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따로 필드에 나가서 사냥한 경험이 없는 희연은 킹스메이커의 말만 듣고 생각보다 길 찾기가 어렵지는 않겠구나 하는 희망찬 생각을 했다.
반면에 모짜렐라는 길 잃으면 표지판을 찾아봐 수준의 말을 팁이랍시고 주는 킹스메이커를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상반되는 반응을 보며 킹스메이커는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쪽이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다고 태평히 생각했다. 어지간히 길 못 찾으면 답답해서라도 마리아가 도와줄 것이란 걸 알았기에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앞장서 걸어가던 킹스메이커는 탑의 입구에 도착하자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희연은 그 모습에 정말로 이번 던전도 킹스메이커는 함께 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충고도 이미 해줬고 정 아니면 엎으라는 덕담도 했으니 난 더 할 말이 없네요. 잘하고 와요 오리 님!”
“네!”
인사를 마친 희연은 탑의 문을 열며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간 것인지 킹스메이커도 뉴비 없지도, 닉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안 보여 더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배경을 바라보다 희연은 천천히 탑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화려한 장식 하나 없고 섬세한 손기술도 보이지 않는, 오로지 순수한 사람의 정성과 노동력으로만 만들어진 탑. 동문의 무덤가에 있는 검은 탑과 이곳의 검은 탑은 부르는 방식뿐만 아니라 모습마저 똑같았다.
그러나 같은 곳이지만 다른 곳이라던 킹스메이커의 말처럼 이곳은 같으나 다른 곳이었다.
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손에 그을음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곳은 불에 타기 전의 탑이었다. 마치 이 탑을 중심으로 이 부근만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또 다른 점은 문이 하나 더 있다는 점이었다. 나선형의 계단이 시작되던 부근에는 그 대신 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 문에는 기대어 울음을 흘리는 여인이 있었다.
울음소리는 밴시의 것처럼 서글펐지만 지친 듯 소리가 작아 듣기 거북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듣는 이로 하여금 애달픈 감정이 들게 하는 울음이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잦아진 것은 여인이 그들을 보았을 때였다.
검은 망토, 검은 장갑. 머리에 뒤집어쓴 땅에 끌리는 검은 베일. 발끝 하나 보이지 않는 검은 드레스. 이 검은 탑처럼 모든 것이 검었다.
이름 모를 검은 여인은 검은 천 자락을 바닥에 쓸며 천천히 걸어왔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비단신은 자그마한 소리 한 점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여인의 걸음은 마치 부유하는 것만 같았다.
“이방인…?”
울음 탓에 가늘어진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베일이 두꺼워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희연은 이름 모를 여인을 보며 마스커레이드에서 보았던 에빌론의 왕녀를 떠올렸다. 꼿꼿한 자세와 베일 너머로 느껴지는 상대를 똑바로 마주 보는 눈빛의 윤곽이 그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희연이 그녀와 왕녀를 겹쳐 보느라 답이 늦어지자, 여인은 다급히 되물었다.
“이방인이 맞나? 맞다면 괜히 나를 애타게 하지 말고 맞다고 해주게!”
“아, 네! 맞아요!”
희연의 답에 여인은 기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안도하면서 슬퍼하였다.
“아아, 무심하신 분이여. 오늘도 제게 이렇듯, 잔혹한 희망을 보내셨군요….”
잔혹한 희망…?
아직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희연은 일단 잠자코 서서 상대가 할 말을 기다렸다.
여인은 옷자락 속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더니 베일 속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다시 베일 밖으로 나온 손수건에는 눈물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천의 색이 짙은 탓에 잘못 본 건가 생각하며 희연은 다시 여인의 눈으로 추정되는 부근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왔지? 나의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는 이들의 하소연? 그도 아니면 나와 함께 울어주는 밴시들의 울음소리에 이끌려 이곳에 당도하였나?”
노래하듯 말하는 여인의 움직임은 조금은 과한 구석이 있어 마치 한편의 극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겹겹이 두른 검은 천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우아함이 그녀를 결코 우습게 만들거나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가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인들 나를 농락하는 게 아닐 것이야.”
“…….”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내 눈을 마주 볼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내 울음소리에 고개를 기웃거릴 호기심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대, 이방인. 먼 곳에서 온 이름 모를 방랑자여, 부디 나를 동정해 주오.”
[멈춰버린 태양 : 검은 탑의 이름 모를 여인은 매일 구슬픈 울음을 흘린다. 멈춰버린 태양 아래 검은 탑, 그곳에 사는 타락한 요정 왕이 그녀의 가장 소중한 보물들을 앗아 가버렸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의혹과 고통 속에 살다 검은 베일 속에 숨어든 그녀에게 잠깐의 안식을 안겨주자.
‘고통과 의혹 끝에 남은 것은 잔혹한 희망이다’]
[퀘스트 조건 : 방황하는 이들의 속박 풀기]
[보상 : 어느 왕국의 보물 상자
(실패 시 하루 동안 던전 <멸망한 어느 요정 왕국의 흔적> 도전 불가)]
어느 왕국이랑 어느 요정 왕국은 다른 건가?
설명과 보상을 차례로 훑어본 희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일단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던전을 진행하다 보면 의문은 자연스레 풀리리라 생각한 것이다.
검은 베일 여인은 이방인의 자비에 감사하다는 말을 한 뒤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타락한 요정 왕이 앗아간 그녀의 보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네. 무척이나 오래된 낡고 빛바랜 이야기이지. 나에게는 세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네. 느긋한 오후에 햇살과 함께 찾아온 카나리아 같은 아이들이었어. 무척이나 우애 좋던 나의 아이들이었지.”
아이들이 신전에 방문한 어느 날, 딸 버드 엘렌이 사라졌다. 사라진 누이를 찾기 위해 첫째 아들이 떠났다. 이어, 둘째 아들이 떠났다.
아이들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막내 아이 차일드 롤랜드가 사라진 제 형제들과 누이를 구해오겠다며 내게 자신이 떠날 것을 허락해 달라 하였네. 나는 마지막 하나 남은 자식을 보내고 싶지 않아 고집을 부렸지만 끝끝내 내 아이는 나를 떠나 버리고 말았지.”
검은 베일 여인은 눈물을 머금고 떠나는 마지막 아이에게 단 한 번도 헛되이 쓰인 적 없는 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의 검을 허리에 매어 주었다.
승리를 기원하는 주문을 외우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돌아오지 않았네. 아무도.”
“…….”
“이 문 너머에서 내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앞에서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우는 것뿐이지. 위대한 마법사도 가장 담대하다는 신의 기사도. 그 누구도 내 아이들을 구원하지 못했네.”
여인은 문에 몸을 기대었다. 힘없는 몸짓이었다.
“이 안에는 내 아이들 외에도 여럿이 갇혀 있다, 마법사가 그리 말했지. 그들의 도움 없이는 나아갈 수 없다, 기사가 말했어. 자비를 아는 그대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부디 앞으로 나아가시오. 그대의 값싼 동정을 우리에게 베푸시오. 진실의 잔혹함은 감히 외면하겠습니다. 신이시여….”
“아….”
순식간이었다. 눈 한번 깜박이는 사이 검은 베일 여인은 모습을 감추었다.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희연의 모습에 마리아는 정신 사납다며 그녀의 목을 붙잡았다. 별님을 만나러 가게 되는 줄 알고 움찔거렸던 희연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여전함에 안도하며 조심히 마리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원래 할 말 다하고 나면 사라지는 NPC니까 정신 사납게 둘러보지 말고 파티나 잡아. 치즈 너도.”
킹스메이커가 없어서일까, 마리아의 행동은 조금 더 거칠어졌다.
이런 저렙용 던전에 온 것이 불쾌한 것인지 가르치는 게 귀찮아서 그런 것인지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희연은 심기를 거스르지 말자 다짐하였다.
희연은 파티창을 열어 어느 파티에 신청을 넣어볼까 모짜렐라와 의논해 보았다.
“여기 이 파티에 있는 사람 직업이 탐험가래! 여기 들어가면 길 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탐험가 그거 쓰레기 직업인데.”
“…테이머보다?”
“테이머보다.”
만인의 놀림거리 테이머보다 더한 직업이란 말에 희연은 조금 놀랐다. 그런 희연과 모짜렐라를 바라보던 이세인은 심심해서 따라온 게 아니라는 듯 파티를 고를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먼저 봐야 하는 건 파티에 있는 사람 직업이 아니라 우리 전부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남았는지야.”
“아.”
“그리고 힐러를 아직 구하지 못했으면서, 탱커와 딜러 구성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는지도 봐야 하고. 이런 특수한 던전일 경우엔 탱커 중에 성기사가 있는지도 봐야 해.”
무엇을 고르건 그건 너희들의 몫이라는 듯 멀뚱히 구경하는 마리아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이세인은 좋은 선생님에 속했다.
이래서 킹스메이커가 뽑아 먹을 수 있는 만큼 뽑아 먹으라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희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설명을 들을수록 새삼스레, 첫 던전에서 그녀가 얼마나 대책 없이 파티에 가입했는지가 새록새록 느껴졌다.
“보면 참 재미없는 것만 가르쳐.”
“…그러면 그쪽이 재밌는 것 좀 가르쳐 보실래요?”
희연은 마리아와 이세인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모짜렐라와 대화를 나눴다.
“여기는 어때?”
“구성은 나쁘지 않아. 근데 이쪽에 이 딜러 직업은 딜량이 별로라 너 바빠질 텐데 괜찮아?”
“…다른 곳으로 골라보자.”
파티창에 공개된 정보를 세세히 살펴보던 희연은 어깨에 얹어지는 무게감에 손끝을 움찔거렸다. 옆에 서서 함께 고민하던 친구 모짜렐라는 어느새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서글퍼질 틈도 없이 희연의 어깨에 팔을 건 마리아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 오리는 참 적응이 빠른가 보다?”
“글쎄요…?”
“아냐. 참 빨라. 날 그냥 없는 셈 치기로 하는 게 어떻게 하루도 안 걸리니?”
“기분 탓이 아닐까요?”
“응. 아니야.”
희연은 마리아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킹스메이커가 의뭉스러운 사람이라 속을 모르겠다면 마리아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는 케이스였다.
“나도 나름 충고를 해볼까 해서.”
“정말요?”
지금도 그랬고 말이다. 내내 관심 없다는 듯 굴다 갑자기 친절하게 나오니 희연은 좋다기보다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깜짝 놀라는 희연의 반응에도 마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로 제 나름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을 알려주었다.
“보통 던전이건 레이드건 파티를 하다 보면 딜러는 피가 50퍼 미만으로 떨어지자마자 많이들 징징거려. 하지만 우리는 그 겉모습에 현혹되면 안 돼.”
“…?”
“기억해. 피가 1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건 죽은 게 아니라는 걸. 0만 아니라면 언제든 살려놓을 수 있다는 걸. 이것만 알아도 네 힐러 생활을 편해질 거란다 오리야.”
“…….”
희연은 자신이 마리아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엄청난 비법을 전수 받는 것처럼 감탄사도 내뱉었다.
마리아는 텅 빈 그 호응을 못 알아본 것도 아니면서 제 삶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을 관두지 않았다. 거진 희연을 세뇌라도 시키려는 수준이었다.
“너 잘 기억해. 힐은 밀당이야. 탱커와 딜러가 숨넘어갈 듯 굴어도 무시해. 안 죽었단 뜻이니까.”
“와….”
“그리고 가끔은 그냥 버려. 치료해 주지 마. 그래야 딜러건 탱커건 아, 내가 나대면 힐 못 받는구나 하는 걸 깨닫고 그제야 좀 고분고분해지거든.”
“…그러다 진짜로 죽으면요?”
내내 성의 없는 호응만 하던 희연의 첫 질문이었다. 마리아는 태연하게 답해주었다.
“그때부터는 여론전 가는 거지.”
게임에서 무슨 여론전을 한다고….
조금 떨떠름해하던 희연은 오래 지나지 않아 첫 던전에서의 일을 떠올리고는 그 여론전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던전 공략 초반, 케이아일과 휘핑크림 유자차는 네 잘못이네 아니네 하며 열심히도 싸웠다.
그때는 하도 개판이라 별 신경 쓰지 않았던 문제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두 사람이 유난히 서로의 탓이라 확정 지으려 하긴 했었다.
땃쥐 미의 개입으로 케이아일의 잘못이라 판명 나며 그의 입지가 좁아졌던 걸 떠올리면 확실히 그 여론전이라는 건 중요한 사안인 것 같긴 했다.
“오빠도 파티하면 그런 여론전 같은 거 해요?”
그러나 마리아의 말만 듣고 믿을 수는 없었기에 희연은 이세인에게 먼저 다른 사실 여부를 물어보았다. 이세인은 환한 웃음을 입에 걸고 답을 들려주었다.
“그럼. 다른 길드랑 레이드라도 같이 가게 되면 여론전은 희준이 담당인걸.”
“…….”
백희준은 뭘 하고 다닌 걸까? 희연은 백희준의 게임 내 사회생활이 의심되었고, 이세인은 어김없이 그 의심에 불을 붙였다.
“희준이는 밑에 애들한테 쓸데없이 정치질할 시간에 레벨이나 올리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필요하다 싶으면 참….”
“…….”
어지간히 입 털고 다녔구나 백희준. 희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표정을 조금 굳혔다. 심지어 마리아까지 백희준의 무용담에 대해 말을 덧붙였다.
“걔 정외과잖아. 걔가 타렌 잘했던 이유도 팀 내에서 정치질 잘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던데.”
“음… 남 탓을 굉장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걸 잘하기는 하죠.”
이세인은 처음으로 마리아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희연은 그 신기한 일을 만들어낸 원흉이 백희준이라는 점에서 웃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