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모두가 저를 놀리는 듯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모짜렐라는 그 이상 긴말하지 않고 먼저 촛농 자국을 쫓아 성큼성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치즈! 그렇게 먼저 가다가 지나가던 귀신한테 잡힌다?”
“시끄러워요!”
“그렇게 먼저 가다 기절이라도 하면 그게 더 쪽팔린 거야!”
“조용히 좀 하라고!”
끝까지 놀리는 마리아 때문인지 모짜렐라는 정말로 단 한 번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멀어지는 모짜렐라를 보며 킹스메이커는 웃음기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친구네.”
“그치? 그래서 나도 제법 귀여워하고 있어.”
모짜렐라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말을 마리아는 당당하게 했다. 희연은 킹스메이커가 그리 장난기가 다분한 성격이 아님에 감사하기로 하였다.
“자, 그러면 우리도 서둘러 가볼까요?”
“네에….”
앞서 희연이 예상했던 대로, 남은 촛농 자국을 쫓아 걸으면 되었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더불어 마리아가 모짜렐라를 겁준 것이 무색하게도 갑자기 발을 잡는 손 이벤트 같은 것은 또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희연의 발을 잡은 손 또한 등불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장치였던 듯했다.
“아, 저기 있다.”
모짜렐라의 하늘색 긴 머리와 하얀 신관복은 이런 어두운 장소에서 더 눈에 띄는 조합이었다. 일행은 어렵지 않게 앞서 뛰어나간 모짜렐라를 찾을 수 있었다.
“으애앵….”
“울지 말라고….”
모짜렐라는 작은 초를 손 위에 올려놓고 울음을 달래고 있었다. 별로 효과가 있었던 건 아닌 듯했다.
머리카락을 헝클이던 모짜렐라는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약간의 짜증스러운 기색이 얼굴에 스치긴 했지만, 그는 끝내 한숨 한번을 내쉬고는 작은 초를 킹스메이커와 마리아가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마리아는 대놓고 웃었다. 웃느라 바쁜 그녀를 대신해 뉴비에게는 비교적 친절하게 대해주는 킹스메이커가 답을 알려주었다.
“머리 위에 불 꺼주면 안 울어요.”
“…죽는다면서요.”
“당연히 비유죠. 초는 무생물인데 죽긴 뭘 죽어요.”
킹스메이커의 답에 희연도 모짜렐라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정도 있고 악마도 있으며 악령이 인형 몸도 차지해 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새삼스레 무생물 운운하는 것이 낯설었다.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짓던 것도 잠시 모짜렐라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작은 초의 불꽃을 후 불어 꺼버렸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엉엉 울던 초의 울음소리가 잦아지며 녹아내리던 촛농이 굳었다.
작은 초는 그저 아주 짧고 울퉁불퉁하다는 거 외엔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초로 돌아갔다.
그제야 희연은 고개를 들어 작은 초가 그들을 어디로 이끈 것인지 확인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자욱한 안개조차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검은 탑. 그들을 기다리는 건 그 검은 탑이었다.
“아까 본 탑이네요?”
“음… 같지만 다르죠.”
“?”
뜻 모를 이야기를 한 킹스메이커는 방긋 웃기만 하더니 희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등불부터 줄래요? 초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먼저라서요.”
“…….”
“?”
대답 없이 표정이 굳은 희연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킹스메이커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희연의 손은 빈손이었다.
“…내가 깜박하고 챙겨야 한다는 말을 안 했네요. 많이들 하는 실수라서 먼저 일러줬어야 했는데.”
“가서 갖고 올게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려 하던 희연을 막은 것은 닉이었다. 닉의 손에는 희연이 두고 온 등불이 들려 있었다. 아무도 챙기지 않아 그가 챙긴 듯했다.
“닉 님…!”
“길마님….”
“우리 길마님이…!”
희연과 킹스메이커, 뉴비 없지는 모두 감동해 닉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희연은 닉이 자신의 실수를 수습해 줬다는 데서 온 감동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의 뉴비 1기가 2기를 챙기는 모습에 감동한 거였다.
닉은 두 부길마의 시선은 무시하고 희연에게 다음에 올 땐 잘 챙기라는 충고만 했다.
“다음부터는 꼭 챙길게요!”
닉에게 다짐한 희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등불을 킹스메이커에게로 넘겼다. 킹스메이커는 초를 다시 촛대에 꽂더니 등불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
“자, 끝!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신 등불이 날아간 방향과 킹스메이커를 번갈아 바라보던 희연은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발을 떼지 못했다. 그건 모짜렐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킹 님…?”
“네?”
“등불…, 그, 초…. 왜…?”
“원래 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체 왜…?
희연은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짜렐라를 제외한 모두가 덤덤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닉마저도 말이다!
설마하니 선행 퀘스트 중에 마지막엔 등불을 던지라는 말이 있었던 건가 싶어 희연은 확인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답은 긍정이었다.
“이렇게 던져놔야 다음 사람이 또 저거 주워서 여기 올 수 있거든요. 저 등불이 워프 포인트이기도 하고요. 우리도 등불 근처로 이동했었잖아요.”
“…그러면 그냥 등불을 이 앞에 둬도 되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멀리 던지면 다음 순번 사람은 먼 길을 걸어야 했다. 희연의 말에 킹스메이커는 조금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만 당할 수는 없으니까?”
“…….”
“농담이고, 바로 이 앞에서 워프하게 되면… 마침 있네. 저걸 보면 등불을 던져주는 게 배려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오리 님.”
“?”
킹스메이커가 가리키는 방향에는 이제 막 이곳으로 이동된 것으로 보이는 어느 일행이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 놓인 등불을 뒤늦게 본 희연은 곧이어 익숙해지려야 그럴 수가 없는 울음소리가 등불에서 나는 것을 듣고는 서둘러 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서글픔이 담긴 울음은 그 울음의 주인이 얼마나 슬픈지 알게 해주면서도 굉장히 듣기 괴로운 소음에 가까웠다. 귀를 틀어막는 것은 낯선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어?”
처음부터 그쪽을 지켜보고 있던 희연은 그들 주위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형상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울음을 듣고 찾아온 것 같은 희끄무레한 것들이 하나둘 어린 소녀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달빛 요람의 숲에서 만났던 소녀 유령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모습에 놀랐던 희연은 이어 그 유령 소녀들이 낯선 일행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더 이상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낯선 일행을 괴롭히는 유령 소녀들이 깔깔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에서 손을 뗀 희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등불을 던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바로 앞으로 이동하면 밴시가 몰려들거든요. 참고로 밴시는 몬스터예요 오리 님. 유령, 악령 이런 거 아니고 그냥 언데드 몬스터.”
서로를 위해서라도 유저 입장에선 등불을 던지는 게 필수란 뜻이었다. 어쩌면 등불의 작은 초가 서럽게 울었던 것은 자신이 던져질 미래를 알고 울었던 걸지도 몰랐다.
밴시들의 괴롭힘은 괴롭힘이라 해봤자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거나 괜히 툭툭 친다거나 하는 소소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상대는 괴로워한다기보다는 성가셔하는 반응에 가까웠다.
심지어 몬스터라는 킹스메이커의 말마따나 공격도 가능해 보였는데, 괜히 유령 모습이 아닌 듯 공격을 가한다 해도 아주 잠시 행동을 저지당할 뿐이지 다시 살아나 괴롭힘을 이어 나갔다.
“저런 유령형 몬스터는 신관, 성기사가 아닌 이상 무기에 성 속성 버프를 걸어야 처리할 수 있어요. 아니면 네크로맨서나 흑마법사가 필요하고요.”
낯선 일행 중에는 신전 직업이나 네크로맨서, 혹은 흑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성가신 벌레라도 내쫓듯 손을 휘적거리다 서둘러 탑 안으로 들어섰다.
밴시들은 탑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인지 아쉬워하며 흐느낄 뿐 그들을 쫓아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괴롭힘의 대상이 사라졌으니 이만 갈 길 가면 좋았을 것을, 밴시들은 희연 일행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눈동자 없이 몸처럼 희끄무레하기만 한 눈을 마주 본 희연은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다 슬그머니 뉴비 없지 쪽으로 이동했다. 모짜렐라도 함께였다.
“총 들어야 할까요?”
“아뇨. 쟤들은 이 앞으로 이동하는 사람만 괴롭혀요. 지금 우리 쪽을 보는 건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킹스메이커는 말끝을 흐리며 닉 쪽을 바라보았다.
“밴시가 언데드는 언데드인데 굳이 세세히 따지고 들면 요정 쪽이기도 하거든요.”
“아.”
닉을 보며 오열했던 티티와 유난히 그에게 관심을 보였던 요정 왕국의 픽시들을 떠올린 희연은 쉽게 수긍했다. 다시 보니 밴시들은 닉을 보며 흐느끼면서도 조금 들뜬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유난히 요정에게 인기 많은 특이한 패시브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닉은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담담히 서 있었다. 눈치 보듯 서성이던 밴시들은 용기를 내서 닉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닉과 달리 루로는 요정이면서 동시에 몬스터인 밴시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조그만 송곳니를 드러내며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음…, 이렇게 된 거 CC기 걸은 셈 치고 그냥 공격할래요, 오리 님? 짠, 경험치가 제 발로 찾아왔어요!”
“…그냥 갈래요.”
“그럴래요? 조금 아쉬운데…. 아니면 악령이 보고 먹으라 해도 되는데 그건요?”
저를 부르는 말에 희연의 어깨에 매달려 꾸벅꾸벅 졸던 악령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펴본 악령이는 밴시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 희연의 얼굴에 매달렸다.
“유령이다!”
“…?”
악령이 유령을 보고 놀랐다. 희연은 조금 황당하다는 눈으로 뺨에 찰싹 붙은 악령이를 보아야 했다.
“먹을래 악령아?”
그러나 악령이는 놀란 것도 잠시, 사악한 흑마법사의 물음에 조금 망설이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에 희연은 악령이가 정말로 밴시를 먹을 수 있구나 싶어 조금 놀라기는 했다.
요정 왕국에서 사악해 보이는 뱀을 먹기도 하고, 넬을 조금 맛본 적도 있긴 했지만 악령이가 유령을 흡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악령이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를 미래를 앞둔 밴시들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재주는 없는 것인지 아직도 닉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악령이에게 먹히기 전에 루로에게 물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희연의 생각대로 악령이가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잔뜩 심통이 난 루로가 제멋대로 차가운 서리를 흩뿌렸고 그에 밴시들은 훌쩍이며 멀리 도망가 버렸다.
악령이는 그 모습에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다음에도 같은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겠다 다짐하듯 짧은 팔을 파닥거리기까지 했다.
“저런. 제 발로 찾아온 경험치였는데.”
킹스메이커 또한 아쉬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 같던 그녀는 뜻 모를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속셈인가 싶어 킹스메이커의 안색을 훑어보던 희연은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움찔거렸다.
그러나 희연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킹스메이커는 그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에 집중했다. 상당히 의외였다.
“오리 님. 이제 이 탑 안으로 들어가면 검은 베일을 뒤집어쓴 NPC를 한 명 만나게 될 거예요. 던전 자체는 이 문 반대편에 있는 문만 열면 진입이 가능하지만 겸사겸사 퀘스트 받아 가야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 잊으면 안 돼요?”
“네에….”
“어려운 건 없고, 그냥 여기를 지나갈 때면 그 NPC한테 왜 우냐고 물어봐 줘요.”
레이의 퀘스트는 단일성이지만 탑 안 NPC의 퀘스트는 반복이라는 말을 덧붙인 킹스메이커는 그 외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일단, 파티창 들어가서 길드명은 비공개로 바꿔요. 여기 애들 중엔 질 나쁜 애들 많아서 가리는 게 낫거든요.”
길드 정보를 공개해놨다가 이미 한번 치졸하고 졸렬한 인간을 겪어본 적 있던 희연은 고개를 끄덕이곤 정보를 비공개로 바꾸었다.
“가렸어요.”
이젠 세세한 설명 없이도 설정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희연은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오리 님, 이젠 알죠? 여차할 때는 다 엎는 거예요.”
“…그런 건 권장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에이.”
아니라고는 절대 말 안 한다는 점에서 킹스메이커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아, 그리고 이번 던전은 맵이 넓어서 초행자는 길 찾는 게 조금 어려운 편이에요. 이름 없는 자들의 설움 던전 같은 일자형이 아닌 필드 맵이거든요.”
길드 성의 온실에서도 길을 잃어봤던 희연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킹스메이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경험에서 나온 것 같은 충고를 해주었다.
“길을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처음 보는 몬스터가 나오는 쪽으로 움직여요. 그게 답이에요.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다는 가장 객관적인 증거죠.”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