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기회다.
놀란 것도 잠시, 희연은 그 이상 생각하지 않고 손이 붙잡힌 상태로 조준 없는 사격을 강행했다. 아이템 설명에 조준이 필요 없다는 글귀를 미리 읽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뽀그르르-
“…?”
다만, 교란의 춤을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조준이 필요 없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인지는 그녀 또한 예상 못 하기는 했다. 총구에서 나온 것은 총알이 아닌 비눗방울이었다.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의 등장에 희연은 잠시 당황하긴 했으나 이어 그 비눗방울이 일제히 마리아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곤 안도했다.
마리아에게 들러붙은 비눗방울은 퐁퐁 터질 때마다 특유의 홀로그램과도 같은 빛을 퍼트렸다.
마리아는 연속으로 눈을 공격당하자 참기 힘들었는지 결국 희연을 붙잡았던 손을 놓고 제 눈을 가렸다.
그러면서 혹여나 이 틈에 희연이 주먹질이라도 해 유효타 판정이 나올 일을 방지하고자 조금 거리를 벌리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희연의 무기는 총. 마리아가 지형지물 뒤로 숨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괴물 같은 반사 신경으로 총알을 채찍으로 쳐 내지만 않는다면 얼마든 공격할 자신이 있었다.
희연은 땅에 떨어트렸던 일반 탄환이 든 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차릉…
“…….”
그 순간 몸이 기울어져 희연이 목에 걸어두었던 사슬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당연하지만 무척이나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당한 것이 많은 희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곧바로 땅 위로 몸을 굴렸다.
쿵!
희연의 예상은 정확했다. 마리아는 사슬 소리만 듣고 희연이 있는 곳을 예측해 주먹을 날렸다.
쾅! 쾅! 쾅!
“아, 삐잇….”
퍽 귀여운 새소리가 마리아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귀여운 소리의 참뜻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희연을 찾아 두서없는 주먹질을 반복했다.
무자비한 주먹질은 위치만 알면 바로 남은 은화를 전부 다 깨버릴 기세였기에 희연은 도망가기는커녕,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용기를 내 반짝 빛났던 것이 무색하게도 넬 역시 그런 마리아가 무서워 희연에게 바짝 붙은 지 오래였다.
“…….”
희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제 손에 쥐어진 총과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위치 좋고, 방해물은 없다. 총을 쏘기만 한다면 그녀의 백발백중 재능을 선사해 줄 스킬이 가치를 빛낼 것이다.
문제는 소리였다. 소음기가 부착되어 총을 쏠 때면 작은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는 료한과 달리 희연의 것은 그 소리가 쉽게 무시할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사람이 총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냐고 한다면 당연히 아니겠지만, 이곳은 상상하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세계였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보다도 먼저 소리가 마리아에게 닿을 것이다. 마리아는 지형지물의 도움 없이 소리만 듣고 총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실패하면, 혹여나 마리아가 정말로 피한다면….
희연은 천천히 방아쇠 위에 올려놨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는 마리아를 몰랐다. 조금만 더 그녀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면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희연은 료한의 심정을 이해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었고 어려워지기만 했다. 사그라지지 않는 의심이 섣부르게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희연은 애써 다음 기회가 또 올 것이라 스스로를 달랜 뒤 인벤토리를 열어 잡다하면서 동시에 가벼운 것들을 찾았다.
한 번 인벤토리를 정리한 보람이 있게도, 희연은 어렵지 않게 원하는 물건을 찾아냈다. 넬을 만난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고 얻은 부산물 중 하나인 <나뭇잎 깃털>이었다.
깃털 모양인 나뭇잎이라는 설명만큼이나 별다른 특색은 없었지만 희연에겐 그것이 넬이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거라는 점이 중요했다.
가지고 있는 나뭇잎 깃털을 모두 꺼내 손 위에 흩뿌린 희연은 바들바들 떨고 있던 넬과 눈을 맞추며 입을 벙긋거렸다.
다행히 넬은 희연의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작은 악령은 제 몸보다 조금 큰 나뭇잎을 한 아름 안아 들고는 용기를 내 마리아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워낙에 작고 공기처럼 조용히 날아다니는 넬이였기에 눈을 감고 있던 마리아는 제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검은 안개 덩어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넬은 마리아의 머리 위쪽에 자리를 잡곤 들고 있던 나뭇잎 하나를 톡 떨어트렸다. 뺨을 스치는 나뭇잎의 존재에 마리아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
두 동강 난 채 팔랑팔랑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 희연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건 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넬은 마리아의 눈에 직접적으로 반짝, 하고 빛났던 그때의 용기를 잃지 않았는지 몇 번 더 같은 행위를 반복해 마리아의 신경이 곤두서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대로는 될 것도 안 된다 여긴 마리아는 눈을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희연이 바라던 바였다.
마리아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뛰어갔다. 앞길을 막는 나무 같은 장애물 정도는 그냥 맨몸으로 들이박으며 뚫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희연은 그 모습을 보며 힐러도 언젠가 저렇게 단단해질 수 있구나 하고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후우….”
내내 바짝 긴장하고 있던 희연은 더 이상 마리아가 나무를 부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이 되어서야 몸에 힘을 풀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도, 그렇게 누워있으려니 희연은 이 숲이 마리아나 키메라 몬스터만 없다면 무척이나 평화로운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새들은 지저귀고, 나뭇잎 틈새로 푸른 하늘과 구름 대신 메우메우를 보던 희연은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넬이 힘써줘서 생긴 이 기회를 이렇게 멍하니 있다 놓칠 수는 없다는 의지가 지친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러나 희연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기세는 마리아가 두고 간 채찍에 의해 막혀버렸다. 희연은 제 다리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채찍을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갖고 갔네….”
마리아가 의도한 바인지는 희연으로선 알 수 없었으나 이대로면 눈을 회복한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도 못 할 판이었다.
닉의 동물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반칙인가 아닌가 고민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던 희연은 멀리서부터 들리는 낯설지 않은 땅울림에 얼굴이 밝아졌다.
“료한 님…!”
료한은 타이밍 좋게 희연의 부름에 맞춰 순록을 타고 등장했다. 반가운 것도 잠시, 희연은 도대체 마리아가 그를 어디까지 던져버렸기에 순록까지 타고 오는 건가 싶어 뒤늦은 걱정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의 뒤에 행방을 알 수 없던 모짜렐라도 함께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희연의 다리 위에 올려진 채찍을 본 모짜렐라는 곧바로 인상을 찡그렸다.
“아, 저거 힘 스텟 최소 3000 넘어야 들 수 있는데.”
“…….”
희연은 마리아가 제 다리에 무슨 짓을 하고 갔나 싶어져 절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못 움직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리가 부러졌다는 알림이 안 뜬 게 기적이었다.
“…….”
목숨 하나 날리는 거로 대신 계산된 건가…?
뒤늦게 든 생각에 얼굴이 굳은 희연의 모습을 모짜렐라와 료한은 빨리 구조해 달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나마 가장 힘이 좋은 료한이 희연의 손을 잡고 쭉쭉 당겨보기도 하고, 료한의 순록이 발길질하여 다리 위에서 채찍을 걷어보려고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짜렐라는 고심 끝에 가장 원초적인 해결 방법을 제안했다.
“땅 파자.”
“…….”
보기에는 조금 그랬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론 모짜렐라와 료한은 희연의 다리 밑으로 얕은 구덩이를 파 그녀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희연은 이게 되는구나 싶어 신기한 마음에 구덩이를 바라보다 반쯤 묻힌 채찍을 보고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찾으러 다시 오겠지?”
“당연하지.”
“…그러면 이거 땅에 묻고 가면 큰일 날까?”
“…….”
“역시 좀 그렇지?”
침묵에 멋쩍은 반응을 보이는 희연에게 모짜렐라는 뒤늦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야. 묻자.”
모짜렐라는 아주 기특한 생각을 했다는 것처럼 눈까지 빛냈다. 헥헥거리며 땅을 팔 때와 달리 모짜렐라는 힘차게 움직이며 채찍을 묻었다. 료한도 한 수 보탰다.
어차피 이 주변에는 닉의 동물들이 즐비하였다. 그중 한 마리에게만 이곳에 있어 달라고 부탁해도 이후 내기가 끝난 뒤에 되찾을 수 있으니 분실할 걱정도 없었다.
희연은 모짜렐라와 료한이 채찍을 묻은 땅을 고르게 다듬고 그 위에 풀 몇 포기까지 심는 것을 확인한 뒤 얌전히 앉아 있던 다람쥐에게 가 물어보았다.
“혹시 여기 가만있어 줄 수 있어?”
다람쥐는 멍하니 희연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람쥐의 의견이라기보단 다람쥐의 눈을 통해 상황을 중계 중인 닉의 답으로 보는 게 옳았다.
뒷수습까지 마친 그들은 기껏 숨겨놓은 채찍을 마리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비록 계획이 두 개나 실패했지만 그들 중 그 점에 대해 기가 죽거나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획 실패보다는 두 번이나 마리아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아 도망치고, 마리아의 무기까지 감췄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자는 그들에게 상당한 자신감을 주었다. 무기까지 잃은 마리아는 상대해 볼 만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물론 근접전이 아닐 경우만을 뜻했다.
“이 정도면 승산은 있어 보여.”
조장의 격려까지 함께하니 희연과 료한의 얼굴도 밝아졌다.
하지만 들떠 있던 것도 잠깐뿐이었다. 채찍을 숨긴 장소와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을 때쯤 그들은 다시 겸손한 자세로 돌아갔다. 기껏 도망까지 성공해놓고 들떠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분하게 앞으로의 상황에 문제점이 무엇이 있는지 먼저 대화를 나눴다.
“일단 한 번 해봤던 것들은 못 쓴다고 봐야 하긴 해. 마리아가 이미 당해봤던 걸 다시 당해줄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면 일단 료한 님 함정은 못 쓸 거고….”
“발 묶고 눈 가린 뒤 공격이라는 계획도 폐지지.”
넬의 반짝임에 이어 시야 교란까지 제대로 당한 마리아는 이제 눈만큼은 제대로 보호할 것이 분명했다. 희연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보기엔 다음 접전이 이 내기의 끝이야. 마리아는 무기를 잃은 만큼 원래도 안 봐줬지만 더 안 봐줄 거고, 우리는 계획이 없어.”
플랜 C. 무계획 즉흥.
이젠 안전 추구, 이후의 대비,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하지 말고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해야 했다.
마리아도 말했다. 어디 한 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덤벼보라고 말이다. 조금 치사하다 싶어도 쓸 수 있는 방법, 희연은 그게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들썩이는 소매에 시선을 돌린 희연은 슬그머니 머리를 내민 넬을 보았다. 어찌 보면 반짝반짝 넬도 치사하다면 치사한 수단이었다. 마리아는 넬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으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
그리고 희연에겐 아직 치사한 수단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희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믿어?”
“뭐?”
“나 믿을 수 있어?”
희연의 수단과 방법에는 모짜렐라와 료한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
마리아는 기분이 좋지 못했다. 셋 중 누구 짓인지 알 수 있는 함정 세트부터 시작해 마지막엔 희연을 놓친 것까지, 마할라틴 숲에 들어온 뒤로 그녀의 기분은 좋은 적이 없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젠 채찍까지 잃어버렸다. 희연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둔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희연도 채찍도 사라졌다.
마할라틴 숲에는 요정 닉의 동물들이 우르르 다니는 만큼 잃어버린 것쯤이야 내기가 끝나면 되찾을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진 않았지만, 손에 익은 무기가 없는 상태란 건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애초에 마리아는 이 내기가 금방 끝날 거라 예상했다. 셋 중 독기 좀 있다 싶은 건 그녀의 치즈, 하나뿐이었고 그녀의 동생은 순응하는 아이였으며 희연은 고난과 역경을 즐기는 성미가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다.
겁 좀 주고 실력 차 좀 보여주면 포기하겠네? 그것이 마리아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세 사람은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반격도 나름대로 하긴 했다. 마리아는 아직도 빛 번짐이 덜 가신 눈을 만지작거리며 숲에 남은 흔적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
그러던 중 마리아는 이런 어두컴컴한 숲속에선 너무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하얀 신관복 차림의 모짜렐라를 발견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모짜렐라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황해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녀 앞에 나타난 거였다.
또 무슨 수작질인가 싶어 설핏 웃은 그녀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그녀의 꼬마 치즈에게로 향했다.
“이건 또 무슨 대단한 계획이니?”
“…….”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미끼야?”
모짜렐라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그게 제 질문에 대한 긍정이라는 걸 알았다. 유쾌하지 못한 숲속 나들이 중 그녀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은 순간이었다.
“나보곤 힐이나 하라더니. 우리 치즈,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저도 별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요.”
“그래 보인다 얘.”
불퉁한 모습에 깔깔 웃던 마리아는 도중 웃음을 뚝 끊었다.
“싫은데도 꿋꿋하게 어울려주고… 그것참 눈물 나는 우정이긴 한데, 너희 우정 놀음에 난 별로 어울려 줄 생각이 없거든? 슬슬 이 숲이 지겨워지기 시작해서 말이야.”
“이 숲이 지긋지긋한 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그래? 잘 됐다. 내가 이제 곧 내보내 줄게.”
“채찍도 없으면서….”
“하하, 뭐라는 거야. 네가 보기엔 내가 무기 하나 없다고 평균 레벨 71짜리 셋도 못 죽일 사람 같아 보여? 그랬다면 넌 이거 끝나자마자 나한테 사람 보는 법부터 배울 줄 알아.”
내기 이후 지옥의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 마리아는 이쯤 하면 많이 봐줬다는 생각을 하며 모짜렐라에게 달려들었다.
모짜렐라는 곧바로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회개하세요>!”
“안 해, 그깟 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