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희연이 작성한 편지는 총 셋으로, 하나를 제외하곤 조언에 따라 모두 신용이 있는 전령조에게 우편배달을 맡겼다.
다른 하나는 다람쥐에게 맡겼는데, 단순히 그녀 자신이 다람쥐가 편지 배달하는 걸 보고 싶어 작성한 나에게 보내는 편지로 별 내용은 없었다.
희연은 다람쥐에게 호두 껍데기 편지함을 넘기면서도 받으리란 기대를 크게 하지는 않았다. 다람쥐가 리본 묶인 호두를 들고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그녀는 큰 만족감을 느꼈다.
반면 전령조에게 우편물을 넘길 때는 부디 이게 제대로 배송되기를 바랐는데, 합법 도박에게 보내는 주문서도 중요했지만 다른 하나가 희연에게는 더 중요한 편지였기 때문이었다.
수신인은 헬르벨. 헬르벨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였다.
헬르벨이 답신을 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신전 쪽은 조용하다던 뉴비 없지와 킹스메이커의 말에 희연은 어렴풋이 그가 잘 지내고 있다 믿고 있었다.
“음….”
선물이라도 같이 보내고 싶었지만 마땅한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던 희연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슬쩍 스킬을 사용했다.
우윳빛을 띤 작은 정화석을 편지에 함께 동봉한 희연은 들키지 않았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는 헬르벨 덕에 스킬은 익혔으나 희연은 신성 스텟의 부족으로 정화석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니 정화석만큼 헬르벨에게 그녀가 성장했음을 보여줄 만한 물건이 없었다.
나무의 수액을 굳혀 편지를 봉한 희연이 값을 지불하고 나오며 일 하나 해결했다는 점에 뿌듯해할 틈도 없이 킹스메이커는 그녀를 데리고 레이가 있는 건물로 뛰기 시작했다.
“…?”
“원래는 중간 과정 다 생략하려 했지만 이렇게 된 거 조금은 챙길까 해서요.”
“뭐를요…?”
킹스메이커는 가보면 안다며 제대로 된 설명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뒤를 일행도 서둘러 쫓아왔고, 모짜렐라는 이번에도 표정을 잔뜩 굳힌 채 뉴비 없지에게 매달려 왔다.
희연은 그 모습에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말을 해주려 했지만 킹스메이커가 먼저 던전에 대한 선행 퀘스트를 빠르게 읊었기에 그쪽에 집중해야 했다.
“자유 도시 에빌론의 주민들은 밤중 기이한 흐느낌을 듣게 돼요. 원인을 알 수 없는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점차 늘게 되고 결국 이방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죠. 이게 던전 들어가기 전에 하는 선행 퀘스트의 주 내용이에요.”
“아, 네…!”
“원인을 찾아 헤매던 이방인은 동문을 지키는 병사로부터 그 흐느낌의 근원지는 무덤가라는 말을 듣게 되고, 무덤가의 검은 탑이 수상하다는 걸 알게 되죠.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말하자 주민들은 이방인에게 행정지구로 가 검은 탑을 철거해 달라는 민원을 넣어달라고 해요.”
하지만 검은 탑은 폐쇄된 옛 신전으로, 한낱 행정지구 직원이 멋대로 철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물이 아니었다. 주민들의 원성을 못 본 체할 수도, 건물을 철거할 수도 없던 행정지구 직원들은 만능 해결사 이방인들에게 퀘스트를 내리게 된다.
검은 탑으로 가 흐느낌의 원인을 제거하기. 그것이 던전으로 들어가는 법을 알기 위해 앞서 하게 되는 퀘스트였다.
킹스메이커의 존재로 도시를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수고를 덜고 마지막 관문만 앞에 두게 된 희연은 이런 식으로 퀘스트를 진행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원래는 다 건너뛰고 그녀를 던전에 넣고 보려 했던 킹스메이커의 행동을 떠올리곤 그래도 되는구나 하고 결론을 내렸다.
좋게 생각한 것은 얼결에 희연과 함께 던전 선행 퀘스트의 압축 스토리를 듣게 된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리아에게선 기대하기 어려운 친절함에 그는 조금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자, 그러면 오리 님.”
레이가 있을 건물 앞에 희연을 내려 준 킹스메이커는 문을 열기 전,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었다.
“이제 레이든 아니면 다른 행정지구 직원이든 상관없으니 안에서 직원을 만난다면 ‘묘지의 검은 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평온한 밤을 보내지 못한대요’, 라고 말해요. 그러면 직원이 ‘이런, 또다시 밤중의 소란이 지속되는군요’, 하면서 던전에 대한 정보를 줄 거예요.”
“…….”
대사까지 다 외우고 있어….
희연은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감탄하는 것도 잊었다. 다른 이들도 이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 희연은 뉴비 없지의 얼굴을 보곤 그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야, 빨리 들어가자.”
“응….”
그리고 그런 쪽으로는 전혀 관심 없는 모짜렐라는 어서 퀘스트 해결하고 던전 가자며 희연을 재촉했다.
성실한 모짜렐라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희연은 때마침 도시 관광 안내자 역할을 맡으러 나가지 않고 건물 내에서 근무하던 레이를 발견했다.
희연과 눈이 마주친 레이는 반갑다며 깃발을 흔들거렸다. 모짜렐라는 그런 안부를 주고받을 시간 따위 없다는 듯, 곧바로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묘지에서 시끄러운 소리 나서 사람들이 밤에 못 잔대요.”
“…….”
킹스메이커가 일러 준 내용과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뜻은 전해졌는지 레이는 곧바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또다시 밤중의 소란이 지속되는군요. 이방인 여러분, 부디 가여운 에빌론의 사람들과 검은 탑의 존재들을 도와주시겠나요?”
[타들어 가는 마음 : 모두가 잠드는 시각,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지며 밤을 방해한다. 무덤가의 옛 신전, 그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가장 담대한 신의 기사만이 그 비밀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의혹과 고통만 쌓여가네,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지’]
[퀘스트 조건 : <멸망한 어느 요정 왕국의 흔적> 1회 클리어]
[보상 : 자유 도시 에빌론의 주민들의 호감
(실패 시 에빌론의 주민들은 삼 일간 당신을 흘겨봅니다.)]
희연과 모짜렐라가 퀘스트를 받자마자 레이는 필요한 정보를 읊어주었다.
“검은 탑의 입구 앞에 서서 태양의 반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여러분은 굉장히 기이한 장소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그곳은 안개가 자욱하고 서늘하죠. 살갗에 들러붙는 습기는 소름 끼칩니다. 흐릿한 하늘이 해를 가려 온기를 기대할 수 없죠. 사람 아닌 것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입니다.”
“…….”
“그곳은 가장 담대한 신의 기사만이 빛을 잃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죠.”
“신의 기사면… 성기사만 갈 수 있다는 뜻인가요?”
다른 직업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싶어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의문은 풀렸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 도시에는 신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가장 담대한 기사는 없으나 신실한 마음 하나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분들이 수없이 많이 계시죠.”
“네에… 신실….”
“그분들의 축복이 함께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하죠. 그러니 부디, 타들어 가는 마음을 달래주세요.”
퀘스트 진행 방향 자체는 어려운 건 없었다. 다만, 킹스메이커가 선행 과정을 요약해주지 않았다면 어지간히 도시를 돌았겠구나 싶어 고인물의 지식이 달콤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당장 지금만 봐도 앞서 많은 것들을 생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전까지 갈 일이 남았다. 원래 방식대로 했었다면 꼬박 하루는 걸렸을 것이다.
신전에만 한 번 들렀다가 바로 동문 언덕으로 가면 되겠다 생각한 희연은 레이에게 꼭 성공하고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한 뒤 모짜렐라와 함께 건물을 나왔다.
“킹 님, 저희 신전….”
“오리 님이랑 오리 님 친구는 신관이라 굳이 안 가도 돼요. 가봤자 잘 해보라는 덕담만 들을 거니까 바로 던전으로 이동하죠!”
“와….”
고인물의 지혜는 정말로 달콤한 거였다.
***
킹스메이커 덕에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된 희연은 그 길로 곧장 동문의 언덕에 있는 무덤가로 이동했다.
무덤가 중에서도 넬과 그레텔의 묘지가 있는 외곽 부근만 돌아다녔던 만큼 희연은 중심에 있는 탑에 가까이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탑 주위에서 서성거리다 갑자기 사라지는 유저들을 본 것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레이가 말했던 대로 태양의 반대 방향으로 돌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보는 희연에게 킹스메이커는 이동하기 전 검은 탑의 안을 먼저 보지 않겠냐 물어보았다.
“이 안이요?”
“다들 던전 갈 생각에 놓치는 일이 많은데, 이 안에는 사실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거든요.”
역시 그냥 있던 건물은 아니구나 싶어 희연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희연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킹스메이커의 뒤를 쫓아 탑 안으로 들어갔다.
“자자, 우리도 들어가자 치즈.”
“난 가기 싫은데요?”
“이런 거 쉽게 있는 기회 아니다 너?”
다른 이들까지 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희연은 먼지 냄새와 뒤섞여 느껴지는 냄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탄내?”
바람이 많이 불고 주위가 탁 트인 바깥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매캐한 향이었다. 희연은 벽을 한 번 만져 손에 묻어나는 재를 확인하였다.
향도 재도, 이 탑이 불에 탄 적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오리 님. 발밑에 조심하고요.”
언제 이동한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벽을 따라 만들어진 나선형의 계단 위에 서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연은 손끝을 문지르다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옛 신전이었다던 이 탑은 에빌론에서 볼 수 있는 신전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딱 기본적인 탑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재료 또한 금이나 상아 같은 것이 아닌 흔히 볼 수 있는 돌이었다.
오로지 사람의 정성으로만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만큼 오래된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킹스메이커의 뒤를 따라 올라간 위층에 있던 것은 단출한 제단과 부서진 석상이었다.
그나마 창이라도 있던 아래층과 달리 위층에는 구멍이라곤 천장에 작고 둥근 구멍 하나밖에 없어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자그마한 햇빛이 내부를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기에 실상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서로의 윤곽 정도뿐이었다.
이런 어두운 곳으로 들어오는 일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희연과 모짜렐라를 제외한 일행들은 자연스럽게 인벤토리에서 등불이나 촛대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희연은 그 모습에 자신도 자체 발광 에흐테라도 꺼내야 하나 싶었지만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킹스메이커가 먼저 손짓했다.
“자, 여기 봐요 오리 님.”
킹스메이커가 가리킨 것은 윗부분이 부서진 석상이었다. 그을음이 진 밑동과 달리 부서진 부분은 그 색이 밝았다. 그것을 통해 이 석상이 부서진 것은 이 탑에 불이 난 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석상을 부순 건 나예요.”
“…네?”
“원래 수상해 보이는 건물이 있으면 들어가서 땅을 파고 벽을 부수고 물건은 던져서 깨는 게 RPG의 전통이거든요.”
“네에….”
“그리고 보면 괜히 부수고 싶잖아요.”
“그렇구나….”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을 애써 일종의 탐구 정신으로 해석했다. 그러자 어떤 탐구 정신의 충족을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을 얻었기에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나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이 석상에 숨겨져 있던 건 이거였어요.”
킹스메이커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제법 묵직한 수정 구슬이었다. 점괘라도 봐줄 것 같은 물건의 등장에 희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흑마법사의 금지된 마법서 같은 거라도 나왔을 줄 알았어요?”
“조금…?”
“그런 게 나왔다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었을 것도 같지만, 아쉽게도 이건 흑마법사랑은 거리가 먼 물건이에요. 신전 쪽 관련 물건이거든요.”
신전 쪽 물건이란 말에 희연은 마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마리아는 무척이나 탐난다는 얼굴을 하고 수정 구슬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마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이세인도, 모짜렐라도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만 뉴비 없지는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그러한 태도는 킹스메이커로부터 수정 구슬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나온 체념에 가까웠다.
이리저리 살펴보느라 바쁜 희연의 반응에 킹스메이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쟤네 다 이거 못 뺏어요, 오리 님. 쟤네가 무슨 수로 나한테서 이걸 가져가겠어요.”
킹스메이커의 놀라운 자신감은 허세가 아닌 엄연한 근거가 있기에 나오는 태도였다.
“그런데 없지 님은….”
“왜 없지한테 안 줬냐고요?”
킹스메이커가 신전의 아이돌, 유망한 성기사 뉴비 없지를 배제한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굳이 이런 거 챙겨주고 싶을 정도로 내 눈에 예쁘게 보이진 않았으니까?”
“…….”
“우리는 그렇게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노예 계약서를 작성한 게 아니었거든요.”
희연은 뉴비 없지가 함무라비 길드, 킹스메이커의 수집품 출신임을 다시 상기했다. 지금이야 두 사람은 어깨동무하며 어디 한 번 뉴비를 키워볼까 하는 사이지만 과거에는 확실히 갑을 관계가 뚜렷했던 듯했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이 아이템이 무슨 용도인지 보여줄게요. 없지 없지, 네 피 좀 줘봐.”
어쩌면 그 갑을 관계는 닉의 등장과 함께 해방된 이후로도 이어지는 걸지도 몰랐다. 희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희연의 의심에 불을 지피듯 뉴비 없지는 피를 내놓으라는 흑마법사의 말에 흑흑거리기만 하고 손을 내밀었다. 싫다는 말 한 번 안 하는 것이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하는 의심을 들게 만들었다.
뒤늦게 희연을 의식한 킹스메이커는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바꿨다.
“네 몸속에 흐르는 초콜릿 좀 줄래?”
말을 바꾸니 흑마법사보다는 마녀처럼 보였다. 뉴비 없지 또한 그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딴지를 걸었다.
“그런 말이 더 무서운데.”
킹스메이커는 마치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것처럼 이번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