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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세스 메이커 (210)화 (210/251)

210화

말을 살벌하게 해서 그렇지 킹스메이커가 뉴비 없지로부터 피를 뽑아가는 과정은 잔인하거나 하진 않았다.

건틀릿과 장갑을 벗으며 드러난 뉴비 없지의 손가락 끝에 킹스메이커는 바늘을 콕 찔렀다. 주사기라도 꽂으려나 싶었던 희연은 예상보다도 간결한 채혈에 조금 멋쩍어했다.

킹스메이커는 피 묻은 바늘을 곧장 제단 위에 올렸다. 마치 제물이라도 바치는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제물이라고 하기엔 피 묻은 바늘은 조금 초라한 구석이 있었다.

“제물로 저거 하나만 바쳐도 되는 거예요?”

“이거 제물 아니에요 오리 님.”

“?”

당연히 제물일 것이라 생각했던 희연은 조금 당황했다.

“없지의 피는 제물이 아니라 일종의 열쇠 역할인 거예요. 가장 담대한 신의 기사. 그게 성기사라는 건 알죠? 성기사 피가 열쇠인 거예요.”

“아….”

“오해한 것 같아서 말하지만, 난 없지 없지를 예뻐하지 않는 거뿐이지 굳이 호불호를 가리자면 호에 가까워요. 재밌잖아요.”

킹스메이커의 말에 뉴비 없지는 아주 잠깐 감격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뉴비 없지는 말에 담긴 묘한 어조를 알아차렸다.

“재미없었으면…?”

“지금 내 앞에 네가 없지 없지.”

“…….”

뉴비 없지가 거짓으로 훌쩍이며 킹스메이커에게 제 설움을 알아 달라 티를 내던 그때였다. 묵직한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천장의 유일한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기둥이 내려앉는 곳이었다. 둥글게 패인 홈이 위로 툭 튀어나온 것을 본 희연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어 킹스메이커를 바라보았다.

킹스메이커는 수정 구슬을 들고 빛기둥에 접근하더니 툭 튀어나온 바닥을 그냥 발로 쳐서 밀어내 버렸다. 좀 더 신비롭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기대했던 희연은 그 모습에 그냥 구멍 밑에 뭐가 있는지나 확인하기로 하였다.

“바람이 부네요?”

둥근 구멍 아래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지만 어떠한 장치가 되어있는 것인지 제법 세기가 강한 바람이 솔솔 불고 있었다.

킹스메이커는 들고 있던 구슬을 그 바람결 위에 올려두었다. 그대로 떨어져서 깨질 것 같던 구슬은 그대로 날아올라 천장의 구멍으로 끼워졌다.

투명한 구슬에 빛이 쐬어지니 어두운 방 안 내부로 굴절된 빛이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마치 반짝이는 해수면을 물속에서 보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다들 불 꺼.”

킹스메이커의 말에 따라 촛대와 등불 등에서 타오르던 불이 꺼졌다. 굴절된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기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밝아져 시야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킹스메이커가 불을 끄라고 한 이유는 단순히 이곳이 이제 더 이상 어둡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바닥 아래에서 부는 바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에 따라 천장 구멍에 끼워진 수정 구슬 또한 도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려졌다.

벽과 바닥, 일행의 얼굴 위로 드리워진 빛이 일렁이고 꼬이더니 점점 무언가의 형체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말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방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자연스레 방의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등을 맞대고 선 희연은 일렁이는 빛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빼놓지 않고 보겠다는 것처럼 집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빛은 형상을 완성했다. 네 개의 나무였다. 그들 일행이 서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린, 뿌리를 공유하는 나무.

그러나 그중 하나는 밑동만 남아 있어 몸통을 길게 빼고 벽에 빼곡하게 가지를 드리운 것은 셋뿐이었다.

“어, 저 나무….”

희연은 그중 나무 하나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다른 나무와 달리 잎이 그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진 그것은 킹스메이커의 지하 공방에서 보았던 마법진이었다.

“세피로트의 나무….”

이름을 기억해 낸 희연은 저게 왜 여기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장소는 신전이었고, 희연이 알기로 저 세피로트의 나무는 마법사 직종 관련 나무였다. 그리고 신전은 흑마법사인 킹스메이커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반되는 두 개가 함께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오리 님, 이리로 와 봐요.”

이 장소가 무엇을 보여주려 있는 장소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희연은 일단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따르기로 하였다.

어느새 벽 쪽으로 이동한 킹스메이커는 이것 좀 보라며 희연에게 뭉개진 빛 덩어리 같은 나뭇잎을 가리켰다.

“여기 잎 부분을 잘 봐봐요 오리 님.”

“?”

희연은 뭐 색다른 거라도 있는 건가 싶어 요리조리 살펴보았지만 그녀 눈에는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희연이 특별한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글자다.]

“…글자?”

이게 어딜 봐서 글자냐는 뜻이 노골적으로 담긴 희연의 어조에 킹스메이커는 조금 웃다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 이 나뭇잎, 전부 다 룬 문자예요 오리 님.”

“…와아?”

의미 없는 감탄사를 뱉은 희연은 다시 자세히 나뭇잎을 살펴봤지만 그녀에겐 여전히 그냥 뭉개진 빛덩어리일 뿐이었다.

“한 글자도 못 읽겠어요….”

킹스메이커도 청산가리도 언어 쪽 공부를 하라 충고한 적 있던 만큼 희연은 차마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킹스메이커는 개의치 않아 했다. 도리어 조금 발랄한 어투로 희연을 다독이기까지 하였다.

“이거 던전 끝나고 같이 룬 문자 공부하면 되죠.”

“…….”

“딱, 룬 문자 중급까지만 따 봐요 우리.”

“어, 없지 님도 룬 문자 중급이에요?”

“아….”

킹스메이커의 표정이 굳는 것만 봐도 답은 알 수 있었다. 희연은 혹시 킹스메이커가 뉴비 없지를 예뻐하지는 않는다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인가 싶어져 조금 망설이다 말을 덧붙였다.

“공부해 볼게요….”

킹스메이커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이후 방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줄 때도 킹스메이커는 연신 생글생글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아가 질색할 정도였다.

물론 킹스메이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말이다. 현재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희연에게 이 방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거였다.

“저 수정 구슬이랑 이 방의 장치는 요정 무덤 설명 들을 때 들은 가장 담대하다는 그 기사가 만든 걸 거예요. 이 나무는 세피로트의 나무, 저건 세계수로 추정되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 뭔지 밝히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류의 나무일 거고. 잘린 나무 하나는 뭔지 짐작도 가지 않고요.”

“그렇구나….”

“지금 당장은 필요 없어 보이는 정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이런 게 도움이 되곤 하거든요.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정보니까 알아두라는 의미에서 왔죠. 그리고….”

킹스메이커는 손을 들어 어느 나뭇잎 하나를 가리켰다. 희연이 보기엔 다른 것보다 조금 더 길어 보이는 뭉개진 빛덩이일 뿐이었다.

“자미엘.”

“네?”

“이 글자. 이거 자미엘이라는 뜻이에요.”

놀라 눈을 크게 뜨는 희연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벽을 툭툭 두들겼다.

“여기 있는 이 나무의 잎, 이거 전부 이름이에요. 아마도 전부 악마 이름인 것 같고요.”

“…….”

“이것 때문에 오리 님 저주를 해결하려면 담대하다는 그 기사를 찾아야 하나 싶었어요. 아니면 저주받은 오리 님을 여기로 데리고 온다면 무슨 색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 같은데요…?”

“맞아요. 아쉽게도 그런 것 같아 보여요.”

다 밝혀서 괜찮다고 생각한 것인지 킹스메이커는 희연을 빛기둥이 쏟아지는 위치에 세워보기도 하고 제단 위에 눕혀보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반응이 있었으면 진즉 있었을 거라는 것을 보여주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은 기대했던 희연도 내심 아쉬워하며 제단 위에서 일어났다.

“음… 아니면 역시 그 담대한 기사라는 호칭이나 업적을 얻어야 하는 걸지도 몰라요.”

“던전 돌면 주나요?”

“아뇨. 그런 류의 칭호는 애초에 쉽게 주는 게 아니라 겨우 남들 다 돌 수 있는 던전에서 주지는 않죠.”

역시 그렇겠지, 하는 생각을 하던 희연은 문득 킹스메이커가 그녀를 던전에 보내려 고집부렸던 것을 떠올리곤 조심스레 질문하였다.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제가 던전 돌다가 칭호 얻어온다거나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나요…?”

“아이참, 티 났어요?”

무지 티 났다.

킹스메이커는 희연이 시작하자마자 얼결에 헬르벨의 퀘스트를 하고 백발백중 명사수가 되는 오페라 칭호를 받은 뒤 메인 스토리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해서 가끔 과한 기대를 할 때가 있는데, 그녀는 룬 문자 하나 못 읽는 뉴비일 뿐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운이 계속될 리도 없었고, 애초에 운이라기보단 휘말려서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에 가깝다는 것이 희연의 생각이었다.

캐릭터 생성을 할 당시 이름 없는 그분이 이것저것 챙겨주어 에흐테흐 숲을 갔기에 에흐테도 만나고 여우의 인정을 받아 헬르벨을 만나게 된 거였다.

그 이후에도 게임의 요소를 요목조목 잘 아는 길드원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고 말이다.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가 뉴비 한 번 더 잘 키워보자 하지 않았다면 희연이 얻었던 많은 기회는 없던 일이 되었을 것이다.

“던전 도는 거야 열심히 하긴 하겠지만, 또 숨겨져 있던 히든 피스를 찾았다 같은 일은 기대하지 마세요. 흔한 일 아니잖아요….”

“물론 잘 알기야 하죠. 하지만 사람은 원래 기대하면서 사니까 인생이 재미있는 거잖아요. 말하지 않았나? 오리 님한테 내 인생을 걸고 싶다고?”

그 말 할 당시만 해도 눈오리 키우기가 단순히 새 뉴비 키우기의 연장선, 즉 재밋거리 정도로만 생각했으면서 킹스메이커는 뻔뻔하게 굴었다.

희연은 그때와 비슷한 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

탑 안에서 보게 된 숨겨진 비밀은 신기하긴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리 소득 있는 정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혹여나 킹스메이커에게서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모짜렐라를 앞세우고 탑 안으로 진입했던 마리아는 대놓고 실망한 티를 냈다.

그런 마리아와 달리 희연은 그런 쪽으로 영 욕심이 없어서 탑을 중심으로 해의 반대 방향으로 돌다 보니 주위 풍경이 바뀌고 두근두근 모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신나 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동한 장소가 왜 요정의 무덤이라 줄여 부르는지 알 것 같은 모습을 한 것을 보고는 희연도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멸망한 어느 요정 왕국의 흔적>, 그곳은 앞서 레이가 말해주었던 대로 안개가 자욱하고 서늘했다. 눅눅한 습기와 햇살 같은 걸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알맞게도 그곳은 묘지였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묘지.

당장에라도 저 땅에서 무언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에 희연은 일단 신성 토템 뉴비 없지 쪽으로 바짝 붙었다.

킹스메이커는 든든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풍경에서는 위험의 수위를 높이는 직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희연의 선택은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다만 희연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런 희연의 뒤로 모짜렐라 역시 바짝 붙었다는 점이었다.

“…?”

의아해하며 뒤도는 희연에게 모짜렐라는 앞을 보라며 타박만 주었다.

왜 그러는 건가 싶어 걱정하면서도 희연은 일단 주위를 살펴 쉼터 같은 곳은 없나 찾기 시작했다.

넬을 만나게 되었던 던전 앞에는 쉼터는 물론이고 유용한 정보를 나누라며 만든 게시판도 있었기에 이곳에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있을 거라 믿은 것이다.

제 뒤에서 두리번거리는 희연의 기척에 뉴비 없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보았다.

“오리 님 뭐 찾아요?”

“쉼터요. 전에 간 던전에는 있었는데 여기는….”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는 거라곤 무덤, 비석, 관리되지 않은 오래된 무덤가에 있을 법한 것들뿐이었다.

뉴비 없지는 조금 멋쩍어하며 답을 알려주었다.

“여기 컨셉이 컨셉이라 쉼터가 있었는데….”

“아, 없앴어요?”

“없애긴 없앴죠… 게임사가 아니라 유저들이….”

컨셉을 지키도록 도와주겠다는 의도였던 걸까? 희연은 그것참 이해 못 할 짓이라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쉼터도 없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서 모여 어떻게 파티를 만드나 싶어 걱정도 되었다.

혹시 킹스메이커와 뉴비 없지, 그리고 닉이 함께 던전을 돌아주는 건가 싶어 조금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던 희연은 무언가 제 발목을 잡는 느낌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악!”

“으와아아악!”

덩달아 놀란 모짜렐라는 희연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르더니 펄쩍 뛰기까지 했다.

땅에서 튀어나온 손에 놀랐던 것도 잠시, 희연은 왜 여기 오는 내내 모짜렐라의 태도가 불퉁했고, 자꾸만 도망가려 했는지 알 것 같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발목을 붙잡은 손은 이미 뒷전이었다. 펄쩍 뛰어오른 모짜렐라가 자진해서 뉴비 없지에게 매달린 것보다는 임팩트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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