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다행인 점은 킹스메이커가 백희준에게 유감이 많은 것과 달리 마리아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만약 이 얘기가 킹스메이커에게서 나왔다면 희연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백희준의 인성 목격담에 대해 여럿 듣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본인의 인성 목격담을 생성하기 바빴기에 백희준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일단락됐다.
“야, 오리야. 여기 괜찮다. 여기 들어가.”
“?”
순식간에 대화 주제를 다시 파티 건으로 넘겨버린 마리아는 희연의 앞으로 자신이 본 것을 공유하였다.
파티 명, 딜 안 넣는 힐러는 강퇴. 여기서부터 이미 마리아는 제 취향에 들어맞아 흡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희연은 애써 파티명을 못 본 체하며 다른 것들을 훑어보았다. 현재 파티에 소속된 이들은 성기사, 탱커인 것으로 추정되는 방패 전사. 그리고 근딜과 원딜인 격투가와 네크로맨서, 신관 하나였다.
비고에는 힐러 2인을 급히 구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완숙 3, 반숙 1이라는 뜻 모를 이야기도 첨부되어 있었다.
“계란…?”
완숙, 반숙하면 생각나는 게 계란밖에 없는 희연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희연에게 이세인은 차분히 뜻을 설명해 주었다.
“계란이 아니라 얼마나 이 던전을 잘 이해하고 잘하는지를 표기해 놓은 거야. 완숙은 패턴, 기믹을 다 알고 있고 100% 클리어를 보장한다는 뜻이고 반숙은 공략도 알고 클리어 경험도 있지만 완벽하게 할 자신은 없다는 뜻이야.”
“아… 그러면 저는 뭐예요?”
“희연이는….”
이세인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마리아가 먼저 답을 들려주었다.
“냉장고에서도 아직 안 나온 계란이지 뭐.”
“…….”
못됐다 정말.
희연은 입을 조금 삐죽거리다가 모짜렐라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몸을 틀었다. 탱커와 딜러가 각각 둘이며 앞서 킹스메이커가 말했던 메인, 서브, 딜힐 포지션의 힐러가 셋이 될 수 있는 구성원을 갖춘 파티였다.
인원수도 딱 맞아떨어졌기에 모짜렐라만 괜찮다고 한다면 마리아가 선택한 파티가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었다.
“구성 자체는 나쁘지 않아. 그런데 여기… 파티장이 네크로맨서인데?”
“나쁜 거야?”
“나쁘다기보다는… 각오는 해야 할 것 같단 뜻이지.”
“?”
파티 경험이 적어 뭐가 좋고 나쁜지 아직 잘 모르는 희연을 위해 모짜렐라는 기꺼이 설명을 해주었다.
“보통 파티에서 파티장을 맡는 건 탱커 아니면 힐러야. 전방에서 보는 사람이랑 가장 뒤의 후방에서 보는 사람들이 시야가 가장 좋고 상황 판단 내리는 일도 잦아서 보통들 그렇게 해.”
“그래?”
“그런데 이런 식으로 딜 넣는 게 주 업무인 딜러 쪽에서 파티장을 하는 경우는 보통 이 사람이 명령 내리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거나 고집 좀 세다는 걸 암시하는 거란 게 문제지.”
조금 편견이 아닌가 싶은 말이기는 했지만 경험 부족인 희연은 그냥 묵묵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하지만 모짜렐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미 파티명에 꽂힌 마리아는 그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네크로가 파티장이야? 이야 여기다 얘들아. 연락 넣으렴 치즈. 참관자 둘 있다고 말 넣고.”
모짜렐라는 질린다는 얼굴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희연에게 한번 눈짓을 보내는 것으로 진짜 여기로 할 거냐 되물을 뿐이었다.
마리아의 고집을 꺾을 재간도 자신도 없던 희연은 그래도 땃쥐 미가 있던 케이아일 없는 케이아일 파티보다는 낫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짜렐라가 해당 파티에게 연락을 넣는 사이 마리아와 이세인은 인벤토리에서 반짝거리는 가루가 든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주머니는 낡았지만 그 안에 든 희고 고운 가루는 마치 보석을 갈아서 만든 것 같았다. 자연스레 희연은 가루에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뭐예요?”
“이거? 우리가 너희 초보 파티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편법.”
“요정의 눈속임이라는 아이템이야. 일정 시간 동안 닉네임을 바꿔주고 레벨 제한이 있는 던전 같은 곳도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줘. 대신 이 가루를 사용하는 동안은 스킬을 쓰면 안 되지만.”
마리아와 이세인이 차례로 들려준 설명이었다. 편법이 저거였구나 싶어 희연은 참 별별 아이템이 다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파티에 참가하는 경우가 흔해요? 아이템까지 있고….”
“그야 옛날에는 이런 게 없긴 했지. 시간이 지나면서 고렙인 사람이 저렙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잦아지면서 생긴 아이템이야. 갈수록 난이도가 단순히 공략법 좀 보고 오는 거로는 안 되는 수준이 돼서 생긴 것도 있긴 하지만.”
그냥 난이도를 내리는 게 더 쉬웠을 것 같은데….
쉬운 길로 가는 건지 어려운 길로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게임 운영법에 희연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안 끼어들고 구경만 할 거야.”
“네에….”
그러한 와중에 마리아는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무시하고 자신은 놀 거라는 의지를 당당하게 내비쳤다. 희연은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리아와 이세인은 각자의 몸에 들고 있던 가루를 뿌린 뒤 무언가 입력하듯 손을 움직였다. 닉네임을 선정하는 거구나 생각한 희연은 두 사람을 구경하던 것도 잠시, 제 옆에 갑작스레 생겨난 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뭐야?”
사람 하나가 오갈 정도 크기의 문은 마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전조 없이 툭 튀어나왔다.
희연은 이게 뭔가 싶어 그 주위를 서성였다. 그런 희연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듯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파티창에서 보았던 구성원으로 된 일행들이 나타났다.
쉼터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어떻게 파티를 맺는 건가 의아했던 희연은 이런 식으로 만나서 대화하고 결정하는 거구나 싶어 상당히 신기해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희연은 서둘러 한 명씩 바라보며 대략 누가 무슨 직업을 가진 것인지 파악해 나갔다.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누가 보아도 성기사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그는 온몸을 감싸는 류의 갑옷을 입는 뉴비 없지와 비교해보면 무척이나 가벼워 보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금실로 화려한 수가 놓인 제복 위에 금속이라 할 법한 것은 망토와 체인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한쪽 어깨 갑옷밖에 없었다. 갑옷 또한 날개 모양을 본떠 만든 것으로 무척이나 화려했다.
흰색을 제외한 모든 색상이 금색인 것으로 보아 그가 방어 쪽에 집중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희연은 그 차림새에 조금 의아해하다가도 킹스메이커를 떠올리고는 옷은 중요한 게 아닐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또 다른 탱커인 방패 전사는 제 몸만 한 방패를 들고 있는 남자였다. 직업명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직관적인 모습이었다.
격투가의 경우 존성대명이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차림새였지만 아무래도 레벨 편차가 있는 만큼 존성대명과 비교해 보면 조금은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힐러의 경우 역시도 격투가와 비슷한 케이스였는데, 킹스메이커의 역작을 입고 있는 희연과 비록 마리아의 놀림거리이나 엄연히 그녀가 키우는 모짜렐라가 입고 다니는 사제복에 비하면 밋밋한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애초에 사제복은 특성상 화려하기 쉽지 않으므로 그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제의 모습이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심 희연이 가장 궁금했고 직접 보는 것을 기대했던 네크로맨서는 상상 이상의 모습이었다.
검은 식물이 둘둘 감긴 두개골 다섯 개가 장식된 고목 지팡이를 들고 온몸을 가리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사람. 누가 보아도 네크로맨서였다.
망토 끝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잔뜩 헤져 있었으며 두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어떻게 저렇게 검을 수 있을까 싶은 색이었다.
아무런 빛을 반사하지 않는 그녀의 긴 검은 머리카락은 마치 거미줄처럼 얇고 하늘거리며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두건을 뒤집어썼되 얼굴은 드러나 있었는데, 비단 얼굴뿐만 아니라 망토 밖으로 드러난 손등 위에도 검보랏빛 염료로 알 수 없는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희연은 저 그림은 직접 그린 걸까 아니면 캐릭터를 생성할 당시 저런 식으로 꾸밀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었던 걸까 조금 궁금해하였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그림이 신기해 상대의 얼굴을 조금 길게 바라보았던 희연은 자연스레 네크로맨서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후후훗… 어리석…”
“…?”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낸 네크로맨서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모습을 불안하다는 듯 바라보던 격투가의 빠른 제지로 인해 뒷말을 마저 내뱉지는 못했다.
네크로맨서의 입을 틀어막은 격투가는 조금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시해주세요.”
격투가는 빠르게 사과를 하더니 그대로 네크로맨서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희연은 네크로맨서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챘다. 처음 겪는 상황이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발버둥 치느라 펄럭거리는 망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연은 모짜렐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NPC 같으시네…?”
“…….”
네크로맨서의 고집이라던가 하는 걸 걱정했던 모짜렐라도 이런 걸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인상만 잔뜩 찌푸린 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묘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먼저 나서서 입을 연 것은 이 중 가장 연상에 해당하는 방패 전사였다.
“아, 이것 참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저 친구가 직업에 심취해서 그렇지 일단은 나쁜 친구가 아니거든요….”
귀농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는 직업에 심취한 네크로맨서로 인해 이미 여럿 이러한 분위기를 맞아보았는지 조금 익숙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그의 말에는 부디 이 상황만 보고 파티 맺는 것을 거부하지 말아 달라는 애원이 담겨 있기도 했다.
사실 파티 내 문제가 될 법한 사람이 있는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모짜렐라와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은 희연은 일단 대화를 나눠보는 것을 선택했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아이고 반가워요! 일단 우리 자기소개부터 쭉 할까요?”
혹여나 희연의 입에서 역시 이 파티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된다는 듯 방패 전사는 서둘러 일을 진행하려 했다.
실상 공개된 파티 정보에 이름이 없었기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도 마땅치 않던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일단 자기소개를 하는 게 먼저였다.
“전… 오리라고 해요, 이쪽 친구는 모짜렐라요!”
그러나 소개를 할 때 아무렇지 않게 닉네임을 다 말할 정도의 뻔뻔함을 아직 가지지 못한 희연은 제 이름과 모짜렐라의 이름을 줄여서 설명했다.
그 부끄러움을 다 안다는 듯 방패 전사도 간결하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저는 강자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기 저 격투가 친구는 마늘쫑쫑! 그리고 이쪽은….”
방패 전사 강자는 화려한 차림새를 한 성기사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입꼬리 끝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희연은 그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이어 성기사가 제 소개를 하는 순간 왜 방패 전사 강자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인지 깨달았다.
“이 몸의 이름은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라고 한다네.”
“…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 그대에게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내리도록 하지, 레이디.”
“…….”
왜 저러는 거지?
희연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저를 놀리는 건가 싶기도 해서 눈만 깜박거렸다. 어찌할 줄 몰라 주위만 두리번거리던 희연은 잔뜩 구겨진 모짜렐라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점만 깨달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레이디의 모습이 마치 작은 새와 같군. 지저귀는 것과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겠나?”
“…….”
진짜 왜 저러지?
희연은 이제는 좀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의미가 함축된 얼굴로 마리아를 돌아보던 희연을 방패 전사 강자가 붙잡았다.
“이 친구도 제 직업에 심취해서 그렇지 나쁜 친구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네크로맨서까지는 받아들여도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 선에서 도망간 사람이 많았던 듯했다. 희연은 그럴만했단 생각을 했다. 마리아도 이런 식의 정신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더욱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방패 전사 강자는 희연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소개를 이어 나갔다.
“여기 이 친구는 라쀠라고, 참 조용하고 착한 친구입니다!”
뒤에 숨듯이 서 있던 힐러가 강자의 소개에 조금 얼굴을 내밀었다.
“아, 안녕하…. 라….”
“네? 죄송한데 잘 못 들었어요.”
“라….”
“네에….”
간신히 이름 정도만 알아들은 희연은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인 성격의 사람이 셋이나 모인 파티가 있을 수 있나 싶어 조금 신기했다.
“음….”
침음을 흘리며 희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제 대망의 네크로맨서의 자기소개만이 남았다. 이쯤 되니 희연은 조금 기대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마늘쫑쫑에게서 풀려난 네크로맨서는 가만히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
침묵에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거리던 희연은 어느새 얼굴이 새빨개진 방패 전사 강자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는 이번에는 또 뭐지 싶어 그쪽에 집중했다.
방패 전사 강자는 자기가 정말 이 나이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오오, 위, 위대하신 분이 강림하시었다…! 오… 오오오…!”
“…….”
“오오오오옷…!”
방패 전사 강자의 오오 소리가 만족스러웠는지 네크로맨서는 그제야 눈을 뜨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멋지게 망토까지 흩날리며 나오는 것이 지금의 시간을 꽤나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가장 깊은 어둠 다크에서 죽음의 데스를 느끼며,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윈드를 타고 등장한 이 몸의 이름이 궁금한 것인가? 좋다! 너희들은 이 몸의 이름을 알 영광과도 같은 운명의 데스티니를 가졌다! 기꺼이 알려주지!”
“…….”
“나의 이름은 흑염의 I-E!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껴라!”
“…와아.”
이 게임 최소 연령이 열다섯이었던가.
희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박수만 몇 번 쳐 주었다. 로얄 임페리얼 나이츠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에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재미있기도 했다. 정말로….
“…….”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희연은 두어 발자국 물러난 뒤 마리아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진짜 여기로 해요?”
“…….”
희연은 마리아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다.