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멋쩍어하는 희연의 반응에 료한은 이유를 몰라 의아해했고 옆에 서 있던 백희준은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무기 안 맞는 거면 빨리 다른 거로 바꿔. 괜히 안 되는 거 붙들고 있느라 레벨 못 높이고 있는 거 아니야?”
희연의 현 레벨이 이유가 없으면 안 되는 레벨이라 생각하는 백희준다운 말이었다. 조건부지만 어쨌든 명사수인 희연은 백희준의 오해에 깜짝 놀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안 바꿀 거야, 나 총 잘 쏴! 레벨은 무기 문제가 아니라….”
“아니라?”
“올릴 거야 이제! 올리려고 했는데 자꾸 재촉해….”
열심히 레벨을 올려 자미엘과의 내기를 끝낼 생각을 하긴 했으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매번 실천을 못 한 게 문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희연의 말에 무언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같던 백희준은 의외의 말을 꺼냈다.
“무기를 너클 쪽으로 바꿔 봐.”
“너클?”
백희준이 무기 운운하는 이유가 레벨 낮은 거에 대해 한 소리 하는 것이라 여겼던 희연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쪽으로 흐르는 이야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새로운 무기 제안은 그녀로서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백희준의 주장에는 타당한 이유도 있었다.
“급하면 손부터 먼저 나가는 거 못 고치겠으면 아예 근접 스타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아직 레벨 50 못 넘겼으면 지금부터 스텟 작업하는 것도 가능하고.”
“…….”
“격투 패시브가 없다 해도, 그건 대명이가 도와주면 금방 익힐 수 있기도 하니까 한번 잘 생각해 봐. 한 번이지만 마리아의 주먹질을 막은 거 보면 그쪽이 더 잘 맞을 수도 있어.”
희연은 멀뚱멀뚱 백희준을 바라보며 그가 참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다. 신관이 주먹질로 힐 하는 거에 대해선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저런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구나 싶었던 것이다.
총탄의 흔적이나 혹은 구타의 흔적을 남기더라도 힐만 제대로 하면 문제가 없긴 했지만, 희연은 가끔 이 게임을 오래 한 사람들의 이런 면모를 볼 때면 게임사에서 참 적절한 패치를 해준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주먹질로 힐을 넣고 회개 스킬을 날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던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백희준에게 질문했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 주먹질이 오빠의 낭만이야?”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니구나….”
무기를 권유할 때면 언제나 그 이유가 낭만인 사람과 함께하다 보니 희연은 백희준을 조금 의심하고 말았다.
고개를 저은 희연은 백희준에게 일단 제 의견을 확실하게 전했다. 괜히 말 안 했다가 이후 백희준이 또다시 근접 무기를 잔뜩 사놓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무기는 계속 총으로 할 거야.”
백발백중 패시브가 아까워서라도 희연은 별다른 이유가 생기지 않는 이상 무기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백희준은 반려된 제 의견에 조금 표정이 굳긴 했지만 그 이상 희연의 고집을 꺾으려 들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 비꼬기는 했다.
“안 바꿀 거면 총으로 사람 때리고 다니지 마.”
“조용히 해….”
총으로 사람 때린 것을 계기로 채찍질까지 배우게 된 희연은 그 말에 심사가 꼬여 백희준의 다리를 살짝 걷어찼다. 백희준은 아픈 척해 주는 배려도 보이지 않았다. 흙 묻은 제 바짓단만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희연은 그 모습에 투덜거렸지만 그마저도 이어지는 백희준의 말에 놀라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이세인이 정 불편하다 싶으면 그땐 연락해.”
백희준 앞에서는 이세인을 꺼리는 티를 내지 않았다 생각한 희연으로선 조금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또한, 마치 희연이 이세인의 존재가 불편할 때 옆에 없을 거라는 듯한 말이었다.
“…같이 안 가?”
“내가 여기서 느긋하게 참관 좀 했다고 한가해 보이나 본데, 네가 짐작 못 할 정도로 바쁜 사람이거든?”
“그런 것치고는….”
“조용히 해.”
독선적인 백희준의 입막음에 희연은 조금 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옆에서 료한이 다시 남매 싸움을 시작하는 건가 싶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희연도 남 앞에서 백희준과 유치하게 싸울 생각은 없었다. 그것도 백희준을 너무나 존경하는 나머지 눈에 콩깍지가 씐 료한 앞에서는 특히 그랬다.
그리고 어차피 료한은 백희준의 편이었다.
“?”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희연의 눈빛에 료한은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희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만 저었다.
총에 대한 좋은 정보도 알려줬으니 료한의 다소 편향적인 눈을 외면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희연은 가능하면 료한이 어서 빨리 백희준의 진면목을 보고 꿈에서 깨기를 바랐다.
백희준 같은 기 세고 잘난 인간 옆에서 마냥 버티기에는 료한은 너무 연약한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레벨 좀 높이며 연락해. 료한이랑 같이 파티 데리고 가줄 테니까.”
백희준은 주변 사람의 사정은 생각 안 하고 제 기준에 맞춘 파격적인 제안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준에 계속 맞춰주다가는 결국 나중엔 울며 도망가게 될 뿐이었다.
“파티….”
희연은 말을 흐리며 이세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마리아와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백희준의 성격을 알고, 이세인의 특강도 기억하는 희연은 애매하게 웃으며 백희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건 좀 싫은데.”
희연은 백희준과 이세인 사이에 끼기도 싫었고, 이세인도 질색하는 실력 부족한 사람은 끼지도 못한다는 백희준의 파티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로 인해 자꾸만 퇴색되어가지만, 희연의 목적은 힐링이었다. 킹스메이커도 인정해준 힐링!
백희준과 함께하는 파티가 힐링이 될 수 없다는 건 당장 레벨 96 료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희연은 어쨌든 여전히 굳건한 본인의 의견을 전달했다. 곧바로 그 의견을 받아주었던 킹스메이커와 달리 백희준이 희연의 말에 보인 반응은 의심이었다.
“…레벨 낮은 거 그냥 네가 게으름 부린 거 아니야?”
반쯤은 정답에 가까운 답을 내놓은 백희준의 모습에 희연은 이대로 대화가 더 길어지면 자신만 불리해짐을 깨달았다. 희연은 곧바로 백희준의 등을 떠밀며 이만 가보라 재촉했다.
잔소리하는 주체를 치워 버리려 하는 희연의 모습에 백희준은 마지못해 발을 떼면서도 희연에게 잔소리했다. 료한과 존성대명을 챙겨 바꿔치기 스크롤을 찢을 때까지도 말이다.
길고 긴 잔소리였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결국 다음에 만날 때도 레벨 50도 못 넘기고 있으면 끌고 가서라도 렙업 시킬 거라는 협박이었다.
물론 희연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어차피 안 걸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킹스메이커가 그리 쉽게 뉴비 육성 기회를 넘기지 않으리라는 점을 믿어서였다.
킹스메이커에 대한 희연의 신뢰는 이상한 쪽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
이세인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를 일견 온화하고 다정하며 유약한 사람이라 착각하기 쉬웠다.
그의 말씨는 다정하고 사근사근한 편이었고 안 그래도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은 언제나 함께하는 미소와 어우러지며 그 효과를 더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오로지 이세인만 알 뿐이지만 그의 외양은 그러한 생각에 불을 지폈다.
옅고, 가늘며, 여린 신관님. 힐러 홍보 포스터 피사체로 써먹어도 이상할 것 없는 커스터마이징이었다.
악령이에게 행패 부리기 전까지만 해도 희연 역시 이세인을 그런 전형적인 힐러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이세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희연은 그래도 이세인은 힐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희연은 이제 더 이상 힐러가 꿈과 희망으로 점철된 편하고 모두가 무조건 떠받드는 꿀 빠는 직업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힐러는 기가 세야 했다. 그리고 이세인은 기가 셌다.
백희준이 이끄는 파티의 메인 힐러 자리를 놓친 적 한 번 없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 점을 모른다 해도, 당장에 저를 반기는 사람 하나 없는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튼튼한 신경 줄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세인을 반기는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지만 그리 티를 내는 편은 아니었기에 있으나 마나였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니고 이세인을 존경하는 모짜렐라였다.
“…….”
자유 도시 에빌론, 우체국을 찾아 행정지구로 들어선 희연은 언제나 함께하던 일행에 더불어 마리아와 이세인, 그리고 모짜렐라가 낀 작금의 상황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이동하는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희연의 원래 계획은 길드의 포탈을 이용해 혼자 에빌론에 갔다 오는 거였다.
합법 도박 있는 곳은 아냐, 우편 보내는 법은 아냐, 우체국 어디 있는지 아냐. 이 세 가지 질문이 오고 감에 따라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 그리고 닉이 일행이 되었다.
희연은 셋 다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갔다 올 동안 마할라틴 성에서 기다리거나 미리 요정의 무덤 던전에 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마리아와 이세인이 희연을 따라오며 그들도 일행이 되었다.
모짜렐라는 마리아한테 끌려왔고 말이다.
마리아와 모짜렐라는 그렇다 쳐도 이세인이 따라왔다는 점이 희연은 가장 놀라웠다.
“오리 님 그쪽 아니에요.”
“앗….”
이세인 쪽에 신경 쓰다 다른 길로 샐 뻔한 희연은 한 차례 고개를 젓고는 일행을 따라 서둘러 발을 놀렸다.
“앞을 잘 보고 걸어야지.”
“네에….”
한 마디 얹는 이세인에게 대충 대답해 준 희연은 일단 그에게 신경 쓰지 말자 다짐했다. 신경 쓸수록 이세인은 머리만 아파지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얼마 안 있어 우체국 역할을 하는 건물을 찾았기에 희연은 어렵지 않게 그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와…!”
희연은 오랜만에 자유 도시 에빌론의 아름다움과 예스러움, 그러면서도 발전된 기술이 혼합된 것 같은 판타지 세계다운 그 특유의 모습에 홀린 듯이 감탄을 뱉었다.
대부분이 비슷한 형태로 지어진 여타 다른 에빌론의 건물들과 달리 우체국은 그 모습이 판이했다.
콜로세움 같은 원형 모양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창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었다. 그중 유리로 막혀있거나 하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천장 또한 없었다.
건물 내부 중앙을 차지한 제법 커다란 나무 주위에는 수로가 흘렀고, 나무뿌리는 특이하게도 땅 아래가 아닌 땅 위에 넓게 퍼져 있었다.
그 뿌리가 어찌나 길고 억세던지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른 것도 모자라 외벽에까지 구불구불 자리를 잡았고, 생동감 넘치는 나무뿌리 사이로는 이름 모를 들꽃이 바닥과 벽 구분 없이 활짝 피어 있었다.
사람이 지은 건물에 숲의 요정이 살다 간 것 같은 곳이었다. 그도 아니면 자연에 헌정한 인간의 작품이거나.
희연이 그리 생각한 것은 이 건물이 사람의 편의성이 아닌 동물들의 편의성에 맞춰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창과 천장이 없는 이유는 새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위해서였고 얼기설기 자리 잡은 나무뿌리는 고양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뿌리 밑동에는 토끼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며 수로에는 물을 마시러 온 사슴과 물놀이하는 아기 곰이 함께했다. 그 외에도 제법 많은 수의 동물들이 이곳을 집 삼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숲에서나 볼 법한 동물들이 돌아다닌다는 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말이다.
레이와 같은 옷을 입은 직원들은 동물들을 피해 요리조리 돌아다녔고 그런 사람들을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녔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나무뿌리를 책상과 의자 삼아 업무를 보았다. 이곳에서 인간을 위한 편의성이 느껴지는 물건이라곤 잉크와 펜, 종이. 그리고 어둠을 밝혀줄 등불 정도밖에 없었다.
편지를 봉하는 것조차 나무의 수액을 굳혀 사용하는 것을 본 희연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와… 우와…, 우와…!”
그런 희연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킹스메이커는 그녀가 더더욱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우체국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편배달은 저기 있는 새들이 해주는 거예요 오리 님.”
“정말요?”
“강아지들도 해줘요.”
“우와!”
“그리고 고양이도 우편배달 해주죠. 새랑 고양이는 창문을 두들기고 강아지는 문을 두들겨요. 나무에 사는 다람쥐도 배달은 해주지만 대신 무게 제한이 있어요.”
“제한이요?”
킹스메이커는 배배 꼬여 작은 바구니처럼 되어버린 나무뿌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희연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리본이 예쁘게 묶인 호두 껍데기로 만든 작은 편지함이었다.
“이 안에 들어갈 정도만.”
“귀엽다….”
희연은 이 우체국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보낼 곳은 없지만 매일 편지를 보내러 오고 싶을 정도였다.
“편지 저한테 보내면 새랑 고양이랑 강아지랑 다람쥐가 저한테 편지 주러 오는 거예요?”
“나한테 보내기 기능이 있긴 하죠?”
“우와…!”
하나하나 놀라워하던 희연은 문득 든 생각에 닉을 데리고 나무의 중앙 쪽으로 이동했다. 닉은 희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묵묵히 그녀를 따라와 주었다.
닉의 등장에 금세 모여드는 동물들을 보며 희연은 아주 오랜만에 이 게임을 시작한 취지를 만족할 수 있었다.
깨끗하게 나은 닉의 손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고양이는 데굴데굴 굴렀다. 뉴비 없지도 희연의 옆으로 와 함께 구경했다.
닉의 다리에 매달린 아기 곰이라던가, 플리랑 친구 하면 좋은 것 같은 어린 사슴, 겁도 없이 드래곤의 머리 위에 올라탄 용기 넘치는 다람쥐까지 구경한 다음에야 희연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렇게 꿈과 희망, 동화라는 컨셉을 잘 지킬 수 있으면서 이 게임은 왜 평소에는…,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희연은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이 게임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즐거워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