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마리아가 힐러의 자질이란 무엇인가 더 이야기하기 전에 킹스메이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런 토론은 이세인과 하라며 마리아를 등 떠민 것이다.
저를 쫓아내는 것과도 같은 행태가 마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이긴 했지만, 킹스메이커가 거듭 자리를 비키라 재촉하자 결국 마지못해 자리를 잠시 옮겨 주었다.
킹스메이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모짜렐라와 료한까지도 쫓아냄으로써 희연과 단둘이 대화할 자리를 마련하였다.
모짜렐라는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료한은 내심 좋아하며 백희준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 료한을 조금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희연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바로 했다.
“오리 님.”
“네?”
“레이드 많이 힘들었어요?”
“…네.”
차마 아니라고는 말 못 하는 희연의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레이드 같은 건 나중에 천천히 시작해도 되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요.”
“안 시킨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에이. 그건 너무 아쉽잖아요.”
희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웃기만 하고 침묵을 지키던 킹스메이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마리아가 말했던 문제점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듣기에 따라 기분이 조금 상할 수도 있긴 하지만, 마리아의 말대로 오리 님은 은근히 상대의 눈치를 많이 봐요. 일단 내가 보기에도 조금 그렇거든요.”
“그래요…?”
“조금.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눈치를 많이 보면서 정작 뭐랄까… 비위 맞추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
“오리 님이 눈치를 보는 경우는… 내가 저 사람에게 민폐인가 걱정할 때, 혹은 저 새끼가 내게 민폐인가 각오할 때. 딱 이 두 경우인 것 같거든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희연에게선 자신이 그런가 하는 의문과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하는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게 큰 문제라는 건 아니죠. 좋게 말하면 배려심 있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배려라는 게 하는 쪽만 계속하면 힘들잖아요.”
“…그렇죠.”
“일단 내가 민폐인가 걱정하는 점의 문제점이 뭔지 쉽게 설명하면….”
“?”
“숲에서 오리 님이 마리아 잡으려고 모두가 미끼가 되자는 의견을 내놓았잖아요. 만약 오리 님은 이게 연습용 서바이벌이 아니었고, 그 파티원이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다면 괜히 의견을 내놓았다가 피해 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입을 열지 않았을 거예요. 맞죠?”
“…조금?”
긍정하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희연의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다시 웃었다.
“배려 좋죠. 좋은데,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못 하면 그건 조금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일이잖아요. 이왕 사는 거 즐기면서 사는 게 좋으니까요.”
“…….”
“그리고 후자의 문제는, 저놈이 내게 민폐를 끼칠 것이다 각오하는 순간 그게 포기로 직결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죠. 그럴 때는 내게 피해를 준 대상을 없애 버리는 게 좋은 건데도요.”
“그렇구나….”
“물론 난 그렇구나, 한 마디로 웬만한 상황은 유연하게 넘기려 하는 오리 님도 좋아요.”
“그….”
희연은 입을 열었다가 서둘러 닫았다. 닫힌 입에서 맴돌던 말이 나왔다면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조금 놀렸을지도 모른다.
“마리아가 말을 좀 그렇게 하긴 했지만, 나도 동의하는 바이기는 하거든요. 눈치 보지 말아요 오리 님. 귀하디귀한 힐러인데 여기서만큼은 내 의견 따르라고 명령질 정도는 해도 돼요.”
“네에….”
“뭐, 게임하다 보면 자연스레 눈치 따윈 안 보게 되긴 하겠지만요.”
힐러를 하다 보면 성격 버리게 된다는 것 같은 투의 말이었다. 마리아를 떠올린 희연은 그것이 제 미래의 모습인가 싶어져 조금 심각해졌다.
사실 모짜렐라도 힐에 집중해야 할 때면….
“…….”
직업을 잘못 선택한 거 아닐까? 희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나 온화한 것처럼 웃는 이세인도 힐러의 고충을 얘기할 때 꽤나 성격 버린 사람처럼 굴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녀는 아직 쓴맛을 못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이 남들에게 힐 줄까 말까 협박해 보는 모습을 상상해보던 희연은 문득 궁금해져 킹스메이커에게 질문하였다.
“킹 님은 제가 눈치 안 보고 좀… 친구분처럼 하길 바라시는 거예요?”
“그런 걸 물어보면 내 입맛대로 해주겠다는 소리처럼 들려서 조금 기대하게 되는데…. 내 취향을 말하라고 한다면 마리아처럼 당당한 게 낫기는 하죠? 아무래도 난 내 뉴비가 어디 가서 기도 못 펴고 있는 걸 보면 너무 속상한 사람이라.”
희연의 귀에는 속상한 나머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금은… 뻔뻔해져 볼게요.”
그래서 희연은 그리 말했다. 다만, 희연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킹스메이커의 머릿속에서 어떤 계획이 다시 착착 세워지기 시작했는지 몰랐다.
조용해진 상대에 의아함을 느껴 고개를 들었을 때, 반짝이는 초록 눈동자를 보고 난 다음에야 희연은 자신이 제 무덤을 스스로 판 것임을 깨달았다.
“마침 좋은 곳이 있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마음의 수양을 하기에 적절한 곳이면서 오리 님 레벨 대에도 딱 맞는 곳이죠.”
“마음의 수양은 혼자 집에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리아와 이세인의 비전을 쏙쏙 뽑아먹기에도 좋은 곳!”
“…….”
“오리 님한테는 유리한 장소!”
더 이상 반박하지 않는 희연을 만족스럽다는 듯 바라본 킹스메이커는 인벤토리를 열어 지도 하나를 꺼내더니 희연에게 이전에도 짚어 준 적 있는 장소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긴….”
희연도 잘 아는 곳이었다. 에빌론의 동문, 톨러의 저택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있는 무덤. 작은 비석이 오밀조밀 그려진 가운데 킹스메이커가 정확히 짚은 곳은 검은색 흑탑 그림이었다.
희연은 어렵지 않게 무덤가에서 보았던 높다란 건물 하나를 기억해냈다. 관리되지 않아 이끼가 끼고 담쟁이덩굴로 칭칭 감긴 아주 오래된 검은 탑이었다.
멀리서만 본 곳이었기에 아는 정보라곤 건물의 외양밖에 없었지만 방금 전 킹스메이커의 발언으로 희연은 뒤늦게 자신이 그곳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데드 몬스터가 나오며, 혼자 들어갈 경우 경험치 독식에 유리하지만 그리 인기가 많지는 않은 던전. 킹스메이커는 지금, 그 던전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였다.
“여기로 몰린 애들 중엔 보통 다른 곳에서 파티 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갈 곳 없어 온 애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힐러 하다 보면 원치 않아도 저절로 멘탈이 강해지는 거죠.”
“…그래서 파티 퀘스트인데 혼자 깨는 사람이 많은 거고요?”
“약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바로 파티의 힐러예요, 오리 님.”
희연은 그 말에 동의하긴 했다. 그녀가 만나 본 힐러들은 성격의 차이만 있을 뿐 어디 가서 기가 약하다는 소리를 들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은근히 무른 구석 있는 모짜렐라까지도 말이다.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심하는 희연을 앞에 두고 킹스메이커는 이게 얼마나 타이밍 좋게 등장한 이벤트인지를 설명하였다.
“입장 조건 충족했고, 거기다 오리 님은 성 속성이라 언데드 대항마로 딱이죠. 힐러든 딜러든 제대로 배워 볼 수 있는 기회예요. 전자는 이세인이 가르칠 거고 후자는 마리아가 가르칠 거고.”
“음….”
“언데드는 하급이면 속도도 느려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채찍질을 연습하기에도 적절한 대상일 거예요.”
“그렇기는 한데….”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어요?”
희연은 머뭇거리다 손을 들어 악령이의 귀를 막았다. 킹스메이커는 그 모습에 더욱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 무덤가잖아요….”
“그렇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런데… 제가 악령들한테 너무 인기가 많아요!”
“…아.”
“여기서 또 악령을 늘리는 건….”
“그게 문제인 거예요? 난 오리 님이 잔혹한 마리아의 훈련을 꺼린다거나 이세인과 함께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 점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그건 뭐….”
진즉 포기했다는 희연의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역시 수긍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하는 바가 뭔지는 잘 알았어요. 하지만 오리 님, 애초에 악령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요.”
“…….”
희연은 차례로 바동거리고 있는 악령이와 뽈뽈 날아다니고 있는 넬을 바라보았다. 미묘한 표정을 짓는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로 안 흔해요.”
“그렇구나….”
희연이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기에 킹스메이커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여기 이 요정의 무덤은 네크로맨서 직업 애들한테 인기 있는 장소라 있었어도 진즉에 그쪽 애들이 데리고 갔을 거예요. 마이너 직업 파는 애들은 좀 집요한 구석이 있거든요. 키워야 할 악령이 늘거나 할 걱정은 안 해도 돼요.”
희연은 악령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감당 못 할 일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킹스메이커가 확언을 해주었기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던전 이름이 요정의 무덤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멸망한 어느 요정 왕국의 흔적’이죠. 이건 스토리 스포니까 여기까지만 말하도록 할게요.”
조금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은 희연의 모습에 킹스메이커는 지금이 바로 밀어붙일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던전 입장 조건 레벨도 충족했고, 같이 들어갈 인원수도 최소 네 명, 딱이다 딱! 당장 들어가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넷이라는 건….”
“하나, 둘, 셋, 넷!”
킹스메이커가 숫자를 세며 차례로 가리킨 것은 이세인, 마리아, 모짜렐라, 희연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킹스메이커는 힐러로만 구성한 파티를 추천하고 있는 거였다.
“…….”
희연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냐는 뜻으로 킹스메이커를 보았고, 그녀는 더없이 진실한 눈을 한 채 웃고 있었다.
***
당장이라도 새로운 던전 나들이를 가자 주장한 킹스메이커의 입장에선 아쉽게도, 희연이 다음 행선지로 고른 것은 자유 도시 에빌론이었다.
이유는 다름 아니고, 희연이 마리아와의 내기 도중 료한에게서 빌린 소음기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소음기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에빌론으로 가야 했다.
내심 공격할 때마다 나 여기 있어요 주장하는 것 같은 소음이 희연은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힐러는 언제나 처치 대상 1순위, 걸어 다니는 어그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우연한 기회로 료한의 소음기를 써보니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다행히 이전에 합법 도박이 주고 간 카탈로그에는 소음기가 있었고, 료한의 것 또한 그의 작품이었기에 성능도 이미 확인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희연에게 그것을 지불할 돈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던전에 가기 전 소음기 주문부터 넣겠다는 희연의 말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도 있긴 했다.
“날 엿 먹인 물건을 대놓고 좋다 하고, 간이 부었니?”
“…….”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희연은 마리아에게 도발을 건 격이었다.
으르렁거리는 마리아의 시선을 피해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희연은 킹스메이커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희연이 던전에 간다는 말에 마음이 넓어진 그녀는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 마리아는 이제 그만 우리 길마님 치료를 해주러 가볼까?”
“…….”
“가볼까?”
은근슬쩍 없던 일로 할 계획이었는지 마리아는 죽상을 한 채 킹스메이커에게 끌려갔다.
닉의 팔에 마리아의 채찍이 빙빙 둘러지는 것을 확인한 희연은 적어도 저 치료가 끝날 때까지는 안전하겠구나 싶어 서둘러 볼일을 마치기로 하였다.
백희준에게 숲에서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던 료한에게로 간 희연은 물건의 정확한 상품명에 대해 물어보았다. 총에 대해서 잘 모르는 만큼 희연은 그에 대한 부가적인 것들 또한 잘 몰랐다.
다행히 료한은 소음기에 대해 묻는 희연에게 기꺼이 정보를 일러주는 것도 모자라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총을 잘 모르는 희연에겐 참 다행인 일이었다.
“기성품이 아니라 자체 제작으로 주문해서 기장을 줄인 제품을 구입하거나, 소음기 기능이 아이템 효과인 장신구를 사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그런 것도 있어요?”
“네. 지금 쓰는 총이 소드 오프 샷건 맞죠? 그냥 샷건으로 고르지 않은 걸 보면 린치가 짧은 걸 선호하는 것 같은데, 여기다가 평범한 소음기를 부착하면 일반 샷건만큼 기장이 다시 길어질 거예요.”
킹스메이커의 취향을 따른 것일 뿐인 희연은 총이 길건 짧건 크게 상관없긴 했으나 일단은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총기류 액세서리 중엔 소염기라는 것도 있는데, 화염 탄환이랑 같이 쓰면 범위 공격도 가능해요. 화염 방사기랑 느낌이 비슷하거든요.”
“우와….”
“그 외에도….”
료한은 아낌없이 희연에게 일용할 지식의 양식을 주었다. 그러다, 말할 때마다 색다르다는 반응을 보이는 희연의 모습에 료한은 결국 의문을 품었다.
“총 종류에 별로 관심이 없나 보네요?”
료한은 첫 던전에서의 만남 때부터 희연이 총기류에 지대한 관심이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뒤늦게 그 사실이 떠오른 희연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총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 왜 무기를….”
“…그냥 그렇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