 연사했다. 이 중 하나만이라도 맞길 바라는 그의 심정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윽…!”
“료한 님!”
연기를 뚫고 뱀처럼 달려든 채찍이 료한을 휘감아 어딘가로 집어 던졌다. 희연은 은화가 하나 더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방금의 공격으로 그나마 목숨을 하나만 잃었던 료한도 희연과 은화 개수가 같아졌다.
끝내 희연은 혼자 남게 되었다. 그나마 연기가 조금 빠져 주위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사부작사부작, 풀잎 밟히는 소리만 들리고 정작 마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희연은 나무에 등을 바짝 붙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일부러 겁주려고 그러는 게 분명하게도, 마리아는 곧바로 공격을 날리지 않고 인기척만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쓸 만한 스킬이라든가, 아이템을 떠올리며 긴장하고 있던 희연의 옆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희연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몸을 틀어 그게 무엇인지 확인했다. 나무의 몸통을 관통한 것은 이런 숲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뭇가지였다.
속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희연은 나뭇가지가 날아온 방향을 찾아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머리 위의 등불의 여린 빛과는 비교하지도 못할 샛노란 금색 눈이 번뜩이며 코앞으로 다가왔다.
“으아악!”
“잡았…!”
희연에게 향하던 마리아의 손이 빗겨졌다. 놀라 주저앉은 희연 탓도 있지만 마리아가 잠시 비틀거린 것이 빗겨나간 것의 주요 원인이었다.
“아.”
시야가 낮아진 희연은 마리아의 발을 건 하얀 나무뿌리를 보였다. 모짜렐라가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모짜렐라의 기지에도 불구하고 희연과 마리아의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마리아는 손만 뻗으면 되었고, 등 뒤에서 접근할 마리아를 생각하며 나무에 바짝 기대어 섰던 희연에겐 퇴로가 없었다.
이 정도로 가까우면 채찍은 못 휘두른다는 생각에 희연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료한에게 미리 어린 시절부터 훈련된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보람 있게도, 마리아는 주먹을 내질렀다.
“읍….”
아프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앓는 소리를 낸 희연은 이어 은화 하나가 깨져 나가는 것을 보곤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목숨 하나라는 게 증명된 순간이었다.
희연과 마찬가지로 은화가 깨져 나가는 것을 발견한 마리아는 이렇게 된 거 아예 붙잡고 은화가 다 깨질 때까지 주먹질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한 손으로 희연의 양 손목을 틀어쥐었다.
방긋 웃는 얼굴에는 도망갈 생각 하지도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희연은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처음에 오간 대화대로 은화가 다 깨지기 전에 마리아를 한 대 때리는 것을 도전해 보려 했다. 양손이 잡혔다면 발길질이라도 하면 될 일이었다.
마리아는 그런 속내 따윈 다 안다는 듯 웃으며 들고 있던 채찍을 희연의 다리 위로 떨어트렸다.
쿵-!
쨍그랑!
“…….”
“무겁지?”
마리아의 채찍은 가죽이 아닌 뭔지 모를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찌나 무거운 것인지 은화도 깨졌다. 더더욱 슬픈 것은 마리아가 쓰는 주 무기를 밀어내고 발길질하기엔 희연의 힘 스텟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이,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해야 해요…?”
평균 레벨 71을 상대로 이 정도로 진심으로 굴어야겠냐는 희연에게 마리아는 뭐 그리 당연할 걸 묻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상대가 설령 레벨도 없는 갓 생성한 뉴비라 할지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거든.”
“…….”
할 말을 잃은 희연에게 마리아는 마치 준비 다 됐냐는 듯 눈을 한 번 마주치곤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희연은 이번엔 소리도 못 내고 눈만 질끈 감았다.
“아…!”
“?”
눈꺼풀 위로 마할라틴 숲에서는 못 볼 밝은 빛을 느낀 희연은 빛 잔상이 어른거리는 눈을 뜨며 상황을 파악했다.
“넬?”
눈을 잡고 비틀거리는 마리아 앞에 언제 희연의 소매에서 빠져나온 건지 모를 넬이 미미한 빛을 뿜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희연의 얼굴에 절로 놀라운 기색이 떠올랐다.
모짜렐라가 들은 척도 안 했던 능력이 빛을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