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한 번만 더 말하면 물어버리겠다는 것처럼 마리아가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이야기했다.
“구경하는 입장에선 솔직히, 흥미롭기만 했는데.”
“조용히 해 진짜….”
“너도 퍽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
“내 착각이야? 솔직히 마지막엔 너도 마음에 들었잖아. 나름 사슬을 활용한 것도 그렇고.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 본 것도, 네가 마음에 안 들어 할 리가 없는데.”
계속되는 추궁에 결국 마리아는 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어. 내 기분이 뺙 같은 것과는 별개로 삐약 마음에 들었다 왜.”
옳지 못한 언어 습관을 보여주는 마리아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혀를 끌끌 찼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희연이 마리아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중요한 점이었기 때문이다.
흥분한 뉴비 없지가 희연과 모짜렐라를 한 손에 하나씩 든 뒤 비행기를 태워주는 것을 바라보다 킹스메이커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제, 개인적인 사감은 빼고 네 평가를 말해 봐. 오리 님 실력은 어때 보여?”
“왜, 실력 별로라 하면 버리게?”
비꼬는 투로 이야기하는 마리아의 말에 킹스메이커는 도리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그렇게 쉽게 무언가를 버리지 않아 마리아. 그게 사람이건 물건이건. 한 번이라도 내 마음에 든 거면 말이야.”
“…….”
마리아는 킹스메이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희연을 보았다. 당장 내려놓으라 외치는 모짜렐라와 달리 희연은 이건 좀 그렇다는 얼굴로 정색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포기했는지 나름대로 즐기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본 뒤에야 마리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쟤도 참 팔자 사납다.”
“무슨 소리야. 내가 꽃길을 걷게 해줄 예정인데.”
“…쟤는 네가 깔아 준 꽃길에서 탄내 안 난대?”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마리아.”
타박에 어깨를 으쓱이고 만 마리아는 그제야 앞서 킹스메이커가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잘 모르겠어. 실력 운운하기엔 쟤는 좀… 기초 지식이 없어.”
“천천히 배우는 중이지.”
“뭘 모르니까 아무렇게나 움직이니 그게 실력인지, 아니면 운과 우연인지 구별도 안 될 정도야.”
“운만큼 타고나기 힘든 것도 없는데.”
“겁이 많아.”
“만용을 부리는 것보다는 낫지.”
“…….”
무엇을 말하건 칭찬으로 이어지는 대화에 마리아는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그래, 다 좋아. 네 뉴비 아주 다 좋다고. 솔직히 말해서 나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피지컬이니 실력이니 따지기엔 아직 레벨이 낮아서 확언은 못 하지만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것도 사실이야. 그런데.”
“그런데?”
“조금… 뭐라고 해야 하지, 겁이 많다? 아니 그것보다는 너무 조심한다고 해야 하나….”
킹스메이커는 마리아의 평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보기에도 희연은 겁이 좀 있긴 하지만 조심성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희연에게 조심성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녀는 킹스메이커의 행운의 눈오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아는 끝내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찝찝하게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킹스메이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레이드든 던전이든 좋으니까 쟤 나랑 둘이서만 한 번 돌게 해 줘. 그러면 문제점이 뭔지 확실히 알 것 같아.”
킹스메이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일단 웃었다. 이제 막 내기에서 이겨 잔뜩 기분이 고조된 그녀의 눈오리에게 이 잔혹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물론 안 보낸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문제점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는 거지?”
“어. 알아낸다면 네 뉴비의 장래, 많은 도움이 되겠지.”
킹스메이커는 대충 눈물을 머금었다 치고 미래를 위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이제 막 뉴비 없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제 발로 땅 위에 서 있는 희연에게로 가까이 간 킹스메이커는 저를 보곤 활짝 웃는 얼굴에 마음이 약해져 약간의 거짓을 섞어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죠, 오리 님, 마리아가 글쎄 곧바로 오리 님의 훈련을 봐주고 싶다지 뭐예요.”
“…네?”
“오리 님의 재능이 너무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럴 리가 없는데…?”
희연은 확고하게 부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는 나뭇가지에 걸린 사슬을 나무 자체를 박살 내어 풀어주고 곧바로 희연을 노려보며 괴성을 질렀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라는 표현이 함께할 수 없는 분노에 찬 괴성이었다. 그때의 분노가 얼마나 된 것이라고 이제 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가 마리아의 입에서 나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킹스메이커가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또다시 얼마나 대단한 계획을 세웠기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하나 걱정이 되었다.
그것도 이제 막 마리아의 실전이 끝난 지금 이 순간에 말이다!
“아….”
어설픈 거짓말이 지금 상황에선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눈치챈 킹스메이커는 일단은 아쉬움의 탄식을 뱉었다.
“원망받기 싫은데….”
노골적인 속내에 희연은 놀라지 않고 차분히 이야기했다.
“원망… 안 해보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그냥 빨리 말씀해 주세요….”
“마리아가 오리 님과 단둘이 나들이를 가고 싶대요.”
“…?”
예상 못 한 단어 선정에 희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육이 채찍질이고 실전이 서바이벌인 마리아에게 있어 나들이가 평범한 것일 리가 없다는 결론은 내렸다.
희연은 슬쩍 모짜렐라 쪽을 바라보았다. 마리아의 나들이가 뭔지 아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짜렐라는 마리아와 나들이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단어냐는 듯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나들이라는 것이 온전히 킹스메이커의 주관적인 표현이지 실제의 의미가 아님을 눈치챘다.
나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때마침 숲속에서 쪼르르 달려 나온 소동물들에게 잃어버린 채찍과 모짜렐라의 지팡이를 받아내고 온 마리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뭐야, 아직도 설명 중이야?”
희연은 기회다 싶어 망설이지 않고 물어보았다.
“나들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나들이? 뭔 나들이? 설마….”
마리아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킹스메이커를 보다 뭐 어떠냐 하는 태도로 다시 희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직설적으로 희연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주었다.
“레이드 갈 거야.”
“네?”
“너하고 나하고 단둘이.”
“…….”
“괜찮아. 죽으면 살려줄게. 그리고 어차피 레이드는 죽어도 페널티 없어.”
마리아는 그 이상 설명이 더 필요하냐며 그길로 곧바로 희연을 끌고 레이드 장소로 이동하려 했다. 다급해진 희연은 마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니, 닉 님 치료부터…!”
“레이드 끝나고 와서 해도 안 늦어.”
닉의 치료 건 외에는 마리아의 거친 발걸음을 막을 수단이 없던 희연은 그 길로 지명도 모를 곳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희연은 마리아와 레이드를 다섯 번이나 돌았지만 기억나는 것은 딱 두 마디뿐이었다.
“누웠네?”
“다시.”
그것이 희연의 첫 레이드 경험이었다. 희연은 보스 몬스터 한 번을 때려보지 못했다.
『가장 담대한 신의 기사』
레이드라 오래 걸릴 거라 예상한 이들의 생각과 달리 마리아와 희연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마할라틴 성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 만에 너덜너덜해진 희연을 보며 모짜렐라는 조금 질색하다 조심히 물어보았다.
“야, 보스가 아니라 마리아가 네 상대였어?”
희연은 멍하니 모짜렐라를 바라보다 서럽게 외쳤다.
“살려준다고 했으면서 한 번도 안 살려줬어! 보스 레벨이 180인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는데 살아남아 보라고 말만 하고서…!”
“아….”
그저 마리아의 인성질에 당한 것뿐이구나 싶어 모짜렐라는 위로도 못 해주고 조언도 못 해준 채 힘내라며 희연의 등만 두들겨 주었다.
모짜렐라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악령이와 넬도 그런 그를 따라 희연을 위로했다. 희연은 그 모습에 그나마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레이드로 끌려가면서 감히 반항할 생각은 못 하던 희연이 그나마 할 수 있던 것은 모짜렐라에게 악령들을 맡기는 거였다.
마리아는 누구와는 달리 악령들을 괴롭힌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메인 퀘스트의 재료로써 탐내기는 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마리아는 뉴비 없지급 신전의 아이돌, 신성 토템이었기에 악령들 입장에선 같이 있어봤자 좋을 게 없는 신성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은 희연과 달리 악령이와 넬은 여전히 뽀송뽀송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 둘이라도 그런 모습이라는 점에서 희연은 위안을 얻었다.
희연은 모짜렐라와 료한에게 마리아와 단둘이 함께한 레이드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혹여나 자신에게 강제로 주어진 기회가 그들에게도 생긴다면 도망가라 미리 경고해 주기 위해서였다.
희연과 같은 경험을 할 확률이 상당히 높은 모짜렐라가 특히나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평균 레벨 71이 자신들이 물리친 보스가 얼마나 위험한 인간이지 다시 한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지는 사이, 마리아 또한 킹스메이커에게 희연의 눈물로 끝마친 레이드에 대해 이야기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는 최대한 간결하게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했다.
“레이드가 안 맞는 것 같아 네 뉴비.”
조잘조잘 이야기하면서도 마리아에게 집중하고 있던 희연은 그녀의 발언에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빛을 지어 보였다. 어찌나 억울했는지 희연은 마리아를 조금 노려보기까지 했다.
희연의 그런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담담하게 물어보았다.
“잘 가르쳐주고 들어가긴 했지?”
“뭘 가르쳐?”
“보스 패턴, 기믹. 뭐 그런 것들.”
“그런 것도 일일이 가르쳐줘야 해?”
킹스메이커는 하하, 웃기만 했고 희연은 그것 보라며 결코 자신이 유난히 레이드에 적응 못 한 게 아니라 주장했다.
“아니야. 너 안 맞아.”
“방금 전에 킹 님이 말한 것 중에 알려주신 거 하나도 없잖아요!”
“안 알려줬다고 같은 구간에서 세 번 틀린다는 점에서 재능 문제 아니니?”
“틀리면 비웃기만 했으면서…!”
“당연하지. 이 게임이 모르는 사람 비웃어 볼 기회가 흔한 줄 알아?”
“…….”
할 말을 잃은 희연은 이것 보라며 억울한 눈빛으로 킹스메이커를 돌아보았다.
혹여나 희연이 마리아를 말로 이기는 진귀한 구경거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킹스메이커는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음에 조금 아쉽기는 해도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희연에게 있어 마리아는 너무 천적 같은 거였다. 희연은 유난히 저런 타입에 약했다.
특정 타입의 사람에게 약해진다는 것은 훗날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게 되는 아레나 콘텐츠에서 불리해질 수 있는 특징이나 킹스메이커는 의연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과거에도 희연과 같은 면모를 닉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닉을 키운 킹스메이커는 믿었다. 희연 역시 시간이 지난다면 부정의 감정을 표정이 아닌 스킬로 보여 줄 것이라고 말이다.
닉은 이제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만나면 얼린다. 희연은 회개를 권할 것이다. 잠시 미래를 상상해보던 킹스메이커는 말 없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연을 발견하고는 티 나지 않게 잔잔히 웃어 보였다.
“레이드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나중에 내가 직접 확인해 볼 테니까 마리아 너도 그만해.”
“더 볼 게 있나?”
“네가 보는 거랑 내가 보는 건 다를 테니까. 난 잘해 보라는 말만 하고 보스 앞에 내 뉴비를 던져 놓지는 않거든.”
자신이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레이드를 진행했다는 것처럼 말하는 킹스메이커의 말에 마리아는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다 알게 되는 것들인데… 쯧, 요즘 애들은 너무 나약해.”
나 때는 공략법 같은 거 없고 스킬 쿨타임 패치 전이라 16시간 동안 맨몸으로 들이박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게 당연했다고 주장하는 마리아의 무용담에 희연은 질색하며 못 들은 척하였다.
답지 않게 노골적으로 반응하는 희연의 모습이 재미있어 지켜보다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마리아의 입을 막았다.
“우리 오리 님 레이드는 나중에 내가 가르치고 순회 돌면 되는 거고. 그래서, 아까 말한 문제점은 뭔지 확실해졌어?”
눈오리의 눈물로 끝난 잔혹한 레이드를 돈 목적을 말하라는 재촉에 마리아도 투덜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아,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레이드 다섯 번이나 돌았는데 그걸 모를까 봐? 그 다섯 번을 죄다 실패로 끝낸 것도 놀랍긴 하지만.”
“사족 붙이지 말고.”
마리아는 편애 참 노골적이다 욕한 뒤에야 킹스메이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눈치.”
“오리 님이 눈치 없다고?”
“아니. 그 반대에 가까워. 눈치를 너무 봐.”
“아아….”
킹스메이커는 의미 모를 감탄을 뱉으며 희연 쪽을 바라보았다. 마리아의 이야기에 희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리 님이 그런 면이 있긴 하지.”
“제가요?”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이는 희연에게 킹스메이커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희연은 곰곰이 생각해보다 모짜렐라와 료한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료한은 아닌 것 같다 했고 모짜렐라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희연이 눈치를 보는 편이라 확정 지은 것처럼 말했다.
“눈치 보지 마, 너. 힐러가 눈치 보기 시작하면 얼마나 고달파지는지 몰라? 힐러는 좀 기 세고 건방져야 하는 거야.”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마리아.”
킹스메이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끝까지 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날 봐. 얼마나 자유롭고 즐겁게 사니?”
하지만 예시가 마리아였기에 희연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